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대통령)당선 직후 CBS TV사업권 허가 약속 “휴지처럼 버렸다”
- 1997년 대선 10여일 전 현 정부 고위층 인사 평양에 있었다
- 1980년대 말 DJ 정치비자금 ‘태극당’에서 문익환 목사 등 재야인사들에게도 전달
- 1989년 3월 노태우 중간평가 유보 조건으로 받은 자금, 중앙당과 의원들에게 300만원씩 떡값으로 분배
- 검찰, ‘DJ 비자금 수사’ 때 “진로에서 받은 5억원 DJ가 아닌 당에 주었다고 하면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뉴욕 자택에서의 임춘원 전 의원
역으로 정치권에 통용되는 ‘진리’가 하나 있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것. 때가 되면 ‘비망록’ ‘회고록’ ‘비화’ ‘비사’ 등의 이름으로 그동안 감춰지고 숨겨졌던 비밀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면 ‘폭로’나 ‘폭탄선언’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둔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물론 때가 돼서 나오는 ‘과거의 비밀’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 속엔 그만한 이유와 까닭이 숨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92년 ‘DJ와 결별’을 선언하기 전까지 DJ의 ‘자금 관리책’으로 통했던 임춘원 전 의원(林春元·64·3선의원). 현 정권 들어서자마자 사기혐의로 지명수배돼 미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던 그가 때를 맞춰 ‘신동아’를 통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매도하고 탄압했다고 여기는 DJ와 현 정권을 향해…. 과연 그의 ‘노림수’는 뭘까.
“다시는 김대중 같은 부도덕한 인간이 정권을 잡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진실을 알아야 할 때 모든 것을 밝히겠다.”
지난 8월20일 미국 LA. 현지 한인방송인 ‘라디오코리아’에서는 한동안 모습을 감췄던 임춘원 전 의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과 분노가 복잡하게 뒤엉켜있는 듯했다.
이날 임 전 의원의 인터뷰 내용은 DJ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대우는 김대중씨를 가장 많이 도와준 기업이다. 그런데 (김대중은)조금 도와주는 척하다가 파멸시켰다. 결국 보복을 당할 것이다.”
임 전 의원은 그러나 새로운 구체적인 사실관계나 물증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조만간 때가 되면 말하겠다”며 추가폭로를 시사하는 선에서 그쳤다.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이 뒤섞였을 뿐만 아니라 추측을 근거로 한 의혹제기에 불과했던만큼 그의 인터뷰는 국내 언론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50여일이 지난 10월12일 임 전 의원은 또다시 뉴욕에서 LA로 건너와 한인방송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다음은 글의 일부다.
“이제는 모든 짐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두 아들을 감옥에 버려두고 국정에 전념할 수 없는 현실은 우리 국민들에게 누가 될 것입니다. 국무총리에게 국정을 맡기고 국민 앞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행동으로 보일 때입니다.”
임춘원 한나라당 막후거래 의혹
이는 사실상 김 대통령의 하야(下野)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와 함께 모든 의혹들에 대한 특별검사와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금은 황당하고 무모한 요구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알려진 임 전 의원의 행보를 보면 그가 이런 돌출발언과 행동을 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DJ의 공천을 받아 민주당(평민당 후신) 지역구(서대문을)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3선 의원이 된 직후 임 전 의원은 탈당을 선언했다. 사실상 DJ와 결별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해 대선 때 그는 YS의 당선을 위해 뛰었다.
다시 1997년 대선 때는 ‘반DJ’ 진영에 서서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비쳤다. 임 전 의원은 대선을 2개월 남짓 앞둔 10월7일, 반DJ인사들 모임인 ‘한길연구회’에 자금을 대고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특히 대선 직후 최대 이슈였던 ‘북풍(北風)공작’에 그가 등장했다. 선거 1주일 전인 12월13일. 재미동포 김영훈 목사 일행이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북한 조선사회민주당 김병식 위원장이 DJ에게 보내는 편지’를 공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 합석했던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던 것이다. 그 후 ‘북풍공작’ 사건에 임 전 의원이 개입했다는 것은 지금까지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당시 ‘김병식 편지사건’은 1998년 3월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감찰팀의 자체조사에 이은 검찰 수사에서 안기부에 의한 공작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임 전 의원이 대선을 앞둔 지금 또다시 DJ를 공격하고 나선 것은 그동안 그의 행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후보를 위한 ‘의도적인 정치공세’라는 오해를 살 여지도 크다. ‘DJ에 대한 공격’은 곧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나라당 측에서 임 전 의원을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모 의원은 얼마 전 기자에게 “우리측에서 임 전 의원에게 메신저를 보낸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 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접촉사실을 시인했다.
과연 임 전 의원은 어떤 ‘비밀 보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한나라당과는 어떤 거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임 전 의원을 접촉키로 했다.
여러 차례 국제전화를 한 끝에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임 전 의원과 통화가 되었다. 1차적으로 서면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신동아’는 임 전 의원에게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의혹수준이 아닌 구체적이고 솔직한 답을 요구했다. 며칠 후 서면질의에 대한 그의 답변이 왔다. 내용은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고 그동안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의혹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서면답변서를 보고난 뒤 관련 사실을 보완 취재했다. 그러고나서 임 전 의원과 두차례 통화를 해 의문나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어보았다.
우선 임 전 의원이 DJ와 결별하게 된 배경, 1992년과 1997년 두 번의 대선에서 ‘반DJ’ 진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게 된 몇 가지 사실에 대한 그의 답변부터 들어본다.
-임 전 의원은 1985년 민추협(민주화추진협의회)을 통해 DJ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엔 김대중 민주당 총재 경제담당특보를 지냈고 1992년에는 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총선 직후 DJ와 오랜 인연을 끊고 무소속으로 남아 있다가, 대선 직전 민자당으로 당적을 변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8년 동안 김대중씨와 같은 당이었습니다. 그런데 1992년에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함께 대통령에 출마했습니다. 그때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우리나라 경제가 무너진다고 믿었고 무엇보다도 ‘친북성향(親北性向)’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김대중씨는 나를 이용만 하고 당직과 국회직 등 정치일선에서 언제나 제외시켰습니다. 평소 경제인들과 친하고 정부측과도 가까운 사람이라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김대중씨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DJ는 나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던 차에 김대중씨는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를 공천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으며, 자기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제거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나를 떨어뜨리려고 호남향우회를 움직였고, 난 그와 싸워서 제 14대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당선된 직후에 김대중씨와 만났습니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 도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을 탈당했습니다. 그러자 김대중씨는 나를 변절한 정치인으로 매도하고 안기부가 공작했다고 모략했습니다.
김대중씨는 자기에게 불리하면 무엇이든지 안기부의 공작이고 배신이며 변절로 몰았습니다. 마치 조폭세계에서 이탈하면 보복하는 것 이상으로 매장하는 수법을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수모를 감당하고 그 소굴에서 빠져나와 무소속으로 정치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국회에 무소속으로 있으니까 김영삼씨가 접근해왔습니다.
김영삼씨는 ‘나도 기독교 장로요 당신도 기독교 장로니까 이번에 기독교 신자가 대통령이 돼서 청와대에서 나는 불교의 목탁소리를 기도와 찬송소리로 바꾸자’고 제의해왔습니다. 내가 나가던 감리교회의 감독회장 표용은 감독, 이재은 CBS 사장과 협의하게 됐습니다. 결단을 내린 후 강남에 있는 르네상스 호텔에서 김영삼 대통령후보와 표용은 감독, 이재은 사장 그리고 내가 만났습니다.
기독교가 나서서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면 CBS에 TV를 허가해주겠다고 김영삼씨는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난 김영삼씨 당(민자당)에 입당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김영삼씨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부터 기독교 인사들은 저버리고 불교측 인사들과 모든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결국에는 기독교의 CBS TV는 제외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을 탈당했고 CBS 이재은 사장은 임기 중에 사퇴하고 말았습니다.”
1991∼92년 당시 CBS의 최대 숙원사업은 TV 공중파사업권을 따내는 것이었다. 회사와 직원들이 전사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했고 범 기독교인 서명운동을 벌였다. 1991년엔 기자들까지 나서서 국회의원들과 3당 대표들을 상대로 서명작업을 시도했다.
CBS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작업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김대중 총재와 야당 의원 전원 그리고 민자당내 기독교계 의원 대부분이 서명에 참여했다. 다만 김영삼 대표만 서명하지 않았다. 기독교계 인사들에게는 민자당의 대통령후보가 서명하지 않는 것이 못내 걸렸다. 대선이 임박해오자 양측의 이해관계는 자연스레 맞물려갔다.
민경중 노조위원장은 임 전 의원과 CBS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임 전 의원은 국회 재무위 간사였다. 그는 기독교계의 대 정치 로비스트나 다름없었다. CBS 등 기독교계 재단법인 감세문제 등 기독교계의 재정적 이해관계와 관련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당연히 이재은 CBS 사장과 표용은 감리교회 감독 등과도 무척 친했다. 반대로 임 전 의원은 기독교계의 막강한 힘을 역이용했다. 그가 국회의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CBS와 임 전 의원은 CBS 미 워싱턴 특파원이 임 전 의원 집에서 근무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민 위원장은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임 전 의원의 주장은 충분히 가능했던 이야기”라고 덧붙였다.
이재은 전 사장(현 성서공회 이사장)도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1992년 대선 직전 김영삼 후보가 대선 전에 CBS TV사업권 허가를 약속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사장에서 물러나게 되는 배경이 됐다”고 밝혔다.
이 전 사장은 또 당선 직후 청와대 면담에서 “YS로부터 ‘기독교방송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은 적이 없다’고 면박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 이야기는 (YS가) 직접 하지 않고 자리를 함께했던 측근 한 사람이 했는데 YS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했던것 같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97년 대선. 임 전 의원은 또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적진에 합류했던 1992년 대선 때와는 달리 이번엔 외곽에서 DJ를 공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반DJ 인사들 모임에 자금을 대고, 소위 ‘북풍공작’을 일으킨 주범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과연 임 전 의원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답은 뜻밖이었다. 그동안 알려진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1997년 대선 직전 임 전 의원은 그 해 10월, 반DJ 인사들 모임인 ‘한길연구회’를 결성한 것입니다. 임 전 의원은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모임을 결성한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모임이 결성됐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난 서울대병원에서 간암선고를 받고 침통해 있을 때였습니다. 그 해 10월17일, 서울을 떠났습니다. ‘한길연구회’ 등 함윤식씨가 하는 단체나 어떠한 기관과도 연관된 적이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잡지를 만들던 손충무씨가 광고를 얻으려고 나에게 접근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손씨 부인이 경영하던 양품점에서 양복을 두 벌 샀는데 그때 수표로 대금을 지불했습니다. 아마도 그 수표가 내가 손씨를 통해 ‘한길연구회’에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오인되는 배경이 됐던 것 같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임 전 의원은 1997년 대선기간에 북한을 방문한 직후 12월13일 김영훈 목사와 함께 일본 도쿄에서 ‘김병식 편지공개 기자회견’을 열고 ‘북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또 대선 직후 국내 모 인사와 전화통화에서 “안기부에서 다 시켜서 한 일”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풍사건에 연루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그때 나는 워싱턴에 있는 감리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교회 김영훈 목사의 소개로 교회 권사인 최정열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분의 남편은 일제 때 일본 동경대학 법학과 출신으로 해방 후 북으로 가서 김일성과 함께 북한정권을 수립하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분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분 조카가 지금 김정일 위원장 주치의인데 간암에 아주 좋은 약을 구해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최 할머니와 함께 북한에 가기로 했습니다.
통일원에는 북한의 ‘마그네시아크링카’라는 광물질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간다고 신고해 허가를 받았습니다. 북측 회사로부터 초청장도 이미 받은 상태였습니다. 북한에 들어갈 때는 중국 베이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베이징에 가보니 김영훈 목사가 서울에 들렀다가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김 목사도 우리 일행에 합류했습니다. 약 일주일 동안 평양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후보가 이끌던 당(국민회의) 소속 사람들이 그곳에 있어서 놀랐습니다.
아마 내가 그런 사실을 폭로할까봐 저를 북풍사건의 핵심으로 몰았던 것 같습니다. 베이징에 돌아와 보니 벌써 우리 이야기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도쿄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김영훈 목사와 최정열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하지만 난 기자회견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워싱턴으로 돌아갔으며 그곳에서도 김 목사와 최 할머니만 기자회견을 했고 난 그곳에 없었습니다.
만일 북풍과 관련이 있다면 내가 직접 나서서 기자회견을 했을 것입니다. 북풍보다도 더 선거에 치명적인 사실(평양에서 만난 국민회의 관계자들)을 알고 있는 내가 정말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저지하려 했다면 왜 폭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안기부의 역(逆)공작이었습니다. 나는 안기부, 그 누구도 만난 적이 없으며 그 누구로부터 부탁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또 내가 국내 모 인사와 통화에서 ‘안기부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했다는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누가 나를 대신해 그런 통화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흑금성이 무엇이고 북풍공작이 무슨 이야기인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의 관심은 오로지 내 간암을 치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안기부에서 왜 그런 공작을 했는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평양에서 본 사람은 당 관계자
-1997년 대선 직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국민회의 당 관계자를 직접 본 것은 확실합니까. 당시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
“내가 평양에 도착한 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난 뒤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평양에 간 것은 ‘마그네시아크링카’라는 광물질을 미국에 가져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북한 관계자와 그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관공서에 갔을 때입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 나를 보고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2명이었는데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당(국민회의) 사람이었습니다.
나 혼자 본 것이 아닙니다. 그때 일행도 함께 봤습니다. 다만 일행은 그들이 누군지 잘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한번은 평양시 단독주택에 있는 안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북한으로 월북했다는 오익제씨도 그 안가에 있었습니다. 그때도 그 사람들을 봤습니다. 내가 묵었던 고려호텔에도 그들의 일행이 몇 명 더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들 중에는 현 정부의 고위층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조만간 때가 되면 밝힐 겁니다.”
북풍사건에 대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던 셈이다. 누군가에 의해, 참여하지도 않았던 모임의 발기인에 올랐고, 하지도 않은 기자회견에 참석한 꼴이 된 것이다. 과연 임 전 의원의 주장은 얼마만큼 사실에 가까운 것일까.
도쿄 기자회견 미스터리
1997년 12월 당시 일본 도쿄에서 벌어진 ‘김병식 편지 기자회견’ 관련 기사를 검색해봤다. 김영훈 목사와 최정열씨 등이 제국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한 날은 대선 1주일 전인 12월13일. 다음날 ‘조선일보’와 ‘연합뉴스’(당시 연합통신)가 기자회견 소식을 가장 자세히 다뤘다. 나머지 신문은 짤막한 단신기사로 처리하거나 아예 싣지 않았다.
두 매체의 보도내용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연합’은 임춘원 전 의원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반면 ‘조선’은 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날 김영훈 목사와 최정열씨의 회견에는 함께 평양을 다녀온 임춘원 전 평민당 의원도 자리를 같이했다’.
이 기사를 작성한 이는 당시 도쿄특파원으로 근무했던 이준, 박정훈 기자. 두 기자에게 당시 회견장에서 임 전 의원을 보았냐고 물었다. 두 기자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 확답을 피했다.
이 기자는 “회견장소에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가 “확실하진 않지만 일본에서 (임 전 의원을) 만난 기억은 있는데 그 자리에 적극 나서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답을 흐렸다. 현장에 있었다는 박 기자도 “임춘원 의원이 배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가 “잘 모르겠다. 당시 여러 매체에서 나온 특파원들이 있었는데 그 기자들에게 물어 보라”고 공을 다른 기자에게 넘겼다.
하지만 당시 회견장에 참석했던 다른 매체 도쿄특파원 중 어느 누구도 확실한 답변을 못했다. “그 문제는 좀 곤란하고 민감한 문제다. 아마 누구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 기자가 귀띔해주었다.
가장 먼저 기사를 작성했던 연합뉴스 김용수 특파원에게 마지막으로 진위를 확인했다. 김 특파원도 “그 날 회견장에 어떤 사람들이 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질문을 바꿨다. “만일 전직 정치인이 그 날 회견장에 있었다면 기사에는 더욱 무게가 실렸을 것이고 기억도 나지 않겠는가.”
김 특파원은 이에 “그렇게 질문하니 그것도 그렇다. 만일 정치인이 있었다면 회견장 분위기도 달랐을 것이고 기억이 나지 않을 리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최소한 당시 도쿄특파원 가운데 회견장에서 임 전 의원을 본 것을 기억하는 기자는 없는 셈이다. 어떤 경위와 이유로 도쿄 기자회견에 임 전 의원이 참석한 것으로 보도된 것인지는 확인불가. 하지만 그 이후부터 도쿄 기자회견 관련 기사에 임 전 의원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고, 1998년 3∼4월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대상에 임 전 의원이 포함되기도 했다.
이어진 서면질의는 DJ의 ‘비자금’ 문제에 집중됐다. 한나라당측이 ‘거래’를 시도하고 있는 ‘임 전 의원의 보따리’도 바로 DJ의 정치비자금과 무관치 않을 개연성이 높다. 임 전 의원은 한때 ‘DJ 자금관리책’으로 통했다. 당 재무위 간사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재벌들과 무척 가까웠다. 그가 정치자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한보사건, DJ비자금 사건 등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도 드러난 바 있다.
1997년 한보사건 당시 임 전 의원은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올라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아 그에 대한 검찰 수사는 ‘결정보류’로 종결됐다. 1998년 2월 DJ 비자금 사건에 대한 수사에서도 임 전 의원은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5억원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났지만 대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임 전 의원은 1985년 DJ의 가택연금을 계기로 DJ로부터 ‘신임 받는 측근’이 됐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 후 DJ의 비밀스런 심부름과 정치자금 조달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심부름을 했고, 정치자금은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조달했는지요.
“나는 1970년부터 사상계(思想界)에서 장준하 선생을 돕다가 정계에 입문하게 됐습니다. 당시 김대중씨는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돼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을 하는 과정에 우리 쪽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 등의 의견을 모은 편지를 가지고 필동 이희호 여사 친정집에서 김대중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문제의 편지를 전해주고 나오는 길에 그 집 현관 밖에서 중앙정보부(안기부 전신-현 국정원) 사람들에게 붙들려 서대문 형무소에 구속된 적이 있는데 그것이 김대중씨와 맺은 첫 인연이었습니다. 유신시절 나는 장준하 선생을 도와서 활동하다가 1975년, 장준하 선생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정치활동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일선에 다시 나섰습니다. 김대중씨가 미국에서 돌아오던 해입니다. 김대중씨의 동교동 집은 오랫동안 비워 둔 상태였습니다. 그 해 겨울, 집에 연탄불을 피웠다가 이희호 여사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김대중씨 부부는 치료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교동 근처에 있는 내 집으로 왔습니다. 그 후 1년 동안 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동안 동교동 김대중씨의 집은 급히 헐고 신축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안기부에서 나를 몹시 괴롭혔습니다. 김대중씨는 당시 연금상태여서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김영삼씨가 김대중씨를 만나려면 내 집으로 찾아와야 했습니다. 그때가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 때였습니다. 자연적으로 비밀스러운 일에 관한 심부름은 내가 하게 됐습니다.
당시 권노갑씨나 한화갑씨, 김옥두씨는 비서로서 김대중씨를 보좌했기에 현역 국회의원 신분인 내가 자연적으로 김대중씨의 비밀 심부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는 김대중씨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곧 망하는 길로 통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김대중씨에게 정치자금을 지원할 수 없었고, 전두환 정권의 철통 같은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국회 재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기업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대기업 총수들을 만나자고 하면 대개 다 만나줬고, 정치자금을 요청하면 대체로 협조해 주었습니다. 물론, 여당의 10분의 1 또는 100분의 1 정도였습니다만 그 창구 노릇을 내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금은 내가 연락과 협상을 해서 금액을 정하면 제3의 경로를 거쳐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권노갑씨나 김홍일씨를 통해, 아니면 다른 의원을 통해 전달했습니다. 내가 직접 돈을 받아서 전달하면 중간에서 떼어먹을 것이라 의심받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 전두환 정권이 나를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조성된 모든 자금은 김대중씨 집의 안방 장롱 속에 보관돼 있다가 여러 경로를 통해 자금세탁 과정을 거친 후 주로 당의 비밀활동자금과 재야활동자금으로 지불됐습니다. 나는 가끔 김대중씨 집으로 불려가서 안방 장롱 속에 있는 수표들을 분류하기도 하고 배분된 자금을 수표로 나누어 묶기도 했습니다. 그 돈을 내가 직접 재야인사들에게 전달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은 돌아가신 문익환 목사에게 당시 3000만원을 전달하기 위해 장충동 태극당에서 민통련 사무를 맡고 있는 여직원을 만나 빵 봉지에 돈을 넣어주었습니다. 계훈제씨에게는 종로1가에 있는 태극당에서 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 장준하 선생과 가까웠기에 나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비밀리에 많은 이야기를 협의하는 사이였습니다.”
-1997년 전 한일상공 대표 정철신씨가 진로그룹을 상대로 진로백화점 반환소송을 제기한 바 있습니다. 당시 정씨는 지난 1985년 DJ와 YS에게 정치자금을 댔다가 의심을 받아 전두환 정부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도를 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정씨는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을 임 전 의원의 소개로 만났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DJ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체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또 한일상공의 공중분해에 대해 아는 사실이 있습니까.
“나는 한일상공 정철신씨를 모릅니다. 또 진로 장진호 회장에게 소개한 일도 없습니다. 그 당시는 전두환 정권의 감시가 심해서 그런 일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한일상공의 몰락 과정도 모릅니다. 당시 진로 장진호 회장이 정치권력과 어떻게 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나는 야당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아는 바 없습니다.
다만, 진로그룹의 지분 중 38.5%를 내가 소유하고 있던 기업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난 진로를 보호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장진호 회장을 개인적으로 도와준 일은 있습니다. 한번은 김대중씨가 나에게 ‘진로그룹 주식을 팔면 몇 천 억원 되니까 그 돈을 빌려달라, 정권을 잡으면 보답하겠다’고 제의하기에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도 김대중씨와 내가 멀어지게 된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전두환 정권 당시 김대중씨를 도운 사람은 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을 하던 기업인들이었습니다. 특히 호남 기업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전남을 기반으로 둔 금호그룹이나 전북의 삼양사 같은 대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고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 대신증권 양재문 회장은 김대중씨와 목포상고 동창이면서도 정부의 감시 때문에 외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몇몇 영남출신 기업들이 도와주었습니다.”
1989년 새해 벽두부터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재신임을 묻는 ‘중간평가’ 문제가 정치권 최대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1987년 대선 당시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 6·29선언과 그동안의 모든 선거공약 이행 여부에 대해 국민으로부터 중간평가를 받겠다”고 노 대통령 스스로 약속한 시한이 다가온 것이다.
당시는 1년 전인 1988년 4·26 총선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평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했고, 국회는 DJ의 평민·YS의 민주·JP의 공화 3당이 주도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 국면으로 바뀐 상황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칫 ‘2년 대통령’으로 끝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노태우·김대중 밀약설의 진실
DJ는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간평가는 약속대로 대통령에 대한 신임투표여야 한다”면서 노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러던 3월 초 어느 날 밤. 노 대통령의 측근이던 당시 박철언 청와대 정책담당보좌관이 동교동으로 DJ를 방문한 뒤 상황은 돌연 바뀌었다.
3월10일 노 대통령과 김 총재간 여야 영수회담에서 김 총재가 “중간평가를 대통령의 신임과 연계시키지 않고 단순정책평가로 하자”고 제안한 것. 노 대통령은 그로부터 열흘 뒤인 3월20일 ‘중간평가 무기 연기’를 선언하는 담화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것이 당시 정치권에 노 대통령과 김 총재간 ‘밀약설’이 흘러나오게 된 배경이다. 그리고 김 총재와 박철언 보좌관의 ‘동교동 심야밀담’에서 거액의 정치자금이 오간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
임 전 의원은 바로 동교동 심야밀담이 있던 날 밤 박 보좌관을 동교동 DJ의 사저로 안내했던 당사자다. 임 전 의원은 지난 해 9월 모 월간지 인터뷰에서 당시 비화를 개략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박철언 전 의원은 임 전 의원의 증언을 전면 부인했다.
-박 전 의원은 그 시기 임 전 의원의 안내를 받아 동교동으로 DJ를 찾아간 것은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임 전 의원의 주장은 전면 부인했습니다. 임 전 의원은 동교동 지하서재 밀담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대화내용을 전혀 모르고, ‘거액전달설’에 대해서도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주장했습니다. 누구의 말이 진실입니까.
(1차 서면질의 후 전화통화에서 임 전 의원은 자신의 주장을 순서대로 실어달라고 했다. 박 전 의원이 또다시 부인하지 못하게 당시 전후 상황과 경위를 자세하게 설명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날 DJ와 박철언 보좌관을 만나게 해준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박 보좌관은 검사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그 사람은 주로 정치권력의 핵심자리에 있었고 나는 야당이라는 괴로운 자리에 있었으나,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89년 3월 ‘DJ-박철언’ 심야밀담 다음날 아침 동교동의 아침식사. DJ,임춘원, 한화갑(맨 오른쪽)
나는 며칠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동교동으로 가서 김 총재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김 총재는 의외로 ‘빨리 만나게 하라’며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박 의원을 신라호텔에서 만나서 협의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밤 10시에 신라호텔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나는 동교동 김 총재에게 전화로 간다고 말하고 비서들을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동교동에는 김옥두, 남궁진, 설훈 등 김 총재의 비서들이 있었습니다. 김 총재는 모두 밖으로 내 보낸다고 말하면서 차고 문을 열어놓을 테니 직접 차고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박 보좌관이 내 차에 올라타기 전에 큼지막한 꽃바구니를 차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아무말 하지 않고 동교동으로 향했습니다. 차고에서 내리면서 내 운전기사가 그 꽃바구니를 나에게 주어서 내가 직접 들고 박 보좌관을 동교동 지하서재로 안내했습니다. 그 꽃바구니 속에는 케이크상자가 들어있었습니다.
지하실에서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박 보좌관이 ‘노태우 대통령의 말씀을 전할 것이 있다’고 해서 난 잠시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후 다시 내려갔습니다. 그 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박 보좌관과 함께 동교동을 나왔을 땐 새벽 3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난 박 보좌관을 다시 신라호텔로 데려다줬습니다. 그곳에서 박 보좌관은 자기 차로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날 김 총재가 나를 동교동으로 불렀습니다. 김 총재는 무척 흥분해 있었습니다. “임춘원 의원,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다. 우리는 자금도 마련되었고 정권을 잡을 기회도 얻었다. 임 의원이 만들었다”면서 나에게 흥분된 어조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난 그때 김 총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치자금은 당과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100만원권 수표로 바꿔서 중앙당과 국회의원들에게 300만원씩 떡값으로 지불했습니다. 모두가 김 총재의 정치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박철언의 주장은 김 총재에게 노 대통령의 말을 전할 때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 당시 김 총재의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김 총재는 나에게 “박철언 보좌관이 이런 말을 하는데 그것이 진실 같으냐, 나를 속이는 것 같으냐”고 자초지정을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과 김 총재간에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고, 그때 ‘중간평가 유보’라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평민당 김 총재가 제1 야당 총재고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는 제2 야당이었습니다. 내가 그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김영삼 총재에게는 김윤환씨가 찾아갔다고 합니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1997년 국정감사에서 1989년 밀담 당시 박 보좌관이 노태우 대통령을 대신해 DJ에게 200억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정 의원의 주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당시 정 의원은 구체적인 물증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내가 알기로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그 당시 안기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금액을 말하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안기부라는 곳은 정말 무서운 곳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대중 총재의 허상을 벗기려고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임 전 의원은 국회 재정위 간사로서 재벌 등 대기업들과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임 전 의원이 어떤 재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고 DJ에게 건너간 자금 규모는 대략 어느 정도 되는지 밝힐 수 있는지요.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체나 개인의 이름을 거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많은 기업들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을 다 기억할 수도 없습니다. 김대중씨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체 오너들은 대개 퇴출됐습니다. 김대중씨는 그 사람들의 정치자금으로 대통령이 되고난 뒤 내치는, 전형적인 토사구팽(兎死狗烹)식 정치행태를 취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어느 기업으로부터 50억원을 받아서 자금세탁과정에 문제가 돼 대단히 어려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략 그 정도에서 유추해석하기 바랍니다.”
-임 전 의원은 DJ의 비자금 관리를 김홍일 의원이 도맡았다고 했습니다.
“김홍일 의원은 주로 아버지 심부름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의 일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김홍일 의원은 환자입니다. 더 이상 건강이 악화되지 않도록 모든 언론사에 부탁하고 싶습니다. 김홍일 의원은 아버지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이용해서 정상배(政商輩) 노릇을 한 사람들을 밝혀내야 합니다.”
-검찰은 1998년 2월 ‘DJ 비자금 사건’을 대대적으로 수사했습니다. 당시 수사결과 임 전 의원도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1991년 7월 5억원을 받은 혐의가 드러난 바 있습니다. YS는 이에 대해 ‘축소은폐 수사’라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당시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1998년 2월, 미국에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모 검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검사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에 비자금 사건을 마무리해야 하니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진로그룹 장진호 회장으로부터 5억원을 받아서 당시 김대중 총재에게 준 것이 아니라 당에 주었다고 써서 팩스로 보내주신다면,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검찰 수사에서 제외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검찰청의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검사가 보내온 팩스 내용대로 써서 서명해 다시 팩스로 보내 주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아무런 관련도 없는 50억원 사기사건 사기범으로 몰렸습니다. 검찰은 해외 범인인도조약에 따라 나를 범죄인 인도한다는 발표를 하고, 모든 신문과 방송 TV는 매일 나를 매도하였습니다. 이 일로 나는 극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맸습니다.
한국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 아니라 권력의 시녀 노릇을 철저히 해왔습니다. 검찰이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국민의 공적이 되고 검찰 스스로 붕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새롭게 탄생할 새 정부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조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정식으로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의 정당한 수사를 믿을 수 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검찰이 수사를 축소 은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통화한 검사는 누구입니까.
“그것도 아직 밝힐 때가 아닙니다. 다만 현 정부에서 검찰 내 상당히 높은 직위까지 올라간 사람이라는 정도만 밝혀두겠습니다. 내가 해외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아직까지 현직에 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때 주고받았던 팩스문건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전화기록이나 팩스 전송기록 등을 보면 다 밝혀질 것입니다.”
-당시 검찰은 평민당에 제공된 정치자금이 ‘매우 복잡한 세탁과정을 거쳤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아는 부분이 있는지요.
“정치자금의 세탁과정을 밝히는 것은 검찰이 할 일입니다. 나중에 검찰에 말하겠습니다.”
-임 전 의원은 제일은행이 미국 캘리포니아 여성상원의원의 남편에게 헐값에 팔렸고, 다시 미 동포에게 비싼 값으로 되팔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과정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요.
“제일은행 문제는 이 정권이 끝나면 아주 큰 문제로 부각될 것입니다. 나는 이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만 미국 모 언론사에서 이 문제를 오랫동안 취재했고 모든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압니다.”
-조풍언씨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조씨를 직접 만나신 적은 있습니까. 그리고 현 정권에서 조씨의 역할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 상당히 다르다고 주장하셨는데 그렇다면 조씨의 실질적인 역할은 무엇입니까.
“미국에서 조풍언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이용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얼마간 재물을 모을 수 있었겠지만 물거품과 같이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조씨는 많은 시달림을 받을 것입니다. 한국의 재원(財源)이 외국으로 흘러나간 것에 대해 상당한 책임이 뒤따를 것입니다.”
‘사전경고?’ ‘허풍?’
임 전 의원은 서면 답변이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보따리’를 모두 풀어놓지는 않았다. 민감하고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선을 앞둔 지금, 임 전 의원 나름대로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흥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임 전 의원이 김 대통령과 현 정부를 강하게 성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당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번 ‘신동아’ 인터뷰를 통해 임 전 의원은 조만간 진실을 밝히겠다고 예고하면서 몇 가지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과연 그 속에 정말 ‘밝혀져야 할’ 진실이 있는지 아니면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의혹만을 위한 의혹’에 불과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