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나는 왜 정몽준 향해 칼 빼들었나”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도쿄·LA·서울 숨바꼭질 인터뷰

  • 글: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2-11-29 10: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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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정몽준 향해 칼 빼들었나”

    이익치 전회장이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참고 있다.

    11월5일 아침 8시50분, 일본 나리타공항 제1터미널의 한 커피숍. 인사를 나누고 구석 자리를 찾아 앉은 이익치(李益治·58) 전 현대증권 회장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이익치는 1999년 9월10일 구치소 들어가던 날 죽었어요. 그때 나를 땅에 묻었어. 묻어버렸어….”

    꽉 다문 입술께가 부들부들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왈칵’이라는 표현 그대로였다. 커피와 팬케이크를 날라온 웨이트리스가 어쩔 줄을 몰라 “스미마셍”만 연발하곤 황급히 사라졌다. 눈물이 팬케이크 위로 시럽처럼 내려앉았다.

    “정몽구 회장이 면회를 와서 그럽디다. 명예회장님(故정주영 회장)이 매일같이 성화라고. ‘내가 이익치 생각에 잠이 안와. 이익치가 뭘 잘못했다고 거기다 가둬놓냐. 뭣들 하는 거야, 빨리 빼내란 말이야’ 하시면서…(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낌). 그래서 두 달 만에 나왔어요. 그때부터 나는 산송장이었어.”

    “너 같은 놈 하나만 더…”



    시간은 33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69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들어간 이익치 사원은 입사 한 달 만에 정주영 회장의 비서로 발탁됐다. 이런저런 훈련을 받으며 두 달쯤 지난 어느 겨울밤, 정회장이 퇴근하는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했다.

    “내일부터는 고속도로 현장에 나갈 거니까 새벽 4시 전까지 우리집으로 와.”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다. 통금이 끝나기 전에 회장집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떨어진 명령이다. “알았습니다” 하고 나왔다.

    궁리 끝에 정회장의 운전기사에게 물어보니 정회장 차에 야간통행증이 붙어 있다고 했다. 기사는 당시 무교동 사옥 숙직실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회장집으로 차를 몰고 간다는 것. 숙직실은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이 못됐다. 하는 수 없이 난방도 안되는 비서실에서 꼬박 밤을 지샌 후 차를 얻어타고 갔다. 다음날부터는 아예 비서실 한켠에 침낭과 이불을 갖다놓고 자명종 시계를 새벽 3시에 맞췄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정회장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런데 이비서는 야통증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그동안 어떻게 왔어?”

    “올 방법이 없어서 비서실에서 자고 12호차 얻어타고 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정회장은 “응, 그랬구만” 하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너 같은 놈 딱 하나만 더 있으면 좋겠다….”

    노회한 총수는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시험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정회장은 어딜 가나 이비서를 곁에 뒀다. 국내 곳곳의 건설현장에서부터 중동 개발현장까지 빠짐없이 데리고 다녔다.

    정회장의 ‘이익치 사랑’은 각별했다. 입사 6개월 만에 대리, 1년 만에 과장을 달아줬다. 파격적으로 빠른 승진에 뒷말이 무성하자 “비서실에서 6개월이면 비서실 밖에선 5년이야. 투덜거리는 놈들은 내 밑에 와서 비서해보라 그래” 하고 일갈해 잠재웠다.

    고속 승진은 계속됐다. 현대건설 부장, 현대엔진 상무, 현대중공업 전무, 현대해상화재 부사장으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특히 1996년에는 현대증권 부사장으로 발령난 지 한 달여 만에 사장으로 승진했고, 곧이어 그룹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7인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3년 후엔 마침내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이익치 전회장은 ‘정주영교(敎)’의 독실한 신도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정주영”이란 답이 튀어나온다. “제로에서 100%를 만드는 명예회장님을 만나게 해준 신께 감사드린다”고 내놓고 말할 정도다.

    그런 이 전회장이 정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통령후보를 향해 날이 퍼렇게 선 칼을 빼들었다. 2000년 9월 현대를 나와 그간 해외에 체류해온 이 전회장은 10월27일 도쿄에서 돌연 기자회견을 자청, “1998년의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서 내가 죄를 뒤집어썼다”며 “이 사건은 당시 현대중공업 오너인 정몽준 후보의 지시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주장, 정후보의 도덕성을 걸고 넘어졌다. 그는 또 “내가 가진 자료 중 정후보 검증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공개하겠다”며 ‘속편’을 예고했다.

    다시 11월5일 오전 나리타공항 커피숍. 냅킨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어렵사리 격한 감정을 추스른 이 전회장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가 그때 죽었는데, 그후에도 아들들(정 명예회장의)이 나를 계속 흔들어대는 거라. 아주 부관참시를 합디다. 어디다 발령을 냈다 말았다 하질 않나, 소송을 걸질 않나, 형제 간에 싸움질을 하지 않나…예전엔 명예회장 앞에서 차려자세로 말도 잘 못하던 사람들이 아버지 몸이 불편하다고 저럴 수가 있나 싶더군요. 몇 달 죽은 듯이 숨죽이고 있다가 회사를 나왔습니다. 30년 동안 훌륭한 분을 모시고 원없이 일했으니, 비록 끝이 좀 안 좋긴 해도 나가게 됐을 때 미련없이 나가자고 정리했죠. 마침 텍사스에 사는 아들놈이 ‘왜 그렇게 마음고생하고 계세요. 바람이나 쐬고 가세요’ 하는 거예요. 쉬면서 책도 좀 읽고, 영어도 배우고, 곧 태어날 손주도 볼 겸 해서 바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벌써 2년이 지났네.

    그 동안 책을 한 200권쯤 읽었어요. 신문, 잡지도 열심히 봤고. 영어가 짧아 ‘월스트리트저널’ 하나 읽는 데도 대여섯 시간씩 걸리긴 하지만요. 그러다 찌뿌드드하면 운동화 꺼내 신고 나가서 조깅도 하고…. 한국과는 연락을 완전히 끊었죠. 그렇게 사니 돈도 많이 안 들고 속 답답할 일도 없어요. 소송이 두 건 걸려 있는 게 좀 꺼림칙했지만, 저야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별 일이야 있겠나, 결국은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고 마음 편히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LA에 갔다가 우연히 한국 TV 뉴스를 위성방송으로 보게 됐어요. 정몽준씨가 대선에 출마했는데 유력한 후보라는 겁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더구나 정후보가 무슨 토론 프로에 나왔는데, 누군가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물으니까 ‘금융감독원이 조작한 게 아니냐’ 운운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내가 누구 대신 감옥에 갔는데…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어떡하나…진실은 영원히 덮이는 거죠. 순간 손주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아이도 훗날 할아버지를 주가조작범으로 알 것 아닙니까. 이대로 있으면 안되겠다, 내 문제는 내가 푸는 수밖에 없다, 나 혼자서라도 마이크 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바로 입을 열고 싶었지만, LA에는 한국 기자가 많이 나와 있지 않아 폭발력이 작을 듯했다. 생각 끝에 자료수집차 일본에 다녀오는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국내 언론사들이 도쿄에 특파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회장이 연루된 두 건의 소송은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한 형사소송과 현대중공업이 현대전자 대납금 반환을 요구하며 제기한 민사소송이다.

    1998년 4월부터 11월까지 현대증권은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으로부터 2200억원을 끌어들여 현대전자 주식을 변칙 거래, 주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 이 사건으로 이익치 전회장은 2심에서 징역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후 상고,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민사소송의 사연은 이렇다. 1997년 현대전자는 외자 유치를 위해 현대증권을 주간사로 선정, 현대투자신탁 주식 1300만주를 주당 13.46달러에 캐나다 왕립상업은행(CIBC)에 팔면서 3년 후 주가가 적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16.96달러에 되산다는 계약을 했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은 이 전회장의 손실보전 각서를 믿고 이 계약에 지급보증을 섰다가 2000년에 2460억원을 물어줬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이 전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지난 1월 재판부는 세 피고가 총 피해액의 70%인 1718억원을 공동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현대중공업은 이에 불복해 다시 소송을 냈다.

    -아직은 대북사업의 성과가 미미한 듯합니다. 현대는 대북사업으로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더 축이 난 실정이고, 덩달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도 도마에 올랐어요.

    “지금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봅니다. 북-일수교가 지연되는 바람에 일본인들의 북한 방문이 이뤄지지 않았고, 청구권 자금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금강산 카지노사업 등도 원래 일정대로 추진되지 않았고…. 시간이 좀 지나면 달라질 겁니다. 당장 개성공단 개발이 합의되지 않았습니까. 이걸 개발하면 몇백개의 기업이 들어갑니다.

    북한도 많이 변했어요. 김정일 위원장은 금강산에 골프장, 카지노, 심지어접대부 나오는 술집까지 다 검토해보라고 했어요. 김일성 별장도 현대상선에 주라고 했다니까. 청구권 자금이 들어오면 그걸 어디에 어떻게 쓸지 구체적으로 조언해달라고도 했습니다. 김위원장은 자기 방에서 만날 CNN을 봐요.

    이렇게 변한 데는 현대가 상당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가 소련과 수교할 때 돈을 얼마나 많이 썼습니까. 하지만 대북사업은 현대가 다 했잖아요. 현대 돈을 쓴 것 아닙니까. 끝까지 한번 지켜보자구요.”

    네 시간이 넘는 인터뷰를 마친 이익치 전회장은 이날 오후 2시55분발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1시가 좀 지나 나리타공항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이 전회장은 미국에 도착한 후 전화번호를 알려왔고, 약 두 시간 여에 걸친 전화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팩트(fact)만 얘기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대개는 이미 고인이 된 정주영 명예회장 주변에서 나온 얘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말을 확인해줄 만한 현대 관계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거나 잠적한 상태다. 구석에 몰린 이 전회장이 대선 정국을 이용, 정몽준 후보에게 역공을 취하려고 근거없이 ‘협박’을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전회장은 취재과정에 다소 실망스런 행동을 했다. 이 전회장은 11월5일 나리타공항 인터뷰에서 ‘신동아’와의 단독인터뷰를 철석같이 약속했다. “나도 언론을 잘 안다”고까지 했다. 11월7일 전화 인터뷰에서도 기자는 이 전회장에게 “신동아가 발간되는 시점까지는 보안을 유지해 달라”고 당부했고, 이 전회장도 그러마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전회장은 바로 그 이튿날인 8일, LA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했다. 하루만에 약속을 뒤집었으니 신의를 의심할 만도 하다.

    더구나 LA에 체류하던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은 최근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이익치는 이영기 전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꼬드겨 투자하게 해놓고 이제 와 딴소리를 한다. 당시 정후보는 중공업 경영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정후보를 저토록 인신공격하는 것은 개인감정 이상의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정후보가 많이 참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측의 반응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신동아’는 이 전회장 발언의 요지를 정후보측에 보내 해명과 반론을 청했다. 정후보측은 내용을 검토한 후 “출생 및 건강과 관련된 내용은 대응할 가치조차 없다. 이는 ‘퍼스낼리티’에 관련된 부분인 데다, 이 전회장의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정후보가 이미 기자회견에서 해명하고 끝낸 부분인만큼 기사화하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다만 현대중공업이나 박진원 변호사의 금감위 위원 자격시비 등 다른 발언에 대해서는 충실한 해명을 하겠다”고 밝혔다.

    “기사화하면 즉각 법적 대응”

    그러나 정후보측은 약속한 시간까지 답변서를 보내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더니 “다른 질문에 대해서도 일일이 답할 경우 불필요한 오해가 증폭될 것 같다”며 “‘신동아’가 어떤 형태로든 이 전회장 발언을 기사화하면 즉각 명예훼손으로 법적 대응을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고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전 회장의 증언에 대해 정후보측의 ‘해명’을 듣고 반론을 게재함으로써 진실에 접근해보려는 노력은 그렇게 해서 무산됐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 전회장은 11월16일 아침 전격 귀국했다. 그의 입에서 또 어떤 ‘폭탄’이 튀어나올지 주목된다.

    -주가조작 사건이 벌어진 시기에 이 전회장은 현대증권 대표이사였을 뿐 아니라 현대그룹의 2인자 격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바이코리아 펀드로 30조원의 수탁고를 올리고 대북사업까지 챙기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신임이 두터워 이 전회장의 말은 곧 명예회장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고 하더군요. 그런 위치에 있던 이 전회장이 계열사 자금이 대규모로 오간 주가조작 사건과 무관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제가 명예회장님 따라 안 가본 데가 없지만, 그런 저도 절대로 참석하지 못하는 회의가 있어요. 돈과 관련된 회의에는 얼씬도 못했어요. 저는 평생 영업만 했습니다. 건설, 엔진, 중공업에선 물론, 1992년 해상화재에 가서도 그랬어요. 현대증권에서도 바이코리아 떠들고 다니면서 영업한 것 아닙니까. 명예회장님은 여러 사람에게 같은 일 시키는 법이 없어요. 쭉 불러다놓고는 ‘넌 요것, 넌 요것’ 하면서 하나하나 정해줘요. 행여 다른 걸 넘볼라치면 ‘니꺼나 잘해’ 하고 면박을 주기 일쑵니다. 제겐 영업만 시켰어요. 천만다행이죠. 제가 경리까지 했으면 감옥 갈 일이 또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돈, 특히 오너의 재산이나 주식과 관련한 일은 100% 종합기획실에서 담당합니다. 주식이나 돈이 대규모로 움직일 경우 종기실이 결정해서 관련 계열사 사장에게 통보합니다. 현대증권은 행동대에 불과해요. 반드시 종기실 지시를 받고 움직입니다.”

    이와 관련, 현대증권 관계자는 “당시 LG반도체와 현대전자 중 누가 반도체 빅딜의 주역이 되느냐를 놓고 논의가 분분했는데, 객관적인 조건은 LG가 유리했다”며 “이때문에 현대전자 주가조작이 기획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①기업실사 결과 ②재무구조 ③주가수준이 주요 선정 기준이었는데, 현대전자가 ①, ②에서 LG반도체에 밀리자 부랴부랴 주가 부양에 나섰다는 것.

    이에 대해 이익치 전회장은 “그 무렵 종기실은 현대전자 관련 대책회의를 여러차례 연 것으로 안다. 빅딜 관계도 종기실의 고려 요소가 됐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종기실에서 그런 일을 전담한다면 정몽준 후보가 주가조작 사건에 관련됐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 아닙니까. 현대중공업 고문인 정후보가 종기실을 제쳐놓고 주식매매를 지시했단 말입니까.

    “종기실에서 그런 계획을 세웠을 수는 있죠. 주식을 움직이는 것, 더구나 오너의 주식 변동은 경영권과 같이 움직이는 거니까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배를 만들기 위해 철판을 산다, 인건비가 나간다 하는 일상적인 자금 이동이 아니라 1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특별한 상황이잖아요. 그런 일을 핸들링할 수 있는 곳은 종기실밖에 없어요. 이건 비단 현대뿐 아니라 삼성 같은 데서도 마찬가질 겁니다.

    당시 종기실에서 실제로 주가조작 계획을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계획하에 돈을 직접 움직인 게 누구냐, 누가 지시해서 주식을 샀느냐를 밝혀내는 겁니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주가조작 사건은 현대중공업 자금담당 중역이던 이영기 서울사무소 부사장이 중공업 돈 1800억원을 보내주고, 현대증권 박철재 자산운용본부장(이사)이 이 돈으로 현대증권 주식을 사고 팔면서 이뤄졌어요. 그렇다면 이영기 부사장한테 돈을 움직이라고 시킨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부사장이 전결로 1800억원을 움직일 수 있겠어요? 그런 지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재라인상 김형벽 중공업 대표이사 사장과 사주인 정몽준 고문 둘밖에 없는데, 엔지니어인 김사장이 그랬을 리는 없어요.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건 정고문의 지시 없이는 안 되는 일이에요.

    이영기 부사장이 이젠 중공업을 떠났으니 지금이라도 사실을 얘기하면 좋으련만, 제가 일본서 기자회견을 가진 직후 잠적했다고 하더군요. 하긴, 그 사람도 답답할 거예요. 중공업이 CIBC에 지급보증을 설 때 실무자였는데, 재판부가 중공업에도 30%의 책임을 물었으니 공연히 정고문에게 밉보였다가 중공업이 그 사람에게 배임으로 구상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이영기 부사장과 박철재 본부장은 이 전회장 지시를 받아서 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는데요. 이 전회장과 만나 주가조작을 논의한 정황도 아주 구체적입니다.

    “‘각본’이 있었겠죠. 명예회장께는 그걸 보고했겠죠. 저는 그 내용도 전혀 모르고 들어갔어요. 명예회장이 대신 들어가라고 하니까. 그러면서 ‘몽준이한테는 별일 없게 하라’니까 두 말 않고 ‘알겠습니다’ 하고 들어간 거예요.

    들어가보니 이영기·박철재 두 사람이 저를 지목했더군요. 제가 조언하고 지시해서 주가조작을 한 걸로 만들어져 있어요. 조서를 읽어보니 내가 ‘매수가를 조금씩 올려가며 현대증권 주식을 사라’고 했대요. 웃음이 픽 나옵디다. 아니, 어느 미친놈이 남의 회사에 주식을 사주면서 비싸게 사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랬죠. ‘조서를 쓰려면 제대로 쓰자. 내가 뭐라고 쓰면 죄가 되겠냐?’고. 그랬더니 ‘주가관리를 잘해주라’고 지시한 걸로 해도 된대요. 그렇게 써줬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박철재 이사는 정몽준 후보와 서울대 동기동창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예요. 현대증권에서 상무까지 하다가 올 3월 현대중공업 재무관리담당 전무로 갔더군요.

    이영기와 박철재 두 사람이 입을 맞추면 제가 딱 걸리게 돼 있어요. 그래도 저야 명예회장님 말씀 듣고 들어왔으니 다 사실이라고 하는 수밖에요. 그래서 제가 주가조작범이 된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현대중공업 부사장이 현대증권 사장의 지시를 받고 1800억원을 빼내 주식거래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 케이스는 오너 외에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아요. 제가 그 내부 사정을 잘 압니다. 주가조작이란 게 뭡니까. 종자돈을 만든 후 주식을 사고 팔아 이익을 챙기는 거잖아요. 그 이익의 주체는 돈을 낸 사람입니다. 현대중공업이 주식거래로 차익을 남기려고 돈을 낸 것 아닙니까. 실제로 중공업이 수백억원의 차익을 남겼잖아요. 그렇다면 그쪽이 처벌대상이지, 제가 왜 ‘주체’가 돼서 처벌을 받습니까.”

    -대통령선거가 두 달도 채 안 남은 시점에 그 얘기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니 이 전회장의 의도를 의심하는 이가 많습니다. 정몽준 후보를 흠집내기 위해 한나라당과 사전 교감이 있다는 게 그 하나인데, 심지어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가 도쿄에서 이 전회장과 접촉, 한나라당이 정권을 잡을 경우 국회 비례대표 20번 이내를 보장했다’는 루머도 나돕니다.

    “허허…. 사실이 아니에요. 한나라당 사람 만난 일 없습니다. 더구나 내가 이회성씨와 불편한 관계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 사람과는 그렇게 불편한 관계로 끝났어요. 사람들이 참 허무맹랑한 얘기를 지어내는군요.”

    이 전회장은 이회성씨의 경기고 1년 선배. 1999년 검찰의 세풍(稅風) 사건 수사과정에 이 전회장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성씨에게 30억원을 건넨 사실이 밝혀졌다. 당초 이회성씨는 이를 완강히 부인했으나 이 전회장의 진술 때문에 구속됐다. 이 전회장은 이회성씨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같은 내용의 진술을 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이 전회장의 폭로를 ‘연출’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회창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차기 정권에서 현대를 살리기 위해 ‘정몽준 주저앉히기’를 시도했다는 얘긴데요.

    “몽헌 회장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랩니다. 그 양반은 제게 연락할 방법이 있는데도 하지 않아요. 저한테 뭔가 섭섭한 게 있거나 아니면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겠죠.

    이건 어디까지나 제 문제예요. 자꾸 정치판과 연결짓지 마세요. 이기자가 제 처지였다면 어떻게 했겠어요? 어른 말씀에 따라 나 혼자 죄를 다 뒤집어썼는데, 그런 내게 몇백억원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걸지를 않나….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기에 내가 입을 연 겁니다. 안 그래도 힘이 막강한 재벌이, 법 위에 있는 재벌이 권력까지 쥐고 흔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저처럼 억울한 국민은 그냥 밟고 지나갈 것 아닙니까.”

    -현대중공업은 이 전회장이 써준 손실보전 각서를 믿고 CIBC에 지급보증을 섰다가 큰 피해를 봤어요. 소송을 걸게도 됐지요.

    “자금난에 빠진 현대전자가 외자를 유치하려고 한 일입니다. 현대중공업은 계열사 중에서 자금사정이 제일 좋았기 때문에 지급보증을 서주기로 했어요. 이건 다 위에서, 그룹 차원에서 결정한 일이에요. 중공업측에서 현대증권 대표이사 명의로 ‘손해 안 가게 해준다’는 편지 한 장 써달라고 해서 써준 것 뿐이에요. 정몽헌 당시 현대전자 회장한테 얘기했더니 ‘그런 게 왜 필요하냐’고 의아해 하면서 ‘손실 안 입게 할테니 써주라’고 합디다. 몽헌 회장이 그때 그룹 부회장이잖아요. 아, 외환위기 전에야 다들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지, 어디다 대고 토를 달아요. 자기들도 그룹이 결정한 일에 토를 달 수 없으니 지급보증을 해준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왕자의 난’을 겪고 난 2000년 6월경부터 중공업이 그 각서를 지급보증서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어요. 말도 안되지. 증권회사 대표이사인 내가 지급보증서를 써주면 배임으로 구속 요건이 돼요. 그런데도 새카만 부사장이 걸핏하면 내 방에 올라와서는 책상을 탕탕 치면서 그걸 해내라는 거야. 내가 써준 각서는 컴포트 레터(Comfort Letter·保障狀)에 불과해요. 지급보증서처럼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게 아니에요. 더욱이 외환위기 전에는 계열사 간에 이런 게 많이 오갔습니다.

    제가 못 쓰겠다고 버텼더니 소송을 걸겠다고 나왔어요. 내가 써준 게 지급보증서였다는 겁니다. 그게 지급보증서라면 왜 부사장을 내게 보내 새로 만들어 달라고 난리를 쳤겠어요.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이 몽헌 회장에게 이를 보고하자 “아버님이 살아계신데 형제 간에 이게 무슨 짓이냐”며 화를 내더군요. 그러면서 “다 내가 시켜서 한 일이니 손해 보지 않게 해줘라. 내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현대전자 주식 835만주를 주고 끝내라”고 했어요. 그때 현대전자 주식이 주당 1만8000원쯤 했으니까 이걸 다 팔면 중공업이 대납한 2460억원과 현대투신 주식 1300만주의 차액을 보전하고도 남았죠. 그런데도 중공업은 부득부득 지급보증서를 요구하더니 결국은 소송을 걸고 말았어요.”

    당시 현대중공업 이사회는 정몽헌 회장의 현대전자 주식을 담보로 손실을 보전해주겠다는 약정에 정회장이 아니라 그룹 구조조정위원회가 배서하겠다고 하자 이 방안을 안건으로 올리지도 않고 소송 제기를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업 사외이사들도 “법인과 법인 간의 문제에 주주가 왜 개입하느냐”며 정회장의 제안을 일축했다.

    이렇게 화해의 여지가 있었는데도 중공업이 기어이 소송을 강행하자 여기엔 ‘이익치를 잘라내겠다’는 정몽준 고문의 의지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정고문은 2000년 5월 정몽헌 회장의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 주주로 부상한 것을 이 전회장의 작품으로 여기고 격분했다는 것. 특히 중공업이 현대전자와 현대증권 두 법인뿐 아니라 이 전회장 개인에 대해서도 소송을 제기하자 그런 시각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아들들은 다 나를 싫어해”

    “제가 현대증권이라는 법인의 대표이사로서 각서를 써준 거지, 개인 이익치가 쓴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저 개인을 걸고 넘어집니까. 제가 무슨 재벌도 아닌데 1700억원을 어떻게 물어내요? 만약 현대중공업이 되산 현대투신 주식 가격이 올랐으면 이익치 개인에게 수익을 나눠줬을까요?

    증권사는 지급보증을 해주는 데가 아닙니다. 계약 어레인지해주고 수수료 받는 곳이에요. 아무리 위에서 결정한 사안이고 증권사 대표이사가 손실보전 각서를 써줬다 해도 지급보증을 해주는 당사자인 현대중공업은 법적 검토나 절차 이행 등을 꼼꼼히 챙겼어야죠. 이런 걸 아주 허술하게 했더라고요. 절차상 정부 승인을 제대로 얻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아요.”

    -어쨌든 1심 재판부는 비록 일부 승소이긴 해도 현대중공업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까. 이 전회장이 써준 각서의 의미를 가볍게 보지 않았다는 얘긴데요.

    “금융감독위원회가 저한테 불리하게 해석했어요. 손실보전 각서는 투자 판단에 중요한 내용이므로 재무제표 등에 기재해야 하는데 그걸 안 했으니 위법이라는 거죠. 제가 손실보전 각서를 써준 것도 증권사 임원으로서 부당한 행위를 한 것이라고 했어요. 이게 재판에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시 금감위 조사가 공정성을 잃었다고 봅니다. 그때 금감위에서 법무부 추천 비상임위원으로 이 사건의 법적인 부분을 조사한 사람이 박진원 변호사였는데, 당시 그는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였습니다. 이해관계가 걸린 회사의 사외이사가 금감위 조사에 참여한 거예요. 이 때문에 말썽이 일자 사외이사를 그만뒀죠(박변호사는 올 3월 다시 현대중공업 사외이사가 됐다). 박변호사는 정몽준 후보의 서울대 선배로, 정후보가 미국 유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사람입니다. 지금은 정후보 캠프의 대선기획단장을 맡고 있어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1월 전원 합의로 제게 잘못이 없다고 결론내렸어요. 제가 쓴 각서는 지급보증서가 아니라 계열사 간에 주고받은 편의적인 문서에 불과하다고 인정한 겁니다.”

    -정몽준 후보와 이 전회장은 오래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는 왜 정몽준 향해 칼 빼들었나”

    이익치 전회장이 지난해 3월24일 정주영 명예회장 빈소에서 영정에 헌화하고 있다.

    “정후보뿐 아니라 다른 아들들도 저를 싫어했어요. 명예회장님이 저를 자주 찾으니까 아들들이 보기엔 제가 명예회장께 이런저런 얘기를 해서 그 분을 움직이는 것 같았나 봐요. 명예회장님이 말년에는, 특히 1992년 대선 때 명예회장 경호실장을 한 이진호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정 명예회장의 4남인 故 몽우씨의 처남)과 저를 자주 불렀어요. 어떤 때는 아들들과 같이 불러서 말씀하시다가 ‘너희들은 나가’ 하면서 우리 둘만 남기기도 했습니다. 아들들이 그걸 얼마나 싫어했는지 몰라요.

    그래놓고 딱히 특별한 말씀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더러 후사(後事)에 관한 것이라든가, 아들들에게 하기 어려운 얘기도 있었지만, 대개는 저희가 그저 말벗이나 되어드리는 정도였죠. 어떤 날은 사극(史劇) 비디오를 두세 시간씩 함께 보고 나올 때도 있었어요. 그러는 동안 아들들은 바깥에서 애간장이 타는 거죠. 궁금함을 참다 못하면 그예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가장 많이 들어온 사람이 정후보였어요. 정몽구 회장은 아버지를 무서워해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명예회장 방에 있다 나오면 반드시 몽구 회장 방에 가서 ‘별 말씀 없었다’고라도 보고해야 했어요.

    언젠가는 정후보가 ‘명예회장님과 몇시간씩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묻기에 우물쭈물했더니 ‘당신, 앞으로 명예회장실 들어갈 때는 박세용 종합기획실장 불러서 같이 들어가’ 하면서 역정을 내더군요. 정후보는 국회가 열릴 때도 오전에는 계동 사옥 11층 현대중공업 고문실-옛 회장실 그대로인데-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명예회장실 드나드는 것 다 체크했어요. 나름대로는 현대중공업을 지키려고 그랬겠죠. 당시 중공업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이었는데, 명예회장이 중공업 지분 19%를 가진 대주주였어요. 이 지분이 어디로 가느냐가 후계구도를 결정하는 거였거든. 그래서 정후보가 그렇게 예민했나 봐요.”

    정주영의 아들 검증

    -정 명예회장에게 자제들 문제와 관련해 조언한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 자리에 영향을 준 적은 없나요.

    “아이구, 거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해요. 명예회장님은 입버릇처럼 ‘네 분수만 알고 살면 돼’ ‘그저 입 다물고 있어’라고 하셨어요. 그 앞에서 엉뚱한 소리 하다가 쫓겨난 임원이 한둘이 아닙니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자 명예회장이 좀 답답하신 듯했어요. 박정희 대통령과는 허물없는 사이였지만 전두환 대통령과는 교분이 없었거든. 그때 눈치 빠른 사장 몇몇이 ‘제가 그쪽으로 줄이 좀 닿습니다’ 하고 나섰어요. 그 사람들, 다음날로 목이 날아갑디다. 명예회장 말씀이 그래요. ‘제 할 일이나 제대로 하지, 시키지도 않은 짓 하다 회사 말아먹을 놈들’이라고.

    제가 비서실에 있을 때 그런 걸 얼마나 많이 봤는데, 감히 명예회장 앞에서 이 아들은 이렇고, 저 아들은 저렇다는 말을 합니까. 아들에 대해서는 험담은커녕 칭찬도 못해요. 조금만 듣기 좋은 소리를 해도 ‘야, 아부하지마. 너 그렇게 할 일이 없어?’ 하면서 불호령이 떨어져요. 아들과 관련한 문제는 100% 명예회장이 결정했습니다. 당신께서 누구보다 아들들을 잘 안다고 생각하셨으니까.

    그렇지만 아들들은 그렇게 보지 않은 듯합니다. 정후보만 해도 그래요. 명예회장님이 1989년에 정후보를 현대중공업 회장에서 고문으로 물러나게 했어요. 그런 인사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명예회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저는 명예회장님과 가까이 있었으니 정후보가 저한테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수도 있죠. 그 무렵을 전후해 저와 정후보 사이가 서먹서먹해진 것 같아요.”

    -정후보는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의정활동에 충실하기 위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게 아닐까요.

    “명예회장님은 1980년 정후보를 현대중공업 상무로 발령했습니다. 1982년에는 사장, 36세 때인 1987년에는 회장에 앉혔습니다. 명예회장은 일단 회사를 맡기면 큰 틀만 잡아주지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경영능력과 자질을 시험했습니다. 다른 아들들도 마찬가지였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기업들마다 노사분규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래서 명예회장님도 아들들의 경영성적을 매기면서 특히 노사분규 대처능력에 가중점을 두신 듯해요.

    그런데 현대중공업이 어땠습니까. 정후보가 회장에 취임한 1987년엔 파업이 두 달 동안 계속되고 시위가 끊이지 않는 등 여간 난리가 아니었어요. 저는 그때 현대중공업 영업본부장으로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명예회장이 찾더니 ‘울산에 기자들이 몇백명씩 모여든다는데 영업이 다 뭐야, 얼른 내려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150일 넘게 울산에서 기자들 상대하며 임시 대변인 노릇 했어요. 명예회장님은 시위현장에 노동자가 몇 명이나 모였는지를 가장 궁금해 했습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오늘은 몇 명이나 모였어?’ 하고 물어볼 정도였죠. 결국 경찰이 투입돼 사태가 마무리됐습니다.

    명예회장님은 그때 정후보를 판단하신 것 같아요. 경영은 맞지 않는 것 아니냐…. 그래서 국회로 빼신 거라고 봅니다. 게다가 1989년에는 벽두부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잖아요.”

    ‘있을 수 없는 일’이란 1989년 초 잇따라 일어난 현대중공업 노조원 테러사건을 말한다. 파업중이던 그해 1월8일, 수련회를 갖던 노조원 10여 명이 복면을 한 50여 명의 괴한에게 집단 구타당한 데 이어 2월21일에는 노조원들이 구사대가 휘두른 흉기에 중상을 입는 이른바 ‘식칼테러사건’이 터졌다.

    수사 과정에서 현대중공업 한유동 전무는 자신이 폭력배와 회사측 노동자들을 동원, 테러를 저질렀다고 자백해 충격을 던졌다. 정몽준 당시 회장은 사건과 무관한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테러에 가담한 일부 노동자들은 “회장단의 재가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테러사건 후 정몽준 ‘의원’은 중공업 회장에서 고문으로 물러앉았다.

    정후보가 이 전회장에게 감정이 상했을 일은 또 있었다. 이 전회장의 회고.

    “1992년 현대중공업이 중장비사업부를 만들었어요. 그 무렵 대우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이 굴삭기 등의 중장비사업으로 짭짤하게 재미를 봤는데 현대는 그게 없었거든. 뒤늦게 제작엔 착수했지만, 판매망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과제였어요. 제가 그때도 중공업 서울 영업본부장이었는데, 명예회장이 ‘이전무, 중장비 판매 아이디어 올려봐. 울산에도 만들어보라고 했으니’ 그러세요. 그게 명예회장님 스타일입니다. 현대그룹의 ‘독재자’지만,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두 개의 안을 올리게 합니다. 결코 한쪽 얘기만 듣질 않아요.

    현대중공업 중장비사업부는 울산의 Y부사장이 생산·영업·판매를 관장하고 있었어요. 정몽준 고문이 스카우트한 분입니다. 그런데 울산에선 ‘이전무가 만든 안을 정고문에게 먼저 보고하라’고 했어요.

    제가 보기에 중장비를 팔려면 전국에 지점을 50개는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러면 1000억원이 들어요. 남들보다 10년 늦게 뛰어들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큰돈이 들어가면 언제 따라갑니까. 꾀를 냈죠. 현대자동차 판매망을 활용하면 되겠더라고요. 인력 좀 붙여주고, 교육 좀 시키고, 판매대행 수수료 쥐어주면 되잖아요. 자동차 쪽에서도 좋대요.

    이런 내용으로 안을 만들어 정고문에 보고했더니 ‘이걸 안이라고 만들었냐’고 해요. Y부사장은 판매망을 새로 만드는 안을 올린 거예요. ‘Y부사장의 안으로 통합하라’는 겁니다. ‘명예회장님이 두 개의 의견을 가져오랬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했더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디다.

    명예회장 방에 가서 Y부사장이 먼저 브리핑을 했는데, 명예회장이 영 듣는 둥 마는 둥이에요. 그러더니 제 생각을 묻더군요. 원안대로 설명드렸죠. 다 듣고 난 명예회장이 두말 않고 ‘이전무 것으로 해’ 하셨어요. 그때 정고문이 저를 어떻게 봤겠어요.”

    이 전회장에 따르면 정주영 명예회장은 1992년 대선에 이어 1997년 대선에도 출마하려 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둔 어느날 명예회장님이 불러서 올라갔더니만 ‘아니, 이내흔이 이럴 수가 있어? 지가 도망을 가?’ 하면서 펄펄 뛰는 거예요. 아, 글쎄 이 양반이 이내흔 전 현대건설 사장더러 대선에 나갈 테니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대요. 당이 없으니까 몇천명의 도장을 받아 가야 후보등록이 되는데, 이 전사장이 그러마고 해놓고는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등록을 못했다는 겁니다.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참 보기 좋았습니다. 됐다, 노인네한테 저런 의욕이 있으니 현대는 앞으로도 끄떡없겠다 싶었어요.”

    “욕심이 많아서 안돼”

    이 전회장은 “항간에는 명예회장께서 자신이 펴지 못한 뜻을 정몽준 후보가 이어받아 대선에 출마하라고 권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정후보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테니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 명예회장은 정후보가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지역구 유권자인 현대중공업 임직원들에게 특별상여금을 지급하는 등 돈을 너무 많이 쓴다며 “지역구를 울산에서 서울 종로로 옮겨 출마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명예회장의 출마 소동이 있고 얼마 후였어요. 이진호 회장과 명예회장 방에 있는데, 이런저런 말이 오가다 정몽준 고문의 대선 출마 얘기가 나왔습니다. 정고문은 1996년 월드컵대회 유치에 성공한 이래 차세대 주자로 종종 거론됐거든.

    그런데 그 얘기가 나오자마자 명예회장님이 ‘몽준이는 욕심이 많아서 안돼’라는 거예요. 그래서 ‘명예회장께서 뜻을 못 이루셨는데, 자제분이 그걸 대신 이뤄주면 좋지 않습니까’ 했더니 ‘안돼. 자네도 알잖아, 왜 안 되는지. 절대 안돼. 큰일나’ 하시더군요. 그때서야 생각이 났어요. 아, 이게 그 얘기구나. 그래서 안된다고 하시는구나….”

    -‘그 얘기’란 게 뭡니까.

    “명예회장에게는 ‘욕심이 많다’는 말이 매우 부정적인 의미예요. 그런데 그 말을 정후보에게 쓴 겁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고, 정말 중요한 얘기가 있습니다. 명예회장께서 오래 전에 제게 따로 당부한 말씀이 있어요. 밝히지 않는 게 좋겠지만, 앞으로 상황을 봐가면서 공개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정후보의 ‘아킬레스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요.

    “그게 알려지면 정후보에게 확실한 아킬레스건이 될 겁니다. 정후보 본인은 잘 알고 있어요. 그건 집안 문제와 맞물려 있어요.”

    -집안 문제면 그 집안에서 끝나는 거지, 왜 대통령선거에까지 끌고 나옵니까.

    “우리가 지금 선진국들을 쫓아가고 있잖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에 가려면 선진 사회에서처럼 모든 것을 엄격하게 검증해야 합니다. 가령 국회의원이 되는 데는 결격사유가 못 될 수 있어도 대통령을 하겠다면 얘기가 달라지는 게 있어요. 미국에서 댄 퀘일 전 부통령이 징병기피와 대학성적표 공개 문제로 혼쭐이 나지 않았습니까. 국회의원이라면 문제될 게 없지만, 부통령은 다르다는 거죠. 부통령은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니까요. 성격적인 부분이나 건강과 관련된 사항들, 이런 게 더 중요할 수 있어요.”

    -정후보의 성격과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그런 게 지도자의 자질로는 굉장히 중요하죠.”

    -성격과 건강은 개인의 문제로 봐야지, 그게 왜 집안 문제라는 겁니까.

    “딱 한 사람만 있으면 괜찮지….”

    -정후보의 넷째 형인 몽우씨가 정신질환을 앓다가 자살했습니다. 그것과 관련있는 얘긴가요?

    “하여간 그건 나중에 얘기합시다.”

    -정후보가 청소년기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확인된 적은 없습니다. 본인도 9월17일 기자회견에서 그 부분에 대해 언급했어요. “난시 때문에 두통이 심해서 치료를 받았지만 정신병은 아니다”고. 정씨 일가의 정신질환을 치료했던 의사도 정후보를 치료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정후보가 그간 기업, 의회, 체육계 등에서 활동하면서 그런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지 않습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좀 두고봤다가 얘기합시다. 정후보에 대해서는 알려야 할 부분이 많아요. 어차피 얘기가 나왔으니 좀더 자세하게 알려야 할 것 같네요.”

    -이 전회장 외에 그 얘기를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정후보 본인, 명예회장님 부부, 저, 그리고 정후보 학창시절 친구 한두 사람 정도만 아는 사실이에요. 또 명예회장께서 제게 그 말씀을 전하며 당부하실 때 같이 있던 사람이 한 명 있어요. 그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겠네요.”

    -명예회장이 왜 그런 얘기를 가족도 아닌 이 전회장에게 했을까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하면 명예회장께서 왜 제게 그걸 부탁하셨는지 설명이 돼요. 때가 됐다고 판단되면 글이 아니라 육성으로(방송매체를 의미하는 듯) 직접 국민에게 알리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일국의 지도자가 되면 국민이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보복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어디 있어요. 도대체 그 양반이 저와 무슨 철천지 원수가 졌다고 이렇게까지 나오는 겁니까. 저야 명예회장님 모신 죄, 위에서 시키는대로 한 죄밖에 더 있습니까. 얼마나 보복적이에요. 이걸 단지 저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있을까요?”

    -그처럼 집요하리만큼 보복적인 성격이 명예회장이 당부한 얘기와 관련있습니까.

    “그렇게 볼 수 있죠. 결코 정상적이라곤 보지 않아요.”

    -그런 성격 때문에 피해를 봤다는 사람은, 지금까지는 이 전회장뿐인데요.

    “천만에요. 그 부분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과거에 현대중공업 임원으로 있다 나간 사람을 몇분 만나보세요. 벼라별 얘기가 다 나올 겁니다. 그분들이야 연세도 있고 하니 입 다물고 계신 거겠죠. 저야 당장 죽게 생겼으니, 가뜩이나 한번 죽었는데 또 죽게 생겼으니 이렇게 떠들지만요.”

    “MJ 생모는 A씨”

    이 전회장은 “모든 것을 솔직하게 검증받을 각오가 돼 있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조차 정직하게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국민에겐 비극”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몽준 후보의 출생과 관련해 새로운 증언을 했다.

    “제가 중동에서 귀국한 게 1978년 말이고, 정후보가 현대중공업 상무로 발령난 게 1980년이니 그 사이의 일일 겁니다. 현대엔진공업으로 발령이 나서 서울과 울산을 오갈 때인데, 하루는 청운동 사모님(정주영 명예회장의 부인 변중석 여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하셨어요. ‘몽준이가 자꾸 생모를 만나고 다닌다. 아버지가 아시면 큰일 날 텐데….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벌써 생모를 여러 차례 만난 모양이더라고요. 제가 ‘생모가 누군데요?’ 하고 여쭤봤죠. 그랬더니 국악인 A씨라고 했어요. 그래서 결국 미국엘 보냈는데, 거기 지사장을 붙잡고 생모 얘기를 하면서 통곡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얘기는 정후보의 친구인 현대 계열사 사장 몇 사람도 잘 알 거예요.”

    이 전회장은 비서 시절부터 정 명예회장 부부로부터 가족과 관련된 얘기 등 내밀한 사연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답답한 사연이 있으면 이 전회장이 지방에 내려가 있을 때도 서울로 불러올려 얘기를 들려주곤 했다는 것. 특히 말년에는 이 전회장을 더 가깝게 여겨 자주 곁에 두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전회장의 증언은 정후보가 해명한 내용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국악인 A씨가 정후보의 생모라느니, 또다른 A씨가 생모라느니 하는 설은 있다. 그러나 정후보는 지난 9월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선친께서 A씨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와는 관계가 없다”며 A씨 생모설을 일축했다. 생모를 만난 정황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하며 울먹였다.

    “군복무를 마친 뒤 미국 콜럼비아대로 유학갔는데, 1978년 봄 학기를 마칠 무렵 서울에서 편지 한 통이 왔어요. 어떤 분이 제 어머니라는 주장이 담긴 편지였습니다. 그해 여름에 서울에 갈 일이 있었는데, 강남의 어느 아파트에서 제 어머니라고 하시는 아주머님을 만나 20분 정도 말씀을 듣고 나왔습니다. 다음날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다소 당황해 하시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일은 너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하셨어요….”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줄 사람은 정 명예회장 부부밖에 없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은 이미 세상을 떴고, 병상의 변여사는 2000년 이후 의식이 없는 상태다.

    -정 명예회장 말년에 가까이 계셨다는데, 현대의 후계구도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습니까.

    “명예회장님은 ‘현대의 후계구도는 삼성의 후계구도와 다르다’고 하셨어요.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3남 이건희 회장에게 몽땅 넘겨주다보니 아들 간에 마찰이 빚어졌잖아요. 그래서 ‘왜 그렇게 하나. 능력에 맞게, 하나를 할 수 있는 놈에겐 하나를 주고, 두 개를 꾸릴 수 있으면 두 개를 주고 관리하게 하면 되는 거지. 한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시절은 내게서 끝이야’라고 했죠.

    아들들에겐 자질에 맞는 회사를 떼주되, 지분은 10%씩만 주면 된다고 했어요. 몽구 회장에겐 산업개발·정공·자동차서비스·우주항공 등을, 몽헌 회장에겐 상선·전자·건설 등을, 몽준 고문에겐 중공업 지분을 10%씩 주기로 했습니다. 그 10%를 가지고 자기들이 능력이 닿으면 직접 경영하고, 능력이 안되면 대주주로서 배당이나 받게 한다는 거죠. 당신이 가진 지분으로는 경영할 수 있는 데까지 하다가-150세까지 살 거라고 자신하셨으니까-남북한 어린이들의 결핵을 치료해주는 재단을 만들 계획이셨어요. 자식들에겐 당신 지분을 아예 넘보지도 말라고 엄포를 놨어요.”

    정주영, 현대차 안 놓으려 했다

    -‘왕자의 난’이 불거지면서 명예회장 뜻대로 일이 풀리질 않았군요.

    “명예회장님은 자식들한테 회사를 다 떼줬으니 현대자동차는 당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나중에 자동차를 재단으로 가져가려 한 것 같아요. 한때 정세영 회장과 몽구 회장에게 자동차를 경영하게 했지만, 어디까지나 맡긴 거지 준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더욱이 명예회장은 북한에 개성공단을 개발하면 자동차를 갖고 들어가려 했습니다. 소형 자동차 조립공장을 지으려고 했어요. 반도체 공장 얘기도 나왔지만 시큰둥했어요. 개성공단 땅덩어리가 워낙 크니 자동차 공장이 적합하다고 보신 거죠. 우리도 포니 만들기 전에 조립공장부터 시작했잖습니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대찬성이었죠. 더구나 그 무렵 도요타 애프터서비스 공장이 북한에 들어올 준비를 마쳤어요.

    명예회장은 정세영 회장에게 그런 뜻을 내비쳤지만 정회장이 소극적이었나 봐요. 그래서 일을 벌이려면 당신이 현대차 대주주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게 ‘세영이가 뜻이 없으니 내가 나서야겠다. 당신은 몽구더러 도우라고 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중공업 지분을 현대차 지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는데, 이 때문에 ‘왕자의 난’이 급물살을 타면서 명예회장의 뜻이 꺾여버린 겁니다.”

    “나는 왜 정몽준 향해 칼 빼들었나”

    2000년 8월 북한을 방문한 후 귀환하는 정몽헌 회장(왼쪽에서 두번째)과 이익치 전회장(맨오른쪽).

    -이 전회장은 정몽헌 회장과 함께 현대의 대북사업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현대의 4억달러 대북 지원설이 터지는 등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전후로 한 대북 뒷돈 거래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 전회장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는 이가 많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1999년 감옥에 갔다 온 뒤로는 ‘산송장’이었어요. 대북사업 연결망도 다 끊겼습니다. 2000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저야 알 턱이 없죠. 제가 대북사업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은 1997년 대선 직후 몽헌 회장과 함께 명예회장의 지시를 받고 북한의 김용순 비서와 접촉한 시점부터 1998년 6월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했을 때까지입니다. 기반을 다지고 문을 여는 일까지만 한 거죠.

    그때나 그후나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심부름만 했을 뿐입니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도 마찬가지고. 대북사업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주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전적으로 명예회장의 몫이었고, 실무는 몽헌 회장이 직접 챙겼어요. 대북사업은 몽헌 회장도 혼자서 쥐락펴락하지 못했습니다. 늘 부친의 지시를 따랐죠.”

    -한나라당 이성헌 의원은 “2000년 4월10일 남북정상회담 발표 직후 이 전회장이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을 불러 북한에 줄 돈을 모으라고 지시했고, 이에 김본부장이 현대건설을 통해 1억5000만달러의 회사 자금을 홍콩과 싱가포르를 거쳐 북한에 송금했다”고 주장했는데요.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그룹 회장, 즉 몽구 회장과 몽헌 회장밖에 없어요. 김본부장이 현대건설 부사장을 겸하고 있었으니 현대건설 사장의 지시를 받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세 사람뿐이에요. 김본부장은 제 지시를 받는 위치에 있지 않아요. 그런 제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돈을 모으라고 합니까. 현대에선 이런 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졌어요. 더구나 그 무렵은 제가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을 때 아닙니까.

    나쁜 상황이 많았어요. 현대전자 주가조작도 제가 한 걸로 돼 있고, 현대투신 문제도 있고…. 뿐만 아니라 제가 평생을 영업한다고 떠들고 다녔고, 현대증권에서 바이코리아 붐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람들이 현대그룹 돈은 죄다 이익치가 들고 움직인다고 생각하나 봐요. 제가 또 기자를 많이 알잖아요. 그러니 이것저것 갖다붙이기엔 내가 제일이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돈 문제는 종합기획실에서 처리합니다. 저는 돈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했어요.”

    -이 전회장이 2000년 4월 남북정상회담 발표 직전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도 의혹을 키웠습니다.

    “글쎄, 그것 때문에 말들이 나온 모양인데, 그건 현대증권 상하이지점을 내러 간 거예요. 그때 내가 비록 끈은 떨어졌어도 명색 현대증권 대표이사 회장 아닙니까. 마침 국내 모 증권사의 상하이지점이 철수하게 됐는데, 그쪽의 인력도 탄탄하고 사무실도 증권거래소 안에 있어서 조건이 좋았어요. 이들을 함께 인수하러 간 겁니다. 우리야 돈 들어갈 것도 없으니 무조건 잡으라고 해서 간 겁니다.”

    뒷돈 줬어도 셈해보고 줬을 것

    -초기부터 대북사업에 관여한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북한과의 거래는 뒷돈 없이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 전회장의 대북사업 경험으로 추론할 때 현대에서도 북한으로 뒷돈이 흘러들어갔을 개연성이 있다고 봅니까.

    “명예회장은 대북사업도 철저하게 기업가적 판단에 따라 했어요. 셈을 해보고 실익이 없겠다 싶으면 어떤 결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계산과 무관하게 북한에 준 것은 소뿐이에요. 명예회장은 말년에 현대의 빚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 돌파구를 북한에서 찾은 거죠. 결국 북한 개발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현대 살리기’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예회장은 북-일수교, 북-미수교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현대가 북한을 개발하면 한국 기업은 물론, 일본 기업과 미국 기업도 들어오고, 북한의 대일 청구권 자금도 들어와 현대의 숨통을 틔우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명예회장이 그러셨어요. ‘북한을 다 가져오면 땅값만도 얼마냐. 김정일이 최고 부자야. 그 넓은 땅 주인이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걸 개발하려면 돈을 줘야지’라고. 그러니 뒷돈을 줬다 해도 충분히 셈을 해보고 줬을 겁니다. 이익을 낼 것 같으면 그보다 더 큰 도박도 했을 거예요. 뭐든 거저 줄 사람이 아닙니다. 줄 때는 반드시 뭔가를 요구해요.

    신의주 공단 개발 얘기가 나왔을 때 ‘거긴 재미없어. 개성 달라고 해’ 하셨잖아요. 개성 코 앞이 비무장지대인데, 남이든 북이든 누가 그런 발상을 할 수 있겠어요. 북측도 처음엔 기가 막혀서 ‘현대 선생들, 이건 좀 이상한 거 아닙네까?’ 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기어이 밀어붙여서 그걸 얻어내더라고….”

    -김정일 위원장이 이 전회장과 얘기하기를 즐겼다면서요? 김위원장이 지난해 1월 상하이 푸동(浦東) 지역 등을 둘러보며 중국 경제체제를 견학한 것도 이 전회장 아이디어라고 들었습니다.

    “상하이에 언제 가봤냐고 물었더니 17년 됐대요. 그래서 ‘오늘날의 상하이를 둘러보는 게 뉴욕에 가보는 것보다 얻는 게 많을 것’이라고 권했죠. 김위원장은 우리에게서 뭔가를 배우려는 의욕이 대단했어요. 눈빛이 반짝반짝해요. ‘1960년대에 북한보다 못 살던 남한이 북한을 추월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기에 ‘박정희, 정주영, 이병철 같은 기업인 덕분’이라고 했죠. ‘핵보다 무서운 게 배고픈 거다. 당신들이 배고픈 건 국제사회에 안 들어왔기 때문이다’ ‘브라질 땅 4분의 1, 호주 땅 10분의 1이 일본인 소유다. 국토가 좁아도 달러만 많으면 된다. 빨리 문 열고 달러 끌어들여라’ ‘미국과 빨리 손잡아라. 평양에 미국 대사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해도 김위원장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 없이 경청했어요. 배석자들은 열심히 받아적고. 김위원장은 그런 자리에 꼭 장군들을 배석시켰어요. 군부의 시각을 바꿔놓으려고 그랬나 봐요. 언젠가는 김위원장이 저더러 ‘이회장 선생 설명은 참 알아듣기 쉬워요. 우리가 이회장 선생을 좀더 빨리 만났어야 하는데’라고 해요. 명예회장 30년 모시면서 저도 모르게 솔직담백한 ‘정주영 화법’을 배운 모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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