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의 재래시장 ‘성동시장’에는 한식뷔페처럼 갖가지 반찬가게가 즐비하다. [사진=경주시청 제공]
휴대전화만 있으면 침대에 누워서 전 세계를 돌아볼 수 있다. 유명한 곳, 숨은 명소, 오지와 번화한 곳, 국경과 계절을 불문하고 어디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여행은 화면 속 랜선 투어와 비교할 수 없이 낯설고 무한한 설렘을 준다. 같은 건축물을 보고, 같은 길을 걸어도 사람 저마다의 감상이 다를 테고, 후에 남을 기억의 모양도 서로 같지 않다. 나는 길을 걸으며 식료품점이나 식당을 기웃거리고, 친구는 골목의 풍경을 눈에 담으려 애쓰고, 또 다른 친구는 사람들의 표정과 옷차림 따위를 유심히 살핀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재미난 발견을 조잘조잘 공유하겠지.
풍기 도넛과 평양냉면
맛이야 말로 실체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와 닿지 않는 여행의 한 조각이다. 어디에나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과 맛집이 있다. 더불어 숨어 있는, 작은, 알려지지 않은 맛의 장소들도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지역의 분위기를 대변할 수도 있고, 주인장이 명물일 수도 있으며, 생긴 지 며칠 안 된 야심작일 수도 있다.
찬바람 부는 내내 과메기 생산에 여념이 없는 바닷가 마을 구롱포 가면 황태덕장처럼 생선 말리는 모습을 지천에서 볼 수 있다. 도시로 나가는 공장형 상품보다는 집집마다 두고 먹을 것을 장만하는 경우가 더 잦다. 마른 생선들 사이에 철규분식이 있다. 분식하면 떡볶이나 쫄면 등이 있을 것 같지만 여긴 단팥죽과 찐빵을 판다. 손을 타서 반들반들해진 작은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노라면 내 아버지의 어린 시절 가까이에 와 있는 기분이 든다. 단맛이 부드러운 팥죽과 팥소가 알뜰하게 들어 있는 자그마한 찐빵을 함께 먹는다. 15년 전 처음 이곳에 왔던 겨울날이 떠오른다. 그때는 여행자의 설렘으로 들어섰는데, 지금은 어쩐지 동네 사람처럼 안온한 마음이 든다.
풍기 도넛은 지역특산물인 인삼 못지않게 유명해졌다. [사진=정도너츠 홈페이지 제공]
풍기하면 인삼과 인견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와중에 의외로 유명한 것이 찹쌀로 빚은 도넛이다. 인삼, 사과, 생강 등의 풍미를 담은 풍기 도넛은 전국으로 이름이 알려지며 택배로 맛봐야 할 지역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발품으로 찾아가 즐기는 풍기의 평양냉면 맛을 더 쳐주고 싶다. 쉬이 끊어지는 메밀면발에 무심함과 깊이감을 동시에 갖춘 육수를 맛볼 수 있다. 이른바 ‘평냉 마니아’들조차 손꼽는 집이나 ‘인싸’들이 가기에는 다소 멀다는 것이 단점인데 그 한적함이 여행자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경주 맛집 ‘성동시장’
일 년에 서너 번씩 꼬박꼬박 경주에 가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나에게 ‘경주 맛집’을 꼽으라면 단연 ‘성동시장’이다. 처음에는 맛집을 검색하고 주변에 물어보며 불고기, 평양냉면, 국수와 만둣국 등을 찾아 먹곤 했다. 여행자로서는 맛좋고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정기 방문하는 나와 같은 입장이 되면 두세 번씩 반복하거 싶은 체험은 아니다. 예상이 가능한, 단조로운 경험은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엘 간다. 성동시장에 들어서면 언제 가도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재래시장은 계절과 사람의 옷을 매일 갈아입기에 하루마다 새롭다.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기대된다. 의외성이 넘치는 시장에 가면 십여 가지 반찬을 줄줄이 늘어놓고 파는 한식 뷔페집이 여럿 있다. 말이 뷔페지 거대한 반찬 가게에서 밥을 먹는 모양새이다. 갖가지 반찬에는 사장님마다의 손맛, 경주의 지역색 그리고 제철이 담겨 있다. 경주 특유의 정갈한 한정식 집의 단아함, 기품, 편안함은 없지만 펄떡이는 시장의 생기와 분주함이 더해진 생경하고도 따뜻한 한 끼의 진가를 경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