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현대상선 아닌 현대전자· 현대건설·현대증권이 창구”

‘총풍’ 주역 장석중이 말하는 현대 대북 비밀지원 내막

  • 글: 엄상현 gangpen@donga.com

    입력2002-11-29 12: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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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억달러가 전부 아니다. 국민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천문학적인 액수”
    • “현대 대북사업 주도자는 이익치”
    • 이석수 담당검사 “장석중은 신뢰성이 별로 없는 사람”
    •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 “현대상선 대출금 4900억원은 실제 대북 지원금 아닌 듯”
    “현대상선 아닌 현대전자· 현대건설·현대증권이 창구”
    현대의 금강산 개발은 다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부를 우회해) 북에 경제원조를 하는 수단으로 정부와 밀약을 한 결과라는데, 사실인가요.

    “그것은 피고인이 대답할 사항이 아닙니다.”

    -피고인은 정주영을 5회, 정몽구를 7회 정도 만났다는데 사실인가요.

    “만난 사실은 있지만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현대와 정부간 내락사항에 대해 피고인이 아는 바를 말해줄 수 있나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1998년 12월19일 서울지방법원 제417호 법정에서 진행된 공판기록 중 일부다. 변호사의 질문에 피고인은 일절 답변을 피했다. 당시 피고인은 이른바 ‘총풍 3인방’ 중의 한 명인 대북사업가 장석중씨. 변호인단은 한나라당 정인봉, 엄호성, 심규철, 김영선 의원 등 4명이었다.

    장씨는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초기에 매우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나라당 변호인측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장씨를 위해 무료 변론을 했다.

    당시 장씨가 현 정부와 현대를 위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소상히 밝혔다면 ‘총풍사건’ 혐의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스러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장씨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나라당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진행했지만 장씨는 한나라당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견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3년9개월여가 흐른 지난 2002년 9월25일. 엄호성 의원은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현대그룹 계열사인 현대상선을 통한 김대중 정부의 4억달러 대북 비밀지원의혹을 제기했다. 엄의원은 총풍사건 변호인단에 있던 사람.

    정치권은 한바탕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한나라당은 정부와 민주당에 대해 집중 공세를 펴는 한편 국민통합 21 정몽준 후보를 적절히 견제하는데 이 의혹을 활용했다. 민주당은 이에 “터무니없는 정치공세다.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며 발끈했다.

    “엄의원 폭로내용은 새발에 피”

    현재 정치권 안팎에서는 엄의원이 제기한 4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현대를 통해 북한에 지원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한나라당 몇몇 의원들은 추가 폭로를 위해 현대그룹의 자금 흐름을 면밀히 분석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렇다면 정말 현 정부가 현대를 통해 북한에 비공식적인 자금을 지원한 것일까. 만일 사실이라면 그 규모는 얼마나 될까. 4억달러? 아니면 그 이상일까. 의문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그 시발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먼저 대북사업가 장석중씨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한때 현 정부의 대북 밀사이자, 현대그룹의 대북 채널로 활동했던만큼 뭔가 단서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엄의원의 현대 대북지원설 폭로 배후에 그의 정보도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장씨는 현대 대북 비밀지원의혹과 관련한 인터뷰 자체를 완강히 거절했다. “물론 깊은 내용까지 알고 있지만 언론에 이야기해서 나에게 무슨 이득이 돌아오느냐”며 거절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신 장씨는 자신을 수사했던 박철준 검사(현 공안1부장)와 대북사업 초기에 진두지휘했던 현대그룹 박세용 전 종합기획실장(전 인천제철 회장)을 지목했다. 다음은 장씨와 수 차례 전화통화와 만남을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최근 현대상선 대북 비밀자금지원의혹을 제기한 엄호성 의원은 총풍사건 당시 장씨의 변호인이었다. 엄의원이나 한나라당측 관계자와 만난 적이 있는가.

    “내가 왜 만나는가. 그런 적 없다.”

    -엄의원의 폭로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새 발에 피다. 현대가 대북사업을 추진하면서 그 정도밖에 안 주었겠는가. 북한지원자금 마련을 위해 현대그룹 경영진이 실질적으로 움직인 곳은 현대상선이 아니다. 현대전자와 현대건설, 현대증권 등 3사의 자금흐름을 잘 살펴봐라. 그리고 현대종합상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금이 어떤 경로로 움직였고, 어떤 과정을 통해 북한에 지원됐는지 좀 구체적으로 밝혀달라.

    “그건 말할 수 없다. 검찰에 가서 물어봐라. 총풍사건 때 내가 직접 쓴 자필진술서가 있다. A4용지 24쪽 분량이다. 현대가 북한에 어떤 약속을 했고, 얼마를 어떻게 지원하기로 했는지 자세히 적었다. 박철준 검사에게 줬다. 그런데 그 자술서를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수사기록에서 뺐다. 그걸 찾아라. 거기에 다 나온다.”

    -그 자술서는 언제 어떻게 작성됐고, 주요내용은 무엇인가.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다. 총풍사건에 대한 대법원 최종판결도 남아 있고…”

    -현대가 북한에 지원한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라고 알고 있나.

    “내가 알기로는 천문학적인 규모다. 하지만 내가 말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난 1998년 9월부터 감방에 가 있었다. 현대 측 일에서도 손을 뗐다. 대북사업 초기단계는 당시 박세용 종합기획실장이 다 했다. 그 사람에게 물어봐라. 그때 현대그룹이 33조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받을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그 사람도 이익치 회장에게 당했다. 얼마전 뉴스를 보니까 이회장이 대북사업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하던데 사실 그 사람이 다 했다.”

    -정몽구 회장과 정몽헌 회장 간의 대북사업 진출 다툼이 문제의 시작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나와 정몽구 회장이 추진했던 통천연구소에 50억원만 투자했어도 대북사업을 잘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몽헌이 중간에서 (정주영 회장의) 편지를 가로챘다.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나를 팔아서 (편지를)받아내 이익치를 시켜 요시다 라인을 통해 북한에 전달했다. 그때 정몽헌은 북한에 ‘큰 떡’을 제안했다. 그게 바로 수천억원이 들어가게 된 이유다.”

    장씨 설명은 엄의원의 폭로내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장씨는 현대의 대북 비밀자금지원 창구로 현대상선이 아닌 현대전자와 건설, 증권 등을 지목했다. 또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으로부터 4900억원을 대출받은 2000년 6월 이후 북한에 자금이 전달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다른 통로를 통해 북한에 자금이 전달됐음을 시사했다.

    과연 장씨 이야기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걸까. 만일 사실이라면 그동안 한나라당에서 제기한 현대 비밀지원설은 방향을 잘못 잡아도 한참 잘못 잡은 셈이다. 그리고 새로운 의혹의 출발점으로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킬 여지도 충분하다.

    현대전자 1억달러 송금의 비밀

    실제로 엄의원이 주장한 현대상선 4억달러 대북 비밀지원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당초 한나라당은 현대상선으로 나간 산업은행 대출금의 흐름에 대해 두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대상선 → 현대아산 → 북한’ 또는 ‘현대상선 → 국가정보원 → 북한’. 엄의원은 “문제의 자금에 대한 계좌추적을 해 보면 어느 시점에 가서 흐름이 딱 끊길 것”이라며 의혹을 부추겼다.

    하지만 경제전문가들은 한나라당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2000년도면 외환시장이 무척 민감했을 때다. 4억달러 정도의 외화가 움직였다면 외환시장에 뭔가 변화가 있었을 텐데 그런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당시는 IMF의 요구에 의해 보름마다 외환보유고를 발표해야 했고, 국내 외환보유고를 늘리느라 정신이 없던 때다. 현대상선과 산업은행에 대한 감사원의 특별감사가 진행되는 중이라 섣불리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상당수 경제전문가들은 산업은행의 대출금이 자금난에 허덕이던 현대 계열사들에 대한 지원용도로 사용됐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문제가 있다면 부당내부자거래 혐의가 짙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 10월28일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이 새로운 대북 비밀자금지원 의혹을 터뜨렸다. 이번엔 현대상선이 아닌 구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 영국 현지법인 반도체공장 매각대금이 문제가 됐다.

    현대전자가 2000년 5월 영국 현지공장을 모토로라사에 1억6200만달러를 받고 매각한 후 이 중 1억달러(1200억원)를 현대건설 중동지역 종속회사인 ‘알 카파지’로 보냈다는 것. 그런데 ‘알 카파지’가 유령회사라는 것이 의혹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실제로 현대건설이 2002년 4월1일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자본금 5000만원에 불과한 ‘알 카파지’는 2001년 유동자산 ‘0’, 고정자산 ‘0’으로 사실상 사라진 회사나 다름없다.

    특히 현금 유동성 문제에 봉착해 있던 현대전자가 무려 1억달러를 자본금 5000만원에 불과한 현대건설 자회사로 송금한 것부터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사라진 1억달러는 과연 대북 비밀지원금으로 사용된 것일까. 이 의원은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해 비교적 솔직하게 답했다.

    “의혹은 제기했지만 실제로 북한으로 건네진 자금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해외에서 이뤄진 자금흐름을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상선의 산업은행 대출금보다는 그 개연성이 훨씬 높다고 본다.”

    이 의원은 아울러 엄의원이 제기했던 현대상선 대출금 대북지원 의혹에 대해서도 나름의 시각을 피력했다.

    “국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받은 자금이 달러로 바뀌어 해외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대가 특혜대출을 받은 대가로 대출금 일부를 여권에 정치자금으로 제공했을 수도 있다. 해외에서 먼저 북한으로 자금을 보내고 난 다음 공백이 생긴 부분을 국내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메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장석중씨의 주장과 일맥 상통하는 대목이다.

    한편 장씨가 지목한 박철준 공안1부장과 박세용 전 회장의 설명을 듣기 위해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완강히 거절했다.

    박부장은 아예 접촉 자체를 거부했다. 박부장의 사무실로 수 차례 전화를 하고 직접 방문하는가 하면, 면담 요청서를 팩스로 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 전 회장도 비슷했다. 박 전 회장은 기자의 전화에 “현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겠다.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다. 현대를 이미 떠난 사람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라는 답을 끝으로 말문을 닫았다.

    총풍사건 수사 당시 장씨를 담당했던 이석수 검사(현 대검 통합운영연구관)에게도 물었다. 이 검사는 자신의 견해를 비교적 자세히 피력했다. 그런데 장씨에 대한 이 검사의 시각은 무척 부정적이었다. 이 검사의 말이다.

    “당시 장석중씨는 내가 직접 조사했다. 장씨가 쓴 진술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주로 대북사업을 하면서 현대의 일을 좀 도와줬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보기에 장씨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는 수단으로 진술서를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사안의 핵심이 아니었다. 본안 소송과 관련이 없었다. 우리가 수사했던 부분은 장씨 등이 선거를 앞두고 북한에 모종의 조치를 부탁했는지 여부였다. 그것이 ‘총풍사건’의 핵심사안이었다. 장씨가 현대와 관련해서 작성한 자술서는 본안 소송과 관련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했다. 우리가 일부러 빼거나 은폐하려고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소송관련 서류에 첨부되지 않은 자료는 장씨에게 모두 되돌려줬다.”

    “사기꾼이라며 펄펄 뛰었다”

    이검사에게 장씨의 여러 진술서 가운데 현대의 대북지원과 관련, 구체적으로 언급된 것이 있었는지 물었다.

    “장씨의 진술서는 전부 읽어봤다. 하지만 현대가 북한에 지원하는 방법과 자금규모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했던 적은 없다. 돈을 몇 억달러 주고받기로 했다는 등 구체적인 액수에 대한 기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작해야 옥수수박사 김순권씨를 통해 비료와 옥수수종자, 농기구 등을 지원하는 것 정도만 이야기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장씨는 현대 대북사업의 깊숙한 내막까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이야기는 많이 했지만 그다지 고급정보를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굉장히 과장이 심한 사람이었다. 김순권 박사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장씨에 대해 사기꾼이라며 펄펄 뛰었다. 한마디로 장씨는 신뢰하기 좀 어려운 사람이었다.”

    장씨를 기소한 검찰은 공소사실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했고, 장씨는 이를 반박해야 할 위치였다. 서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다툼을 벌인 당사자였던만큼 같은 사안도 충분히 다를 수 있다. 때문에 이검사의 주장도 장씨의 이야기만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감사원은 현대상선과 현대전자를 감사하는 중이다. 하지만 현대상선측에서 관련 자료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아 그 결과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소문이다. 이런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장씨의 자필진술서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 것일까. 가능성은 반반이다. 검찰 측 주장처럼 별다른 내용이 없을 수도 있지만 ‘수수께끼’ 같은 대북 비밀자금지원을 위한 현 정부와 현대 간의 막후 거래를 푸는 ‘열쇠’가 숨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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