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남기춘 전 서부지검장.
서부지검 발표가 있기 이틀 전, 수사를 지휘하던 남기춘(51·사법연수원 15회) 서부지검장이 사표를 내고 검찰을 떠났다. 이유는 명확지 않지만, 검찰 주변에서는 남 지검장이 검찰의 인사 움직임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실제로 검찰 주변에선 ‘서부지검장과 대검 형사부장 원포인트 교체설’이 유력하게 거론됐었다. 두 기업에 대한 수사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논란만 키운 것에 대해 청와대와 법무부가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문제가 된 건 한화그룹 수사였다. 그룹 회장을 구속한 태광그룹 수사와는 다르게 한화그룹 수사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애초 기대됐던 비자금의 용처는 고사하고 조성 경위도 속 시원히 규명되지 못했다. 관련자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은 번번이 기각됐다. 검찰 내에서조차 수사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검찰 내부 분위기는 곳곳에서 확인됐다. 조근호 신임 법무연수원장(고검장급)이 1월3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수사는 예술인가요, 아니면 과학인가요’라는 글을 올린 것을 두고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조 원장은 이 글에서 “수사가 예술이 되면 법적 안정성이 사라지고 중구난방이 된다”고 지적했다. 한상대 신임 서울중앙지검장(고검장급)이 검찰의 환골탈태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당대 최고 ‘칼잡이’로 불리던 강골검사의 사퇴로 이어진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 대체 검찰과 한화그룹 사이에선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리고 이번 수사의 핵심은 뭘까.
지하로는 못 들어간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번 한화그룹 수사는 내부고발자인 전직 한화증권 간부가 금융감독원(금감원)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차명계좌 5개를 제시하면서 시작됐다. “한화그룹이 수백억원대 비자금을 조성하고 주가도 조작했다”는 제보였다. 금감원은 이 사건을 검찰에 이첩했고, 대검찰청은 서부지검으로 사건을 내려 보냈다. 그럼 왜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이 아닌 서부지검으로 보냈을까. 그동안 검찰은 통상적으로 이런 정도의 기업비리사건은 서울중앙지검(특수부, 금융조세조사부)에 배당해왔다. 그래서 한화그룹 사건이 서부지검에 배당된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가장 먼저 김준규 총장과 노환균 당시 서울중앙지검장(현 대구고검장) 간 갈등설이 검찰 주변에서 불거졌다. 현 정부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노 지검장을 견제하기 위해 김 총장이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서울지검 특수부는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이 1심에서 무죄가 나오면서 체면이 망가진 상태였다.
다른 분석도 있었다. 서부지검의 막강 수사라인이 이 사건을 불렀다는 것이다. 김 총장과 가까우면서, 검찰 내 최고의 특수통으로 불려온 남기춘 지검장이 있고 기업조사 경력이 많은 봉욱 차장, 삼성특검에서 활약했던 이원곤 형사5부장이 있어 사건이 서부지검으로 갔다는 것이다. 검찰의 한 간부는 “정치적인 분석을 걷어내고 보면 효율적인 수사를 위한 사건배당으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화그룹 수사는 처음부터 시끄러웠다. 지난해 9월16일 한화빌딩 본사 경영기획실에 대한 압수수색 과정에선 검찰직원과 한화 측 관계자(경비업체)간에 몸싸움도 벌어졌다. 검찰과 한화의 신경전도 볼만했다. 한화 측은 별건 수사, 강압 수사, 먼지털이 수사라며 반발했다. 검찰도 검찰대로 불만이 쌓여갔다. 한화그룹이 허위사실을 퍼뜨리는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한다고 생각했다. 수사 초기, 서부지검장실에선 한화 측 변호인(임원)과 남 지검장 간에 고성이 오가는 경우가 많았다. 남 지검장이 “변호사가 왜 지검장실에 오느냐”며 화를 냈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12월8일 남 지검장이 검찰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에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검찰의 시각이 잘 반영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