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찾으러 日로 건너간 서예가 스토리
소장가 10명 손 거친 세한도
누구에게나 세한의 시절이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국립중앙박물관]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우리는 어떤 작품을 명작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명작과 명작이 아닌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기준이나 조건을 충족시켜야 명작으로 대접받는 것일까. 명작이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이런 질문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명작의 정의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우리 옛 그림이 있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다.
“세한도는 잘 그린 그림인가. 참, 썰렁한 그림 아닌가.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화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세한도는 왜 명작으로 대접받는 것일까.” 세한도에도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분명 ‘세한도’는 그리 잘 그린 그림은 아니다. 그림은 휑하고 썰렁하다. 그림 속 허름한 집 지붕 선의 비례도 맞지 않고, 지붕과 창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도 서로 어긋나 있다(이를 두고 획일적인 서양의 시선을 탈피한 3차원적 동양의 관점이라고 말하는 이도 꽤 있다). 이것이 김정희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자체만 놓고 보면 그 아름다움을 쉽게 느낄 수 없다.
누군가는 “문인화란 사실적 표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면박을 줄지 모르겠다. 그렇다. 그 썰렁함에 추사의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세한도가 명작이라고 말하기엔 무언가 많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림을 그린 김정희의 관점(시선)뿐만 아니라 다른 관점(시선)이 필요한 대목이다.
슬픈 사내의 그림이 대한해협 건넌 사연
1840년 억울하게 유배를 가게 된 추사는 1844년 여름 제주 서귀포 대정읍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였다. 역관(譯官)이라서 중국을 자주 드나들던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책을 구해 유배지로 보내주었다.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서화(書畵)였으니 이상적이 보내오는 책은 김정희에게 특히 더 값질 수밖에 없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한낱 유배객을 잊지 않고 책을 구해 전해 주는 갸륵한 제자. 추사는 그 변함없는 마음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그림을 완성하곤 그 옆에 사연을 적고 ‘歲寒圖’라 이름 붙였다. 그러곤 자신을 비부(悲夫), 즉 슬픈 사내라 칭했다. 적당한 자학과 적당한 쓸쓸함이 담겨 있는 명칭이다.
추사는 세한도를 이상적에게 보냈고 이를 전해 받은 이상적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1844년 가을 그는 이 그림을 가슴에 품고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 갔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추사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장악진(章岳鎭), 조진조(趙振祚) 등 16명의 글을 받아 그림 옆에 이어 붙였다.
세한도는 10명의 소장자를 거쳤다. 1865년 이상적이 세상을 떠난 뒤 세한도는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인 김준학(金俊學)이 물려받았다. 그 후 휘문학교를 설립한 민영휘(閔泳徽)의 집안으로 들어가 아들 민규식(閔奎植)을 거쳐 1930년대 서울(경성)에 와 있던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의 품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후지쓰카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추사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1943년 봄,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포함해 자신이 수집한 추사의 서화 수천 점을 들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추사의 세한도가 이국 땅으로 유출된 것이다.
그림 한 점 돌아온 것이 광복의 전조
일본에서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 [동아DB]
세한도를 되찾아온 손재형은 1949년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오세창(吳世昌),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李始榮),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정인보(鄭寅普)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찬문을 받아 세한도 두루마리 뒤에 이어 붙였다.
정인보는 세한도를 보고 이 같은 발문을 남겼다. “국보 그림 동쪽으로 건너가니 뜻있는 선비들 처참한 생각 품고 있었네. 건강한 손 군이 한 손으로 교룡과 싸웠네. 반전되어 이미 삼켰던 것 빼앗으니 옛 물건 이로부터 온전하게 됐네. 그림 한 점 돌아온 것이 강산 돌아올 조짐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 후 손재형이 국회의원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한도를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히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눈 밝고 열정적인 개성 출신의 수집가 손세기(孫世基)의 손에 들어갔고, 이후 아들 손창근(孫昌根)이 넘겨받았다. 그러곤 2020년 손창근은 대를 이어 간직해 온 세한도를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170여 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친 세한도. 해외로 유출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열혈 컬렉터 손재형의 투지 덕분에 국내로 돌아왔고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히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안목 있는 컬렉터 손세기 부자(父子) 덕분에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그 170여 년의 스토리는 이제 세한도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추사가 그린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 차가운 바람만이 세한도가 아니라 170여 년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세한도의 미학으로 녹아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신비감이 덧붙여졌다. 정확히 말하면, 부정확하고 왜곡된 정보가 전파되면서 이것이 세한도를 둘러싼 미스터리가 되고 나아가 세한도의 신비적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 핵심은 손재형이 세한도를 찾아오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흔히 “손재형이 100일 동안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가 부탁했고, 그에 감동한 후지쓰카가 돈을 받지 않고 세한도를 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리 과장된 것이다. 손재형의 3남인 손홍 진도고등학교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 세한도를 그냥 받아올 수는 없는 법이지요.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거금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님은 세한도만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그 유명한 불이선란 등 7점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글씨를 제외하고 추사의 최고 명품들은 그때 다 돌아왔다고 봐야겠지요.” 세한도에 붙어 있는 오세창의 발문에도 ‘돈을 주고 찾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계에 전운이 가장 높을 때에 손 군 소전이 훌쩍 현해탄을 건너가 거액을 들여 우리나라의 진귀한 물건 몇 종을 사들였으니 이 그림 또한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도 후지쓰카가 그냥 내주었다는 얘기가 계속 전해온다. 왜 그런 것일까. 손재형이 후지쓰카를 100일 동안 찾아갔다는 구체적 근거가 없는데 사람들은 “100일 동안 찾아갔다”고 얘기한다. 왜 그런 것일까.
세한의 시절에서 느끼는 공감
돈을 주고 찾아왔다는 것보다 무상으로 받아왔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자극한다. 100일도 그렇다. 두 달보다는 100일이라는 숫자가 우리네 정서에 잘 어울린다. 단군신화에서 곰이 웅녀가 된 것도 100일의 기적 아니었던가. ‘무상’과 ‘100일’은 이렇게 세한도 귀환의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더욱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렇기에 이런 과장된 정보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이런 과장된 스토리를 굳이 바로잡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돈을 주고 찾아왔다고 해서, 또 100일 동안이 아니라 두 달 동안 찾아갔다고 해서 그 감동이 줄어드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일제강점기이던 1944년, 거금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두 달 넘게 후지쓰카를 찾아가 세한도를 찾아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정인보가 발문에 “광복의 전조”라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후지쓰카가 거금을 받고 세한도를 넘겨주었다고 해서 후지쓰카의 진심이 폄하되는 것도 아니다. 후지쓰카는 경성제대 교수로 있으면서 ‘이조에 있어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추사 김정희)’이라는 박사 논문(동경제대)을 썼고 평생 추사를 연구한 사람이다. 그에게 세한도는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내놓았다는 것은 돈을 받았는지 여부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다.
충남 예산군 추사 고택 앞 김정희 동상. [이광표]
감동적인 비화는 차치하고 세한도를 들여다보면 알 듯 모를 듯하다. 소나무 두 그루와 측백나무 두 그루, 허름한 집 한 채. 매우 간략하며 메마르고 휑하다. 차갑고 스산하다. 유배객의 내면이 저러했던 것일까. 추사는 여기에 ‘세한도’라고 이름 붙였다. 추운 계절, 세한. 이 상징적 제목은 그림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세한도는 실제로 보는 이에게 다의적, 다층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끌어낸다. 그림 속의 집의 정체는 무엇인지, 휘어진 고목 소나무와 곧게 뻗은 소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등, 또한 감상자들은 세한도를 통해 자신의 상황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세한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사랑한 그림 세한도
그래서일까. 세한도는 우리 시대 문인,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왔다. 동시에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세한도에 자극받은 문인, 예술가들은 세한도를 소재 삼아, 세한을 주제 삼아 다양한 작품을 창작해 왔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미술, 사진, 연극, 가곡, 무용, 춤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고미술이나 문화유산 가운데 이렇게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변주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찾아볼 수 없다. 세한도가 단연 압도적이다.특히 많은 시인이 세한도를 시로 변주해 왔다. 외환위기가 막 시작된 1998년, 계간 ‘창작과비평’ 1998년 봄호엔 세한도 관련 시 3편이 한꺼번에 실렸다. 고재종의 ‘세한도’, 도종환의 ‘세한도’,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이다. 어렵고 차가운 시기일수록 ‘세한도’의 상징성에 관심을 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다.
“서리 덮인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친 길이다/ 천명이 알려주는 세한행(歲寒行)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라신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유안진의 ‘세한도 가는 길’)
2008년엔 세한도 관련 시를 한데 모은 시집 ‘시로 그린 세한도’(과천문화원)가 출간됐다. 여기엔 53인의 시 64편이 수록됐다. 세한도를 시로 변주한 시인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시인은 집 떠난 아버지를 떠올렸고(정호승 ‘세한도’) 어느 시인은 포스트모던을 되뇌었다(이근배 ‘추사 고택에 가면’).
시인들은 왜 이렇게 세한과 세한도를 변주하는 것일까. 문학평론가 윤호병은 이렇게 분석한 바 있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사적인 가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 그림에 암시되어 있는 김정희의 강직한 성품과 지조 및 어떠한 역경에서도 자신의 정신자세를 굽히지 않겠다는 불변의 덕목을 자신들의 시 세계로 전환시켜 오늘을 사는 하나의 지혜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윤호병, ‘한국 현대 시로 전이된 김정희 그림 <세한도>의 세계’)
최근 미디어아트가 인기가 높다. 작가 이이남은 미디어아트의 대표 주자다. 이이남이 미디어아트를 시작할 때 내놓은 작품은 ‘세한도’(2007), ‘신 세한도’(2008)였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이이남의 미디어아트는 이렇게 세한도와 함께 시작됐다. 추사의 세한도가 이이남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한 것이다.
추사 고택에 깃든 특별함
충남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추사 고택. [동아DB]
얼마 전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경험했다. 우선 고택의 리듬감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고택 입구부터 맨 안쪽 사당에 이르는 동선이 돋보였다. 오르막 내리막 리듬감이 경쾌하게 다가왔다. 추사의 무덤도 인상 깊었다. 고택 마당의 쪽문을 나서면 바로 추사의 무덤이 나온다. 수년 전 단장된 추사 무덤 앞에는 테이블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추사가 심은 백송. [이광표]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