2001년 10월호

南·北·美 삼각관계 ‘이변’은 없다

  • 정낙근 < 안민포럼 통일안보위원 >

    입력2005-01-04 17: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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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시 행정부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현재 진행중인 대북한 프로그램을 지속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反테러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진행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확산될 가능성이 없고, 북한이 전쟁에 장애가 되지 않는 이상, 미국이 현 상황에서 대북 프로그램을 중단하거나 유보할 이유는 없다. 결론적으로 反테러전쟁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 특별한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기쁨과 분노를 대중의 요구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경제권력은 감정을 억누르고 손익계산에 철저해야 한다. 모든 행위와 사건을 경제적 이익에 따라 판단하는 냉철함만이 그들에게 요구될 따름이다.

    2001년 9월11일.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과 뉴욕에서 대재앙이 발생했다. 세계권력의 중심부에서 반인륜적이고 원시적인 방법에 의해 테러가 발생한 것이다. 우리는 1만여 명의 희생자와 천문학적 경제 손실을 초래한 이번 사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

    외형으로는 문명적·계급적 성격이 중첩된 투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은 반제국주의적 계급투쟁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한켠에서는 금번 사태를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제3세계를 착취한 제국주의 미국의 오만성을 응징한 것으로 평가하며 환영하고 있다. 반면 미국을 비롯해 세계는 이번 사태의 규모와 참혹성에 놀란 나머지, 이를 문명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반문명적 행위로 규정해 규탄하고 있다.

    미국이 이번 반(反)테러전쟁을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 무한정 밀어 부치기는 힘들 것 같다. 전쟁 수행을 경제적 손익계산과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은 응징 여론이 들끓지만, 곧 경제논리에 따라 전쟁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확전 가능성 없다



    이제 문제는 전쟁이 얼마나 지속되고, 대상을 어느 선까지 제한하는가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경제 회복이 미국경제와 깊게 연동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김대중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이는 남북관계의 진전과도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경과를 전망해보자. 일각의 우려처럼 이슬람 대 반이슬람으로 전선이 확대돼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쟁의 결정은 공식적으로는 부시 대통령이 하지만 전쟁의 관리는 정치권력이 아니라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숨어있는 경제권력, 곧 거대자본의 몫이다.

    이번 반테러전쟁의 경우 경제권력이 아프간과 라덴을 대상으로 하는 전면전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실리가 크지 않다. 과거 걸프전쟁에서는 유전의 보호라는 사활적 이해가 걸려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전쟁 수행과정에서 타협할 수 있는 적정선을 함께 찾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컨대 미국인의 자존심과 분노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응징은 하되, 공격의 범위는 최소로 국지화해 효율적으로 타격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목표를 라덴의 체포 및 살해에 두고 전선이 아프간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단기간에 목표를 달성해야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이 개전 이전에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아랍권 국가들과 외교 수순을 밟고 있는 것도 확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보여진다. 사건 초기에 비서방진영의 러시아 중국 쿠바 북한 이슬람연맹 국가들이 앞다투어 미국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 또한 전선을 국지화 하려는 희망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만약 미국이 장기전에 빠져들거나 이슬람권으로 전쟁이 확전될 경우 미국의 패권은 오히려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탈레반 세력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 도처의 미국 관련 시설과 인사를 대상으로 테러와 도시 게릴라전을 전개할 경우 미국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번 반테러전쟁은 향후 한반도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부시 행정부는 두 개 전쟁의 동시 수행과 승리라는 윈윈(win-win)전략을 포기할 의사를 이미 내비친 바 있다. 미국은 당분간 아프간과의 반테러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2003년 북한과의 핵·미사일 재협상을 남겨둔 미국으로서는 테러국가 해제를 벌써부터 대북카드로 들고나올 이유가 없다. 협상을 위한 카드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아껴야 할 시점이다. 그렇다고 북한에 대해 테러국가 해제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이를 준수할 것을 현 시점에서 요구할 가능성도 없다.

    북한 역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려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북한은 사건 발생 하루만인 12일 밤 테러사태를 비난하면서 유엔 회원국으로서 모든 형태의 테러와 테러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현 시점에서 부시 행정부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현재 진행중인 대북한 프로그램을 지속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반테러전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프로그램의 진행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전으로 비화되지 않고 북한이 이번 전쟁에 장애가 되지 않는 이상, 미국이 현 상황에서 대북 프로그램의 중단이나 유보를 택할 이유는 없다. 결론적으로 반테러전쟁이 한반도 정세 변화에 특별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한반도 관련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 정책결정자들의 한반도 관련 인식과 언술, 그리고 대외정책 등의 분석을 통해 2001년 하반기와 2002년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을 추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김대통령이 강력히 바라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를 둘러싸고 남북한과 미국간에 ‘이익 경쟁’이 치열할 것 같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미국과 북한 양측이 핵과 미사일 등 주요 협상을 2003년으로 미루어 놓았다는 점과, 그 이전에는 한반도 정세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현상유지를 통한 실리 추구를 선호할 것으로 보는 데 있다. 한국의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적극 활용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2003년’의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3년은 2010년까지의 한반도 구도를 결정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예전의 그들 스타일과 달리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기간을 ‘2003년’으로 명시했다. 또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 의한 제1차 경수로 사업이 완결되는 시점도 2003년이다.

    요약하면 미국과 북한은 핵과 미사일에 관한 재협상을 2003년으로 미룬 것이다. 따라서 2003년경에는 새로운 합의 도출을 위해 한반도 정세가 갈등과 대화를 오가는 심각한 우여곡절을 겪을 것임을 시사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전망하면, 북·미간 핵과 미사일 재협상이 타결되기 전까지는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정세가 경색국면으로 ‘연출’돼 보일 수 있다. 그래야만 미국은 비용을 적게 부담하면서 한국과 일본 등 관련 국가들로부터 재원을 염출할 명분이 만들어진다. 또 재협상에 의해 새로운 프레임웍을 만들어야 사업 참여를 통해 이익을 챙길 기회도 갖게 된다. 따라서 2003년까지는 미국과 북한은 기존의 협상틀을 깨지 않는 범위내에서 실리를 챙기는 행보를 지속할 것이다.

    세상사가 그러하듯이 모든 일에는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도 강경노선과 유화노선을 오가는 행보를 보일 것이다. 강경노선은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갈등과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갈등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강자가 선택할 수 있는 노선이다.

    반면 유화노선은 가능하면 갈등을 피하고 합리적인 대화와 협상으로 문제 해결이 가능할 때 채택된다. 노선의 선택은 강자의 몫이다. 약자는 이에 수동적으로 적응하거나 대응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부시 행정부가 MD 추진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위해 의도적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강경노선을 선택한 측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이래 국가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는 사안이 미사일 방어체제(MD)의 추진이다. 미국으로서는 이를 위한 명분 마련이 절실한 과제다. 미국이 MD 계획을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안보적 측면 이상으로 경제적 측면에도 기인한다.

    지금 미국경제는 침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를 상승국면으로 되돌리기 위한 모멘트가 필요하다. 그 계기가 바로 전쟁과 기술혁신이다. 보다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MD 사업에는 군수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 부시 공화당 정권의 물적 토대 중 하나가 바로 군수자본이다. 만약 MD가 추진되면 메이저 군수기업뿐만 아니라 첨단산업 분야의 많은 기업들이 참여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수요 창출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MD 계획은 군사기술의 디지털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19세기 산업혁명을 능가하는 21세기 디지털 혁명을 이끌어내는 긴요한 도구다. 이러한 거대 프로젝트의 추진 여부는 미국이 21세기에도 계속 경제적 군사적 패권국가로 남아있을지 가름하는 관건이다. 한마디로 MD 강행에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해 악마와 불량국가의 안보적 ‘위험’을 담보로 우방국들에게 ‘보호’를 팔겠다는 경제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MD 계획이 의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되기 위해서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안보에 위험이 되는 현재적·잠재적 요인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만들어낼 필요도 있다. 그런 점에서 미·중 정찰기 공중 충돌 사건은 ‘중국 위협론’의 부각과 MD 계획 추진에 좋은 명분을 제공한다. 이번 대참사도 MD를 추진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지난 5월1일 부시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미 국방대학에서 안보 관련 연설을 하는 가운데 MD 계획을 강행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이 연설은 부시 대통령이 국내외의 반대를 무마하면서 MD를 계속 추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단 MD 추진이라는 큰 목표로 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이상, 미국은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일련의 작업을 할 것이다. 그 대상물로 걸려든 곳이 바로 한반도다. 구체적으로 김정일의 답방을 둘러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와 관련된 건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중 정찰기 공중 충돌 사건과 미국의 대북 강경 태도는 부시 행정부에게 MD 추진을 위한 명분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갈등은 언제든 대화를 예비한다. 이 점에서 부시 대통령이 MD 강행 의사를 천명한 것과 때를 같이 해 5월 초 유럽연합(EU) 의장인 예란 페르손 스웨덴 총리가 방북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페르손 총리의 방북은 미국에 의해 고도로 ‘연출’된 사건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부시 대통령은 5월을 기점으로 MD 추진을 위해 그동안 의도적으로 조장한 갈등을 풀어도 괜찮은 단계에 왔다는 판단에서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그리고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해결사로 나서는 게 어딘지 어색했다. 자칫하면 북한에 굴복한 모습으로 보여질 수도 있고, 더 크게는 미국이 국제사회의 반발 여론에 못이겨 MD 추진 전략을 포기할지 모른다는 식의 잘못된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면서 남북한과 미국 모두에게 거부감이 없는 페르손 총리를 북·미 대화 재개의 중재자로 선택한 것이다.

    김정일간 페르손 정상회담의 결과, 김정일은 1999년 9월 북·미 베를린 회담에서 합의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예가 2003년까지 지속될 것임을 밝혔다. 북한은 줄곧 “북·미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미사일을 시험발사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혀 왔으나, 시험발사 유예기간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 미국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MD 강행 저지라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는 북·러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도 언급하긴 했으나, 그것은 의례적일 뿐 일단 북한의 1차적인 관심대상에서는 뒤로 밀려난 것 같다. 이제 김정일은 북·미 대화의 재개를 통한 체제 보장과 경제적 실리 확보에 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미국 또한 MD 추진과는 별도로 한반도 차원에서의 당면한 경제적 실리를 두고 밀고 당기기를 계속 할 것이다. 바로 그 장(場)이 김정일 답방 성사과정을 포함한 제2차 남북정상회담과 관련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을 미국도 북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금년 하반기 이후 정국은 김정일 답방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김정일이 답방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조건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김정일의 ‘수령’으로서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 둘째는 북한에 대규모 경제적 이익을 약속하는 것, 그리고 셋째는 답방기간을 포함해 평양 체제의 안전을 미국이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 중 두 번째 조건은 실무적 차원에서 답방을 위한 사전 정지용으로 논의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전력 지원 문제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긍정적 검토 의사, 금강산 관광사업의 대가 중 미납금 2,200만 달러의 지불, 심지어 김대중 정부 스스로가 천명한 정경분리의 원칙을 파기하면서까지 수익성이 불투명한 금강산 관광사업에 정부투자기관인 한국관광공사를 끌어들인 일은 김정일 답방 분위기 조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6·15 공동선언의 제4항에 따른 민족경제공동체 건설을 위한 진일보한 합의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 번째 조건은 미국이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첫 번째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방안 합의에 있어 일정한 진전이 담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김정일은 수령의 지위를 높이는 성과를 얻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김정일 답방을 비롯한 남북정상회담에서 과연 의미 있는 성과가 얻어지고 그것이 실천으로 연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판단해 보면 이 문제는 아쉽게도 남북한 당사자보다는 미국의 의사가 더 중요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미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려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우리로서는 미국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결국 남북정상회담에 가장 ‘목말라’ 있는 김대통령이 먼저 ‘우물을 팔’ 것 같다. 다수의 행위자가 물고 물리는 협상에서는 먼저 카드를 내미는 쪽이 불리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통령이 가장 불리하고 비용도 가장 많이 지불해야 할 것 같다. 이에 비해 미국과 북한에겐 남북정상회담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종의 ‘꽃놀이 패’인 셈이다.

    이 점에서 현재 미국이 노리는 먹이감이 바로 한국의 FX사업이다. FX사업은 김대중 정부가 남북통일 이후까지를 상정, 추진하는 21세기형 전력 증강사업의 핵심이다. 최소한 향후 30년 이상 한반도의 제공권을 책임질 첨단 전투기와 전폭기를 동시에 확보하는 국방 계획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 국방부는 4조295억원의 예산을 책정했다.

    군수 메이저에 기반을 둔 부시 정권으로서는 이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당연하다. FX사업을 단순히 하나의 사업 아이템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중요한 포인트는 IMF 위기로 우리의 민간부문이 미국으로 넘어간 것에 더해 이제 군수부문까지 미국에게 이양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중요 산업이 미국에 예속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FX 사업과 무기구매 문제를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북·미 관계와 남북정상회담에 미국의 최대한 협조를 요구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FX 사업 건이 10월 말 이전에 ‘내부적으로’ 미국으로 결정 되는 것과 함께 김정일 답방에 대한 발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관측하는 근거는 김대통령 역시 한반도 평화 정착과 정권 재창출이라는 숙원 과제를 해결하는데 이 프로젝트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5월9일 MD 계획과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틀(strategic framework)’을 전달하기 위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일행의 청와대 예방이 새삼 주목된다. 물론 국제사회는 남북정상회담의 재개에 대해 환영과 지지의 반응을 보인다.

    미국은 전직 고위급 인사를 특사로 선정해 북한에 파견한다. 미국특사는 김정일이 정상회담에 나올 경우 남·북·미 3자 간에 거래할 선물에 대해 김정일과 협의한다. 미·북 양측은 재래식 전력 감축과 주한미군 감축 문제를 핵심의제로서 먼저 논의한다. 군사적 이슈는 미·북간 문제라는 입장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남 북한과 미국 간의 ‘3자회담’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특히 재래식 전력 감축의 핵심은 휴전선에 전방 배치된 남북 양측의 군사력을 30km 후방으로 이동시키는 것과 재래식 무기를 감축하는 것이 될 것이다. 10월로 예정된 APEC 정상회담에서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지지 결의가 선언문에 포함된다. 이보다 앞서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9월 북·중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일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촉구하는 모습을 ‘연출’한 바 있다. 중국 역시 한반도의 긴장완화에 미국 못지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세계에 과시하는 한편, 미국의 독주를 견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김대통령은 FX 사업의 미국행 결정으로 재래식 전력을 감축할 명분을 얻게 된다. 이것은 나아가 철저한 대북 검증과 주한미군 감축 반대를 주장하는 국내의 보수세력을 무마하는 효과도 얻는다. 비록 8·15 방북단 사건으로 대북 햇볕정책이 위기를 맞긴 했지만, 북한의 대화재개 ‘선물’로 서서히 기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한편 김정일은 미국으로부터 주한미군 감축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전달받는다. 미국은 북한과의 협의 결과를 김대통령에게 전달하고, 김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정상회담의 성과를 극적으로 선전할 채비를 갖춘다. 김대통령이 김정일에게 대규모 경협과 지원을 약속하는 카드도 포함된다.

    남북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된 ‘불가침’ 조항 실천을 위한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가동에 합의하고, 재래식 전력 감축과 주한미군 감축 문제는 남·북·미 3자회담을 통해 계속 진행할 것에 합의한다. 그러나 합의문에는 남북한이 ‘자주’의 원칙에 충실하게 합의를 도출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미국이 양해한 것이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재래식 전력 감축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지루한’ 여정이 일단 시작된다. 아울러 김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연합기구’나 ‘민족통일기구’ 같은 과도적 기구의 구성을 관철시켜 남북 연합단계를 자신의 임기 내에 완성하려고 할 것이다.

    이제 퇴임 1년 반을 남겨둔 김대중 정권으로서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 해결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로 남북관계의 급진전밖에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김대통령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금년 하반기 개최를 무리할 정도로 밀어 부칠 것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가 뉴스의 초점으로 부각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다만 반테러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의 발생과 FX 사업권 결정의 지연으로 남북정상회담의 개최 일정이 다소 지연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그러나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로 한반도에 평화공존의 분위기가 넘치더라도 이것에 현혹되어선 곤란하다. 왜냐하면 향후 1년 동안 전개될 한반도 정세는 내년의 대통령 선거와 직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 정권은 남북정상회담에 정치적 명운을 걸고 있는 이상, 아직 실천되지 않은 ‘자기 희망적’ 성과를 바탕으로 평화 분위기 연출에 몰두할 것이다. 더구나 합의문 서명이라는 의전적 행위로부터 실천이라는 가시적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남북관계의 속성상 그 시간적 갭(gap)이 상당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더욱 그러하다.

    만약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예상대로 성사된다면 대통령 선거까지 남은 1년. 정상회담으로 연출된 평화 분위기를 김대통령의 업적으로 칭송하고 정권 재창출에 활용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반대로 미국과 북한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그러나 민족을 위한 진정한 실천으로 이어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봉우리가 가파르면 골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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