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소년 지킴이’ 강지원(姜智遠) 서울고검 검사가 11월6일 명예퇴직했다. 그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퇴직의 주된 이유가 청소년 보호·교육활동의 본격화를 위한 것이지만, 검사생활 24년 내내 한시도 떠나지 않던 검찰에 대한 회의 탓도 크다고 털어놨다. 아울러 ‘청와대가 검찰조직과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강도높은 직언도 서슴지 않았다.
강검사 인터뷰는 포도(鋪道) 위에 은행잎이 뒹구는 10월의 마지막날 오후, 서울고검 1522호실에서 이뤄졌다. 퇴직일인 11월6일이면 비워야 할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지난 2월 명퇴를 결심했다. 당초 11월 중 명퇴신청을 하려 했는데, 신청서를 내기도 전 언론이 ‘선수’치는 바람에 예정보다 한 달쯤 앞당겨 신청서를 내게 됐다”며 허허롭게 웃었다.
‘청소년 지킴이’ ‘교육개혁가’ ‘탤런트 검사’…. 주지하듯, 세간에 각인된 강검사의 이미지는 그렇다. 이는 청소년보호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지내며 왕성한 청소년 관련활동을 한 이력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검사였다. 3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이 검찰에 회의를 갖게 된 배경, 공안·특수부 검사 시절 체험한 수사 외압(外壓) 등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들과 검찰개혁에 대한 견해를 작심하고 털어놨다.
초임검사 시절 검찰에 회의
강검사는 “나 자신이 워낙 검찰에 회의가 많은 사람”이란 말부터 꺼냈다. “검찰조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검찰에 정을 느낀 적이 없다”고도 했다. 이율배반적인 말처럼 들린다.
-검찰에 회의가 많다, 정을 못 느낀다는 말이 선뜻 와닿진 않는데요.
“원래는 1972년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재무부를 거쳐 부산세관 행정사무관으로 근무했어요. 그때 세관의 부패를 체험했습니다. 동료와 부하직원들이 하나둘 구속되는 걸 보면서 ‘공직사회가 정말 썩었구나’ 싶어서 법조계는 그나마 깨끗할 것이란 생각에 사시 공부에 매달렸는데 어쩌다 수석으로 붙었어요. 그때가 1976년이었죠. 사법연수원 마치고 1978년에 검사로 임용됐는데, 사시성적과 연수원성적을 합한 뒤 종합순위를 매겨 임용기준으로 삼는 거예요. 저는 사시성적이 너무 좋아 종합순위 1등이었으니 당연히 서울지검으로 발령받을 줄 알았죠. 1등을 서울지검으로 발령내는 게 당시 관행이었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저를 전주지검으로 보내는 겁니다. 당시 2등은 서울지검에, 3등은 폭력전과가 있던 터라 지방으로 발령났습니다.”
-내막이 있을 것 같은데요.
“대학 2학년때인 1969년 3선개헌 반대 데모를 해서 무기정학을 당한 사실 때문이었어요. 중앙정보부가 검찰에 관련기록을 보내 전주지검으로 발령받은 거예요. 당시 저는 발령을 거부하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검찰측에선 ‘그러면 신문에 난다’며 ‘1년 뒤엔 서울로 빼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첫 검사 발령 때부터 검찰에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죠. 그때 받은 충격이 컸어요. 세관의 부패에 결코 뒤지지 않는 병폐가 검찰에 있더군요. 그때 든 회의가 이후 저의 24년 검사생활을 줄곧 지배했습니다.”
-초임검사 시절의 기억이 그토록 선명하게 각인됐다는 말씀인가요?
“그 이후론 계속 독재정권이었잖아요. 그런 후 서울지검 공안부로 오라는 제의를 몇 차례 받았는데, 안 갔어요. 그러자 1988년에 공안부로 강제발령을 내더라고요. 그때도 사흘을 버텼어요. 그랬더니 모 간부가 지금도 잊지 못할 한마디를 남겼어요. ‘너만 살려고 하느냐?’ 이거, 정말 기막힌 표현입니다. 결국 그 말의 압력에 굴복했죠. 당시는 6·29 직후여서 공안상황이 이전보다는 조금 나을 때이긴 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공안사건 공소장을 보면 누가 어디서 태어나 어떠어떠한 불온서적을 읽고 어쩌구저쩌구 했다는 자질구레한 내용들이 무려 한 페이지 분량이나 됐어요. 그것을 검찰에선 모두사실(冒頭事實)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는 공소장을 썼던 거죠. 저는 이걸 폐지해야겠다 싶어 모두사실을 모두 배제해버렸어요. 그리고 공안사건으로 계류된 사건들을 연말에 대대적으로 공소취하해버렸죠. 야당 탄압용으로 생겨난, 수년 묵은 사건들을 없애버린 겁니다.”
-강검사만 그렇게 한 거란 말씀인가요?
“제가 처음 한 거죠. 검찰이 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건 검찰 본연의 자세가 아니다 싶었으니까. 그러다 1989년 4월 동해시 국회의원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1988년), 일명 서석재 사건을 맡게 됐죠. 선거법을 위반한 이 사건으로 서석재씨는 후에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되죠. 아무튼 그때 수사 갈등이 말 못할 정도로 컸어요. 이건 에피소드인데 당시 검사장이, 지금은 돌아가신 분입니다. 그분이 제게 중간간부는 일절 배제하고 자기한테 직보하라는 희한한 지시를 내리는 거예요. 검찰을 배후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는 걸 그때 간파했죠. 게다가 당시 중간간부는 사사건건 순응하지 않는 제게 ‘일을 피하는 검사’라고 모략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저는 ‘이제 당신들과는 같이 일 못하겠다’고 중간간부에게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공안부 탈출’을 꿈꾼 거죠.”
-그러면 1988∼89년에만 공안부 검사생활을 한 건가요?
“그렇죠. ‘폭탄선언’ 후 부서개편 때 중간간부가 저를 부르더니 ‘아무 데나 보낼 수는 없으니 서울지검 특수부로 보내주겠다’고 하기에 거부했어요. 한직(閑職)이지만, 공판부로 가고 싶다고 자청했죠. 그랬더니 검사장이 직접 불러요. ‘공판부를 자청한 게 사실이냐?’고 묻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공안부는 지긋지긋하다’고 계속 뻗댔죠. 결국 공판부 공판실장으로 가게 됐는데, 당시 그 자리는 서울보호관찰소장 겸직이었어요.”
-그때 청소년 보호활동에 눈뜬 거군요. 이런 구체적 사연들은 못 들어본 것들인데요.
“처음 공개하는 겁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제가 ‘날개’를 달았죠, ‘탈출’에 성공했으니. 그런데 세상이 참 웃기더군요. 서석재 사건 당시 노태우씨와 YS는 앙숙이었죠. 그런데 그 후엔 3당 합당에 함께 참여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로 그 서석재 사건을 계기로 YS와 노태우씨측이 가까워졌다고 합디다. 서석재씨가 구속됐다 보석으로 풀려난 뒤 YS가 소련을 방문하거든요, 정부 지원으로. 그때 절실히 깨달았죠. 말단검사는 열심히 수사하는데, 위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따로 노는구나.”
-당시에도 검찰이 정치권에 휘둘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짐작만 했죠. 그런데 곧 다시 체감하게 됐습니다. 예를 들면요, 지금도 제가 후회하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 공안부 검사 시절 당시 재야운동가였던 이부영씨(현 한나라당 의원)가 어떤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석방되자마자 여의도 무슨 집회에서 또 불온한 발언을 했다고 해서 구속영장신청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게 제 소관이었어요. 저는 신청서에 서명하지 않았죠. 그렇게 작은 일로 사람을…그렇잖아요? 하루종일 서명을 거부했죠. 그랬더니 지위가 한참 높은 상급간부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상급간부라면 어느 정도 지위를 뜻하는 건가요?
“누구라고 밝히진 않겠습니다(그러나 강검사는 기사에 언급하지 않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누구’인지를 밝혔다). 어쨌든 그는 ‘강검사 심정은 알겠으나 좀더 대국적으로 생각해달라’며 간곡할 정도로 저를 달랬어요. 그래서 제가 ‘인간관계를 무시할 수 없어 신청서에 서명은 하겠다’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어요.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후엔 이 사건을 절대 맡지 않겠다는 거였죠. 부끄러웠습니다. 당시 저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론 서명한 사람이잖아요. 물론 제가 서명 안 해도 다른 검사가 했을 겁니다. 재야인사 한 명 구속하는데 정치권이 저렇게까지 총력전을 벌이는가 싶어 젊은 검사로서 ‘참으로 검찰이 치욕적이다’는 생각밖에 안들었어요.”
10월31일 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강지원 검사. 명퇴와 동시에 그는 변호사 개업을 했다.
“지금도 후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왜 진작 검사복을 벗지 못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공판부 근무를 자청한 후 청소년사업에 눈뜬 뒤부터 거기에 천착하다보니 결단을 내리기 힘들었던 탓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검찰개혁에 대해선 늘 내부에서 목소리를 높였어요. 특별검사제 도입이나 검찰총장 인사청문회에도 찬성해왔고. 특검제 논의는 예전엔 금기였어요. 퇴직하는 날 출입기자실에 들러 이런 얘기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 검찰 50년의 역사는 청와대와 검찰 간 유착과 갈등의 치욕스러운 역사다. 검찰을 장악하려는 역대 정권에 대해 검찰은 끊임없이 저항했지만 결국 ‘내부의 적’이 그것을 가로막아온 것이다’.”(강검사는 퇴직 당일 약속을 지켰다)
-‘내부의 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딴 게 아녜요. 청와대에 ‘줄대기’하는 검사, 청와대와 교감하는 검사, 청와대에 복속해 앞잡이 노릇하는 검사 등 세 부류죠. 역대 검찰총장 중엔 대통령과 일주일에 한번씩 비밀독대한 사람도 있어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젊은 검사들을 제외하면 검찰에선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겉으론 청와대와 등진 것처럼 행동하지만, 대통령과 직접 통하는 사람, 더러는 비서실장이나 사정수석, 민정수석을 통해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하고 지침을 협의합니다. 이게 검찰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아닌 척 내숭을 떤단 말입니다. 떳떳하지 못해요. ‘청와대적 발상’을 가진 이런 소수의 검사들이 검찰을 망쳐왔어요. 그들이 검찰을 떠나야 검찰이 삽니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거든 차라리 옷벗고 정치판에 뛰어들어라, 그 말입니다.”
-‘검찰 외부의 적’도 있을 법한데요.
“정치권력이죠. 그냥 정치권력이라고만 하면 금방 안 떠오를 수 있으니 구체적으로 말하죠. 청와댑니다. 새 정권에선 검찰을 독립시키는 대통령이 나와야 해요. 자기 자신부터 조사하라면서 가신이니 친인척이니 하는 측근들에게 서릿발을 날려야 나라의 기강이 섭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입으론 부패 척결을 외쳤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전직 대통령이 둘씩이나 구속되고, 또다른 전현직 대통령들의 자식이 모두 합해 셋씩이나 구속되는 이런 나라가 세상에 어딨어요? 정치검사들이 판쳐도 그마나 그런 ‘성과’가 가능했던 건 언론과 일부 의식 있는 검사들 덕분이지만.”
-‘젊은 검사들이 독립투사와 같은 용기로 싸워야 한다’는 말씀의 속뜻은?
“과거 사법부 독립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컸죠. 그래서 제1·2차 사법파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사법부 독립’을 운위하는 말이 적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성취가 있었기에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검찰권 독립은 말이죠. 아무 진전도 없어요. ‘검찰의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데 저는 그 말에 반대합니다. 정치적 중립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정치적 가치판단입니다. 정치적 중립보다는 정치적 독립이 더 중요합니다. ‘정치적 중립’이라고 표현한 형사소송법 교과서를 다 뜯어고쳐야 돼요. 정치적 독립의 핵심이 무엇이냐, 딴 거 없어요. 청와대로부터 독립이에요. 정치적 독립이 하늘에서 굴러떨어집니까? 한직을 자청한 제겐 그 독립을 주장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그런 기회를 갖는 검사들은 과감히 독립을 주창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독립투사가 되라고 했겠습니까? 사법부 독립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검찰은 다릅니다. 검찰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검찰 독립은 얻고자 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얻어질 겁니다. 더욱이 검찰 독립엔 대통령의 의지가 필요해요. 시스템도 뜯어고쳐야 합니다. 특히 검찰인사권 독립이 필요해요. 임기제인데도 검찰총장을 얼마든지 갈아치우잖아요?”
검찰인사권 독립을 위해선 ‘검사의 임명 및 보직은 법무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행한다’고 규정한 검찰청법 제34조부터 손대야 한다. 그러나 강검사는 한 발짝 더 나아가 ‘검찰인사전권위원회’(가칭)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권으로부터 독립한 획기적 장치가 아니고는 검찰 독립이 요원하다는 소신 때문이다.
“대한민국만큼 검찰인사를 정권이 좌지우지하는 나라가 없어요. 제가 이런 얘기를 자신있게 하는 이유는 차장검사, 부장검사, 지청장 같은 자리를 단 한번도 안해본 광복 이후의 유일한 검사이기 때문입니다. 엽관(獵官)운동 하기 싫어서, 때론 눈꼴 사나워서 평검사 이후 인사 때마다 저는 법무연수원, 사법연수원, 고검 근무를 자청했어요.”
-실제 검사들의 정치권 줄대기는 어느 정도입니까?
“‘검찰인사 때면 구라파(歐羅巴)전쟁이 벌어지는 것과 같다’는 검사들끼리의 자조(自嘲)가 있어요. 검사직 자체가 고위직에 속합니다. 인사 때면 엄청난 잡음이 이어지죠. 경쟁자들 사이엔 누가 누구의 줄인지 웬만큼 소문이 납니다. 인사와 관련해 검찰에선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정해져 있어요. 제 얘기는 이런 구분을 없애란 겁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거거든요. 검찰요직이 몇군데 있어요. 법무부 검찰국, 대검 중수부, 서울지검 기타 등등. 심지어 지청장 자리도 사실상 서열이 매겨져 있다시피 해요. 웃기는 조직 아닙니까? 인사 때만 되면 이 요직경쟁이 말할 수 없이 심합니다. 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서 자리를 배치하라, 그게 바로 적재적소 인사예요. 인사원칙상 서열화를 깰 유일한 방법이죠. 이게 안 되니까 인사불만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컨대 소년부장이라면 소년범죄 수사에 열정을 가진 검사를, 공안부 검사라면 공안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검사를 발탁하면 되는데, 윗선에선 그런 적성과 노력을 고려하지 않아요. 왜 TK정권 때는 TK출신 검사가, PK정권때는 PK출신들이, MK정권 때는 MK출신들이 다 요직에 앉습니까? 그때마다 검찰이 변명한 게 있죠. ‘능력이 뛰어나 요직에 앉혔다.’ 그런데 왜 공교롭게도 매번 그렇습니까? 유능하다는 게 얼마나 허구에 찬 소립니까? 이전 정권에서 ‘물 먹은 검사’가 다음 정권에선 ‘유능한 검사’로 돌변하고, 또 그 다음 정권에선 다시 ‘무능한 검사’로 바뀝니다. 이건 역사가 증명하잖아요.”
-특수부에 특수통 검사들이 없다는 지적도 많은데요?
“그것도 적재적소 인사만 이뤄지면 해결됩니다.”
-정치검사란 용어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조금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청와대를 기웃기웃하고 들락거리고 교감하고 나아가서는 앞장서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소수의 검사들이죠. 청와대에 복속해서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고자 하는 그런 검사들은 딴 직업을 가져야 합니다. 왜 검사들이 출신지역에 따라 이렇게 편파적입니까? 검찰의 생명은 공정성인데. 지역적 편파심리를 가진 검사는 이미 죽은 검사예요.”
-그런 검사들이 소수라 생각하십니까?
“소수라고 하는 게 좋겠죠?(웃음) 많다고 말하면 너무 자괴감에 빠질 것 같아 소수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줄대기’할 데 없는 검사도 꽤 많을 텐데…검찰 내부통신망 등에 가끔 비판적인 목소리가 터져나오진 않습니까?
“그런 거 없어요. 검찰이 워낙 수직적 조직이다 보니 법관들과는 다릅니다. 대한민국엔 검사가 한 명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돕니다. 모든 권한이 집중하는 최고 총수인 검찰총장만이 검사 아니냐는 거죠. 형소법의 ‘검사는 독립관청이다’란 말은 이젠 휴지나 다름없어요. 막말로 제가 검찰총장이라면 사건에 관한 모든 지휘권을 위양(委讓)하고 총장으로서 일반적 행정과 지도에 전념할 겁니다. 권한을 과감히 위양할 것 아니면 뭣하러 검사들이 필요합니까?”
검찰, ‘죽은 검사들의 사회’
-젊은 검사일수록 입신(立身)에 대한 갈망이 심할 듯한데요.
“오히려 젊은 검사들은 좀 나아요. 소신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수직적 사회에서 자란 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세대는 리버럴하고 수평적 사고에 익숙해요. 하지만 올라갈수록 승진 폭이 줄어드니 그런 사람도 줄어듭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검사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리를 가지고 경쟁하니까 그런 겁니다. 심지어 고위직이 되기 위해 충성서약에 가까운 행태도 벌어집니다.”
-실제 사적 모임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검사도 많지 않습니까?
“많죠. 검사들이 동창회나 향우회에 자주 가면 안됩니다. 나중에 변호사 할 때를 생각해서 그러는 검사들이 있다면 빨리 떠나야 합니다. 학연·지연에 목매달고 ‘끼리끼리 문화’를 조장하는 검사들은 심성이 타락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인정(人情)사회가 아니냐’고 반론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게 그렇지 않아요. 딴 직업은 몰라도 검사들은 그런 사적 인연을 초월해야 합니다. 그것말고도 검사들이 할 일은 엄청나게 많습니다.”
강검사는 검찰인사를 전담하는 ‘검찰인사전권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소년 교육활동에 진력하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검찰에 회한이 너무 많아요. 사실 학창시절엔 신문사 논설위원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더랬습니다. 제가 검사가 된 건 법조인이 돼야 출세할 수 있다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아요. 그런데 막상 검찰을 떠나려니 역설적으로 검찰에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애착을 갖고 검찰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점점 높일 생각입니다. 혹자는 ‘검찰에 있을 때 싸우지 그랬느냐’고도 하지만, 적어도 조직 내부에 있을 때는 동양적 정서상 차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못했죠. 제 한계였습니다. 청소년 관련활동을 하면서 제 지적 사고의 외연이 많이 확장됐는데, 그중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마이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명퇴 결심도 그 연장선상에 있어요. 출세에 연연하지 말고 사회도덕성 회복에 힘쓰자. 말하자면 저만의 참된 성공을 위해 퇴직하는 거죠. 더 늦기 전에.”
-지금이 그 시점입니까?
“올해 2월부터 내년 2월까지 1년간이 제 사시 동기들의 검사장 승진기간입니다. 저는 지난 2월 이미 검사장 승진을 포기했어요. 발표는 안했지만, 그때 ‘검사장 승진 포기의 변’이란 문건까지 써놓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검사장은 ‘검찰의 꽃’으로 불리는 자리인데, 아쉽진 않습니까?
“물론 저도 초임검사 시절엔 ‘나 같은 사람이 검사장 한번 안해볼 것이며, 검찰총장이라고 못할까’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런 생각을 일찌감치 버린 게 옳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역대 검사장이나 검찰총장 중에 진정으로 국민들에게 존경받는 검사가 몇이나 될까 의문입니다.”
-검사장 승진 기회를 동기들에게 ‘양보’한다는 표현을 쓴 것 같은데.
“제가 행시 합격 후에 다시 사시에 합격했기 때문에 사시 동기들이라 해도 상당수는 학교 후배들이에요. 모임만 하면 제가 좌장(座長)이죠. 저보다는 그들이 검사장 자질에 더 맞다고 봅니다.”
강검사는 부산세관 근무시절까지 포함한 공직인생 30년을 ‘끊임없는 탈출과 모색의 30년’이었다고 명명(命名)한다. “초임검사 시절 지방경찰서 수사과장이 명절 때 촌지를 가져왔기에 가차없이 되돌려보냈죠. 공안부 있을 땐 스스로 뛰쳐나왔죠. 특수부 검사 때는 직속상관의 친구를 밀수혐의로 구속해 특수부에서 쫓겨났죠. 검사장 승진 기회도 버렸죠. 끊임없는 모색의 과정이었어요.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고 한 것처럼. 인생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강검사도 서울지검 공안부 및 특수부 검사 시절엔 ‘냉혈 검사’로 불렸다던데요?
“초임검사 시절엔 검사라면 일단 무섭고, 중형을 구형하고, 강력하게 범죄를 처단하는 존재인 줄로만 알았죠. 또 그런 검사들이 승승장구했어요. 하지만 청소년 관련활동을 하면서 과연 무거운 형량만이 능사인가 싶었던 겁니다.”
-명퇴 선언에 대한 검찰 내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다들 의외라 생각하더군요. 말리는 이들도 있었죠. 심지어 정계에 입문하려는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고… 반응이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경기고·서울대 출신의 엘리트로 내년 봄 정기인사의 검사장 승진대상자 중 한 명이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검사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온 그의 노모(89)는 2년째 치매를 앓아 아직도 그의 명퇴 사실을 모른다.
-정치할 의향은 없으시죠?
“물론이죠.”
“정치권 말 듣는 검찰은 ‘범생이’”
-그래도 영입 제의는 종종 받았을 텐데요.
“솔직히 지난 20여년에 걸쳐 정치권에서 얘기는 수없이 많았어요, 가까이는 4·13총선까지. 진짜 웃기는 얘기 하나 할까요? 현 정권 들어 개각 때마다 청와대 민정·교육문화수석으로 천거됐다는 소식을 몇 달씩 지나서야 알게 됐어요. 백번 오라고 해도 안 갔을 겁니다. 명리(名利)를 생각한다면 검사장이 되기 위해, 개각 때 장관자리 따내기 위해 분주하게 쫓아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청소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진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이 심각합니다. 정치인 대부분이 학력은 높아도 참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제가 전인교육을 강조하는 건 그런 정치인들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기도 해요.”
-말씀을 계속 듣다보니 청소년들이 정도(正道)가 아닌 교육을 받는데서 오는 부작용이나 검찰이 정도를 걷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부작용은 결국 궤를 같이하는 것 같습니다.
“바로 그렇죠. 바른 교육을 못받았으니 정치권도 이 모양이고 검찰도 이 모양이지요. 우리 사회 전반이 그래요. 검찰은 반드시 변화해야 할 영역 중 한 곳입니다. 정치권 시각에서 보면 그야말로 말 잘 듣는 ‘범생이’ 아닙니까?”
강검사는 퇴직과 동시에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앞에 법률사무소 ‘청지(淸芷)’를 개업하고 변호사로 변신했다. 그가 대표변호사로 있는 ‘청지’엔 올해 2월 사법연수원을 졸업한 4명의 새내기 변호사(남녀 각 2명)가 합류해 일한다. 모두 조세·금융·기업분야에 밝은 인재들이라는 게 ‘강지원 변호사’의 자랑이다. 사무장도 두지 않은 그의 사무실은 ‘사건브로커 출입금지구역.’ 사무실 한켠엔 청소년피해상담센터를 마련해 ‘청소년 지킴이’ 활동은 변함없이 할 예정이다.
-로펌들의 영입 제의가 있었을 법한데요.
“사실 제의가 있었어요. 그러나 제 일은 상업적 로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공익적 성격이 짙은 일을 주로 해왔고. 그래서 사양했어요. 극단적 가정이긴 하지만, 제가 청소년 성매매(원조교제) 사건의 변론까지 맡을 수는 없잖아요?”(웃음)
-우리 검찰이 정치적 독립을 확보한 때가 있었다고 봅니까? 한시적으로라도.
“…없었죠. 부분적으로 독립을 확보하려 노력한 적이 있긴 하죠. 정치권에선 구속하라는데 소신있는 검사들이 반대하거나, 정치권에선 불구속했으면 하는데 구속수사한 사례들이죠. 그러나 그건 아주 예외적 경우일 뿐이에요.”
-존경하는 검사가 있습니까?
“별로 없어요. 그러나 몇 분은 기억에 남습니다. 한 분은 제가 초임검사 시절 전주지검 차장검사로 계셨고 후에 대법관을 지낸 이명희 변호사(李明熙·69)이고, 다른 분은 제가 서울지검 특수부에서 일할 때 특수부장이셨던 송종의씨(宋宗義·61)입니다. 둘다 대쪽 같고 사심 없는 분들이죠. 또 이용호게이트 특검으로 일했던 차정일 변호사도 기억에 남습니다.”
강검사는 지난 4월 사법연수원 소식지 ‘미네르바’가 연수원 33기생 990여 명 중 36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존경하는 법조인’ 설문조사에서 차정일 변호사와 문흥수 서울지법 부장판사와 함께 공동7위를 했다. 1위는 심재륜 전 고검장이었다.
-후배들이 따르는 법조인으로 거명된 게 좋지 않으세요?
“어느 여성잡지를 보니 한 남성 사법연수원생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었어요. 그 사람 인터뷰 기사에 ‘앞으로 강지원 검사 같은 법조인이 되고 싶다’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 기사를 보고 무지 부끄러웠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기대도 됐습니다. 자기가 학창시절 말썽을 많이 피웠다고 털어놓는 그 솔직한 연수원생이 자신만의 분명한 목표를 가진 점은 높이 살만하죠. 가끔 청소년 교육사업을 하는 분들이 ‘강검사 영향으로 이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는 말을 하는데, 그럴 때 보람을 느낍니다.”
-이명재 검찰총장 체제가 이전 검찰총장 시절과 다른 부분이 있다고 봅니까?
“이용호게이트로 문제 됐던 검사들이 대부분 복귀했잖아요. 검사가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형식적으론 대통령 결재가 필요할지 모르지만, 대통령이 절대로 검찰간부 인선에 간여해선 안됩니다. 법관인사에 대통령이 간여합니까? 대법원장이 하잖아요. 검찰 고위직 인사에서 청와대는 손떼야 합니다.”
-병풍(兵風) 수사결과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지….
“고검에 있다보니 병풍 수사의 전모를 몰라 법리적 문제를 말하긴 어려워요. 한 가지만 지적하렵니다. 대체 사건 하나를 두고 몇 달을 질질 끄는 나라가 어딨습니까? 수사결론은 몇 주일 아니 한 달이면 낼 수 있습니다. 이건 도대체 검찰이 무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고의적인 건지…. 음성테이프 감정했다는데 그거 하루면 돼요. 왜 한달씩이나 걸립니까? 이러니 정치권 장난에 검찰이 놀아났거나 같이 춤을 췄다는 혐의를 양측(여야)은 물론 국민들로부터도 받는 겁니다. 검찰은 죄가 되면 처벌하고 죄 없으면 풀어주는 일만 하면 돼요. 좌고우면하는 정치적 고려는 검사를 타락시킵니다. 검찰이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아요?”
-그렇지만 검찰이 정치권의 검찰 흔들기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못할 텐데요.
“흔드는 건 흔드는 사람 소관이고, 흔들리지 않는 건 검찰 소관입니다. 남 탓할 필요 없어요.”
-병풍 수사 초기부터 ‘이번 사건의 수사는 결론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검찰 내부에도 있지 않았나요?
“그랬죠. 병풍 수사가 정치권의 선전도구로 이용당할 것이란 이야기가 파다했지요.”
“청와대는 검찰인사에서 손떼라!”
-최근엔 검찰이 연말 대통령선거 때까지 현재 진행중인 주요 정치사건 수사를 사실상 중단한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는데요.
“말도 안되는 얘기죠. 그러면 도둑놈, 사기꾼도 안 잡겠네? 대선시기와 검찰 수사가 무슨 관련이 있으며 수사결과에 따라 어느 후보가 유·불리하게 될 것이란 예단을 왜 합니까? 그건 검찰이 간여할 문제가 아녜요. 그건 막말로 대선후보들의 운(運)이에요. 검찰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만 밝혀내면 됩니다. 검찰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50년 역사 동안 검찰이 정치권으로부터 너무도 많은 못된 행태를 배워, 그런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요.”
-이번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봅니까? 검찰이 전례없이 강경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지당한 거 아녜요? 통상 평검사 시절엔 강압수사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피의자가 뻔한 거짓말하며 뻗대면 누구라도 열받지 않겠습니까? 그렇더라도 가혹행위는 없어야 합니다. 조그만 구타사건이라도 자꾸 문책하고 징계해야 그런 후진적 풍토를 바꿀 수 있습니다.”
-전관예우 풍토는 얼마나 심각하다고 보십니까? 로비전담 변호사들까지 있다고 하는데요.
“예전보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있다고 봐야죠. 다만 민사사건은 양쪽 당사자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에 전관예우가 개입할 소지가 희박합니다. 반면 형사사건은 양형(量刑) 결정 때 정상참작을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바로 거기에 전관예우가 개입합니다. 유럽이나 일본에선 형사사건에서 변호사가 할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그래서 무죄를 다툰다든가 하는 사건이 아니고는 그런 문제가 거의 생기지 않죠. 전관예우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병폐입니다.”
‘서울지검 피의자 사망사건’ 파문으로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이 동반사퇴해 또 한번 끝간 데 없이 위신이 추락한 대한민국 검찰. 그 검찰을 떠나며 쏟아낸 ‘강지원 전 검사’의 고언(苦言)을 검찰은 얼마나 ‘전관예우’(?)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