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조만간 이라크에 무기사찰단이 들어간다.
- 숨기려는 이라크 관리들과 찾아내려는 사찰단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예상된다.
- 미 유력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최근 ‘사찰의 미로(迷路)’란 제목의 특집기사를 마련, 1990년대 무기사찰단이 겪은 체험은 이번 무기사찰단에 교훈이 될 것이라 지적했다. 그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편집자).
지난 8월 생물무기 제조공장으로 의심받아온 한 공장을 언론에 공개하고 있는 이라크 관계자들
결론부터 말하면, 무기사찰단이 그런 혐의를 입증하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 당시 사찰단의 일원으로 알 하캄 공장을 조사했던 조너선 터커(현 워싱턴 미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이라크는 속임수와, 아니라고 우기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한 나라”라고 말한다. 미국·프랑스·스웨덴·영국·러시아, 그밖의 몇몇 국가들로 구성된 UNSCOM 사찰요원들은 거듭 알 하캄을 방문해 조사하면서 결국 알 하캄 공장에서 예전에 생물무기를 만들었다는 이라크의 시인을 받아냈다.
산업용? 생물무기 제조용?
알 하캄 공장은 일반적인 산업용 공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유엔 무기사찰 요원들은 외딴 곳에 철조망을 높이 두르고 외곽에 경비탑까지 세운 사실을 미심쩍게 여겼다. 그리고 건물건물 사이 거리도 뚝 떨어져 있어 독성물질이 새어나올 경우에 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만했다. 이라크 관리들은 닭 사료 공장이라 주장했지만, 막상 가보니 말라빠진 닭 3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공장 내부를 그냥 휙 둘러보면, 일반적인 공장과 다른 사항은 없어 보였다. 발효탱크들과 여러 제어장치 그리고 뱀처럼 꾸불꾸불한 파이프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전 무기사찰 요원 조너선 터커의 증언.
“그곳 공장에 설치된 발효기들은 여러 다른 공장에서 뜯어온 부품들을 짜맞춰 만든 것이었고, 파이프들도 크기가 각기 다른 것들을 용접으로 이어 맞춘 것이었다. 공장 설비가 훌륭해 보이진 않았지만, 탄저균(anthrax)을 비롯한 여러 생물무기를 충분히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겉으론 산업용이지만 언제라도 군사용으로 바뀔 수 있는, 다시 말해 이중 용도(dual use)로 쓰일 수 있다는 점. 이것이 바로 사찰 요원들이 부딪친 딜레마였다. 그 곳 설비들은 치명적 생물무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유엔 무기사찰단 요원들은 “그 이중의 용도 때문에 생물무기 사찰이 무기사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작업”이라 말한다. 사찰단 생물무기팀을 이끌었던 리처드 스퍼첼 박사는 알 하캄 공장의 발효탱크를 보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매우 작은 규모의 발효탱크는 닭 사료로 쓰이는 단세포 단백질을 만든다기보다 생물무기를 만드는 데 더 적합한 것이었다. 단세포 단백질을 만들려면 발효기 용량이 10만ℓ는 넘어야 하는데, 그곳엔 2000∼5000ℓ짜리 발효기들만 있었다.”
의심을 품은 스퍼첼 박사는 이라크 정부에 알 하캄 공장 관련자료를 요청했다. 월 단위로 생산원료는 얼마나 주문했고, 물은 얼마나 소비했는지, 그리고 제품 등급을 어떻게 매겼는지 등에 관한 자료였다. 그러나 알 하캄 공장측이 제출한 자료는 앞뒤 숫자가 맞지 않는 엉터리였다. 의문을 풀기 위해 사찰요원들은 공장 관계자들을 바그다드의 한 호텔로 불러 하나하나 따져 물었다. 전 사찰요원 터커의 증언.
“알 하캄 공장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자유롭게 말할 수 없었다. 이라크 정부가 보낸 감시인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정부는 우리가 민간인들을 인터뷰할 때는 정부 관리가 입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공장 관계자들은 필요 이상으로 입을 많이 여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라크 정부는 유엔 사찰팀이 이라크 민간인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3명의 관리를 따라붙였다. 그들은 뒤쪽에 앉으라는 사찰팀의 요구를 거절하고 인터뷰 대상자가 마주보이는 곳에 앉았다. 사찰단 생물무기팀장 리처드 스퍼첼은 이라크 정부가 민간인들에게 어떤 지침을 내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이라크 과학자는 2시간에 걸쳐 사찰팀의 심문을 받는 동안 그가 지켜야 할 답변의 선을 넘었다. 그러나 잠시 휴식시간을 가진 뒤 그는 앞서 한 말을 뒤집으려 했다. 스퍼첼의 증언.
“이라크 정부에서 나온 감시인들은 눈빛으로, 몸짓으로 아니면 기침소리를 내서라도 알 하캄 공장 관계자들이 비밀을 털어놓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공장에서 하는 일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중간에 말을 바꾸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여러번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이는 짓을 되풀이하면서 앞에 한 말을 뒤집곤 했다. 이라크 정부의 생물과학 책임자 리하브 타하는 인터뷰 도중 말이 막히니까 책상을 치며 화를 냈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유엔 사찰팀은 몇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이를테면 알 하캄 공장 설비 가운데 상당부분은 살만 팍 공장 설비들을 옮겨왔다는 점이다. 살만 팍 공장은 1991년 걸프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생물무기 제조공장이다. 아울러 살만 팍에서 일하던 생물공학 연구진이 대부분 알 하캄으로 옮겨왔다는 점도 밝혀냈다.
알 하캄 공장이 생물무기 공장인지에 대해 사찰팀 내부에선 다른 견해도 튀어나왔다. 가장 큰 쟁점은 알 하캄의 환기장치였다. 프랑스와 러시아 출신 요원들은 “만약 알 하캄이 생물무기를 만드는 시설이라면, 안전문제를 고려해 아주 정교한 환기시설과 방호시설들을 갖춰야 하는데, 알 하캄엔 그런 게 없다. 따라서 생물무기 제조공장으로 보기 어렵지 않으냐”는 견해를 내비쳤다. 조너선 터커의 증언.
“이라크 정부가 바라던 것이 바로 그런 결론이었다. 내 생각엔 이라크측이 일부러 안전시설을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어 국제사회의 눈길을 피하면서 실제론 불법행위(생물무기 제조)를 저질렀을 것으로 본다.”
유엔 사찰단은 알 하캄 공장 살충제 생산라인에서 두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첫째, 박테리아 살충제(bacterial pesticide, BT) 샘플을 전자현미경으로 살펴보니 그 박테리아에는 벌레를 죽이는 데 필요한 독성 결정체들이 제대로 없었다. 둘째, BT 입자(粒子)가 너무 작았다. 일반적으로 BT 입자는 공기 중에서 다른 곳으로 퍼지는 걸 막기 위해 적당히 커야 하는데, 알 하캄 공장의 BT 입자는 그렇지 않았다. 조너선 터커의 증언.
“그 입자들은 너무 작고 가벼워 바람에 밀려 멀리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라크가 주장하듯 살충제로는 적당치 않았다. 오히려 생물무기로 쓰려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시 사찰팀은 BT 생산라인이 탄저균 또는 그보다 더 치명적인 생물무기를 제조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됐다. 유엔 무기사찰단장 롤프 에케우스는 유엔의 모든 회원국에 이라크로 수출한 ‘두가지 용도’의 장비 목록을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서류들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사찰단은 이라크가 고성능 환풍기들을 주문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앞서 프랑스와 러시아 사찰단원들이 “알 하캄 공장이 정말로 생물무기 제조공장이라면 당연히 설치됐어야 할 텐데…”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문제의 환풍기였다.
사라진 22t 분량의 배양기
일련의 인터뷰를 통해 사찰단원들은 이라크가 추진해온 여러 프로젝트의 약호(略號, code)를 알아냈고, 이것들이 생물무기 생산작업과 연관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이라크가 주문한 고성능 환기장비들은 바로 알 하캄 공장에 설치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했다.
사찰단은 또한 이라크가 무려 42t에 이르는 미생물 배양기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배양기는 일반적으로 병원에서 의료진단용으로 쓰이지만, 탄저균이나 보툴리누스 독소(botulinum toxin), 오염될 경우 피부가 썩어 들어가게 하는 회저균(gangrene)을 만드는 데도 쓰인다. 이라크 정부는 20t 가량의 배양기를 의료진단에 썼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22t에 대해선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못했다. 한 무기사찰단원은 “전세계 어느 나라의 병원에서 20t 가량의 배양기를 의료진단용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쓸 수 있겠는가”라고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후세인 정권의 생물무기 프로그램 책임자 리하브 타하 박사는 사찰단원들 사이에서 ‘세균박사’로 통했다. 다른 많은 이라크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서양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다. 사찰단 생물무기팀장 리처드 스퍼첼 박사가 그녀의 상대역이었다. 그녀는 배양기 잔고 계산이 잘못됐다는 스퍼첼의 지적에 대해 “그럴 리가 없다”고 우기다 나중에는 마구 짜증을 부렸다. 사찰요원의 집요한 질문에 화를 벌컥 내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선 책상을 발로 차기도 했다. 후세인은 1997년 그녀에게 과학적 업적을 기리는 훈장을 주었다.
10월1일 유엔 무기사찰단의 이라크 복귀협상을 타결지은 뒤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유엔 무기사찰단 및 국제원자력기구(IAEA) 관계자들
생물무기를 만들었다고 실토하긴 했어도, 이라크 정부는 그것들을 탄두에 채우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달 뒤 사정이 바뀌었다. 1995년 8월 사담 후세인의 사위인 후세인 카멜이 이라크를 떠나 망명한 뒤, 유엔 무기사찰단과 면담했다. 카멜은 알 하캄에 대해 무기사찰단이 알고 있는 이상의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진 못했지만, 사찰단이 그동안 캐낸 문제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나아가 그는 그동안 파괴한 것으로 여겨온 생화학무기와 핵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추가적 정보를 폭로했다. 카멜이 망명한 뒤, 이라크 정부는 그동안 공격적인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해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1991년 말까지 모두 파괴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구체적으로 믿을 만한 증거 제시도 없는 주장이었다. 유엔 무기사찰단은 그런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한 사찰단원은 “이라크는 막대한 양의 배양기를 숨기고 있고, 알 하캄 같은 곳에서 전문가들을 관리해왔다. 그러고도 생물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이라크 정부를 비난했다.
후세인의 사위 카멜의 망명과 증언 후 사찰단원들은 이라크 대량파괴무기들에 대한 사찰작업에 더욱 매달렸다. 1994년부터 1년 동안 무기사찰단원으로 일했던 빅터 마이진의 증언.
“이라크의 생물무기 개발 사실이 하나둘 드러나자, 러시아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동안 러시아는 이라크가 생물무기를 모두 폐기했다고 주장하는 후세인을 적극 변호했었다. 그러나 사찰단의 활동 결과, 러시아는 바보가 됐다.”
후세인 사위, 망명 뒤 사찰단 만나
이라크 정부에서 파견한 감시인들은 때때로 사찰단원들을 위협했다. 사찰단 생물무기팀장 스퍼첼 박사의 증언.
“우리가 UN 마크가 달린 차량들을 몰고갈 때 이라크 감시인들은 2∼3명이 짝을 이뤄 따라다녔다. 때로는 차량과 차량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바짝 붙어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하곤 했다. 어떤 사찰단원들은 화가 난 나머지 총을 꺼내 겨누기도 했다.”
무기사찰과 관련해 민감한 지역을 방문할 때는 감시인들의 행동이 더 거칠었다. 입구에서 가로막고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기 일쑤였다. 한번은 2시간쯤 그렇게 기다리던 사찰단원들이 차량 보닛 위에 위성전화를 설치, 유엔본부 쪽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이라크 관리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사찰단원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1996년 5월, 무기사찰단원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6주에 걸쳐 알 하캄 공장 파괴작업을 감독했다. 구조 기술자들이 수십 채의 건물에 폭약을 설치해 하나씩 무너뜨렸다. 또다른 기술자들은 생물무기를 만드는 데 쓰일 배양균들을 중화시켰다. 산소용접기로 이중덮개의 강철 발효기들을 잘라냈다. 사찰단원들은 일부 부품들을 증거품으로 모아 꼬리표를 붙였다.
당시 사찰단원으로 일했던 올리비아 보쉬(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 연구원)의 증언.
“그때 우리가 신경을 쓴 것은 이라크 쪽에서 그런 폐기장비들을 모아 생물무기 생산에 재활용할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알 하캄 공장 파괴 뒤 나중에 그 폐기장비들이 어디론가 옮겨지지 않도록 현장사진을 찍었다.”
알 하캄 공장 파괴를 준비하면서 사찰단은 이라크 정부에 “알 하캄의 설비를 다른 곳으로 옮겨선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현장설비 목록을 만들면서 설비의 상당부분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라크 정부는 “도둑이 훔쳐갔다”고만 해명했다. 문제가 커질 것 같자, 이라크 정부는 한 트럭분의 장비를 도로 가져왔다.
알 하캄 공장에서 생물무기가 제조됐다는 흔적을 추적하는 데 단서가 될 샘플을 추출하기는 쉽잖은 일이었다. 이라크 정부가 이미 그 설비들을 화학물질로 세척했기 때문이었다. 사찰단은 발효기와 의심스런 설비들의 표면을 걸레로 닦아내고 건조제를 뿌린 다음 샘플을 추출했다. 사찰업무 초기에는 모은 샘플들을 이라크 국경 밖 실험실로 운반했지만, 나중에 사찰단은 이라크 안에 실험실을 만들었다. 알 하캄 공장파괴 뒤 사찰단은 분해된 설비조각들을 갖고 다시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생물무기에 나타나는 DNA가 발견됐다.
비록 알 하캄 공장에 대한 사찰이 성공적이었다 해도 생물무기 사찰은 본질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당시 조너선 터커는 곧 이라크로 들어갈 새로운 무기사찰단원들이 겪을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생물무기 생산설비는 화학무기 생산설비에 비해 훨씬 규모가 작다. 화학무기를 만드는 데 드는 원료가 여러 t이라면, 생물무기는 몇 kg이면 된다. 요점은 생물무기를 어떻게 만들고 보관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정보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는 그런 민감한 정보를 제공하길 꺼린다. 이라크에 대한 대량파괴무기 사찰이 성공을 거두려면, 미국은 유엔과 관련정보를 나눠가져야 한다.”
이라크로 들어가는 새 무기사찰단원들은 선배들이 그랬듯, 이라크 수출입 관련서류를 뒤질 필요가 없다. 이젠 이라크도 배양기 같은 기본장비를 생산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리처드 스퍼첼은 “새 사찰팀은 탄저균 색출에 전보다 더 앞선 기술을 갖고 들어가지만, 이라크측이 협조하지 않는 한 사찰을 제대로 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새 사찰팀도 스퍼첼이 그랬듯, ‘이라크 수수께끼’를 푸느라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란 얘기다.
1990년대 이라크에서 무기사찰에 종사했던 사람들은 새 사찰단이 무기사찰에만 매달려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라크의 과학두뇌들에게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무기사찰뿐 아니라 누가 그런 무기를 만들 줄 아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후세인은 여러 해에 걸쳐 미생물학자와 화학전문가, 핵물리학자들을 불러모아왔다. 만약 이들이 사찰단에 입을 연다면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무기사찰단에서 핵무기 사찰팀장으로 일했던 데이비드 케이 박사는 “시설과 장비는 우리가 파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설치한 두뇌를 파괴할 수는 없다. 후세인 쪽에서 보면, 파괴된 군사장비는 돈으로 사들일 수 있지만 고급인력은 쉽게 재생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사찰단원들이 이 이라크 두뇌들을 심문한다면 통역을 둘 필요가 없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영국 등 서방국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들이다. 특히 미국에서 교육받은 이라크 인재들은 후세인의 대량파괴무기 개발에 첨병들이다.
1994년 서방으로 망명한 이라크 최고위 과학자 키디르 함자 박사는 MIT공대 석사를 거쳐, 플로리다주립대에서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함자 박사의 증언.
“1970년대 후반 다른 이라크 과학자들과 핵무기 개발에 나섰을 때 함께 참여했던 후샴 샤리프, 모예세르 알-말라흐 등은 모두 미국 유수 대학의 핵물리학 박사다. 이라크 핵무기 프로그램의 초기 입안자들은 모두 미국에서 교육받고 돌아온 사람들로, 이들은 젊은 이라크 학생들에게 미국의 어느 대학으로 가라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었다.”
1980년대 들어 이라크 과학자 집단은 영국, 구소련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다양해졌다. 1980년대 말 30명의 이라크 핵물리학자 가운데 절반만이 미국 대학 출신이었다. 이같은 다양성은 후세인의 장기 교육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함자 박사의 증언. “그러나 후세인은 곧 동구권과 구소련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들이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1990년대에 이라크 유학생들이 미국·영국·캐나다로 몰린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뛰어난 과학자 한두 명만 있으면…
1991년 걸프전 뒤로도 이라크는 미국으로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데이비드 케이 박사는 1993년 미시간대에 강연을 갔다가, 강의실을 메운 핵물리학 전공 대학원생 가운데 이라크 학생이 10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매우 예리한 질문을 던졌고, 공부가 끝난 뒤엔 대부분 이라크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조지아주립대의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1990년부터 1999년 사이에 이공계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 중 1215명이 미 국무부가 ‘테러 지원국가’로 지정한 7개국 중 5개국 출신이다. 이 가운데 이라크 출신은 112명. 핵물리학·화학·미생물학 분야 등 예민하게 여겨지는 분야의 박사는 14명으로 집계됐다. 이들 중 몇 명이나 이라크로 돌아갔는지는 모른다. 그동안 이라크 정부로부터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가족을 두고 혼자 나와 있었다면, 이라크로 돌아갔을 것이다. 문제는 머릿수가 아니다. 한두 명의 뛰어난 과학자만 있다면 대량파괴무기의 전체 프로그램을 완성할 수 있다.
후세인은 자신을 배반하고 망명하려는 과학자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해왔다. 1990년대 이라크 대량파괴무기 프로그램 책임자이던 후세인 카멜은 1996년 서방세계로 망명했다. 그러나 남은 가족이 걱정스러워 망명 직후 마음을 바꿔 이라크로 돌아갔다. 그리곤 곧 죽임을 당했다. 미시시피주립대 미생물학 박사 출신인 압둘 나시르 힌다위는 1980년대 이라크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입안했다. 그러나 망명 계획이 드러나 1988년 체포된 뒤 죽었다. 이라크 과학자들은 후세인 체제가 싫어 망명을 꿈꾸지만, 실천이 쉽지 않다. 무기사찰단이 그런 과학자들을 인터뷰할 때 감시인들이 따라붙이는 것은 정보가 새는 것과 그들의 망명 기도를 막기 위해서일 것이다.
11월 들어 유엔 무기사찰단은 다시 이라크로 들어간다. 새 무기사찰 요원들이 가봐야 할 곳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약 700군데가 사찰대상으로 꼽히며 이 가운데 100곳이 우선 사찰대상이다. 1995년의 알 하캄 사찰은 다시 시작된 이라크 무기사찰에 교훈이 될 것이다. 이쯤에서 리처드 스퍼첼 박사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라크 대량파괴무기(WMD) 프로그램의 핵심인물을 빼내온다면, 이라크의 WMD도 더불어 없앨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