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호

多讀의 나무에 열린 多作의 열매

  • 글: 공병호경영연구소장· 경제학 박사 gong@gong.co.kr

    입력2002-12-02 17: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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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多讀의 나무에 열린 多作의 열매
    지금까지 나는 40여 권의 책을 펴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내가 쓴 것이다. 올 한해만도 모두 5권의 책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그렇게 다작(多作)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 대답은 바로 다독(多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30대 초엽부터 시작된 나의 책 읽기는 이제 또 하나의 장르를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나온 ‘공병호의 독서노트: 미래편’이다. 혼자서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주제별로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그런 책이다. 이것 역시 많이 읽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세상에 눈뜨게 한 하이에크

    중·고교 시절을 되돌아볼 때 어떤 책을 읽었노라 말하긴 어렵다. 부지런히 공부해서 대학 들어가기도 바빴기 때문이다. 대학 때도 유학이다 뭐다 해서 포괄적인 독서를 할 만한 짬을 내지 못했다. 미국에서의 대학원 시절 역시 허겁지겁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하기에 바빴다. 특정 주제를 두고 깊이 있는 독서를 할 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논문 읽기, 시험 등으로 이어지는, 생존을 향한 투쟁의 시기라고 표현하는 게 좋겠다.

    내 인생에서 독서를 대하는 큰 터닝 포인트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몇 해 지나서 맞았다. 학부 4년, 박사학위 4년을 마무리한 다음에 시작한 직장생활에서 더 내놓을 게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말 못할 고민을 하던 시절이다.



    그 무렵, 무엇인가 새로운 주제를 찾아나선 내게 큰 방향을 제시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의 저술을 만난 것이다.

    그는 1899년에 나서 1992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영면할 때까지 탁월한 자유주의(한국적 의미로는 보수주의) 사상가였다. 그 공로로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정책과 사상의 근저에 바로 하이에크가 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사회에 대한 튼튼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해낸 사람도 바로 하이에크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는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길’을 찾고 있었다. 내가 지금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렇듯 삶을 매순간 어떤 것을 찾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특히 책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찾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날 내가 만난 하이에크의 첫번째 책은 ‘개인주의와 경제질서’인데 자유사회의 운용 원리를 명쾌하게 제시한 책이다. 사상적 토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인프라가 구축돼 있지 않던 내가 하이에크의 저술을 만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눈을 뜨게 한 사건이었다. 오늘의 나는 그 한 권의 책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읽는 행위에 대한 ‘불감증’

    한국사회가 당면한 여러 가지 고민, 그리고 한국인들이 헤쳐나가야 할 대안들이 하이에크의 책에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마치 ‘스파크’가 일어난 것처럼 꼬박 밤을 새우며 영문 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아, 내가 이 일을 해야겠구나” 하는 점을 깨치게 됐다. 그때 나는 단 한 권의 책이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아마도 내가 다독과 다작을 병행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일 것이다. 권력은 유한하고 덧없는 것, 하지만 지식과 지혜는 오래오래 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그때부터 갖게 된 것이다.

    그 책을 시작으로 하이에크의 대표 저작들인 ‘자유헌정론’ ‘법, 입법 그리고 자유’ ‘노예의 길’ 등을 탐독했다. 길지 않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가운데 하나가, 하이에크의 사상 체계를 파고들면서 사회 운용의 원리,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신의 삶에 대한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던 그때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전공을 넘어선 책 읽기가 시작됐다. 정치·경제·사회·문화·과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책을 읽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저서를 읽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스스로 글을 쓰면서 항상 자신만의 사상체계를 세워보고 싶은 욕구가 강한 편이다. 30대까지 30여 권의 책을 펴냈지만, 이 가운데 내놓을 만한 책은 ‘기업가’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그 적들’ 등이다. 이 책들은 자유시장경제와 자유기업주의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으며, 30대인 내가 안고 있는 고민과 열정 그리고 사회에 대한 비전이 담긴 책이다.

    나의 책읽기에서 뚜렷한 특징은 책을 읽고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한 다음 나만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데 철저하게 이용한다는 점이다. 대단히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책 읽기를 하는 것이다.

    多讀의 나무에 열린 多作의 열매
    하이에크와의 만남은 읽고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한국사회에 널리 전파한다면 좀더 부유하고 여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이나 케이토 연구소를 벤치마킹한 연구소를 만들려는 꿈을 갖게 됐다. 나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꿈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마침 1996년에 기회가 찾아왔고, 그 기회를 포착해서 1997년 전경련의 도움을 받아 재단법인 자유기업센터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가 한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2년 6개월 동안 하이에크, 뷰캐넌, 미제스, 애덤 스미스, 커즈너츠, 랜드, 바스티야, 액튼 등 50명이 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책을 하드 커버로 만들어낸 것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름도 생소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책이 대학 서가에 꽂히고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읽게 됐다. 읽는 것, 쓰는 것, 스스로 책을 펴내는 일을 함께 진행했다.

    1999년 3개월간의 기부금 모집에서 90억원을 웃도는 돈을 모으는 데 성공한 나는 재단법인 자유기업원으로 분리·독립시키고, 연구소를 떠나서 사업의 세계로 인생의 방향타를 돌렸다.

    이따금, 훗날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자유기업센터의 ‘자유주의 시리즈’만은 남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그 책들이 두고두고 한국의 지적 토대를 풍부하게 하고, 한국사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사상적 방향타를 제시하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평생동안 추구할 것 같았던 연구소 생활을 접고 뛰어든 사업 세계에서는 책을 손에 잡을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 세계를 떠난 지난해 8월 나는 개인연구소를 열면서 다시 한번 왕성한 독서에 몰입했다.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한경와우TV의 ‘공병호의 독서대학’, MBC라디오의 ‘공병호의 독서산책’, 한국경제신문의 ‘공병호의 책이 있는 풍경’ 등 여러 독서 관련 코너를 맡으면서 이제는 책 읽기를 권하고 가이드 노릇까지 겸하게 됐다.

    현재, 과거, 미래를 아우르는 책 읽기

    1990년대 초반 날로 비어가는 머리를 채우기 위해 시작한 책읽기, 그 과정에는 이렇듯 하이에크와의 만남이 있었다. 책을 매개로 한 그와의 만남은 나 자신으로 하여금 연구소 설립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리부터 예정된 삶이란 없다. 지식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나의 책 읽기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 그리고 책읽기를 통해 얻은 신념과 열정, 에너지는 30대를 열정적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 됐다.

    40대로 접어든 후부터는 개인의 발전이라는 ‘자기경영’ 테마를 갖고 새로운 글쓰기와 글읽기 그리고 글 소개하기로 삶의 새 지평을 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의 중심에 지난 15년간의 책 읽기가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인생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오묘하다는 생각을 한다. ‘사소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오늘도 ‘안테나’를 높게 세운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현재와 과거, 미래를 아우르는 책 읽기를 계속할 참이다. 그것에서 기쁨과 위안, 통찰력과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들을 가공하고 재창조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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