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대북 공격 의도 서로 의심하다 양국 갈등 키웠다”

  • 김동현 전 미국 국무부 한국어 수석통역 tong.kim@prodigy.net

    입력2005-08-25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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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50주년을 하루 앞둔 2003년 9월30일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나이트필드에서 열린 기념식. 한미 양국 병사들이 기수단을 앞세워 행진하고 있다.

    1978년부터 27년간 미 국무부에서 통역으로 일하다 지난 7월 은퇴한 김동현(미국명 Tong Kim)씨가 최근 한미관계의 주요 쟁점, 한미동맹의 시대별 변화와 전망 등을 담은 글을 ‘신동아’에 보내왔다. 오랜 기간 미국 관료들과 함께하며 생각을 공유해온 그의 글은 미국 정부, 특히 국무부의 한반도 관련 당국자들이 동맹문제에 대한 한국의 태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특히 한국 정부가 북한의 남침 위협에 대한 평가를 미국과 달리하고 있다는 비평이나, 이라크 파병에 대한 한국의 태도가 주한미군 감축협상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평가, 한국 젊은이들의 ‘자주권 의식 강화’가북한의 ‘자주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다는 인식에서는워싱턴 외교가에서 2000년대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와 함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90년대 1차 핵 위기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회고담은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둘러싼 양국간 긴장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근에한미동맹의 현안으로 등장한 이슈들은 한국 언론에서 상세히 보도한 것처럼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자주국방 정책 ▲한국의 균형자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비상계획(Contingency Plan) 5029 ▲용산기지 및 미 2사단 재배치 문제 ▲방위비 분담 문제 ▲SOFA(한미행정협정) 수정 문제 등. 이 중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는 이미 합의단계를 넘어 실천단계에 들어갔으나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주한미군 병력감축은 미국측이 실천자인 만큼 일단 합의된 일정대로 진행되고 있다. 또 하나, 어느 면에서 이런 현안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오는 12월 국회에서 다룰 자이툰부대 파병연장 결의안의 통과 여부다.

    이러한 현안 가운데는 미국측이 먼저 제기한 것도 있고 한국측에서 먼저 제기한 것도 있다. 그중 일부는 상대방의 조치 또는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듯한데, 모두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컨대 자주국방론, 균형자론, 전략적 유연성, 한미연합사의 지휘체계, 비상계획 5029 등은 미국의 세계군사전략 변화 및 개혁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이는 한국의 자주권 의식 강화와 연결할 수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의 균형자론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역 안정을 위해 미국이 균형자 구실을 해야 한다고 인정한 것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한편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에는 여중생 두 명의 불행한 사망사고에 항의하는 촛불시위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런 상황이 없었다면 그때까지 진행되던 한미연합토지관리계획(LPP)의 범위를 뛰어넘어 모든 주한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이동한다는 현재의 계획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국이 처한 상황이나 상호작용이 주요 현안에 영향을 끼치기는 이미 실천의 중반단계에 접어든 주한미군 감축 문제도 마찬가지다. 만약 한국측이 이라크에 1개 사단 규모의 전투부대를 파병해주길 바랐던 미국측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했다면 전세계 미군 재배치 검토(GPR·Global Force Posture Review)와 군 변혁(Force Transformation) 계획에 따른 주한미군의 병력 조정은 상당히 신축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 규모가 미국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파병 시기가 지연되는 동안 두 나라는 주한미군 감축 협상을 벌였다. 결국 한국은 미군 감축계획을 2008년까지 늦추는 데는 성공했지만, 병력 숫자보다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전투력이 중요하다는 새로운 군사력 개념에 익숙지 않은 보수층과 일반 국민의 심리적 충격을 무마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

    현 시점에서 미국의 관심은 용산기지 이전과 미 2사단 기지의 1차적인 통합, 이를 통한 주한미군 한강 이남 재배치 일정이 이미 합의한 대로 지켜지느냐에 집중되고 있다. 앞으로 2년간의 방위비 분담 건은 이미 지난해 협상을 통해 결정이 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사령부는 한미연합사의 전투력과 직결된 C4I(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 및 정보) 체계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과 한국인 종업원들의 인건비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북한의 정권붕괴, 인민군에 의한 쿠데타, 난민 집단탈출, 내란 또는 천재(天災) 상황에 대비한다는 비상계획 5029는 계획의 명칭을 정하는 데서부터 한미간에 이견이 노출됐다.

    이와 같은 이슈들이 제기된 배경은 무엇일까. 왜 굳이 이 시점에 이러한 쟁점들이 불거졌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기준을 놓고 한미간에 커다란 시각차이가 생겼다. 둘째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달라졌고, 한반도 주변정세 역시 변했다. 끝으로 한국 정치환경의 변화, 즉 정부의 자주·주권의식이 강하게 대두되는 환경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한미동맹의 근거는 1953년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당시 미국은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해 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5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의 참전은 형식상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비록 미국의 주도로 이뤄졌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동맹이란 우방 또는 우호관계보다 차원이 높은 군사적 개념이다. 동맹은 ‘유사시 함께 싸운다’는 정치적 의지와 군사적 준비태세를 전제로 한다. 처음부터 한미동맹의 방어대상은 북한이었다. 한미동맹의 본질적인 의도는 지금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고, 만약 그 억제력이 무너질 경우 침략군을 격퇴한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양국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북한 문제를 제외한 한미관계 논의란 상당부분 의미를 잃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양국의 군사 당국자들은 북한의 군사위협을 평가할 때 우선 군사력의 양적인 규모를 중시했다. 즉 병력의 수, 무기체계 및 장비의 보유현황, 전투력 배치 등을 중심으로 하고, 여기에 훈련교육의 수준 등 질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전쟁준비 태세’를 기준으로 삼았다. 노농적위대를 포함하여 200만명에 달하는 병력 동원력, 휴전선에 전진 배치되어 서울은 물론 중부권까지 사정거리 안에 둔 1만1000여 문의 화력체계, 자폭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8만~12만명의 특수부대 병력(SOFs), 4000~5000t으로 추산되는 생화학무기와 미사일 등은 방어임무를 맡고 있는 한미연합사의 처지에서 볼 때 가공할 만한 위협이다.

    더욱이 지난 2월10일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자신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핵 무기고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고 보면, 북한의 군사위협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분명하고 현존하는 위험(clear and present danger)’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은 해마다 미 의회 예산청문회를 통해 북한의 군사위협 평가를 공개적으로 증언해왔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언제부터인가 군사위협 측정의 패러다임을 전통적인 물리적 기준에서 북한의 남침 의도 유무에 대한 심리적 기준으로 전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러한 평가기준의 전환은 남북관계의 피상적인 변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 5년간 남북간 화해와 교류를 추진하면서 상당한 양의 대북지원이 이뤄졌고, 이를 통해 남북간 이해가 어느 정도 증진됐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과연 김정일 정권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키겠냐는 식으로 북한의 의도에 대해 관심이 커졌고, 이에 따라 미국측의 전통적인 군사접근 방법에 제동을 걸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한국군이 군사력의 양적 평가기준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정부 지도부의 안보 문제 접근방법이 달라진 것만은 확실하다.

    지난 수년 동안 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확인된 한국 국민의 심리를 들여다보면, 북한보다는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위험성을 우려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국민 다수의 인식도 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기준을 전환하게 한 정치적 환경이 아닐까 생각한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한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 규정하고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수차례 공언한 바 있다. 한편 그를 지지하는 상당수 국민은 설마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핵무기를 사용하겠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통일이 되면 북한이 개발한 핵무기가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위협에 대한 평가를 전환한 데에는 지지층의 이러한 인식이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한국의 386세대를 비롯한 중심세력이 미국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음을 잘 안다. 사정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미국의 책임도 상당히 크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국무부 부장관은 미 의회 증언에서 “지금까지 키 큰 농구 선수들이 작은 선수들의 머리 위로 자기들끼리만 공을 주고받아왔으므로” 작은 선수 처지의 한국 젊은이들이 화가 날 만도 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노 대통령의 지도력 발휘에 기대를 걸고 있다. 노 대통령이 정치적인 부담을 무릅쓰고서라도 동맹유지 및 강화 차원에서 미국의 정책에 협력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당시. 뒤편에 이승만 대통령이 서 있다

    한편 북한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서적 호소력이 강한 ‘우리 민족끼리’라는 구호를 내걸고 외세를 배제하자는 주장을 강도 높게 펴고 있다. 반면 북한은 주한미군과 한반도 주변에 배치된 미국의 군사력을 평가하는 데 전통적인 양적잣대와 첨단기술의 전투력 잣대를 모두 적용한다. 북한은 언제나 이러한 측정결과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북한은 미국의 선제공격 가능성을 기정사실화하고 있기에 미국의 침공 의도는 측정할 필요가 없다. 북한의 주적(主敵)개념은 확실하다. 한미연합군이다.

    북미간의 뿌리깊은 불신으로 인해 미국이 북한의 핵 포기 의사를 믿지 않는 만큼, 북한도 부시 대통령의 불가침 공약을 믿지 않는다. 한마디로 북한의 의도를 두고 한국이 미묘한 태도를 보인 데 비해, 미국의 의도에 대한 북한의 태도는 논쟁의 여지 없이 분명하다. 한반도의 위험은 9·11사태 이후 미국에서 선제공격 개념이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자존심이나 말로는 절대로 지지 않는 북한은, 선제공격은 미국의 전유물이 아니라면서 북한도 선제공격을 선택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는다.

    서울의 자주·주권의식 강화

    한미 동맹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는, 세계화라는 흐름에 비춰볼 때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민족주의의 재등장이다.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주·주권의식은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한때 서울에서 자주파와 동맹파 또는 반미파와 친미파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도됐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과거 50년간의 한미관계에서 한국이 겪은 불공정한 일들이 한국에 자주권 행사 의욕을 고취시킨 면이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자주권에 대한 요구가 확대된 데는 우선 한미 접촉과정에서 생겨난 여러 가지 문제가 직접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북한의 태도도 이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한번도 미국에 무릎을 꿇은 적이 없다. 핵무기 협상이나 푸에블로호 포로 송환협상 등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여왔다. 미국은 북한의 이런 도전적인 선언을 헛소리라고 폄하해왔지만, 북한의 민족주의 주권의식을 지켜본 한국의 새로운 세대는 특히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교류를 통해 새로운 자아의식을 갖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보수층은 이와 같은 현상을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말려든 것이라고 우려한다.

    북한의 위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한국에서 자주·주권 의식이 고조된 상황이다 보니, 한국 정부는 한미간 현안을 협상할 때마다 사사건건 산술적으로 계산하게 됐다. 한국의 자주국방 정책이나 비상계획 5029, 또는 한미군사동맹의 지휘체계 문제 등은 노 대통령이 등장한 후에 현저하게 강화된 주권의식과 관련이 깊다. 특히 미군 재배치 비용이나 방위비 분담을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한국측이 한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노력한 것만 봐도, 한국이 무조건 미국의 요청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자주의식과 이러한 비용이 미국의 필요에 따라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동맹인 한국과 적대국인 북한 중 누가 더 협상하기 어려운 대상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 적도 있다.

    정확한 상황 판단과 장기 전략적 구상 아래 위협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자주권을 행사한다면 문제가 없다. 예컨대 북한이 남침할 의도가 없다는 분명한 증거와 남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제도적 장치, 현실적 상황이 마련된다면 문제의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지도부가 아무리 불가침 약속을 한다 해도, 그것을 믿기 어렵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동안 안보문제에 관한 숱한 남북간 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미간의 최근 현안 가운데 특히 돈과 인원에 관계되는 부분에서 한국 정부가 지나치게 경직된 태도를 보임으로써 동맹의 질(質)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은 숫자를 따지기보다는 장기 전략상의 큰 이익을 내다보고, 이를 위해 미국의 이해와 협력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물론 무엇을 원할 것인지는 한국이 결정할 문제다.

    한국의 북침 가능성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한미동맹을 둘러싼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대목이 바로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에 관한 부분이다. 전쟁 발발 가능성을 둘러싸고 한미 양국이 빚어온 갈등의 흐름을 살펴보면 두 나라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동맹문제에 접근해왔는지 그 얼개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크게 군사정권 시절과 김영삼 정부, 이후로 구별할 수 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따라가되, 위기가 가장 심각했던 김영삼 정부 당시의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겠다.

    6·25전쟁의 참화를 겪기 이전의 이승만 정부, 즉 전쟁의 무서움도 모르고 군사력도 없이 북진통일을 정치적 구호로 외치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후의 어느 군사정권도 북침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은 없다. 하지만 미국은 냉전기간 중 한국전쟁의 재발 방지에 전력을 기울이며 한국에 의한 북침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침을 단행할 만한 군사력을 보유한 적은 없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미국이 자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인계철선 효과(tripwire effect)’는 미국으로서도 부담스러운 부분이었다.

    이를 반영하는 것이 1953년 휴전 이후 발생한 몇 차례 위기 당시 양국의 태도다.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하고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이 취한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했다. 그 일로 일시적으로 한미간에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전쟁 발발에 대한 위기의식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 당시를 살펴보면 19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장교 두 명이 살해된 ‘도끼 만행’ 사건이 가장 위험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리처드 스틸웰 유엔군 사령관이 워싱턴의 허가를 받아 전쟁을 각오하고 문제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를 한미 합동으로 잘라냄으로써 해결됐다. 한미연합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엄청난 무력을 동원, 시위를 벌임으로써 미루나무를 무리없이 제거했다.

    이 사건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이 1994년의 1차 핵 위기다. 상황이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양국의 견해가 엇갈리고 갈등이 심각해졌다. 그 내용도 이전 시기보다 더 복잡했다. 이 시기 한국은 미국의 대북공격을 경계하는 동시에 미국의 대북 유화책에 강하게 반대하는 묘한 태도를 취했다.

    김영삼 정부가 미국의 북한 공격을 반대한 것은 분명하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권영해 국방부 장관은 당시 애스핀 미 국방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만약 미국이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군사작전(surgical strike)을 감행한다면 북한은 전면전으로 대응해올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핵 문제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는 한국 정부의 견해를 밝혔다. 김영삼 대통령도 퇴임 후 “당시 전쟁에 반대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김영삼 정부의 태도 변화

    김영삼 대통령은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자주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배짱을 지녔기에, 미국에서 볼 때는 다루기 힘든 상대였다. 김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진보적인 한완상 부총리, 미국과 호흡이 잘 맞던 한승주 외무장관을 앞세워 미국의 대북 유화책을 지지하는 듯했으나, 얼마 안 가서 대북정책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자주 맞서곤 했다.

    첫 번째 충돌은 김 대통령이 1993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엘 위트와 로버트 갈루치 등의 공저 ‘심각해져가다(Going Critical)’에 기술된 것처럼, 김 대통령은 그때까지 북미간에 논의되던 ‘일괄 타결(package deal)’이라는 용어가 미국 매체에 보도되는 것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예정된 회담 시간을 연장하면서 한미 양국의 외교 수뇌부간 합의로 결정된 ‘포괄적 접근(comprehensive approach)’이라는 용어 사용도 반대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별 차이가 없는 듯 보이는 것도 문제였다.

    김 대통령이 계속 강하게 반대하자 회담장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김 대통령은 다른 사안보다 용어 선정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양국 정상은 결국 정종욱 안보수석과 토니 레이크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즉석에서 만들어낸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thorough and broad approach)’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였다.

    돌이켜보건대 김 대통령이 이렇듯 표현 문제에 신경을 쓴 것은 대북정책 주도권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동의 없이 미국이 북한에 양보할 가능성을 날카롭게 경계했다. 이때 김 대통령은 한승주 장관의 말보다 오히려 박관용 비서실장이 워싱턴으로 불러온 유종하 당시 유엔대사의 의견에 귀기울였다. 미국은 그때 외무부를 통한 협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백악관과 청와대를 잇는 채널을 강화했다.

    1994년 봄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검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면전을 계획한 적은 없다. 미국이 북한 핵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을 요구하는 동안, 팀스피리트 훈련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극히 심각해졌다. 북한은 병력의 70%를 휴전선 근처로 전진배치하고 있었다. 이 무렵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과 여러 차례의 전화협의를 통해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을 유엔 제재로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제재 결의안에 담겨질 내용까지 협의한 상태는 아니었다.

    북한은 이때도 ‘유엔의 제재는 곧 북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유엔 제재를 가할 경우 북한이 공격해올 수 있다는 가능성이 대두됨에 따라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투력을 급격히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고 주한미군 사령부는 전쟁을 각오하는 상태로 돌입했다.

    당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의 승인을 받기 전에 한국에 와 있던 군인 가족들과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방문 중이던 딸과 손자들을 서둘러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전쟁 시나리오에서 미군은 5만명 이상, 한국군은 수십만명, 일반 시민은 100여 만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일단 전쟁이 나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한다는 것이 최종목표로 설정됐다(이 목표는 현재의 작전계획에도 반영돼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작전계획 목표가 전투력 못지않게 억제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처럼 고조되던 위기는 우여곡절 끝에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해소의 길을 찾게 됐다. 얼마 전 서울의 매체들이 일부를 공개한 김일성의 마지막 업무지시 녹음 테이프에는 “내가 카터보고 제재하려면 하라 했어”라고 말하는 육성이 포함돼 있다. 이 테이프는 김일성의 장례식에서 처음 공개됐다. 카터는 훗날 “만약 미국이 제재했더라면 북한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라며 당시 절박했던 느낌을 밝힌 적이 있다.

    미묘한 기류

    그러나 이후 시작된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유화책에 대해 한국측의 반응은 싸늘했다. 제네바합의가 나올 때까지 서울과 워싱턴 사이에는 계속해서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일성 사망 이후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미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제네바협상 기간에 북한과 미국의 회담이 끝날 때마다 미국측은 자국 시각으로 정리한 내용을 한국측에 통보했다. 미국의 목표는 협상의 성공이었다. 한국 정부가 협상의 성공을 별로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미국측 대표들이 한국에 어느 수준으로 협상과정을 설명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 대통령은 북미 핵 협상이 거의 합의에 도달할 무렵 갑자기 ‘뉴욕타임스’와 한 회견에서 “한국보다 대북협상 경험이 적은 미국이 북한에 속고 있다”고 말했다. 늘 자신감에 차 있던 김 대통령은 이보다 앞서 그의 핵심 참모 한 사람에게 “야, 이제 두고봐라. 미국놈들은 이북놈들에게 속고, 우리는 미국에게 당하게 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통령은 거의 다 합의된 미국의 협상안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국민에게 한 약속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인 YS’의 배짱은 알아줄 만했다. 김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배신감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레이니 당시 주한 미 대사는 미국이 동맹인 한국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 대통령에게 다짐해야 했다.

    ‘중심적 역할’의 배경

    사람들은 아직도 왜 한국이 북미협상에서 제외됐는데도 경수로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겠다고 나섰는지 궁금해한다. YS가 취임 초 대북 유화책에서 강경책으로 선회한 것은 평생의 경쟁자이며 진보적인 대북관을 갖고 있는 DJ를 의식한 때문으로 보인다.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구속, 사법처리한 것도 DJ와의 경쟁의식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YS의 참모 한 사람이 필자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김 대통령은 제네바협상 진행과정에 불만이 있었지만 협상이 끝나가는 판에 어떻게 해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한 것 같다.

    이러한 국내정치 배경에서 나온 것이 한국의 중심적 역할, 즉 한국형 경수로 제공안이다. 그렇다고 김 대통령이 단순히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정치적 명분만 갖고 30억~40억달러를 내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북미 기본합의서에 보면, 200MW 경수로 2기를 건설하는 데 10년이 걸리는 것으로 돼 있다. 한편 당시 한국 정부는 경수로가 완공되기 훨씬 전에 북한 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얼마 안 가서 무너질 텐데 일단 준다고 하자는 것이 청와대의 생각이었다고 들은 바 있다.

    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1993년 11월24일 아침(현지시각) 방미 중인 김영삼 대통령이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함께 백악관 주변의 조깅트랙을 돌고 있다.

    ‘신동아’ 2005년 3월호에 실린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특강 내용을 보면 “미국이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제네바 합의도 체결했다는 것을 북한이 나중에 알아버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무렵 북한의 붕괴설이 워싱턴에서도 난무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붕괴설이 제네바합의 체결의 동기가 됐다는 증거는 없다. 정세현 전 장관이 말한 “미국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은 곧 망한다. 후하게 약속하고 안 지켜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미국측 협상대표인 로버트 갈루치는 상원에서 “북한과 합의한 내용의 장점은 미국이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해마다 50만t의 중유를 북한에 공급하기 위한 예산을 의회에 신청할 때 갈루치가 한 말이 말썽이 되기도 했다. 미국 행정부는 북한과 한 합의가 상원의 비준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제네바합의 자체에 ‘Agreed Framework(직역하면 ‘합의된 틀’)’이란 모호한 명칭을 붙였고, 북한은 이것을 ‘조미기본합의문’이라고 번역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제네바협정’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처음부터 ‘비용을 후하게 약속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구성해 참여 국가들로부터 경비를 지원받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이 중심 역할론을 내세워 경비부담을 자청했다는 게 미국측의 설명이다.

    한편 미국측 협상대표단은 제네바에서 한국의 제안을 북측이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북측은 “지금 조선과 미국이 협상하는데 왜 난데없이 제3자인 남조선을 끌어들이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북측 협상대표는 “남조선이 우리를 도와준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세 살짜리 어린애도 믿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이밖에 과거 사찰 문제 에 대한 한국의 반대로 난관을 겪었지만, 결국 제네바합의는 한국이 못마땅하게 생각했음에도 서명이 이뤄져 실천단계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미국의 협상팀 멤버 중에 한국의 제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러나 행정부 고위층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특히 클린턴 대통령은 이렇듯 어려운 환경에서도 늘 김영삼 대통령을 정중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클린턴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국을 한국으로 정하고 서울에 왔을 때 당시 ‘문민정부 대통령’의 국민적 인기를 부러워했다. 김 대통령이 오랫동안 민주화 투쟁을 한 점도 클린턴의 존경을 샀다. 클린턴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서울 방문을 하나의 추억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YS 정부 당시에는 전쟁 문제와 관련해 한미간에 미묘한 대결양상이 빚어진 국면이 또 한 차례 있다. 1996년 9월 벌어진 북한의 잠수함 침투사건이다. 이 시기의 갈등은 1차 핵 위기 양상과는 사뭇 달랐다. 이때는 미국이 한국의 북한 공격을 염려하는 형국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영삼 정부는 대북강경책과 북한정권의 연착륙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향해 경제지원을 하는 두 가지 방안 사이에서 오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국은 경수로 제공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서울은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미국의 전례 없이 미온적인 태도에 크게 실망해 KEDO 활동을 중단해버렸다. 서울에서는 남북한을 놓고 미국이 등거리정책을 편다는 의구심을 가졌고, 김 대통령은 대북 강경노선을 더욱 굳혔다. 이것은 한편 자주권의식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미국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자주권 행사는 동맹관계에 긴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방적 군사행동 가능성

    1996년 10월 중순 ‘중앙일보’는 잠수함 침투사건 이후 한국군이 12개의 대북 공격대상을 선정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한국 정부 관리들은 공식적인 정책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미국측 관계자들은 이와 같은 도전적인 사태진전에 초미의 관심을 쏟았다. 한미간 사전협의와 동의 없이 한국군이 일방적으로 북한의 목표를 공격하면 미국의 의사와 관계없이 한반도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미국의 가장 큰 우려였다. 미국측은 또 앞으로 북한의 도발행위가 있을 때 한국군이 일방적으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공로명 외무부 장관, 김동진 국방부 장관과 레이니 대사,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이 서울에서 협의를 했으나, 신통한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더치 미 중앙정보부장의 서울 방문도 효과가 없었다. 이후 윌리엄 페리 미 국방장관과 김동진 장관 사이에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도 해결이 나지 않았다. 김동진 장관은 “시간적으로 미측과 협의할 수 없는 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미국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뉴욕타임스’는 한미동맹의 새로운 균열과 관련해 “일부 미국 관리들은 북한보다 한국 정부가 더 골칫거리라고 생각한다”고 보도했다.

    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2월3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열린 제1차 한미동맹안보정책구상회의(SPI)에 참석한 양국 대표단이 상호 동맹관계 지속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1996년 11월 마닐라에서 열린 APEC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이 회담에서 미국측은 잠수함 침투 대응작전에 대한 김 대통령의 설명을 들었다. 이 자리에는 이례적으로 틸럴리 주한미군 사령관과 한국의 합참의장도 참석했다. 회담이 끝날 무렵 클린턴 대통령은 김 대통령과 단둘이 만날 것을 제안하고, 양쪽의 외무장관만 배석하기로 했다. 필자는 미국 국무장관이 직접 노트 테이커(Note Taker·회의기록 담당) 노릇을 하는 것을 그때말고는 본적이 없다. 이 자리에서 한미 두 정상은 한미동맹의 공고성을 다시금 다짐하고 상호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이렇듯 미국이 한국의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염려하던 9년 전의 분위기는 이제 거의 완벽하게 뒤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주한미군이 남침과 북침을 다 같이 억제하는 임무를 띠었다면, 이제는 한국이 미군의 북한공격을 억제하는 기능을 갖게 된 듯한 형국이다. 최소한 한국측은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의 북한 침공 가능성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고, 한국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한미군이 동북아 분쟁에 개입할 수 없다고 다짐한 바 있다. 이렇듯 단호한 의사 표시는 노 대통령이 취임 당시부터 전쟁 가능성, 특히 미국에 의한 전쟁 개시를 깊이 우려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 나온 것이어서 주목된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동맹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서두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자주국방론, 균형자론, 전략적 유연성, 한미연합사의 지휘체계, 비상계획 5029 등 노무현 정부 출범 이래 양국 사이에 형성된 주요 쟁점은 모두 전쟁을 누가 일으킬 것이며, 이를 어떻게 견제할 것이냐는 질문과 관련이 깊다. 물론 이런 현안은 앞으로 한미정책구상(SPI·Security Policy Initiative) 협의를 통해 원만히 해결될 여지가 남아 있기는 하다.

    극복의 길

    한국에서 군사 독재자들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양국 사이에 안보문제와 관련한 잡음이 크지 않았다. 월남전 파병으로 동맹을 다진 박정희 정권을 거쳐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만 하더라도 한미동맹은 공동목표를 위해서 싸운 혈맹으로 미일동맹보다 우위에 있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정권만 잡으면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이든, 민주화 투사이든 상관하지 않고 협력했다. 어떤 면에서 미국은 독재정권을 다루기가 더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가 정착되고 발전할수록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쇠퇴해왔다.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미국의 가치관이 한국에서 실현될수록,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미국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진 만큼 한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어떻게 나오든 누가 집권자가 되든 상관없이 미국은 한국과 협력을 계속 추구할 것이라는 기대 역시 하기 어렵게 됐다. “미군 주둔을 원치 않는 나라에 미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는 미국의 방침은 단순히 감정 차원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미동맹의 핵심에는 언제나 북한 문제가 있다. 북한에 대한 한미간의 인식 차이를 좁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다. 여기에는 한미 양국의 지도자들이 각자 국내정치의 제약을 초월하고, 필요할 때는 자기 생각도 과감하게 전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싫어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대해 취하는 갈등적인 태도나 북한에 대한 불분명한 태도도 잘 알려져 있다. 북한과 미국의 불신이 뿌리깊고 한미동맹 공조체제가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현실에서, 북한에 대한 궁극적으로 합의된 목표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 양국의 현 정치지도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기회는 자연히 다음 정부로 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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