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DJ에게 대선자금 안 내 63빌딩 빼앗겼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판도라의 상자’의 마침내 열다

  • 글: 조성식 mairso2@donga.com

    입력2002-11-29 13: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DJ에게 대선자금 건넨 기업인 명단에 최회장 이름이 없어”
    • 500억원 낸 재벌은 멀쩡, 10억원 낸 나는 5공 청문회 소환
    • 92년 대선 때도 YS한테는 줬지만 DJ는 가능성 없어 안 줘
    • 97년 대선 때 이회창에게 준 자금? 노 코멘트
    • 옷로비사건 터지자 김태정이 구속 서둘러
    • 동교동계 실세 주축 ‘9인 비선조직’이 신동아그룹 공중분해 모의
    • 옷로비사건 때 나를 돕던 영부인 측근 황용배, 사직동팀에 협박당해
    • 대한생명, 부실기업 결정 당시 유동성에 문제없어
    • 자격 없는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는 권력형 특혜
    • 이 정권 끝나면 대한생명 반드시 되찾는다
    “DJ에게 대선자금 안 내 63빌딩 빼앗겼다”
    최순영(63) 전 신동아그룹 회장을 횃불선교원에서 만났을 때 첫 느낌은 쓸쓸함이었다. 그는 수십명이 앉아 회의를 해도 좁지 않을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차를 나르는 여비서가 있을 뿐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볼품없이 길기만 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줄로 늘어선 소파들은 썰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하고 있었다. 그 휑뎅그렁한 방에서 그는 서류 더미를 쌓아놓고 자신의 ‘한 맺힌’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작은 몸은 드넓은 방 때문인지 더욱 왜소해 보였다. 신동아그룹 해체 후 최순영씨가 언론 인터뷰에 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999년 7월 서울지법 형사30부는 최씨에게 재산국외도피 등의 혐의를 적용한 검찰의 공소사실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징역5년에 추징금 1965억원을 선고했다. 그해 10월 최씨는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올 1월 항소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1부)는 징역3년을 선고했으나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추징금은 2192억원으로 1심 때보다 늘었다. 이 소송은 최씨의 상고로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대한생명을 부당하게 뺏겼다고 여기는 최씨는 법원에 부실금융기관 결정처분 취소 소송과 감자 및 증자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두 사안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도 청구했다.

    법적으로 위임명령을 제정할 수 없는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가 만든 규정에 터잡아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한 것은 명백한 위법이라는 주장이다. 또 증자 및 감자 결정은 주주총회의 특별결의가 있어야만 하는데 이사회에서 처리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 두 소송은 현재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각각 계류돼 있다. 최씨는 여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대세는 기울어진 상태. 9월23일 공적자금위원회는 논란 끝에 한화 컨소시엄을 대한생명 인수자로 결정했다. 한화 컨소시엄은 10월28일 예금보험공사와 본 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대한생명을 인수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대 대표이사 회장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권이 끝난 뒤 말하려 했는데…”

    사정이 그런데도 최씨는 여전히 대한생명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그 의지의 표출이라 할 만하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횃불선교원은 그의 부인 이형자씨가 원장을 맡고 있다. 전 이사장이기도 한 최씨는 이곳에서 흡사 망명정부의 수반처럼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횃불선교원은 현 정권과 검찰을 만신창이로 만든 옷로비사건이 잉태된 곳이기도 하다. 1998년 12월 하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나간 소문, 곧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가 이형자에게 옷값 대납 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했다”는 유언비어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유언비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네 차례 수사(사직동팀, 서울지검, 특검, 대검 중수부)와 국회 청문회 조사, 법원 판결을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연씨가 옷값 대납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형자씨는 1998년 12월17일 이 선교원에서 배정숙씨(당시 통일원장관 부인)로부터 “연정희씨가 앙드레 김 의상실 등에서 2200만원어치의 옷을 샀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 남편이 구속될까봐 크게 걱정하고 있던 이씨는 배씨의 얘기를 옷값 대납 요구로 받아들였다. 연씨에 대한 이씨의 오해(?). 이것이 바로 옷로비사건의 출발점이다.

    최씨 주장 중에는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할 것이 적지 않다. 그에 따라 기사를 두 부분으로 나눴다. 본 기사에서는 최씨 주장을 대부분 그대로 소개하되, 관련자 또는 관련 기관의 반론이나 사실관계 검증이 필요한 부분은 부속 기사로 따로 처리했다.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는데, 같은 주제에 관한 질의와 답변은, 대화의 흐름에 지장을 주는 경우를 빼고는, 순서에 상관없이 하나로 묶어 처리했다.

    재계 인사 중에 최씨만큼 현 정부에 한이 맺힌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 정권이 끝난 다음 말하려고 한 것인데…” 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두 가지로 구분해야 해요. 내가 구속된 사건과 대한생명을 뺏긴 것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고요. 사람들은 이걸 혼동하고 있어요. 이 정부가 내 사건을 기회로 삼아 대한생명을 뺏어 가버린 거예요. 내가 잘못한 건 잘못한 거지만, 대한생명을 억울하게 뺏긴 건 따로 봐줘야 합니다.”

    최씨는 “참고로 읽어 보라”며 ‘상고 이유서’라는 두툼한 자료를 내밀었다. 지난 3월 대법원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걸 읽어봐야만 이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어요. 대한생명에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 정권에서 내가 왜 어떻게 당했는지.”

    신동아그룹에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현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경. 서울지검 특수1부는 회장인 최씨가 거액의 외화를 빼돌렸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내사에 착수했다. 그 무렵 신동아그룹 계열사인 신아원 사장 김종은씨가 최씨를 협박하다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검찰 수사는 활기를 띠었고 최씨는 재산국외도피 혐의로 두 차례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검찰은 최씨의 혐의에 대한 판단을 미뤘다. 대한생명이 미국 보험회사 메트라이프(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회사)와 투자협상 중인 것을 감안해 본격 수사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IMF 사태로 외자유치가 절실한 때였다.

    최씨가 구속된 것은 이듬해인 1999년 2월. 재산국외도피와 사기, 업무상배임 등으로 기소됐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곧바로 대한생명에 대한 특별검사에 착수했다. 특검 결과 대한생명의 부실액이 2조67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의 ‘관리명령’에 따라 대한생명에 관리인이 파견됐다. 그 와중에 검찰은 최씨를 불법대출에 따른 배임, 횡령 혐의로 추가기소했다. 그해 5∼6월 금감위는 대한생명을 공개 매각하려 했으나 3차례의 유찰로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대한생명은 금감위 결정에 따라 국영보험사가 되는 수순을 밟았다. 그해 9월 금감위는 대한생명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자본감소 명령을 내렸다. 대한생명의 주식은 전부 소각당했다. 21개 계열사 대부분도 매각처분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11월 예금보험공사는 대한생명에 공적자금을 투입했고, 경영진이 교체된 신동아그룹은 해체됐다.

    “완전히 초법적으로 이뤄진 거예요. 그 배후에는 정치자금 문제가 있고 옷로비사건도 관련돼 있어요. 나를 구속하기 위해 언론과 시민단체를 동원해 외화를 밀반출했느니 해외에 별장을 사놓았느니 비행기를 사놓았느니 하면서 매도했어요. 총수를 구속한 지 한달 만에 국가가 강제로 기업을 점령한 건 대한민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에요.

    가장 큰 이유는 1997년 대선 때 DJ에게 대선자금을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이 사건의 대전제입니다. 내가 30여 년 동안 사업하면서 가장 큰 실수를 범한 게 그때예요. 그걸 안 줬기 때문에 이 정권이 출범한 후 30대 기업 중 대표적으로 얻어맞은 거예요. 대략 알겠지만 그때 대선자금 제대로 안 줘 괘씸죄로 걸린 기업이 신동아그룹과 모 항공사, K그룹, D증권이에요. 호남의 대표적 기업인 K그룹과 D증권은 나중에 잘 타협해 살아났지만, 나와 모 항공사 회장은 구속돼 혼이 났죠. 이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대선자금을 주지 않아 당했다는 최씨의 주장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정권이 바뀐 직후 - 아마도 1998년 봄일 거예요 - 어느날 친하게 지내는 모 그룹 회장을 만났는데 ‘대선자금 지원한 기업인 명단에 최회장 이름이 없다’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안 줬다는 얘기는 안 하고 ‘명단이 하나둘이겠냐, 다른 게 또 있겠지’ 했어요. 그 정도로 기업들 사이에서 대선자금과 관련한 얘기가 많이 돌았어요.”

    -역대 정권 때는 내셨지요?

    “예. YS한테도 줬죠.”

    -보통 단위가 어느 정도입니까.

    “청와대에서 30대 재벌을 초대하면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요. 액수가 자리를 정합니다. 가장 많이 낸 사람이 대통령 바로 옆에 앉습니다. 가장 조금 낸 사람이 맨 끄트머리에 앉아요. 일화를 얘기하죠. 하루는 청와대 만찬에 들어갔는데 풍산금속 유회장이 끝자리에 앉은 저를 보고 ‘최회장도 열 개짜리구먼’ 해요. ‘열 개짜리가 뭐냐’고 묻자 ‘10억이란 얘기야’ 하면서 웃더라고요. 최하가 10억원대였던 거예요.”

    최순영씨는 1998년 12월 하순과 1999년 1월초 두 차례에 걸쳐 검찰이 청와대에 자신의 사법처리를 품신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태정씨는 “내부적으로 사법처리 방침을 정한 건 사실이지만 총장인 내가 청와대에 건의한 적은 없다”고 부인하면서 “아마도 박시언이나 황용배가 그런 얘기를 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당시 수사팀 관계자는 “김종은을 구속한 뒤 수사팀에서 최순영 구속방침을 지휘부에 보고했기 때문에 (청와대로) 그런 보고가 올라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씨는 측근을 통해 “당시 검찰 쪽에서 그런 보고는 없었던 것 같다”며 “최순영의 일방적인 주장이거나 추측일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충격적’인 주장이라 할 만한 ‘9인 비선조직’의 실체 여부는 확인하기 쉽지 않다. 최씨에게 그 얘기를 들려줬다는 황용배씨가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황씨는 기자의 면회를 거절했다. 편지로 질의 내용을 전한 후 다시 면회를 신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9인 비선조직’의 수장으로 지목된 권노갑씨의 오랜 측근은 “처음 듣는 얘기”라며 “그런 일에 우리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권씨는 1998년 7월부터 12월말까지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최순영씨 사건에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 김태정씨는 “9인 비선조직이란 게 뭔지 나도 궁금하다”며 “황용배한테 물어봐 나한테도 알려달라”고 말했다.

    자신이 부당하게 구속됐다는 최씨의 주장은 이 사건에 대한 1심 및 항소심 판결내용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검증될 듯싶다. 외화유출의 주범이 자신이 아니라 김종은씨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법원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받아들여 최씨를 주범으로, 김씨를 종범으로 판정했다. 최씨는 또 검찰이 자신의 공범으로 구속된 김종은씨가 카자흐스탄 무역과 관련해 회사 돈 650만달러를 횡령한 혐의를 조사하지 않는 등 김씨를 봐줬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최씨에 대한 국세청 고발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수사를 안 한 게 아니라 수사에 착수했지만 러시아 연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확인하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쪽(카자흐스탄)에 자료도 요청해 받았다. 하지만 자료만 봐서는 판단하기가 어려웠고 사법공조도 안 돼 더 이상 수사를 진척시키지 못했다. 검찰은 김종은을 최순영의 공범으로 구속했고 기소까지 했다. 그를 봐준 게 없다.”

    공소권을 남용해 같은 사안으로 자신을 두 차례 기소했다는 최씨의 주장 역시 검찰의 강력한 반박에 부딪힌다. 박영관 서울지검 특수1부장은 최씨에 대한 추가수사가 검찰의 자체 판단이 아니라 국세청과 대한생명의 고발로 촉발된 점을 강조했다.

    지난해 5월 국세청은 최순영씨를 고발했다. 최씨가 해외에 가공의 역외펀드를 조성해 1억달러를 유출한 후 그중 8000만달러를 국내에 들여와 이미 불법으로 해외에 유출한 1억6500만달러 변제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박부장은 “8000만달러 유출은 구속 당시 혐의인 1억6500만달러 해외유출과는 별개”라고 말했다.

    최씨 수사에 관여했던 한 검사는 이에 대해 “두 사건이 관련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별개의 사안으로 기소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추가된 혐의는 말하자면 카드를 돌려 막은 것이다. 카드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카드에서 빚을 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카드 빚 갚으려 다른 카드로 빚 내”

    지난해 6월 대한생명이 최씨를 고발한 사건도 추가기소 내용에 포함돼 있다. 최씨가 이사회 결의 없이 대한생명 공금 147억원을 부인 이형자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신동아학원 횃불재단 한동대학교 등에 기부한 혐의다.

    박영관 부장은 또 “옷로비사건(국회위증사건) 대법원 판결 날짜에 맞춰 추가기소 사실을 발표했다”는 최씨 주장에 대해 “도대체 옷로비사건과 최순영 추가기소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에 따르면 수사에 착수한 지 1년이 지나 뒤늦게 기소한 것은 주임검사가 언론사 탈세사건, 진승현 게이트 수사 등으로 바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 올 상반기에 최씨가 대한생명 자금 외에 신동아건설 자금 25억원을 신동아학원과 한동대학교에 기부한 사실이 새로 드러나 보강수사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당시 주임검사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피해의식이 강한 것 같다. 최순영 수사를 하던 중 언론사 탈세사건도 맡게 되고 최순영의 혐의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할 부분이 생겨 바로 기소할 처지가 못 됐다. 기소일이 대법원 판결 날짜와 같은 것은 오비이락이다.”

    이제 대한생명 부실 결정이 부당하고 불법적이었다는 최씨 주장에 대해 당사자라고 할 만한 금감위 반론을 들어보자. 금감위는 다섯 개의 질문 항목에 대해 방대한 양의 답변서를 보내왔다. 요점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실기업 판정의 부당성 여부. 금감위는 당시 대한생명이 외부차입금이 전혀 없고 현금 유동성이 좋았다는 최씨의 주장에 대해 “부실금융기관 결정은 외부차입금이나 유동성 유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고 반박했다.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거나 거액의 금융사고 또는 부실채권 발생 등으로 정상경영이 어려울 것이 명백한 경우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할 수 있다. 금감위는 대한생명의 외자유치협상실패로 자체적인 경영정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999년 6월말 현재 부채(14조2538억원)가 자산(11조5785억원)을 초과했다. 또 매각절차가 지연되면서 수입보험료 감소, 해약 증가 등 수지가 악화돼 유동성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금감위는 또 최씨가 문제삼은 지불준비금과 주식 시가평가제에 대해 “법규에 의해 모든 보험회사는 향후 보험금 지급을 위해 적립하는 책임준비금(지불준비금)을 부채계정에 기록·평가해야 하고, 주식은 시가평가를 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계열사 부실대출금을 계산하면서 4621억원을 과다계상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예금보험공사의 의뢰에 따라 민간 회계법인이 1999년 9월 대한생명의 자산·부채를 실사한 결과도 금융감독원의 특검 결과와 비슷했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설사 과다계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총 부실규모(2조9000억원)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부실금융기관 결정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둘째, 채권을 공적자금으로 투입한 것에 대해서는 “대한생명에 대한 공적자금 지원은 지불불능에 따른 유동성 때문이 아니라 자산부족분 해소를 위한 것이었다”며 “채권도 유동성이 필요할 경우 시장에서 매각할 수 있으므로 현금 지원과 비교해 효과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셋째, 자구노력 박탈 등 구조조정과정의 위법성 여부. 금감위는 “최순영 회장 구속 전인 1999년 1월 이미 외자유치협상이 결렬돼 자력에 의한 경영정상화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본 계약 체결 직전까지 갔다”는 최씨의 주장을 반박했다.

    “투자협상을 벌이던 메트라이프가 대한생명의 부실이 엄청난 걸 알고 정부에 그 부실을 보전할 것을 요청해와 대한생명의 부실을 인지하게 됐다. 최순영 회장 구속과 상관없이 1999년 2월부터 자산·부채 특별검사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공개매각 절차를 밟으면서도 실현 가능한 자구방안을 제시할 경우 언제든지 매각절차를 중지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는 등 실질적인 자구기회를 부여했다. 매각 지연으로 보험해약률이 높아지는 등 경영이 악화되자 신속한 경영정상화를 위해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다.”

    넷째, 대한생명의 흑자기록과 관련한 의문이다. 금감위는 “대한생명이 2001년에 흑자로 돌아선 주요 원인은 공적자금 투입으로 부실을 해소하고 새로운 경영진이 인력감축 조직개편 등 구조조정을 추진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자격에 대해 짚어봤다. 한화종금의 부실로 인한 공적자금 투입 책임에 대해 금감위는 “한화가 1300억원에 이르는 증권금융채권을 매입하는 등 대주주로서 책임부담을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또 충청은행 대주주로서 이 은행의 퇴출과 공적자금 투입에 책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IMF 이전 대주주의 경영참가가 어려웠던 상황에 부실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돼 지난해 한화그룹은 부실책임이 없는 것으로 결정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한화그룹에도 질의서를 던졌다. 충청은행과 한화종금의 부실 및 퇴출 책임을 묻는 질문엔 금감위와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특히 한화종금에 투입된 공적자금에 대해서는 “현재 56%의 높은 회수율을 보이고 있으며 계속 회수중이다”고 밝혔다. 한화파이낸스의 자본잠식을 문제삼자 “잠식액 500억원 중 314억원은 한국부동산신탁의 부도에 따른 것이며 나머지 금액은 기아자동차 부도 등 IMF 사태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최순영은 한화 음해 중단하라”

    한화그룹의 자금력 취약에 관한 질문에는 “지난해 말 한화그룹의 가용자금은 7000억원”이라며 “외부 차입금이 아니라 자산 매각 등 구조조정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대한생명을 인수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최순영씨가 ‘권력형 특혜’라고 주장하는 한화그룹의 한국프라스틱 인수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PVC 제조업체들은 과잉설비에 의한 과다출혈로 재정난에 봉착해 있었다. 업계 부실화를 우려한 정부는 1972년 총리 지시를 통해 5개사를 한국프라스틱으로 통·폐합했다. 당시 신동아그룹의 대한프라스틱뿐만 아니라 한국화약그룹의 한국화성공업도 정부에 경영권을 빼앗겼다. 한국화약그룹이 한국프라스틱을 인수한 것은 1980년이다. 그때는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도 아니었고 지분 매매 당사자는 이 회사를 잠시 경영하다 부도를 낸 진양화학과 한국화약그룹이었다. 신동아그룹은 상관없었다. 최순영씨는 한화가 권력을 이용해 기업을 빼앗은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도 안 맞고 사실도 아니다.”

    한화 관계자는 “대한생명 인수와 관련해 한화의 상대방은 최순영씨가 아니라 정부”라며 “한화그룹에 대해 더 이상 음해성 발언을 하지 말기를 충고한다”고 말했다.

    “DJ에게 대선자금 안 내 63빌딩 빼앗겼다”

    1999년 8월 국회 청문회에 나온 옷로비사건의 주인공들. 최순영씨는 자신이 구속된 배경에 옷로비사건이 있다고 주장했다.

    최씨는 5공 청문회 때 재벌회장으로는 맨 먼저 청문회장에 불려갔다.

    “나하고 대림 이준용 회장, 고려합섬 이사 등 3∼4명이 불려갔어요. 정치라는 게 웃겨요. 그때 국회에서 10억원이 가장 큰 액수로 얘기됐는데, 사실 삼성 현대 대우의 정치자금 액수는 몇백억원대였어요. 회장들 모임에서 하는 얘기가 있었어요. 최하가 500억원입니다. 대우조선이 잠수함 이권 따려고 바친 돈이 500억원이에요. 현대 정주영 회장도 돈을 냈는데 더 많이 낸 김우중 회장한테 빼앗겼지요. 유명한 얘기입니다. 정회장은 자기네가 대우보다 조선기술이 월등히 앞선다고 생각했기에 안심하고 있었어요. 시설이나 인력이나 실력에서 다 앞서니 당연히 현대가 차지할 것으로 믿었던 거죠. 계약도 먼저 했고. 그런데 김우중 회장이 막판에 전통(전두환 대통령)을 돈으로 움직인 거예요.”

    최씨는 5공 청문회에 나가 고생한 것을 ‘인정’받아 YS 정권 때 있었던 전·노 비자금 수사 때는 검찰 출두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통과 노통이 입원해 있을 때예요. 검사 세 사람이 병원으로 가 비자금 조사를 벌이기도 했지요. 나는 전에 10억원 낸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에 검찰청에 불려가지는 않았어요. 세 검사 중 한 명이 나를 보자고 하기에 ‘죽어도 검찰엔 안 가겠다’고 하니까 팔레스호텔로 불러냈어요. 그 검사 얘기가 삼성 현대 대우 럭키 회장들이 250억원씩 냈다고 진술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했지요. ‘검찰에서 조작을 해도 너무 한다’고. ‘내가 김우중 회장한테 들은 것만 해도 500억원이다. 재벌회장들이 입 맞춰 돈 내는 줄 아느냐. 경쟁이 붙어 서로 남보다 많이 내려고 한다’고.

    검사가 뭐라 그랬는지 압니까. ‘최회장!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그룹 회장 중 한 명이라도 500억원을 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국민정서상 구속돼야 합니다. 그런데 회장을 구속하면 그 그룹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그 여파가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칩니다. 검찰이 유도한 건 아니지만 맨 처음 들어온 사람이 줄여서 250억원이라고 얘기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 액수로 맞춘 겁니다’ 하더라고요. 조작이지요. 이게 현실이에요. 나같이 10억원 낸 놈은 청문회에 세워 정경유착의 대표적 기업인으로 만들고.”

    -10억원은 이권과 상관없이 준 겁니까.

    “그럼요.”

    -100억원대 밑으로는 다?

    “그냥 인사로 주는 거예요. 100억원대 이상은 이권이 걸립니다. 대가로 뭘 받지요. 우리 같은 졸자가 건네는 10억, 20억원은 통과세 같은 거예요.”

    최씨는 1992년 대선 때도 DJ에게는 대선자금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웬만한 기업가는 정치권에 보험을 들지 않습니까.

    “YS가 대통령 할 때 야당총재였던 DJ와 아주 안 만났던 건 아니에요. 1년에 한두 번 만나 점심도 사주고 용돈도 줬어요. DJ가 잘 알아요. 자기 입으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재계 순위 안 오르는 게 좋아”

    정권이 출범한 지 석 달 만에 검찰 조사를 받았기 때문인지 최씨는 현 정권에서는 청와대에 한번도 들어가지 못했다. 30대 대기업 중 신동아그룹의 서열은 가장 잘 나갈 때가 25위 안팎이었다. 이와 관련한 최씨의 얘기가 재미있다. “순위가 오르면 더 내야지. 안 올라가는 게 편해요. 자꾸 순위가 오르면 10억원대로 안 되거든요.”

    -YS 때는 어땠습니까. 한푼도 안 받는다고 했잖아요.

    “YS가 전통, 노통과 다른 점은 선거 전에는 받았지만 선거 후에는 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지만 받은 거나 마찬가지지. 선거 전에 받나 후에 받나. 선거 전에 받을 것 다 받았어요.”

    -1992년 대선의 경우 YS, DJ 양쪽에 다 준 기업체가 많지 않습니까.

    “대기업들은 거의 다 그랬을 거예요. 8대 2냐, 9대 1이냐, 7대 3이냐 비율 차이지. 여야 차이가 그렇게 납니다. 그룹마다 달라요. 나처럼 아예 한쪽엔 안 준 경우도 있고.”

    -1997년 대선 때도 기업들이 이회창, DJ 양쪽에 다 줬다고 봐야겠네요?

    “다 줬죠.”

    -그런데 최회장께서는 이회창씨 쪽에만 줬다는 거죠?

    “그건 답변 못하겠어요.”

    -얘기가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노 코멘트.”

    최씨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미뤄 짐작해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최씨는 1999년 5월1일 서울지법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동생 이회성씨에 대한 7차 공판에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당시 이씨는 1997년 대선 때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과 대선자금 불법모금을 공모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였다. 이날 최씨는 법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이석희 차장의 요청으로 5억원을 헌 돈으로 준비해 대선자금으로 제공했다. 이 돈은 그룹에 배당된 한나라당 후원금과는 별도로 쇼핑백에 담아 약속장소에 세워져 있던 빈 차의 트렁크에 넣었다. 자금 제공 후 세무조사가 보류됐다.”

    -두 차례 다 안 줬다면 DJ로서는 섭섭할 만했겠습니다.

    “밑에 있는 실세들이 ‘이런 놈은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겠지요.”

    -K그룹이나 D증권이나 다 호남기업 아닙니까. 대선자금을 안 줬을 리가 없을 텐데요.

    “줬는데 너무 적게 줬어요. 그래서 호남 재벌이 이렇게 적게 줄 수 있냐고….”

    -얼마를 줬는데요?

    “모르죠.”

    최씨는 액수는 모른다면서도 “K그룹과 D그룹은 대선이 끝난 후 더 갖다 줘서 위기를 모면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업 총수들에게 직접 확인한 것이냐고 묻자 “재벌그룹 회장쯤 되면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고 에둘러 말했다.

    -1992년과 1997년 모두 DJ에게 안 준 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서였습니까.

    “예, 난 가능성이 없다고 봤어요.”

    -1992년에 YS한테는 얼마나 줬습니까. 10억원대입니까.

    “그건 얘기할 수 없고. 하여간 상당한 금액을 냈어요. 내가 얼마 냈다는 건 정계에서 다 알아요. 이 사람들이 그걸 아니까 자기들도 기대한 거죠. 그런데 안 내니까 괘씸했던 거죠.”

    -그쪽에서 노골적으로 달라고 하던가요?

    “주로 간접적으로 요구합니다. 전화를 걸어 ‘최회장한테 연락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요.”

    최씨에 따르면 대선 캠프에서 자금을 요구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비서실을 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무자에게 연락하는 경우다.

    -1997년 대선 때 DJ쪽에서는 어떤 식으로 요구했습니까.

    “연락이 오긴 했지만, 우리는 그쪽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별로 관심도 갖지 않았으니까요. 선거 때 되면 다 연락 오죠. 의례적으로는 다 와요.”

    -DJ의 경우 당쪽에서 연락이 왔습니까.

    “당쪽이었죠. 나한테 직접 연락하지 않고 비서실을 통해.”

    최씨는 당시 DJ쪽 연락창구가 누구였냐는 질문에 “얘기하고 싶은 맘 없다”고 입을 닫았다.

    -어쨌든 특이한 경우네요. 대개는 보험 차원에서 양쪽에 다 줄 텐데.

    “맞아요. 내가 당한 것도 특이하고 (DJ쪽에) 확실히 선을 긋고 안 준 것도 특이하고. 양정모씨(전 국제그룹 회장)의 경우 괘씸죄에 걸려 은행을 틀어막으니 꼼짝없이 당한 거지만, 우리는 빚도 없는데 날 구속시킨 다음 부실기업이라고 몰아붙여 하루아침에 공중분해시켰어요. 독일군이 유태인 학살하듯 죽여버린 거예요.”

    최씨는 “그걸(대선자금을) 안준 게 지금도 후회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1998년 12월 하순에 발생한 옷로비사건을 끄집어냈다.

    “내 사건이 옷로비사건과 연결돼 있어요. 그 사건만 없었다면 타협의 여지가 있었지요. 어떤 기업처럼 나중에라도 갖다줬다면…. 그 사건의 주역으로 떠오른 사람이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의 부인입니다. 김태정 총장은 부인 때문에 자신이 옷로비사건에 휘말릴 듯싶으니까 서둘러 나를 구속해버렸어요.”

    -정권과 타협을 시도하지는 않았습니까.

    “IMF 사태를 맞아 다들 어려웠잖아요. 그걸 타개하려고 대한생명 주식의 50%를 해외기업에 매각해 10억달러를 유치할 계획이었어요. 그 돈을 신동아그룹과 대한생명 구조조정에 쓰려고 했어요. 미국의 보험회사 메트라이프와 구체적인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DJ가 방미할 때쯤 나도 IMF 이후 처음 미국에 가 메트라이프와 양해각서까지 체결하고 돌아왔어요. 연말쯤 가계약까지 갔는데 옷로비사건이 터져서 중단됐던 내 수사가 다시 시작된 거예요.”

    -1998년 6월 대통령 방미시 동행할 때만 해도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걸 혼동하는 사람이 많은데, 같은 시기에 미국에 간 건 맞지만 한 비행기에 타지는 않았어요. 나는 나대로 가서 메트라이프와 주식매각 협상을 한 것이고 DJ는 DJ대로 IMF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외자유치 활동을 벌인 거죠. 그런데 내가 메트라이프와 10억달러 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하니까 대외적으로는 마치 DJ가 가서 성사시킨 것처럼 발표한 거죠. DJ의 치적으로 삼기 위해.”

    -당시 검찰 수사팀은 최종적으로 대한생명의 외자유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해 되지도 않는 협상을 가지고 시간만 끈 것으로.

    “1998년 11월쯤 메트라이프와 가계약을 체결했어요. 보통 가계약이 이뤄지면 몇 개월 안에 본 계약을 맺게 되지요. 본 계약을 하기 직전 내가 구속된 거예요.”

    “검찰이 청와대에 두 차례 구속 품의”

    최씨에게 메트라이프와 가합의한 것을 입증하는 서류가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근거 자료가 있어야 최회장 주장이 설득력을 갖지 않겠습니까.

    “그걸 어떻게 입증한다? 검찰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거짓말을 했어요. 대한생명 국영화 과정의 위법성이나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인수 결격사유 등은 자료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다 근거가 있어요.”

    -당시 검찰 수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검찰은 1998년 중반까지는 정상적이었어요. 하반기에 이르러 김태정 총장 부인이 옷사건에 휘말리면서 총장을 보호하기 위해 태도가 돌변한 거예요.”

    -김태정씨도 수사 유보를 지시했잖아요?

    “그런데 마누라가 관련된 사건이 벌어지니까 청와대에 구속 품신 올리고 난리를 친 거예요. 두 번 품신해 안 되니까 박주선을 설득해 대통령에게 옷로비사건 내사 결과를 보고할 때 보고서 맨 끝에 ‘최순영은 나쁜 놈이니 구속해야 한다’고 쓰게 한 거예요.”

    최씨가 말하는 보고서란 그가 구속되기 하루 전인 1999년 2월10일 당시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올린 것으로, 옷로비사건에 대한 사직동팀의 조사결과를 담고 있다. 이 보고서 제목은 ‘검찰총장 부인 관련 비위첩보 내사결과’. 보고서의 결론은 옷로비사건은 최씨 부인 이형자씨의 자작극이라는 것.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항목의 ‘건의사항’이다.

    ‘최순영 회장 사건은 미화 1억6500만달러의 재산 해외도피, 수출금융 1억8500만달러의 편취행위로서 사안이 중대한 점, 공범인 사장 김종은이 구속된 점, 사건처리를 둘러싼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유포돼 있는 점 등을 종합하건대 최순영의 구속으로 사건의 신속한 종결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됩니다.’

    최씨는 바로 이 내용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최씨에 따르면 옷로비사건이 불거진 이후 검찰에서 1998년 12월과 1999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최씨 구속을 청와대에 품의했는데, 대통령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최씨는 당시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이 김대통령에게 검찰의 품의 내용을 보고했다고 주장했다.

    “처음엔 사실 박주선도 박지원(당시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도 제대로 보고했어요. 검찰에서 구속 얘기가 나오자 대통령에게 ‘재벌총수 구속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옷로비사건이 불거지니까 코너에 몰린 김태정 검찰총장이 최순영을 빨리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1998년 12월23일경 처음으로 구속을 품신했어요. 김중권 실장과 비서관 한 명이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했습니다. 대통령이 거절하자 김태정이 당황했지요. 이듬해 1월초 검찰에서 두 번째 품의가 올라갔어요. 역시 김중권 실장을 통해 보고됐는데 그때도 대통령이 거절했어요.

    그러자 김태정이 마지막 수단으로 박주선에게 압력을 넣은 것 같아요. 어떻게 옷로비사건을 보고하면서 내 구속을 건의합니까. 대통령이 나쁘게 인식하도록 만든 거예요. 김태정이 박주선한테 이 보고서를 받아보고는 가슴이 찔리니까 마지막 ‘건의’ 항목을 지우고 박시언(당시 신동아그룹 부회장)에게 준 거예요. 김태정이 ‘최회장 회개하라고 해!’ 하면서 던진 걸 박시언이 얼른 복사해서 갖고 나왔지요. 이게 바로 사건의 핵심이에요.”

    -김중권 비서실장이 김대통령에게 그런 보고를 했다는 것은 배석했다는 비서관한테 들었습니까.

    “그건 지금 밝히지 못해요. 김실장이든 비서관이든 둘 중 한 사람한테 들은 것만은 확실해요. 이 정권 끝난 다음에 확인해 줄 수 있어요.”

    “김중권이 도우려 한 건 사실”

    -1999년 1월 사직동팀의 옷로비사건 내사에 김중권 실장이 개입했다는 설도 있는데요. 목사들 얘기를 듣고.

    “김실장이 도우려 했던 건 맞아요.”

    -사직동팀 내사 과정에 도움을 줬다는 건가요.

    “옷로비사건을 조사한 사직동팀 수사관 4명 중 한 명이 김실장 직계예요. 김실장이 약수교회 장로인데, 그 사람이 그 교회 교인이에요. 그래서 김실장은 옷사건 내사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박주선이 최종보고서에서 사건을 조작한 것도 알았지요. 이런 내용은 나중에 수사관 4명이 법정에 나와 증언할 때 알게 된 겁니다. 수사관들 중에는 박주선 직계도 있고 박지원 직계도 있었어요. 다 자기 직계를 심어놓고 따로 보고를 받고 있었어요.”

    -김중권 실장이 조작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건가요.

    “그것까지는 몰라요. 권력 내부의 문제니까.”

    -사직동팀 요원들이 누구누구의 직계라는 것은 누구한테 들은 얘기입니까.

    “우리 나름대로 그 정도 정보는 갖고 있어요.”

    박주선씨와 김태정씨가 최종보고서를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은 1999년 11월 옷로비사건 특검수사 과정에서였다. 그해 12월 대검 중수부는 두 사람을 구속했다. 두 사람 모두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가 적용됐는데, 김씨에게는 공문서 변조 혐의가, 박씨에게는 증거은닉 혐의가 추가됐다. 법원은 김씨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집행유예)을 내렸지만 박씨에 대해서는 일부 무죄 및 선고유예 판정을 내림으로써 검찰 수사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

    최씨는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에 박시언씨가 맡았던 일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박씨를 그룹 부회장으로 영입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지 않았다.

    -박시언씨와 원래 친분이 있었습니까.

    “모르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토록 민감한 시기에 그런 중요한 자리에 기용할 수 있습니까.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런 얘기는 여기서 하지 맙시다.”

    재미사업가인 박시언씨는 최순영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검찰과 정치권에 구명 로비를 펼쳤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신동아그룹 부회장에 취임한 것은 최씨가 처음 검찰 조사를 받은 직후인 1998년 6월. 정식 직책은 신동아그룹 비상근총괄부회장 겸 대한생명 고문이었다.

    박시언씨는 김태정씨와 친분이 깊었고 박주선씨와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었다. 김대통령과는 미국 망명 시절 경제적 도움을 주면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5대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동생 로저 클린턴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최순영씨 수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1998년 11월, 그가 김규섭 서울지검 3차장 방에 드나드는 것이 기자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총수가 구속 위기를 맞으면 기업에서는 필사적으로 로비하지 않습니까. 당시 박시언씨 영입을 두고 말이 많았지요. 박씨를 통해 검찰 수사상황을 파악했던 거지요?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게 실수였는지 몰라요. 나는 구속될 줄 몰랐어요.”

    -1999년 11월16일 옷로비사건 특검은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어요. 당시 정씨는 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면서 이형자씨가 자기한테 ‘박시언을 영입해 P씨(현 정권 실세)를 잡았다’ ‘정치권 로비에 100억원이 들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완전히 거짓말이에요. 허무맹랑한 얘기예요. 처음 듣는 얘기예요.”

    -당시 박시언씨가 김태정 검찰총장을 여러 차례 만났지요?

    “만나긴 만났는데… 잘 생각나지 않네요. 내가 진짜 죄를 지었다면 겁이 나서라도 굉장히 로비했을 텐데, (내 행위가) 범죄인지 아닌지 잘 몰랐기 때문에….”

    -검찰이 조사를 벌이고 언론과 시민단체가 나섰다면 위기감을 느껴야 정상 아닙니까.

    “시민단체에서 떠드는 내용이 사실이 아니었으니까요. 외화 빼돌린 것도 없고 해외에 호화별장이나 비행기를 사들인 적도 없고. 검찰에서 언론플레이 하고 시민단체에도 흘려준 거예요. 나중에 다 거짓말이라는 게 확인됐어요. 확인된 다음엔 기사를 안 쓰더라고요. 그 탓에 나는 지금 부도덕한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는 거예요. 해명은 하나도 안 되고.”

    최씨가 해외에 호화 경비행기와 별장을 갖고 있다는 의혹은 말 그대로 의혹에 그쳤다. 이와 관련, 당시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입증할 방법이 없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의 구속배경과 관련해 또 한가지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이른바 ‘9인 비선조직’의 음모. 최씨에 따르면 ‘9인 비선조직’이란 동교동계 실세들로 구성돼 있는데, 그 모임에서 신동아그룹 해체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DJ 정권 초기 배후에서 정권을 조종한 비선 조직이 있었어요. 모두 9명인데 권노갑이 그 중심 인물입니다. 아태재단 상임이사를 지낸 이수동도 끼여 있어요. 거기서 이 정권의 인사권, 이권 문제 등 모든 걸 관장했어요. 이 비선 조직은 정기적인 모임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마다 일정한 장소에 모여 주요 사안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김태정 검찰총장이 거기에 붙은 거예요. 비선은 아니지만 그 모임에 참석해 ‘신동아그룹 최순영은 나쁜 놈이니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자기 마누라를 음해한다고. 모임에서는 옷로비사건과 DJ에 정치자금 내지 않은 것을 문제삼아 신동아그룹을 공중분해시키자는 얘기가 나왔어요.”

    ‘9인 비선조직’의 음모

    최씨는 이 모든 얘기를 황용배씨한테 들었다고 말했다. 영부인 이희호 여사와 친분이 깊은 황씨는 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 출신으로 현 정권에서 마사회 감사를 지냈다. 지난해 12월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에 따르면 황씨는 사위 양아무개씨 등이 코스닥 등록업체인 S사의 미공개 주식정보를 이용해 시세차익을 올린 혐의로 금감원 조사를 받게 되자 양씨 등 2명으로부터 금감원 조사 선처 명목으로 2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다. 또 국군정보사 직원에게 3000만원을 주고 S사 주가조작 내용을 고발한 진정인을 청부폭력한 혐의도 받았다.

    그는 옷로비사건 소문이 퍼지던 1998년 12월 하순 이형자씨와 연결된 기독교계 인사들의 부탁을 받고 이희호 여사에게 옷로비사건을 알리면서 최순영씨 사법처리에 대한 기독교계의 우려를 전했다.

    최씨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자.

    “DJ와 이희호 여사의 가신그룹은 서로 라인이 달라요. DJ 가신그룹의 대표는 이수동씨예요. 한 30년 간 집사생활을 했죠. 반면 이여사를 20년 동안 보필하고 시중 들어온 사람이 바로 황용배씨예요. 이여사가 다니는 창천교회 장로이기도 하죠. 이여사 직속 계보예요. DJ가 대통령 된 다음에 황씨에게 ‘고생했다’면서 자기가 타고 다니던 차를 선물로 주더래요. 그 얘기를 듣고 우리가 황씨에게 ‘그것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박물관에 기증하면 큰 기념물이 되겠다’고 얘기한 적도 있어요.”

    -황용배씨도 ‘9인 비선조직’에 속했습니까.

    “그쪽에서 가입시키려 애썼는데 안 들어갔어요. 옷로비사건 때 그 사람이 나를 좀 도왔어요. 그 전엔 서로 전혀 몰랐는데, 같은 장로인데다 내가 기독교계에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인지 나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쪽(정권 실세들) 정보는 황용배 장로를 통해 들을 수 있었어요.”

    -‘공중분해’ 얘기는 황용배씨한테 직접 들으신 겁니까.

    “황용배 장로가 얘기하니 알지 우리가 어떻게 그 비선조직에서 비밀리에 한 얘기를 알겠어요.”

    -정확한 표현이 무엇이었습니까.

    “‘신동아그룹 공중분해’라는 말은 확실하고, 나머지 얘기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9인 비선조직’에 관한 얘기는 최씨가 대법원에 제출한 상고이유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9인의 비선조직에는 현 동교동계 실세들이 포진해 있으며 K 전검찰총장은 비선조직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 자택에서 모일 때 가끔 참석해 신동아그룹 해체 음모를 협의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권노갑씨가 ‘9인 비선조직’을 이끌었다는 게 분명합니까.

    “동교동계가 주축이라면 누가 책임자겠어요? 내가 얘기 안 해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황장로를 면회해 물어보세요. 그 사람도 억울하게 당했기 때문에 이 정권에서는 말하지 않을지 몰라도 정권이 끝나면 말할 겁니다. 정권이 바뀌면 비선조직에서 국정을 농단한 사실이 다 밝혀질 겁니다.”

    지난 3월 1심 재판부는 황씨에게 알선수재죄를 인정해 징역 2년에 추징금 2억2700만원을 선고했다. 항소심에서는 추징금은 그대로이고 실형은 1년6월로 감형됐다. 황씨는 상고했다가 취하했다. 최씨는 황씨가 구속된 것을 일종의 보복으로 규정했다.

    “옷로비사건 때 우리를 도와준 것 때문에 당한 거예요. 그 사람이 그때 정권 실세들한테 굉장히 협박을 받았어요. 오죽하면 사직동팀 관계자한테까지 협박을 받았겠습니까. 그 얘기까지도 저한테 했어요. (황용배) 집 앞에 와서 나오라고 불러내서는 차안에서 나를 돕지 말라고 협박했다는 겁니다. 사직동팀 관계자가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정보를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황용배씨가 우리 편을 드니까 이희호 여사한테 중상모략까지 했어요. 황장로가 최순영한테 20억원을 받았다는. 이여사가 그런 내용이 적힌 편지를 내보이면서 ‘돈 받았다는 투서가 들어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보기에 황장로가 ‘음해’라며 펄쩍 뛰었대요.”

    최씨는 비선조직의 ‘음모’가 현실로 드러나 자신이 구속되고 대한생명이 국영화되는 등 신동아그룹이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고 주장했다. 대한생명 국영화에 대해서는 금감위의 부실기업 결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은행 주식 가졌던 게 죄냐”

    이 주장의 핵심은 금감위가 대한생명의 부채를 실제보다 과다계상했다는 것. 당시 금감위 발표에 따르면 대한생명은 1999년 6월말 현재 부채가 자산을 2조6700억원 초과했다. 부실 내역은 계열사 대출금 1조8800억원, 유가증권평가손 7900억원이었다. 하지만 부실규모가 두 배로 부풀려졌다는 게 최씨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계열사 청산가치 평가에서 4600억원, 주식시가평가로 7900억원, 기타 부동산 저평가 등으로 2000억원 등 모두 1조4500억원이 부당하게 부실로 잡혔기 때문에 실제 부실금액은 1조2200억원이라는 것이다.

    “순전히 가설로 계산했어요. 대한생명이 일시에 망할 경우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모든 보험가입자한테 돈을 내줄 수 있는지 없는지 가정한 겁니다. 이른바 지불준비금이라는 겁니다. 따져보니까 내줄 돈이 모자란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실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는 어떤 기업도 살아남지 못해요. 삼성도 못 살아남아요. 부채가 있는 기업이라면 다 그렇죠. 딱 날짜를 정해 일시에 은행빚을 다 갚으라면 살아남을 수가 없죠. 그런 이론으로 대한생명을 국유화한 거예요. 당시 대한생명이 신동아그룹 계열사에 빌려준 돈을 다 떼일 것으로 보고 부실로 잡은 거예요.

    또 하나. 1997년인가 1998년인가부터 시가평가제라는 걸 도입했어요. 대한생명 같은 보험회사들은 증권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채권이야 금리가 고정돼 있으니 상관없지만 주식은 시세에 따라 가격 변동이 심하지요. 시가평가제가 실시되기 전에는, 연말 결산 때 매입 가격 그대로 장부에 적었어요. 그런데 시가평가제가 되면서 1000원에 산 주식이 500원으로 떨어지면 500원 적자 낸 것으로 기재하게 된 거예요.

    IMF 이후 정부가 상당수 은행을 부실금융기관이라며 퇴출시켰잖아요. 당연히 은행 주식이 폭락했죠. 당시 대한생명이 경기 조흥 제일 서울 등 4개 은행의 대주주였어요. 구조조정 과정에 그 주식들이 저평가됐습니다. 그걸 부실로 잡은 거예요. 그건 국가에서 책임질 일이에요. 은행 주식 갖고 있던 게 죄입니까.”

    “DJ에게 대선자금 안 내 63빌딩 빼앗겼다”

    대한생명을 부당하게 뺏겼다고 여기는 최순영씨는 법원에 부실금융기관 결정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하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도 청구해놓았다.

    -시가평가제 도입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를 때려잡을 때 그것을 악용한 거죠. 그런 식으로 따지면 생명보험사 중에는 삼성생명만 빼고 다 공적자금이 들어가야 해요. IMF 이후 2~3년 동안 대기업은 다 어려웠어요. 대한생명이 진짜 부실기업이었다면 오늘날 죽어버렸을 겁니다. 대한생명이 작년에 8800억원 흑자를 냈어요. 올 상반기 흑자액은 6100억원이에요. 매월 1000억원 이상 흑자를 냈다는 얘기입니다. 흑자가 안 났어야 자기네가 주장하는 대로 부실기업이지요. 대한생명을 뺏은 후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은 현찰이 아니에요. 이걸 아무도 몰라요. 국가가 3조5500억원의 현찰을 집어넣어 그 돈으로 직원들 월급도 주고 보험금도 지급해 살아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대한생명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채권이었어요. 7년 만기에 5년 거치 2년 분할상환 조건이었어요. 현찰은 100원도 안 들어갔어요.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은행 부채는 없었습니까.

    “100원도 없었어요. 우리뿐만 아니라 보험회사는 은행 빚 안 집니다.”

    현찰 아니라 채권으로 공적자금 투입

    유동성 부족은 금감위가 대한생명을 부실기업으로 판정하는 데 중요한 잣대였다. 그런데 최씨에 따르면 당시 대한생명은 매월 5000억∼6000억원의 보험료 수입 등으로 3조6000억원대의 유동자산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동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금감위는 대한생명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기 때문에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회생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거짓말이에요. 내가 구속된 지 한 달 후인 1999년 3월말 결산 당시 대한생명이 갖고 있는 현금예금액이 9300억원이었습니다. 또 가용할 수 있는 유가증권이 2조6700억원이었어요. 현찰이 모자라면 유가증권 팔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었어요. 공적자금으로 현찰이 투입됐다면 또 몰라요. 하지만 그것이 채권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유동성에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최씨가 또 하나 문제삼는 것은 구조조정 과정이다. 자구노력 기회를 충분히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다른 기업과 비교할 때 형평에 어긋났다는 것. 최씨에 따르면 자구계획서 제출기간을 1주일밖에 주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공적자금 투입까지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부실징후가 보이는 기업에 대해선 경영개선 권고, 개선 요구, 개선 명령 등 3단계를 밟는다. 그런데 대한생명의 경우 이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게 최씨 주장이다.

    “부실이 있더라도 일단 개선명령을 내립니다. 보통 1년 내지 1년 반 걸려요. 충분히 시간을 주는 거지요. 과거에 많은 생명보험회사가 그런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개선되지 못하면 관리명령을 내려 차압도 하고 국유화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 달간 조사한 후 곧바로 매각 결정을 내린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에요. 대한생명보다 재무구조가 훨씬 나쁜 동아생명에도 1년이라는 시간을 줬어요.”

    화제를 최씨가 구속된 사건으로 돌렸다. 이 사건의 표면적인 출발점은 신동아그룹 계열사인 신아원 사장 김종은씨가 공갈혐의로 구속된 일이다. 1998년 4월 김씨는 최씨에게 위장무역사실을 폭로하겠다며 30억원을 요구했다. 이에 최씨는 약속장소에서 김씨를 만나 10억원을 주고 영수증과 각서를 받았다. 이때 미리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김씨를 검거했다.

    그 즈음 최씨의 재산해외도피 혐의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서울지검 특수1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최씨가 검찰에 불려간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안 돼서였다.

    “무역을 하기 위해 신아원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초대 사장에 김종은을 임명했어요. 나중에 알게 됐지만, 김종은은 들어오자마자 650만달러 규모의 무역거래에서 사기를 쳤어요. 카자흐스탄에서 기름을 사들이는 사업이었어요. 1999년 11월쯤 검찰에 정식으로 고발했어요. 내가 위장무역의 주범으로 인정돼 3년 실형을 받았는데, 주범은 내가 아니라 김종은이에요. 김종은이 650만달러어치를 해먹고는 그걸 메우기 위해 위장거래를 시작한 겁니다. 나도 사기 당한 거예요. 검찰도 이 사실을 알면서 아직 조사를 하지 않습니다. 다음 정권에서 꼭 김종은을 구속시킬 겁니다. 나는 주범이 아니에요. 김종은한테 사기 당하고 (신동아그룹은) 공중분해되고…. 어처구니가 없어요.”

    1998년 4월 공갈 혐의로 구속된 김종은씨는 그해 12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자 서울지검 특수1부는 김씨를 다시 구속했다. 수출입계약서를 허위로 작성하는 방법으로 총 1억6500만달러의 외화를 밀반출한 혐의였다. 이것은 최순영씨의 혐의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김씨는 이듬해 다시 집행유예판결을 받고 출소했다.

    -김종은씨가 러시아 쪽으로 발이 넓은가 봐요.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만나게 해주고.

    “그 일이 내가 속아넘어간 결정적 계기예요.”

    -1996년에 김종은씨 주선으로 카자흐스탄 대통령을 만나 1000만달러를 전달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죠?

    “검사가 유도신문해 악의적으로 이용한 거예요. 그걸로 장난을 치려다 국제문제가 됐어요. 법정에서 재판장이 나한테 묻더라고요. ‘검찰에서 그 얘기는 없던 걸로 하자는 데 동의하겠느냐’고. 그래서 좋다고 했죠.”

    최씨는 이 사건에 대해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돈 전달자를 두고 최씨와 김종은씨 말이 다르다. 최씨에 따르면 김씨가, 김씨에 따르면 최씨가 직접 카자흐스탄 대통령에게 1000만달러를 제공했다는 것.

    “김종은한테 주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대로 전달했는지 절반씩 나눠 먹었는지 배달사고를 냈는지 의심스러워요.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한심스러워.”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그는 카자흐스탄 국방장관에게도 100만달러를 제공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묻자 최씨는 “그 얘기는 더 하지 말자”며 눈길을 돌렸다.

    -공소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까.

    “내 혐의는 크게 세 가지예요. 횡령, 업무상 배임, 그리고 신아원을 통해 외화를 유출했다는 것. 그런데 횡령 부분은 최근 대한생명과 국세청이 다툰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대여금으로 인정됐어요.”

    최씨가 말하는 대법원 판결은 대한생명이 영등포세무서를 상대로 낸 법인세부과처분 취소 청구소송에 대한 것이다. 대한생명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최순영 당시 신동아그룹 회장이 대한생명에서 가져간 1800억원에 대해 국세청이 법인세 등을 부과하자 소송을 냈다. 그러나 원심에 이어 최종심에서도 패소했다. 재판부는 “대한생명이 최씨에게 제공한 돈은 최씨가 횡령한 것이 아니라 무이자로 대여한 것”이라며 “대한생명은 1800억원에 대한 이자수입을 무이자 대여로 누락시킨 만큼 이 부분을 회사소득으로 보고 법인세를 부과한 것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대한생명은 2000년 10월 최씨를 상대로 횡령금 750억원을 돌려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배임 혐의는 어떻습니까.

    “합법적 절차를 밟아 대출한 것까지 배임으로 몰아붙였어요. 억울합니다.”

    -재산국외도피 혐의도 인정하지 않습니까.

    “도피 부분은 잘 몰랐는데, 재판부 얘기가 외화유출 혐의라는 건 나중에 회수됐더라도 일단 해외에 돈이 나가는 순간 해당된다는 겁니다. 제가 항소심에서 감형된 건 돈이 다시 들어온 점이 정상참작됐기 때문이에요. 나는 무역사기를 당한 사람입니다. 무역의 ‘무’자도 모르는 문외한입이다. 김종은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거예요.”

    “회사 되찾아 추징금 내겠다”

    대한생명을 되찾겠다는 최씨의 의지는 숱한 소송을 빚고 있다. 대한생명 부실기업 결정에 대한 행정소송, 위헌소송에 이어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에 대해서도 소송으로 맞서고 있다. 그는 한화 컨소시엄이 대한생명 인수자로 결정된 후 예금보험공사를 상대로 법원에 매매계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법원이 이를 기각하자 곧바로 항고했다. 또 한화 컨소시엄이 예금보험공사와 인수계약을 맺은 직후엔 한화그룹 5개 계열사를 상대로 주주권행사금지 가처분신청도 냈다.

    -한화의 인수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수)가격도 엉터리지만 더 큰 문제는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퇴출 당한 충청은행에 한화가 갖고 있던 주식이 17%입니다. 충청은행을 인수한 하나은행에 손실보전 명목으로 공적자금이 1조4800억원 투입된 데 대해 대주주로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또 외환위기 직후 퇴출 당한 한화종금에도 1조48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는데 그중 약 6000억원이 회수되지 못한 실정입니다. 한화가 대한생명에서 빌려간 돈도 800여억원이 있어요. 이런 기업이 어떻게 인수 자격이 있습니까.”

    최씨는 “한화와는 선대 때부터 악연이 있다”며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부친 김종희씨가 이후락씨와 사돈간이었어요. 이후락씨가 정보부장 할 때 선친이 대한프라스틱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초 이씨가 선친을 중앙정보부에 3일간 감금하고는 백지위임장을 강요해 회사를 빼앗았어요. 당시 플라스틱 제조회사가 전국에 5개 있었는데 모두 한국프라스틱으로 통·폐합됐습니다. 선친은 이 일로 울화병을 얻어 1976년에 돌아가셨어요. 그후 한국프라스틱은 한국화약그룹(한화의 전신)에 넘어갔습니다. 이번에도 또 권력을 앞세워 뺏어가려 해요.”

    최씨는 한화의 대한생명 인수는 ‘특혜’라고 주장했다.

    -추징금은 다 냈습니까. 항소심에서 2200억원이 나왔지요.

    “회사 찾으면 다 낼 수 있어요. 몇조원을 찾는데 몇천억원이 문제겠습니까.”

    -재산을 대한생명에서 가압류 조치 해놓았지요? 한남동 자택과 선산, 유가증권 등 한 70억원쯤 된다는데.

    “맞아요. 난 재산이 그것밖에 없어요. 다 압류당하고 경매 처분됐어요.”

    최씨를 구속한 서울지검 특수1부는 지난해 7월, 보석으로 풀려난 최씨에 대해 8000만달러 재산국외도피와 배임 혐의로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영장을 기각했다. “최순영씨는 이미 1억6500만달러 재산도피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으며, 이번 범죄사실로 다시 구속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없고 수사가 더 필요하다”는 게 기각사유였다. 이에 검찰은 보강수사를 거쳐 1년이 지난 올 7월 최씨를 추가로 기소했다. 업무상 횡령 혐의가 덧붙여졌다.

    “정권이 바뀌면 이길 수 있다”

    이에 대해 최씨는 “검찰이 공소권을 남용해 구속 당시 혐의와 관련된 사안을 가지고 다시 기소했다”고 주장했다. 공교롭게도 검찰이 최씨를 추가기소한 7월9일은 대법원이 옷로비사건과 관련, 국회 위증 혐의로 기소된 이형자씨 자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날이다. 최씨는 이를 두고 “검찰이 옷로비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희석시키고 나를 망신주기 위해 날짜를 맞춰 기소했다”고도 주장했다.

    최씨는 현재 지병인 협심증과 심근경색 등으로 병원에 자주 다니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횃불선교원에 나가 있으며, 인근 야산을 산책하거나 기도하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다. 그의 삶의 지상목표는 ‘빼앗긴’ 기업을 되찾는 것.

    그는 “제기한 소송 중 한 건만 이겨도 대한생명을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정권이 바뀌면 이길 수 있다”는 얘기를 구호처럼 되뇌면서. 과연 그가 믿는 신은 그의 ‘한’을 풀어줄 것인가.

    ◇ [철저 검증] 최순영의 허와 실

    최순영씨 얘기 중엔 주관적인 주장이 적지 않다. 이해당사자의 반론과 비교하거나 사실관계를 따져볼 사안이 많다. 먼저 자신의 구속이 옷로비사건과 관련돼 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살펴보자.

    최씨 구속에 관여했던 검찰 관계자는 “기업을 잃은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의 구속이 옷로비사건과 관련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며 “최순영은 죄질이 좋지 않아 애초 사법처리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검찰이 1998년 5월 최순영을 조사한 후에도 사법처리하지 않은 것은 외자유치 명분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최순영을 사법처리할 방침이었으나 상부에서 보류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공갈죄로 구속돼 있던 공범 김종은과 최순영을 외화도피 혐의로 입건만 해둔 채 본격 수사는 미뤘다. 그해 10월부터 언론과 시민단체 등에서 최순영의 비리를 제시하며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그 무렵 수사팀은 대한생명의 외자유치 협상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만한 결정적 단서를 잡고 최순영의 혐의에 대해 보강수사에 착수했다.

    그해 12월 하순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종은을 구속한 것은 최순영을 구속하겠다는 수사팀의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외화도피 혐의의 공범인 김종은을 구속했으니 최순영 구속은 시간 문제였다. 수사팀은 상부에 구속을 품신했다. 구속이 연기된 건 옷로비사건 때문이었다. 투서가 들어가니 위에서 뭔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옷로비사건으로 구속 연기”

    이 수사관계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씨의 주장은 다소 무리다. 당사자인 최씨로서는 그렇게 볼 측면도 있겠지만, 옷로비사건과 무관하게 그의 혐의내용과 사법처리 여부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상태였고, 수사팀이 구속방침을 정했던 사실이 객관적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당시 검찰총장이던 김태정씨는 “내가 밉겠지만 지금까지도 나를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수사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늦게 구속한 것이 화근이었다.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내 손으로 장로를 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씌웠던 것 같다. (최씨가) 외자유치 협상만 성공시키면 구속하지 않으려 했다. IMF 사태로 국가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국익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98년 10∼11월 외자유치가 거짓말이라는 게 드러났다.

    그때부터 수사팀은 적극적으로 구속을 건의했다. 연말까지 외자유치가 안 되면 구속하기로 서울지검과 묵계가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그해 12월말이나 이듬해 1월초 구속됐을 것이다. 하지만 옷로비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또 늦춰졌다. 보복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옷로비사건의 핵심 쟁점은 최씨의 부인 이형자씨가 당시 검찰총장 부인이던 연씨에게 옷로비를 했는지, 또 연씨는 이씨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는지다. 기사 앞부분에서 밝혔듯 옷로비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의 진실이다. 이씨가 연씨에게 옷으로 로비한 사실이 없는 데다 연씨도 옷값대납 요구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는 특검과 법원에서도 인정된 사실이다.

    이처럼 실체 없는 사건이 커진 것은 언론의 ‘예단’과 ‘정치 검사’로 낙인찍힌 김태정씨에 대한 세간의 반감 때문이었다.

    배정숙씨나 정일순씨가 이씨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 연씨가 어떤 옷을 얼마나 어떻게 구입했고 언제 반환했는지, 정일순씨가 왜 장부를 고쳤는지, 박주선씨와 김태정씨가 어떤 자료를 주고받았는지는 사건의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곁가지에 대해서는 경찰(사직동팀)과 검찰(서울지검, 대검), 특검 수사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 심지어 법원도, 국회 청문회 위증사건을 맡은 재판부(서울지법 형사23부)와 김태정 박주선씨 사건을 맡은 재판부(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가 서로 다른 판결을 내린 상태다. 전자는 이형자씨 증언에 무게를 뒀고, 후자는 연정희씨에게 죄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형자씨 자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연정희씨가 옷 구입과 관련해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한 서울지법 형사23부조차 “국회에서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가린 것일 뿐 사건의 실체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며 사건의 본질에 대한 판결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