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호

인디 뮤지션의 세계

목표 연봉 1000만원 레슨과 행사로 밥벌이하며 ‘나만의 음악’ 꿈꾸다

  •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hanmail.net

    입력2011-02-22 16: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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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 뮤지션의 세계

    지난해 뇌출혈로 세상을 뜬 원맨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

    1월27일, 26개에 달하는 홍대 클럽에서 100여 팀의 뮤지션이 무대에 섰다. 그들은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하나의 주제로 공연을 펼쳤다. 지난해 11월 초 세상을 떠나 많은 이를 안타깝게 했던 원맨 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4500장의 티켓은 순식간에 팔려나갔다. 평일 저녁 홍대 앞에 몰린 인파는 남은 티켓을 구하기 위해 이 공연장, 저 공연장을 돌아다니며 발을 동동 굴렀다. 1990년대 중반, 한국 대중문화계의 화두로 떠올랐던 인디 음악에 대한 열기가 실로 오랜만에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한국 인디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순간이었다.

    인디란 무엇인가

    여기서 묻고 싶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혹은 여러 페스티벌이 열릴 때마다 인디에 대한 얘기를 한다. 이런 식이다. “… 등등의 인디 밴드가 참가한다.” 그런데 과연, 인디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을 수 있다. 원론적으로는 독립 유통 음반을 의미한다. 미국, 영국 등 유니버설, 소니BMG, 워너, EMI 같은 메이저 레이블이 사실상 모든 음악 유통을 장악하는 국가에서 이런 메이저 레이블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제작·유통 시스템을 갖춘 레이블을 인디 레이블이라 불렀다. 그리고 여기에 소속해 활동하는 뮤지션들을 인디 뮤지션이라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들에게는 판매와 활동의 열악함 대신 음악 창작의 자유가 주어졌다. 그 때문에 메인스트림에서는 할 수 없는 온갖 실험을 할 수 있었다.

    대중음악 미학의 발전사는 일정 부분 인디 레이블과 인디 뮤지션의 몫이었다. 그 개념이 1990년대 중반, 한국에 이식됐다. 마침 홍대 앞을 중심으로 헤비메탈이 아닌 펑크와 얼터너티브 등을 연주하는 밴드가 등장하고, 그들이 공연하는 클럽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였다. 하지만 한국에 메이저는 없었다. 음반 산업은 주먹구구식이었고 영세 기획사들이 난립하는 형국이었다. 삼성, LG 등의 대기업이 뛰어들긴 했지만 복마전 같은 음반 시장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지극히 미미했다. 인디가 메이저의 반대 지점에서 출발했음을 상기한다면, 애당초 본래의 의미를 유지한 채 이식되기는 힘든 개념이었다.

    당시 인디 담론을 주도했던 측은 과거의 운동권 내지는 진보 진영이었다. 그들은 인디에 정치적 함의를 부여했다. ‘문화 게릴라’라는 프레임이 설정됐다. 언론엔 스토리가 필요했다. 그들의 음악보다는 가난한 현실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그래서 한국의 초기 인디에는 ‘지하실에서 라면을 먹지만 우리 자신의 음악이 있기에 행복하다’는 스토리가 입혀졌다. ‘획일화된 대중음악에 저항하는 진짜 음악’이라는 포장지도 씌워졌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그런 인식이 조금씩 바뀐 건 그 안에서 스타가 등장하면서다. 크라잉넛, 노브레인, 언니네이발관, 델리스파이스 같은 밴드들은 지상파에도 진출했고 음반 판매고도 꽤 올렸다.



    그 후 인디 음악의 개념을 대체한 건 실력파 뮤지션이라는 거다. 2000년대 이후 메이저 가수들의 자질논란이 극심해지면서부터다. 신인 가수가 데뷔하고, 그들이 실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수사로 ‘홍대 인디 밴드 출신’이라는 문구가 보도자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체리필터처럼 사실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었다. 씨엔블루의 캐치프레이즈가 인디 밴드인 것과 마찬가지다. 당시의 인디 신이 스스로를 규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던 해프닝이다. 홍대 음악=인디 음악. 즉 로컬 음악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장르는 다양해지고 밴드의 색깔은 더욱 다양해졌다. 일원화된 묶음이 불가능해졌다.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TV 출연보다는 라이브에 역점을 두는 음악’이라는 포괄적 합의가 부지불식간에 이뤄졌다. 그렇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주류 기획자들이 홍보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인디 뮤지션의 세계

    (왼쪽) 대표적인 ‘인디 아이돌’로 통하는 장기하와 얼굴들. 이들은 음악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오른쪽) 인디 밴드 최초로 1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린 크라잉넛.

    장기하의 스타덤

    상황이 바뀐 건 2008년 이후다. 데뷔 앨범을 내기도 전에 이미 스타가 된 장기하의 스타덤은 다시 인디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마니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심지어 최근 음악에 관심도 없던 386세대가 그에게 열광했다.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사 프로그램에서까지 다뤄질 정도였다.

    장기하뿐만 아니라 요조, 국카스텐, 검정치마, 브로콜리너마저 등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이 더불어 나름의 지분을 확보했다. 사람들은 다시 인디 음악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건 문화게릴라로서도, 실력파도, 라이브 중심도 아니었다. 그냥 인디 음악이었다. 개념은 사라졌다. 아이돌의 대척점으로서 인디 음악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해보자. 지금, 인디는 무엇인가. 거기에는 창작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에픽하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뮤지션은 씨가 말랐다. 사실 그게 뮤지션의 정의이기도 하다. 음악을 만들어서 연주하고 부르는 이들. TV에서는 갈수록 보기 힘든 뮤지션을 통칭해서 한국 사회는 인디라고 부르고 있다. 즉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보니 그 안에는 다양한 삶이 공존한다. 대부분의 삶은 힘들다. 이는 1980년대 헤비 메탈 밴드나 1990년대 이후 인디 밴드들이나 마찬가지다. 이진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여느 연예인의 죽음보다 많은 관심과 애도를 받았던 이유는 그가 힘들게 음악을 하며 지내온 삶의 상징처럼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웬만한 음악인들이 되도록 회피하고 싶어 하는 ‘곤궁한 현실’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던 몇 안 되는 이였다. 연봉 1000만원만 되면 계속 음악을 하겠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털어놓곤 했다.

    3집 ‘굿바이 알루미늄’을 냈을 때는 그 목표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조금만 더 하면 될 듯싶어 앨범을 또 만들었다고 했다. 앨범이 발매된 2008년 당시 고인의 나이는 서른여섯. 대기업 과장급 나이다. 굳이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그 또래 직장인의 평균 연봉을 생각하면 1000만원이라는 목표는 아찔할 정도다.

    그는 음악말고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소속사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음악으로 발생하는 수익은 유통수수료를 제외하곤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원맨 밴드였기에 저작권료 또한 고스란히 그에게 귀속됐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나름의 히트곡도 있었다.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 ‘치킨 런’ ‘나를 연애하게 하라’ 같은 노래들은 홍대 앞을 넘어 비교적 많은 이에게 알려진 노래들이었다. 즉 전업 음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던 셈이다.

    전업 음악인의 성공 조건

    하지만 그 좋은 조건들은 그에게 평균적인 사회인만큼의 수익도 안겨주지 못했다. 물론 그보다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음악인들도 있다. 반면 고 이진원이 갖췄던 조건의 바깥에서 더욱 힘든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도 있다. 먼저 대표적인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

    A는 대학 시절부터 밴드를 했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다. 큰 야심은 없었다. 졸업 후 취업을 했다. 괜찮은 대기업이었다. 회사를 다니는 틈틈이 음악을 만들었다. 다른 멤버들도 각자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녔다. 데모를 냈다. 특정 레코드 숍에서만 팔았다. 소문이 잠깐 났다. 미약했다. 2007년 EP앨범을 냈다. 이 앨범이 나온 레이블 역시 친구들이 모인 레이블이었다. 제대로 된 프로모션도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노래 하나가 인디 음악 팬들을 기반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노래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 노래의 인기는 홍대 앞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포털 사이트에 그들의 이름을 치면, 노래가 연관검색어로 떴다. EP앨범은 그리 많은 양을 찍어내지 않았다. 없어서 못 팔았다. 그들이 공연하는 클럽은 관객으로 꽉 찼다. 데뷔 앨범이 가장 기다려지는 밴드로 꼽히곤 했다. 기존의 레이블을 떠나 좀 더 큰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다. A는 이미 회사를 관두고 전업뮤지션으로 나선 상태였다.

    2008년 말 데뷔 앨범을 냈다. 평단과 시장의 폭발적인 지지가 동시에 따라왔다. 2010년 가을, 두 번째 앨범을 냈다. 역시 자체 레이블이었다. 매니지먼트와 유통은 다른 레이블에 맡겼다. 공연 기획도 전문 기획사를 통해 했다. 현재 한국의 밴드가 음악만으로 생활하기에 최선의 조건을 만든 거다.

    이는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과 유사하다. 앨범 및 음원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최대한 챙긴다는 점에서. 게다가 매니지먼트와 공연기획까지 전문적인 인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음악은 최근 문화 시장의 압도적 주류인 20~30대 여성층의 취향과도 맞닿아 있다. 안정적인 생활기반이 성립하는 데 더없이 유리하다.

    ‘인디 아이돌’ VS ‘인디 생계돌’

    그러나 이런 성공사례, 즉 음반(및 음원)과 공연만으로 생활할 수 있는 성공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안된다. 최근 몇 년간 1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인디 앨범은 두 손에 꼽힌다. 장기하와 얼굴들, 노리플라이, 에피톤프로젝트, 검정치마, 국카스텐, 브로콜리너마저 등이다. 그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면 홍대 앞 클럽을 벗어나 몇 백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콘서트를 해도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이 되기 마련이다. 부수입으로 CF에 음악이 사용되는 것도 기대할 수 있다. 앨범이라는 핵심 콘텐츠가 스스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더욱이 A의 밴드처럼 다른 직원조차 없이 자체 레이블을 통해 앨범을 제작하는 경우는 이 밴드가 유일하다 해도 틀리지 않다.

    밴드가 스스로 레이블을 설립하는 경우는 있으나 최소한 매니저 한 명 정도는 두는 게 일반적이다. 혹은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는 레이블의 힘을 빌려 비교적 쉽게 팬을 확보한다. 무명의 혹독함, 혹은 인디의 전형화된 가난함을 겪지 않고 지명도를 얻는 경우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2008년 이후의 몇몇 ‘인디 아이돌’에 한정된 사례다.

    편차는 있을지언정, 인디 뮤지션 대부분의 삶은 고 이진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중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한 이는 레슨을 주된 수입원으로 삼는다.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다.

    현재 한국 대학에는 어림잡아 60개 이상의 실용음악 관련학과가 존재한다. 그만큼 많은 사교육 수요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현장에서 음악 활동을 하는 이들은 우선적으로 학원 강사로 채용된다. 학생 수에 따라 급여를 받는 이도 있고, 월급을 받는 일도 있다.

    레슨 못지않게 음악인의 밥그릇을 책임져주는 건 행사다. 지방자치단체들의 수없이 많은 축제 무대나 각종 영화제, 그리고 봄과 가을이 황금 시즌인 대학 축제가 행사 시장의 주된 밥그릇이다. 지명도는 없지만 연줄이 있어서 운 좋게 행사를 따는 경우 적으면 10만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는다. 어느 정도 지명도가 쌓이면 100만원대로 올라간다. 그러다가 히트곡이 생기면 5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 물론 500만원급의 밴드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러나 행사가 비교적 많은 팀이라고 해도 넉넉한 생활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레이블과 팀이 3대7로 수익을 나누고 또 멤버들끼리 균일하게 나누면 정작 손에 쥐는 돈은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행사라는 게 그렇게 자주 있는 것도 아니어서, 드높은 지명도를 갖고 있지 않은 이상 일주일에 하나쯤 잡히면 어디 가서 행사 많다는 소리를 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음악 성향이 차분하거나 지나치게 과격해서 행사장의 분위기를 방방 띄우지 못한다면, 섭외에서 제외되게 마련이다. 행사는 어쨌든 ‘대중’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다.

    레슨을 할 여력이 안 되고 행사도 부실하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직업을 갖는 거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환경은 자기 시간을 좀처럼 주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은 택배 분류처럼 수입은 적더라도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을 택한다. 집에 여유가 있거나, 대출을 받을 환경이 되면 자기 가게를 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시간이 지나다보면 가게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음악과 생활은 주객이 바뀌는 경우가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몇 년째 자발적 비정규직 노동으로 생활을 해결하며 음악을 하고 있는 한 뮤지션은 농담처럼 말한다. “이 두 가지 생활을 할 에너지로 취직을 했으면 아마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 자아실현과 생계유지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건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더 다양한 음악을 위하여

    한국 대중음악에서 다양성은 사실상 인디 음악의 몫이 된 지 오래다. 최근 발표된 2010년 최다 판매 음반·음원 차트를 살펴보면 90% 이상을 아이돌이 차지한다. 장르는 댄스 아니면 발라드다. 한국의 음반·음원 시장은 세계에서 10위권 안에 드는 규모지만 이토록 편중된 구조는 더 큰, 혹은 비슷한 규모의 시장을 가진 국가 중에서 찾아보기가 힘들다. 사실상 시장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인디 음악이 음악 창작의 다양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을 위해, 인디 뮤지션들은 사회 안전망 바깥에 머물고 있다. 꿈과 현실의 처절한 등가교환이나 다름없다. 이런 환경이 반드시 음악인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작품에 대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결국 굶어 죽어간 한 시나리오 작가의 비극이 최근 전해졌다. 고 이진원과 함께, 이런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제까지 한국 사회는 가난을 예술의 꼬리표처럼 당연히 생각할 것인가. 예술가에게 실업급여가 지급되는 선진국이나, 혹은 아시아의 예술 허브를 노리고 문화 예술인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베이징처럼 문화 지원 정책을 왜 우리는 내놓지 못하는 것인가. 근래 사회적 화두, 혹은 논쟁이 되고 있는 복지라는 키워드를 보다 넓은 방향으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편중된 대중문화를 가진 나라를, 문화 선진국이라 말할 수는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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