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암 걸린 시신 뼈 수술용으로 둔갑

불량 인체조직 유통사건 전말

  • 글: 정호재 demian@donga.com

    입력2002-11-04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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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9월 중순 검찰 수사 결과 악성질환 바이러스를 보균한 시신의 뼈가 환자들에게 이식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량 인체조직을 유통시킨 장본인은 국내에 인체조직은행 개념을 처음으로 전파했던 한 치과의사. 그는 구속됐지만, 의료사고의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 인체조직의 안전성을 보장할 제도적 장치가 전무한 국내 인체조직 시장을 그는 어떻게 주유(周遊)한 것일까.
    암 걸린 시신 뼈 수술용으로 둔갑
    ”할머니, 치과 봉사 나왔습니다.”

    2000년 초, 경기도내 한 복지회관. 치과의사들이 자원봉사를 나왔다. 복지회관에 몸을 의탁한 무연고 노인들을 무료진료한 뒤 치과의사들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어르신들, 시신 기증이란 거 아세요? 조직은행에 시신을 기증하면 일부 조직을 떼서 의학 연구에 쓰려 합니다. 나머지 시신은 화장해서 무료로 장례 치러 드릴게요.”

    뒤에서 지켜보던 복지회관장이 맞장구를 친다.

    “할머니, 장례비가 공짜래요.”



    이 말에 몇몇 노인이 손을 내민다.

    “그래? 애들에게 손 안 벌리고 죽어야지. 나도 기증할게. 어여, 신청서 줘.”

    할머니들에게 시신 기증을 권유한 치과의사들은 인체조직은행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이 시신을 기증받은 뒤 가공한 인체조직을 파는 바이오벤처 주주임을 알았다면 노인들은 과연 시신을 기증하려 했을까.

    구속된 ‘조직은행 선구자’

    장기 기증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인도주의의 실천이다. 뇌사자 장기기증은 이미 법제화됐다. 생존한 이중에도 죽은 후 신장 및 골수를 기증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많다. 장기 기증은 2000년 개정된 ‘장기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증·이식 관련절차가 진행된다. 모든 실무를 위임받은 기관은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 산하 국립장기기증관리센터(KONOS). KONOS는 장기만 관리한다. 그렇다면 다른 인체조직은 어떻게 관리될까.

    국내에서 조직이식술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정형외과를 중심으로 널리 활용됐다. 각종 질병으로 손상된 인체 부위를 같은 종류의 조직으로 대체하는 의술이 조직이식술이다. 이식술이 발달하면서 상업적 활용영역은 뼈·연골·피부·인대·혈관 등으로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더욱이 조직이식술은 대부분 보험급여 적용이 안돼 수익성이 높다.

    최근 5년간 공식적으로 수입된 인체조직은 200억원어치. 그러나 비공식 수입 물량이 매년 300억원어치가 넘을 것으로 관련업계는 추산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국내 시신을 활용하자는 의견이 모아졌고, ‘조직은행’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조직은행은 시신을 기증받아 인체조직을 채취·저장·처리·보관하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는 곳이다. 기증된 시신은 조각조각 나뉘어 수천명에게 이식된다. 때문에 철저한 안전시스템과 윤리성이 요구된다. 실제 미국에서 조직이식 과정에 에이즈와 세균성 질환이 전이돼 사망한 사례가 있다.

    지난 9월 중순. 국내 한 조직은행의 베일이 벗겨졌다. 인천지방검찰청 강력부(부장검사 이재순)는 같은달 12일 악성질환인 암, B형 간염, 성병 등을 보균한 시신의 뼈를 가공해 수도권 일대 300여 개 치과 및 정형외과에 팔아온 치과의사 엄모씨(49)와 이모씨(35)를 약사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서울 평창동에 H조직은행을 차리고, 조직은행이란 이름에 걸맞게(?) 시신 기증운동을 벌였다. 겉으론 ‘비영리 공익단체’라고 홍보했지만, 실제론 절대 판매해서는 안되는 연구용 시신의 뼈까지 팔았다.

    의료계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체조직은 화학적 가공을 거쳤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것을 절대 금하고 있다. 그러나 H조직은행의 의료감독이자 실질적 운영자인 엄씨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4구의 연구용 시신을 포함한 16구의 사체에서 시가 10억원어치의 인체조직을 채취, 가공해 이중 6억원어치를 판매했다.

    엄씨의 이런 행각에 검찰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조직은행이란 용어가 나온 지 10년이 넘고 국내 의료수준이 크게 뒤떨어진 것도 아닌데, 인체조직 이식의 안전성을 보장할 법규정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불특정 다수에 치명적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는 인체조직이 동네병원에서조차 쓰이는 현실에서, 대체 엄씨를 어떤 법규 위반으로 기소할 것인지를 놓고 검찰은 장고에 들어갔다.

    사건을 수사한 인천지검 박진만 검사는 고심한 끝에 결국 엄씨를 약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하고, 사체·해부법 및 전염병예방법, 폐기물관리법 위반 등 혐의를 추가했다. 박검사는 다음 3가지에 주목했다.

    첫째, 오염된 인체조직의 이식은 수백, 수천명에게 균을 감염시킬 수 있는 위험한 의료행위다. 둘째, 외과에서 널리 쓰이는 인체조직이 아무런 법적 규제 없이 유통되고 있다. 셋째, 인체조직 수입업체와 일부 바이오벤처들이 비윤리적 행위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구속된 엄씨가 국내에 조직은행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는 점. 때문에 그가 구속되자 의·치의학계, 관련병원, 장기기증 관련 시민사회단체, 복지부 및 식약청 관계자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내 엄씨에 대한 뒷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엄씨는 지난 7년간 과연 어떤 일을 해온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1995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치과의사 엄씨와 복지부 산하 재단법인인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이하 장기기증본부)는 ‘사랑의 뼈은행’을 공동설립했다. 장기기증본부는 장기기증이 주업무 였지만 사후 시신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후 장기기증본부엔 연평균 100여구의 시신이 기증된다. 국내 최초의 조직은행을 꿈꾸던 엄씨에겐 너무도 매력적인 파트너로 비쳤다. 조직은행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장기기증본부로서도 조직은행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피부·인대 같은 조직과 달리 뼈는 구하기 쉽고 보관도 쉬워 임상연구 및 현장 적용이 한결 빨리 진행된다. 1993년 미국 조직은행에서 관리자격증을 딴 엄씨는 한국이 인체조직 이식의 미개척지임을 알고 그 상업적 잠재성에 주목했다.

    우선 시신의 안정적 확보가 필요했다. 당시 장기기증본부는 장기 기증운동을 선도했는데 엄씨는 뼈 등 인체조직도 장기기증본부처럼 체계를 갖춘 조직은행이란 시스템 아래서 안전하게 관리돼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홍보했다.

    엄씨는 스폰서를 찾는 일도 추진했다. 장기기증본부의 명성은 큰 힘이 되었지만, 조직은행 설립은 기본적으로 설비투자가 전제돼야 가능한 일이다. 담배인삼공사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10억원은 외환위기로 무산됐다. 그래서 대형병원을 포함한 범의료계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아쉬울 게 없는 대형병원들은 일개 치과의사와 손잡고 조직은행을 만드는 일에 회의적이었다.

    이때 도움을 준 곳이 인천의 길병원. 장기기증본부와 친분도 있고, 조직은행의 필요성에도 공감한 길병원은 3억원을 투자해 장기기증본부와 함께 ‘한국조직은행’을 설립했다. 1999년 6월이었다.

    벤처자금 동원, 수익사업 꾀해

    그러나 시신 조달은 장기기증본부가, 자금과 의학적 자문은 길병원이, 실질 운영은 엄씨가 맡는 ‘한 지붕 세 가족’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면서 조직은행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게 됐다.

    ‘한 지붕 세 가족’은 한국조직은행이란 거창한 명칭이 공익성을 높이고 국내 조직은행의 주도권을 잡는 데도 유용하고 돈벌이 기회까지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하루 아침에 상황이 좋아질 리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분열이 시작됐다.

    바이오산업 투자 열풍이 한창이던 2000년 5월, 의료기기 수입회사인 H사가 엄씨에게 10억원 투자를 제의해왔다. 파격적 지원이었다. H사는 인조피부 ‘알로돔’을 수입해 돈을 많이 번 업체. 인체 피부가 돈이 된다고 간파한 H사는 엄씨가 확보한 시신에서 뼈는 엄씨가 가공하고 피부는 자신들이 가공해 팔면 충분한 사업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H사는 중간 규모의 인체조직 가공회사였지만, 바이오벤처란 수식어가 붙으면서 순식간에 돈이 몰렸다.

    엄씨는 공식적으론 H사 연구실장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론 한국조직은행과 H사를 오가며 조직은행에 기증된 시신을 가공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사업이 본격화되기도 전 H사와 엄씨 간에 갈등이 싹텄다.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H사에 수십억원대의 투자금이 몰리고 액면가의 10배로 뛰어오른 발행주식에 대한 지분확보 싸움이 소송으로 번지면서 양측은 결별했다. 엄씨와 장기기증본부의 관계도 정리됐다. 실질적인 운영주체인 엄씨가 모든 인력과 시신을 H사 연구실로 이전하다시피하면서 한국조직은행도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엄씨와 H사는 한국조직은행의 인체조직을 훔쳐다 판 꼴이 됐다. 시신의 소유권을 놓고 한국조직은행 설립에 참여한 길병원측과 엄씨는 서로 상대방을 제소했다.

    이런 와중에도 국내 인체조직 시장은 계속 성장했다. 인체 활용을 규제하는 관련법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엄씨는 다시 서울에 H조직은행을, 부천엔 인체조직 가공회사를 설립했다. 유명 의료기기회사의 투자를 받아 설비도 최상으로 갖췄다. 그는 H조직은행에서 인체조직의 안전성을 책임지는 의료감독(Medical Director, MD)으로 일하면서 제자와 후배를 각각 조직은행장과 사장으로 임명했다. 엄씨와 함께 사업했던 한 치과의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엄씨 회사엔 20여 명의 의사가 주주로 참여했다. 엄씨로부터 뼛가루를 받아 포장하는 벤처기업 대표는 모 정형외과 교수의 처남이다. 저명한 그 교수는 학회에서 엄씨 회사의 뼛가루를 적극 추천했고 제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미국의 경우 시신 1구를 가공하면 최고 23만달러(약 3억원)에 달하는 부가가치가 생긴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시신 1구를 제대로 가공해 팔면 7억원의 부가가치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기증을 통해 공짜로 얻은 시신에서 뼛가루와 피부만 1차 가공해 판매해도 뼛가루 1cc에 10만원, 치과 임플란트에 사용되는 뼈 재생 분말가루 BMP 0.5cc에 27만원이다. 피부는 부가가치가 훨씬 더 높다.

    조직은행은 시신을 1차가공(조직분리)해 판매하는 중간가공단계 사업체다. 그러나 공익적 성격이 짙기 때문에 공정한 원칙 아래 의학적 안전성을 고려해야 하며 생산된 인체조직은 최소한의 가공비 이익만 남기고 필요한 이들에게 싼값에 공급해야 한다.

    엄씨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인체조직 이용에 관한 관련법을 만들고 제도권으로 진입해 가장 먼저 정부의 인정을 받는 독점적인 조직은행을 만들려고 했다. 조직은행을 재단법인화하고 그곳을 통해 획득한 인체를 직접 가공해 팔려는 의도였다. 그러려면 복지부 승인이 필요했고, 장기기증본부 혹은 다른 뼈은행과의 경쟁이 불가피했다.

    “엄씨는 H조직은행을 재단법인으로 만들려고 집요하게 시도했다.”

    엄씨와 함께 조직은행을 추진했던 한 치과의사의 말이다. 엄씨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하 식약청)과 복지부를 들락거리며 조직은행에 무관심한 공무원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했다. 선진국의 조직은행은 모두 재단법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에 관련법이 없어 생각같이 쉽게 일이 풀리지 않았다. 엄씨는 미국 조직은행연합(AATB)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조직안전규정 번역본을 들고 다니며 공무원들을 설득하며 관련법 제정과 재단 설립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했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조직 기증운동을 하면서 다진 유명인사들과의 인맥이 힘을 발휘했다. 모 국회의원을 통해 식약청에 압력을 가한 덕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조직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식약청은 설립인가를 원했다. 관련법은 없지만, 먼저 조직은행을 재단법인 형태로 출범시켜 이를 중심으로 안전관리규정을 만들고 식약청 고유업무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복지부는 조직은행 안전관리규정과 인체조직의 분배·유통·윤리성을 보장할 법의 필요성엔 공감했지만,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이 장기이식 창구를 KONOS로 일원화한 결과 뇌사자 장기 기증이 격감한 전례에 주목했다. 즉 엄씨가 재단법인을 설립해 인체조직 가공을 독점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 더 정확히 말하면, 복지부엔 판단할 만한 전문가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인체조직 시장 수요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정형외과 의사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엄씨의 H조직은행이 식약청의 인정을 받으면 구멍가게 수준으로 운영해온 대학 내 뼈·조직은행들은 안전관리규정에 걸려 몰락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치과의사에게 조직은행 주도권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 의사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의사들은 식약청을 항의방문하는 등 재단법인 설립에 극력 반대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엄씨의 ‘선구자적 행동’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식약청도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됐다. 식약청 생물의약품과 유무영 사무관은 “조직은행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는 계기가 필요했는데, 우리로선 그게 엄씨였다. 엄씨에게 공이 있다면 그것은 조직은행을 사회이슈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식약청은 지난해 말부터 생물의약품과를 신설해 인체조직 관련 업무를 직접 챙기고 있다.

    조직은행 재단법인화를 추진한 엄씨의 밑천은 한국조직은행에서 가지고 나온 뼛가루와 10여 년간의 조직은행 운영 노하우, 든든한 배경인 치과의사그룹, 미국에서 딴 조직은행 관리자격증인 CTBS(Certified Tissue Bank Specialist)였다.

    CTBS는 조직은행 전문의(?)

    엄씨는 CTBS를 사람들을 현혹하는데 써먹었다. 지난 9월12일 엄씨가 구속될 때까지도 조직은행 관련자나 검찰, 심지어 엄씨의 변호사까지도 이 자격증이 ‘미국 조직은행 전문의’ 자격증인 줄 알았다. 그러나 CTBS는 조직은행 실무자를 위한 자격증일 뿐이다.

    그러나 엄씨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인체 전반의 질병·면역 관련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치과의사 출신이란 점이었다. 치과의사가 조직은행장이나 의료감독을 맡은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찾기 어렵다. 하지만 엄씨는 조직은행 실행안과 관련법 제정을 제안하면서 치과의사가 의료감독에 포함돼야 한다고 줄곧 주장했고, 실제 의료감독으로 일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도 바로 미국에서 손쉽게 딸 수 있는 CTBS였다.

    엄씨의 H조직은행은 설립 직후부터 장기기증본부 지역본부 관계자들을 구슬려 이들을 통해 시신을 공급받았다. 장기기증본부는 하나의 조직이면서도 각 지역본부가 독립채산제로 운영된다. 따라서 본부에서 특별히 감사를 하지 않는 한 기증된 시신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런 장기기중본부 운영상의 허점을 간파한 엄씨가 장기기증본부 지역본부를 H조직은행에 끌어들인 것이다. 이에 몇몇 지역본부는 2001년 초부터 엄씨에게 13구의 시신을 전달했다.

    그런데 이중 4구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신이었다. 엄씨는 기증자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거나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인해 해부용 이외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는 시신까지도 가공해 판매했다. 수요는 많은데 재료(시신)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엄씨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신에서 채취한 인체조직을 유통시킨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에 대한 의학적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술용으로 사용된 사실이 의료사고라는 확증을 잡지 못해 검찰은 애를 먹고 있다.

    간염이나 성병 바이러스를 보균한 시신의 뼈를 가공해 이식했다면 바이러스가 전염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식약청의 답변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조직 기증은 장기 기증보다 더 철저히 관리돼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인체조직(뼛가루)의 바이러스를 검사할 기술도 부족하고, 설령 뼛가루가 바이러스 음성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이식받은 환자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위험성이 있으니 사용해선 안된다는 생각엔 변함 없다.”

    위험하긴 한데 검증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식약청 관계자는 현재 식약청이 인체조직에 대한 안전관리를 강제할 수 있는 법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항변했다.

    엄씨는 검찰조사에서 “소독은 물론 화학처리까지 해서 절대 안전하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의사들의 견해는 다르다. 한마디로 절대 위험하다는 것.

    마취과 전문의 김명희씨는 “엄씨 주장은 의학상식이 결여된 것이다”며 “식약청과 검찰이 불량 인체조직을 이식받은 환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해 인체조직 유통비리를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경우 인체조직 유통에서부터 시술까지 철저한 관리와 감독 아래 이식수술이 진행되는 데도 이식받은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식 환자의 상태를 계속 살펴 불량 인체조직 여부를 판명하는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엄씨에게서 불량 인체조직을 공급받아 시술한 분당 모병원 관계자는 “검찰 통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혹시나 싶어 환자 상태를 점검했으나 아직 별 탈이 없다. 현재 환자 상태로 보아 앞으로도 별일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불량 인체조직을 이식받은 환자의 발병 가능성은 누구도 완전하게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번 사건은 조직·뼈 은행이라고 자처하는 각종 단체가 난립하는데도 복지부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조직이식술은 1990년대 말 국내에서도 이미 첨단의학이라 부르기 어려웠고, 선진국에선 장기 및 조직 이식에 관한 법의 정비가 마무리된 지 오래다. 복지부가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얼마든지 벤치마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복지부와 식약청은 최소한의 관련규정도 갖추지 못하고 외국산 인체조직이 무분별하게 수입되는 현실을 수수방관해왔다. 인체조직은 기타항목으로 수입 통관 때도 최소한의 세금만 부과된다. 이런 상황을 틈타 50여 개에 달하는 국내 의료기기·인체조직 수입업체가 사업영역을 대폭 확장하고 직접 시신을 획득·가공하는 사업에까지 손을 뻗친 것이다.

    복지부와 식약청은 ‘개점휴업’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식약청조차 엄씨에 휘둘렸다는 사실이다. 엄씨는 식약청에 조직은행 개념을 설명하면서 안전관리기준, 조직은행법 등 제반 정보를 제공했다. 실제 2001년 식약청이 제시한 안전관리권고안은 엄씨가 제출한 서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심지어 식약청 연구관이 엄씨의 H조직은행에 이사로 재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식약청이 H조직은행을 재단법으로 인가하려 한 것도 일종의 난센스. ‘선 법인허가 후 법령제정’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엄씨의 H조직은행 사건은 현재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최근 길병원은 H조직은행 공급 뼛가루에서 C형간염 바이러스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기증자는 83세 노인. 기증자의 나이도 나이지만 그 뼈들은 중소병원 수술실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다시피해서 모은 것들이다.

    이에 대해 바이러스 검사방법이 없다고 주장한 식약청은 길병원의 검사방법은 인정되지 않은 것이라 주장했다. 상반된 주장에 검찰은 장고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300곳이 넘는 치과·정형외과에서 H조직은행의 인체조직을 이식받은 환자들이다. 그들에 대한 보상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사건 수사를 맡은 인천지검에 최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경찰서인데요. 신문기사 보고 전화했습니다. 매장한 시신을 누가 파내 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혹시 거기서 수사하는 H조직은행이 여기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나 해서요.”

    뜬금없는 소리일 수 있지만, 그냥 흘릴 수도 없는 얘기다. 무덤 속 시신으로 수억원을 버는 현실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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