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호 게이트’ 특검수사가 끝난 직후 검찰 소방수로 등장했던 이명재 검찰총장이 서울지검 피의자 고문치사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외유내강의 카리스마로 조직을 추스르고 정치권 외풍에 당당히 맞섰던 ‘이명재 검찰’의 빛과 그림자.
11월5일 퇴임식을 끝낸 이명재 전 검찰총장이 박수를 받으며 검찰청사를 떠나고 있다.
“추운데 고생시켜서 죄송하다”며 말문을 열었지만 “소감이 어떠냐” “앞으로 포부를 밝혀달라”는 등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 통 대답이 없다. 집에 들어서기 직전에야 겨우 “중임을 맡게 돼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검찰이 다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짤막한 한마디를 남긴다. 이명재(李明載) 전 검찰총장의 영욕의 10개월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검찰은 참담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호남 출신인 신승남(愼承男) 전 총장은 국회에 탄핵안이 제출되는 등 야당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다가 1월13일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된 동생 승환(承煥)씨가 차정일(車正一) 특검팀에 구속되면서 결국 사표를 냈다.
검찰의 자존심이라는 대검 중수부와 서울지검 특수부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는 특검팀이 연일 굵직한 수사 성과를 내놓는 동안 ‘이용호 게이트 부실수사’라는 여론의 비난 앞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또 ‘진승현 게이트’와 ‘정현준 게이트’ 등 대형사건에 정·관계 고위인사들이 개입된 증거들이 새롭게 드러나고 재수사에 들어가면서 서울지검 특수부도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신 전총장의 퇴임 후 사흘 동안 고민을 거듭했다. 검찰을 안정시킬 수 있으면서도 임기말에 터져 나올 각종 사건을 무리없이 처리할 수 있는 인물, 정치권과 검찰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 절실했다. 이때만 해도 언론의 하마평에 이 전총장의 비중은 높지 않았다. 이미 지난해 5월 서울고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기 때문이다.
검찰 외부인사가 검찰총장에 임명된 것은 1963년 신직수(申稙秀)씨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전격적인 이 전총장의 임명에 대한 정치권과 여론의 반응은 예상보다도 훨씬 좋았다. 민주당은 “위기에 처한 검찰을 되살리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논평을 냈고, 한나라당도 “검찰가족의 신임을 받고 있는 분이 임명돼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밝히는 등 이례적으로 여야 모두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39년 만에 외부인사가 총장으로 영입됐지만 검찰 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론 역시 긍정적 평가 일색이었다.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정치권과 언론, 검찰 내부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까.
경북 영주 출신인 이 전총장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은행에 잠시 근무하다 1970년 제11회 사법시험에 합격, 1975년 검사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형인 이경재(李景載) 전 중소기업은행장과 동생인 이정재(李晶載) 전 재경부차관과 함께 ‘수재 3형제’로 잘 알려졌던 그는 대검 중수과장-서울지검 특수부장-대검 중수부장 등을 거치면서 특수분야, 특히 경제사건 수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사건과 명성그룹 사건, 5공 비리 사건, PCS 비리사건, 환란사건, 세풍사건 등 아직도 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대형 경제사건들을 무리없이 수사했다.
이런 큰 사건들을 처리하면서도 피의자들의 불만을 사거나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않아 그의 수사능력은 더욱 빛났다. 이 전총장과 함께 일했던 한 검사는 “피의자를 추궁할 때에도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자세였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신(修身)에는 더욱 철저했다. 서울고검장으로 재직중이던 지난해 1월 아들 종원씨가 결혼을 했는데 검찰 주변은 물론 비서실 직원들에게까지 전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서울고검장을 사퇴한 것도 뜻밖이었다. 이 전총장보다 선배인 신 전총장(사시 9회)이 총장으로 내정된 상황이었기에 굳이 물러날 이유도 없었다. 후배 검사들도 “이번만은 잘못 판단하신 것 같다”며 한사코 말렸지만 “후배들이 나아갈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퇴장’을 하자고 다짐해왔고 이를 실천할 때가 왔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수사능력과 인품을 높이 평가한 김기춘(金淇春) 전 법무부장관으로부터 ‘당대 최고의 검사’라는 찬사에 가까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검찰총장보다 컸던 것이 사실이다.
8개월 만에 친정으로 돌아온 이 전총장의 취임사는 듣는 사람이 전율을 느낄 정도로 의지에 차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검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문이다. 먼저 “검사가 활동하기 때문에 시민이 평온을 누린다”는 프랑스 사상가 몽테스키외의 말을 인용하며 검찰의 자성을 촉구한 뒤 “진정한 무사(武士)는 추운 겨울날 얼어죽을지언정 곁불을 쬐어선 안 된다”는 ‘무사론’을 설파했다. 얼핏 검사의 기상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검사가 정치권 근처에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숨어 있었다. 훗날 정치인에게 수사기밀을 알려준 혐의로 검찰 선후배인 신 전총장과 김대웅(金大雄) 전 광주고검장을 기소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을 예고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어 이 전총장은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무리를 지어 날아가면서 집단 양력이 생겨 멀리 오래 날고 위엄을 갖춰 어떤 난폭한 조류도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고 말한다. 정치권의 압력에는 단합으로 맞서라는 주문이었다.
취임식이 끝난 뒤 한 젊은 검사는 “오랜만에 전의가 되살아나는 것 같다”고 반겼다. 이후 ‘정치적인 사건’과 ‘검찰 내부 문제’는 두고두고 이 전총장을 괴롭히고 발목을 잡았다.
한나라당과 신경전
그의 첫 고비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검사장급 고위간부에 대한 인사가 예상보다 늦어지면서 주변에서는 각종 설이 난무했다. 정치권에서 인사에 개입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흘러나왔고 특히 서울지검장 자리를 놓고는 ‘어느 당은 누구를 밀고, 다른 당은 누구를 지지한다’며 구체적으로 실명이 거론됐다. 이런 와중에 유임이 확실시됐던 최경원(崔慶元) 법무장관이 1·29개각에서 물러나면서 인사를 둘러싼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난산 끝에 2월5일과 9일 단행된 검찰 인사에서 이 전총장은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대검 중수부장 재직 시절 대검 수사기획관으로 호흡을 맞췄던 김종빈(金鍾彬) 전 법무부 보호국장을 대검 중수부장으로, 서울지검 특수1부장 시절 휘하에 있던 박만(朴滿) 전 대검 공안기획관을 수사기획관으로 각각 배치하면서 총장의 직속부대인 대검 중수부를 안정시켰다.
또 각종 선거를 앞두고 가장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서울지검장과 대검 공안부장 자리에 경기 여주 출신의 이범관(李範觀) 전 인천지검장(현 광주고검장)과 충남 서산 출신의 이정수(李廷洙) 전 대전지검장을 각각 기용, 지역문제를 해결했다. 각종 게이트 수사를 맡았던 간부들에 대해서는 문책성 인사를 단행, 취임 인터뷰에서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묻는 것이 조직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말한 것을 실천했다. ‘이명재 검찰’이 본격 출범한 것이다.
차정일 특검팀 해체와 함께 대검 중수부에서 김대통령의 차남 홍업씨 등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 전총장은 본격적인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3월22일 특검팀은 활동시한 만료와 함께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홍업씨의 고교동기인 김성환씨가 평창종건 등과 90억원대의 자금거래를 했으며 이 가운데 10억여원 상당은 통상적인 거래성 자금으로 보기 어렵다. 계좌와 자금은 김성환이 단순히 관리만 했을 가능성이 있어 자금 출처 및 사용처 등에 대해 더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했다. 누가 보아도 이는 ‘김성환씨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홍업씨를 수사하라’는 강한 촉구였다.
아울러 특검팀은 이수동(李守東)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가 지난해 대검의 이용호씨 수사 당시 수사정보를 들었다는 의혹과 관련, “신 전총장과 김고검장의 공용 및 개인전화에 대한 발신 및 착신 통화 내역 모두에 대한 조사의 필요성이 있고, 이수동씨 본인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혀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 수사라는 숙제도 안겼다.
특검팀으로부터 수사자료를 넘겨받은 대검 중수부는 4월1일부터 후속 수사에 착수한다. 이 무렵 서울지검에서는 ‘최규선 게이트’가 터져나온다. 최씨는 체육복표 사업 등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기자회견을 통해 “홍걸씨에게 수만달러를 용돈으로 줬다”고 스스로 밝힌다. 사상 유례없는 ‘현직 대통령 두 아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홍걸씨에 대한 수사는 당초 예상보다 쉽게 풀려나갔다. 미국에 유학중이던 홍걸씨는 5월16일 검찰에 자진 출두했고 검찰은 홍걸씨를 최씨와 함께 기업들로부터 36억여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하지만 홍업씨에 대한 수사는 쉽지 않았다. 세상물정에 밝지 않았던 홍걸씨와 달리 홍업씨는 아태재단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나름대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 홍걸씨의 검찰 출두 광경을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는 ‘두 아들을 모두 구속하는 건 너무하지 않으냐’는 동정 여론이 일고 있었다.
청와대에서도 홍업씨만은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5월말 홍업씨의 측근 유진걸씨가 조사를 받던 도중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자 청와대에서 민정비서실 소속 박아무개 과장을 보내 ‘강압수사’ 여부를 조사한 것이 단적인 예다. 홍업씨 소환 시기를 놓고도 말이 많았다. 월드컵 기간에 홍업씨를 소환할 것이냐를 놓고 검찰에서 ‘가능한 한 피하겠다’는 견해를 밝히자 한나라당에서 이 전총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고 이 전총장이 “월드컵 기간에도 소환할 수 있다”고 해명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편에서는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가 한 시사주간지 인터뷰에서 “검찰에도 특권주의와 엘리트주의에 젖어 소위 이회창 체제를 지원하는 세력이 있다”고 발언하는 등 양당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토록 정치권에서 민감하게 다뤘던 홍업씨 소환은 결국 월드컵 한국-이탈리아의 16강전이 벌어진 다음날인 6월19일로 정해졌다. 소환 사흘 뒤인 21일 홍업씨도 구속된다.
이명재 전 검찰총장은 “진정한 무사(武士)는 겨울날 얼어죽을지언정 곁붙을 쬐어선 안된다”는 ‘무사론’을 설파했다.
이와 함께 이 전총장은 ‘수사기밀누설’ 사건도 마무리지어야 했다. 이수동씨에게 수사정보를 알려준 혐의를 받았던 신 전총장은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했고, 김고검장은 수사팀의 소환을 받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면서도 사표를 제출하지 않았다. 검찰 내 비호남 세력이 호남 세력을 축출하는 과정이라는 루머까지 흘러나오는 등 검찰은 내홍(內訌)을 겪었다. 이 전총장은 두 사람 기소를 앞두고 검찰 간부회의에서 “검찰은 위기와 시련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도약과 성장을 거듭해온 전통이 있다. 화합과 단결로 검찰의 위상을 재정립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자”는, 평범하지만 뼈 있는 이야기를 던졌다. 그리고 7월11일 신 전총장과 김고검장을 기소한 이 전총장은 청와대에 사표를 제출했다..
이 전총장이 사표를 낸 배경은 단순치 않아 보인다. 먼저 본인이 공식적으로 밝힌 이유는 전직 검찰총장과 현직 고검장이 기소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인간적인 고뇌가 적지 않았다. 이번 일로 또다시 검찰에 큰 실망감을 갖게 된 국민들과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 검찰조직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여기에 자신을 검찰총장에 임명해준 대통령의 두 아들을 구속시킨 것에 대한 미안함도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 간부들의 사표 만류
반면 대통령의 두 아들과 전·현직 검찰 고위간부를 기소한 것에 대한 정치권과 검찰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자신에 대한 재신임을 스스로 청와대에 물음으로써 여권으로부터 제기될 정치공세를 사전에 차단하고, 전·현직 고위 검찰간부의 사법처리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검찰 내부의 잡음도 예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이 전총장의 사표를 받은 즉시 반려했고, ‘검찰에 남아달라’는 검찰 간부들의 호소를 이 전총장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사표 파동’은 마무리됐다. 이 전총장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때 사표를 제출한 것은 이 전총장의 입지를 크게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홍업·홍걸씨를 둘러싼 정치공세도 사라졌고 검찰 내 불만의 목소리도 수그러들었다.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한층 높아졌다. 이 전총장에 대한 신망과 인기가 검찰의 버팀목이 됐던 시기다.
병풍 수사 때 말수 적어져
그러나 뒤이어 닥친 이른바 ‘병풍’은 이 전총장으로서는 더욱 풀기 힘든 난제였다.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의 장남 정연씨 병역면제를 둘러싼 이 사건은 1997년 대선 과정에 한번 공론화됐던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전 의무부사관 김대업씨는 “1997년 정연씨의 병역비리를 숨기기 위한 대책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5년 전 일인데다 실체를 명확히 밝혀내기가 쉽지 않은 사안이었다. 반면 수사는 ‘제로섬 게임’이 될 것이 분명했다. 즉 민주당 또는 한나라당 가운데 한 곳은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서울지검이 수사를 벌이는 동안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거의 날마다 치열한 공방을 되풀이하면서 검찰을 압박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수사가 본격 착수되기 전부터 이 전총장을 찾아와 “서울지검 특수1부에 이 사건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겉으로는 김대업씨가 특수1부에서 수사 보조요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댔지만 내심 박부장이 호남 출신이라는 점을 문제삼은 것으로 비춰졌다.
며칠 뒤 한나라당이 박부장 등을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고발하자 이 전총장도 한동안 외부와 연락을 끊는 등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어 민주당 이해찬(李海瓚) 의원이 이른바 ‘병풍 유도’ 발언을 한 뒤 한나라당 의원과 당원들은 서울지검 청사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이면서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병풍수사에서 ‘기대했던’ 결과물이 나오지 않자 불만을 토로하다가 수사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10월25일에는 의원들이 이 전총장을 찾아가 “수사를 계속하라”고 몰아붙였다. 이 전총장의 주변 인사는 “홍업씨 사건 때도 힘들었겠지만 병풍수사를 더욱 부담스러워 한 것은 사실이다. 이 전총장은 부담스러울 수록 말수가 적어지는 스타일이었는데 가장 말수가 적었을 때가 바로 병풍 수사 때였다”고 전했다.
그 와중에 이 전총장은 9월초 4박5일의 일정으로 국제검사협회 회의 참석차 런던을 방문, 잠시 근심을 덜고 한갓진 한때를 보냈다. 마침 병풍 수사는 소강 상태였고 이 전총장도 공식 회의일정을 마친 뒤 모처럼 망중한(忙中閑)을 맞았다고 전해졌다. 당시 이 전총장을 수행했던 한 검사는 “런던에서 한식집을 찾아 삽겹살에 소주를 곁들이며 농담도 하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거의 유일했다”고 술회했다.
병풍수사 결과에 대한 논란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10월26일 서울지검에서 발생한 ‘피의자 사망 사건’은 이 전총장의 최대 시련이자 마지막 시련이 됐다.
사건 발생 이틀 뒤 서울지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 전총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곧바로 대검 감찰부에 본격 수사를 지시했다. 이 때부터 이 전총장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심각하게 고심하다 ‘물고문’ 의혹이 제기되면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자 사퇴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11월4일 이 전총장이 사표를 내자 대부분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본인은 이 사건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홍업·홍걸씨 사건과 병풍수사는 사실 정치적 사건이었다. 즉 이 전총장으로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수사팀이 제대로 수사하도록 독려만 하면 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피의자 사망 사건’은 검찰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인권’과 직결된 치명적인 사건이고 그만큼 7월에 사표낼 때보다 실질적인 책임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 전총장의 퇴임식은 참으로 쓸쓸했다. 일부 참석자들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검찰에 쏟아지는 모든 질책은 내 두 어깨에 짊어지고 가겠다. 검찰인의 명예를 지키면서 태산같이 의연하되 누운 풀잎처럼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는 이 전총장의 목소리도 잠겨 있었다.
물론 이 전총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의 목소리도 분명히 흘러나오고 있다. 취임 직후 “내가 성인 군자가 아닌데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던 것처럼. 우선 검찰조직의 수장으로서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주어진 일은 완벽하게 처리하려 애썼지만 새로운 일을 벌이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 고위 검찰간부는 “일선 검찰청에 순시를 나가고 젊은 검사들과 소주도 한잔 하시며 이야기를 나누라고 몇 차례 권했지만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검사들이 있을까봐 선뜻 나서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에 대해 다른 간부는 “얼마나 검찰의 상황이 어렵고 ‘비빌 언덕’이 없었으면 이 전총장이 소극적이 됐겠느냐”며 옹호하기도 했다.
본인은 두 차례나 사표를 내면서 정작 아랫사람에게는 추상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피의자 사망 사건’ 처리 과정이다. 이 전총장은 사건이 수습되기 전에 사표를 냈다.
한 소장검사는 “서울지검장이든 주임검사든 잘못한 점이 있다면 검찰총수로서 마땅히 책임을 묻고 조직을 추슬렀어야 했는데 이 전총장은 본인이 사표 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으려 했다”면서 “이 전총장의 사임 뒤에도 검찰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점을 볼 때 사표 낸 시점이 너무 빨랐다”고 지적한다.
“본인이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는 분명 본받을 만하고 이 전총장이 개인적으로 검찰총장 자리를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게 생각한 것도 알지만 검찰총수라는 자리를 생각할 때 사표 제출은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는 다른 검사의 말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
여론에 지나치리만큼 민감했다는 비판도 있다. 4월9일 이수동씨를 조사했던 대검 중수부는 밤 9시30분쯤 출입기자단에 ‘중대발표’가 있다는 사실을 급히 알렸다. 그리고 수사기밀 누설 의혹과 관련된 이수동씨의 진술을 공개했다. 이날 오후 이씨가 검찰 조사 과정에 ‘김대웅 고검장을 수사기밀 누설 당사자로 지목했다’는 첩보를 들은 일부 언론에서 취재에 들어가자 아예 전 언론사에 알렸다는 것이다.
이 전총장이 공개를 지시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지만 이날 저녁 긴급회의를 열고 대검 검사장들과 대책을 논의했다는 점, 검찰 고위간부와 관련된 진술이 포함돼 있는 데다 당시만 해도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했던 이씨의 진술을 전격 공개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이 전총장이 승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전총장이 언론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다.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어 새로운 일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신감을 얻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가 검찰총장으로 임명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세를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할 만큼 그는 이른바 자기세력이나 계파를 형성하지 않았다. 고위검사들은 군대로 치면 사단장 격인 일선 지검장을 거치면서 세력을 이루는 것이 통상적인데, 특이하게도 검찰총장에 오르기까지 일선 지검장을 지내지 않았다는 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서는 덕분에 이 전총장은 검찰조직 전체의 화합을 유도할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추진력은 갖지 못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적어도 검찰총장으로서의 몸가짐만큼은 검사들의 귀감이 될 만했다. 이 전총장은 사표를 낸 뒤 한 검사장에게 “나는 이제 어떻게 하느냐”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찾아와도 일절 만나지 않았는데 그 원망을 다 어떻게 감당하느냐는 것이었다.
검찰총장에 취임한 뒤 골프는 아예 하지 않았고 등산도 그만뒀다. 점심은 거의 예외 없이 구내식당에서 해결했고 저녁에도 외부인사를 만나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월드컵 개막식 때는 초청장을 받았으나 개인 사정을 이유로 가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는 마땅한 집기 하나 비치돼 있지 않았다.
이를 주변에서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수도승’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한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따뜻한 마음씨를 잃지 않았다. 이 전총장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했던 석동현(石東炫) 전 대검 공보관이 지난 5월 갑자기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일이다. 이 전총장은 몇 번이나 “격무 때문에 병이 생긴 것 아니냐. 개인적인 병이 아니라 공상(公傷)이다”며 미안해했다고 한다. 석 전공보관이 수술을 했을 때에는 개인적으로 수술비를 보태주기도 했다.
퇴원한 뒤 석 전공보관은 건강 회복을 위해 지방 근무를 원했지만 이 전총장은 “나를 보좌하다 병이 생겼으니 대검에 있으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고집하며 대검 과장으로 발령을 냈다는 후문이다. 또 사표를 낸 11월4일 밤 이 전총장은 대검 간부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다가 급히 귀가했다. 한 참석자는 “‘총장으로 임명된 날 기자들이 몇 시간을 떨면서 기다렸던 것이 생각난다’며 일찍 자리를 떠났다”고 전했다. 역시 이 전총장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생했으니 오늘은 무조건 쉬어”
검찰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보스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 전총장을 덕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검사는 드물다. 대검의 검사장들과 술자리 한번 제대로 갖지 않았고 재임기간에 일선 지검·지청에 대한 순시도 전혀 하지 않았지만 검사들은 그를 따랐다.
이종왕(李鍾旺) 변호사는 “이 전총장은 일선에서 일을 할 때부터 부하들이 밤을 새울 때는 같이 밤을 새웠고, 후배들을 먼저 쉬게 해주는 등 아랫사람들이 승복할 수밖에 없게 했다. 하지만 부드러운 겉모습과는 달리 속에는 칼이 숨겨져 있다. 외유내강의 전형이다”고 평가했다. 한 검사장은 “꼭 검사들하고 밥이나 술을 같이 먹어야 인화가 된다는 통념이 깨졌다. 말이 없이도 조직원을 다 끌고 갈 수 있다는 걸 배웠다”고 회고했다.
업무는 실무진의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었다. 간혹 큰 흐름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5월 홍업씨 수사가 한창일 때 토요일 오후 업무가 끝난 뒤 이 전총장이 수사팀을 불러 점심을 샀다. 일부 참석자들은 ‘총장이 왜 불렀을까’ 하면서 내심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폭탄주까지 한 잔씩 돌린 뒤에도 별 말을 하지 않다가 “고생들 했으니 오늘은 무조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라”고만 지시(?)했다.
대검의 한 간부는 “솔직히 말해 이 전총장은 평소에 보고서를 올리면 읽는지 안 읽는지 잘 모를 정도로 말을 아꼈다. ‘네 일은 네가 책임지고 하라’며 일임하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전총장은 풍파를 온몸으로 겪다가 자연인으로 돌아갔고 검찰은 신임 총장 아래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총장만큼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다시 검찰총수로 맞이하기는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토록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았던 이 전총장이 뜻하지 않게 낙마하게 된 과정과 이유를 곰곰이 살펴보면 검찰이 반성하고 개선해야 할 과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