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호

[고담기담] 어느 노비의 파란만장 출세기

  • 윤채근 단국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2024-10-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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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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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이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때론 얼마나 놀라운가. 나는 성도 없이 태어난 어느 비천한 노비가 모진 세파를 뚫고 이뤄낸 믿을 수 없는 성공에 대해 말해 볼 참이다. 노비의 이름은 막둥, 충청도 후미진 고을 찢어지게 가난한 송씨 양반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디 떵떵거리던 고을 유지 집안인 송씨 가문은 변변한 벼슬아치를 길러내지 못한 채 가세가 차츰 기울어갔다. 그러다 막둥이 태어날 무렵엔 하루 세 끼니를 걱정할 처지에 이르렀다.

    막둥의 부모는 자신들이 모시던 주인 송정근에게 누구보다 충직한 하인이자 말벗이었다. 정근은 비록 고을 명예직인 좌수를 지냈다지만 그건 그저 허울뿐인 입에 발린 호칭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귀천을 불문하고 그 누구도 돈 한 푼 없이 허송세월하는 그를 존중하지 않았다. 막둥의 부모만은 예외였다.

    다섯 살 무렵, 막둥은 정근의 서재를 청소하다 방바닥에 이리저리 펼쳐진 책들을 발견했다. 비록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과거에 낙방했지만, 정근은 스스로 학자라는 허위의식에 빠져 성리학 책들을 소리 내어 읽곤 했다. 책 한 권을 들어 올린 막둥은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날 저녁 잠들기 전, 막둥이 아비에게 물었다.

    “아버지! 주인님 방에 책이 있던데, 읽을 수 있으세요?”

    막둥 부모는 동시에 웃음보를 터뜨려 멈출 줄을 몰랐다. 그런 부모가 이상했던 막둥이 다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우스우세요?”

    배꼽을 잡다가 방귀까지 뀐 아비가 대답했다.

    “내가 그걸 읽을 수 있으면, 이렇게 살겠냐? 그런 건 우리 주인님처럼 양반으로 태어나야 읽을 수 있는 거다. 우린 몰라도 돼!”

    아비를 뚫어지라 쳐다보던 막둥이 말했다.

    “우리도 책을 읽으면, 양반이 될 수 있나요?”

    아비는 말없이 모로 누워 잠을 청했고, 막둥이를 옆자리에 누인 어미만이 아들 엉덩이를 토닥이며 속삭였다.

    “책은 읽을 필요 없으니, 내일은 산에 가서 나뭇가지라도 주워 올래? 주인님이 돈이 없어 땔감도 부족하구나. 어서 자라.”

    막둥이는 잠이 오지 않아 그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몸을 일으킨 그는 좁은 방에 서로 찰싹 달라붙어 잠든 형과 누이 일곱 명을 바라봤다.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그를 향해 잠에서 깬 맏형이 속삭였다.

    “주인집 도련님들 흉내 낼 생각일랑 마. 우린 상것보다 더 천한 노비야. 너도 조금 커보면 알게 될 거야. 빨리 자고 내일 나무나 하러 가자. 도련님들 추우시겠다.”

    계획된 도주

    막둥은 가족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가끔 도련님들이 책 읽는 방에 몰래 들어가 한참 동안 머물기 일쑤였다. 읽지도 못할 책을 쥐고 끙끙대는 막둥을 우연히 발견한 정근은 재미 삼아 천자문을 가르쳤다. 놀랍게도 막둥은 한 달 만에 천자문을 뚝딱 외워버렸다. 깜짝 놀란 정근이 막둥을 유심히 쳐다보며 말했다.

    “노비가 너무 머리가 좋으면 화근이 된다. 앞으론 도련님들 방에 들어가면 안 된다. 명심해라!”

    막둥이 풀이 죽어 땅바닥만 바라보자 마음 약한 정근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떠냐? 그런 책 읽는 대신 셈 공부를 해보는 거다!”

    막둥이 눈동자에 생기가 돌며 물었다.

    “셈 공부가 뭐예요?”

    “이것저것 계산하는 거다. 내가 비록 큰돈은 없다만, 돈 계산이 서툴러 더 가난한 것도 같구나. 나중에 네가 우리 집안 돈 관리를 하는 거다. 머리가 그리 총명하니 좀 잘하겠니?”

    막둥은 그렇게 산수를 배우기 시작해서 열 살 무렵엔 주판 없이 어른도 하기 어려운 복잡한 계산까지 척척 해냈다. 가끔 정근 집을 방문하던 고을 호방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쯧쯧! 서얼으로라도 태어났으면 아전으로 딱인데, 아깝다! 아까워!”

    막둥이의 야무진 계산 실력 덕분인지 정근의 집안 형편은 약간 나아졌고, 적어도 터무니없는 빚을 지진 않게 됐다. 막둥은 내친김에 주인집 장 보는 일까지 도맡게 됐는데, 그럴수록 그에 대한 정근의 믿음은 단단해져만 갔다. 어느 날 저녁, 정근이 아들들 몰래 막둥을 자기 서재로 불러서 물었다.

    “막둥아! 내 이런 말 하긴 쑥스럽지만, 네가 내 아들들보다 똑똑하다. 아까운 재주를 타고났어. 결국엔 쓸 데도 없을 테지만, 세상 이치를 깨치고 죽는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보람 있는 일일 터, 오늘부터 천자문보다 어려운 책을 읽어 보겠니?”

    주인님 말 뜻을 바로 눈치챈 막둥은 넙죽 절을 하고 대답했다.

    “배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읽는 건지만 일러주신다면, 백번 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날 이후 막둥은 정근이 주는 책을 회계장부 사이에 끼워두고 남몰래 읽기 시작했다. 막둥의 글 익히는 속도가 남다르자, 신이 난 정근은 아예 책을 여러 개로 쪼개 분철해 주며 속삭였다.

    “비록 네가 내 자식은 아니지만, 내 밑에서 자란 식솔이라면 식솔이다! 과거 응시는 못 할지나 네가 제법 근사한 선비처럼 여생을 산다면, 이 또한 내가 남긴 유산이라 할 것이야!”

    주인님의 말에 용기백배한 막둥은 장부 정리를 핑계로 밤을 낮 삼아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던 차에 정근 부부에게 늦둥이 아들이 태어났다. 이번 자식만큼은 재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 정근은 웃어른께 공경하고 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으로 ‘경충’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송씨 가문의 기대를 받고 자란 경충은 하지만 다섯 살이 되도록 그럴 싹수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하루는 정근이 막둥이를 데리고 장터로 나가 못 마시는 술을 하염없이 마시더니 울면서 말했다.

    “막둥아! 내 말 들리느냐?”

    막둥이 의자에서 쓰러지려는 정근을 부축하며 대답했다.

    “주인님! 약주가 과하셨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야죠.”

    막둥이의 팔을 뿌리친 정근이 고개를 숙이고 속삭였다.

    “도망가거라.”

    자기 귀를 의심한 막둥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취하셨습니다.”

    “안 취했다. 막둥아! 도망가라. 우리 집은 희망 없으니, 도망가서 재주껏 살아라.”

    막둥은 술값을 꼼꼼히 계산한 뒤 정근을 업고 집으로 향했다. 달빛이 노랗게도 보였다가 파랗게도 보였다. 정근은 정신을 잃기 직전 노래를 흥얼대더니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널 가르쳤겠느냐? 이미 알고 있으면서, 에이! 그동안 고생 많았다!”

    그날 이후 막둥은 길고도 긴 고민을 외롭게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결심을 굳힌 어느 날, 막둥은 장부를 정리할 때마다 조금씩 따로 떼어둔 돈을 가지고 주인집을 벗어나 줄행랑을 놓았다. 동네 전체가 발칵 뒤집혔지만, 정작 주인인 정근은 먼 산만 쳐다보며 “허참!”만 연발할 뿐이었다.

    능란한 장사꾼

    한양으로 도주한 막둥은 신분을 감춘 채 흥인문 근처 저자에서 짐꾼으로 살았다. 어깨너머로 장터 돌아가는 사정을 익힌 그는 안면을 튼 포목점 주인에게 간청해 종업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엔 옷감을 옮기고 진열하는 일을 맡아 하던 막둥은 차츰 자신의 회계 실력을 인정받아 가게를 책임지는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 그때부터 그는 타고난 상술을 마음껏 발휘해 1년 만에 가게의 판매 실적을 두 배로 높여놨다.

    포목점 주인은 막둥을 종묘 옆 시전 상인들에게 소개해 줬다. 서민들의 장터인 저자와 달리 시전은 말끔한 건물에 구획도 가지런하고 파는 물건도 다양했다. 일하는 환경이 좋아지자 막둥의 수완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의 치밀한 계산 실력은 시전을 감독하는 관청인 평시서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친하게 지내게 된 평시서 주부 덕에 그는 평민들이 지니는 호패까지 얻었다. 그때 그의 성명은 박막동이었다.

    평시서 주부는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 막둥이 시전에 작은 가게를 처음 차릴 때는 엄청난 힘이 됐다. 비로소 자기만의 삶의 터전을 일군 그는 너무 감격해 하루 종일 울었다. 포목점에서 일한 경험을 살린 막둥은 청나라에서 건너온 비단을 받아 주로 한양 부호들에게 내다 팔았다. 장사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고, 그럴수록 막둥이 고관대작 집안을 드나드는 일도 잦아졌다.

    단골이 돼 말문을 트게 된 호조참판이 어느 날 막둥을 안채로 불러 차를 대접했다. 청나라 비단과 서역 비단의 차이에 대해 한참 떠들던 참판이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성명이 박막동이던데, 어디 박씨인가?”

    마음이 섬뜩해져 말문을 잃은 막둥이 어쩔 줄 모르자 참판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놀라긴! 조정에도 족보 사서 신분을 속인 벼슬아치들이 수두룩해! 그깟 서푼도 안 될 양반, 돈이면 다 사는 거 아닌가?”

    상대의 속마음을 몰라 막둥이 전전긍긍하자 참판이 덧붙였다.

    “돈만 많으면 못할 일이 없어! 한 200냥만 준비하면 내 좋은 집안에 줄을 대줄 텐데, 우리 박막동 씨 생각은 어떠신가?”

    막둥은 길게 숨을 쉬며 호흡을 고른 뒤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한규라는 사람

    오직 돈만으로 한양 사람 누구나 알아주는 최씨 집안 족보에 이름을 올린 막둥은 남은 인생을 최한규로 살게 된다. 하지만 한양 양반 최한규가 계속 시전에서 비단을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재산을 처분한 막둥은 경기도 영평 땅으로 급히 사는 곳을 옮겼다. 처음 몇 개월을 숨죽여 지내던 그에게 이웃에 살던 양반들이 조금씩 말을 붙여왔고, 막둥도 차츰 거짓말하는 데 이골이 나게 됐다. 그렇게 한두 해가 지나자 막둥은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를 양반이라 착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릴 때부터 주인 정근으로부터 글을 배워뒀던 터라, 영평 땅의 양반 누구도 막둥이 노비였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자주 악몽에 시달리던 막둥은 곧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같은 이유로 또 여러 번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떠돌다 파주에 터를 잡게 된 막둥은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동안 벌어둔 돈을 지니고 한양으로 간 막둥은 비단을 팔며 안면을 텄던 높은 벼슬아치들을 두루 방문했다. 어떤 양반에겐 돈을 집어주고, 또 다른 양반에겐 인맥을 자랑해 환심을 사는 방법으로 그는 그들을 자기가 사는 파주 집으로 초대했다. 막둥의 꾀는 절묘하게 들어맞았다. 한 달이 멀다 하고 한양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막둥을 방문하자 파주에서 막둥의 이름값은 날로 치솟았다.

    파주 인근 양반은 물론이고 고을 수령들까지 막둥에게 줄을 대려 안달이 나자, 행동거지마저 느긋해진 막둥은 파주에 사는 최씨 문중 종계에까지 참석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그는 최씨 집안에서도 자랑스러워하는 명실상부한 최한규가 됐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파주 양반들은 막둥에게 중앙 조정에 진출해야 한다며 극성으로 과거 보기를 부추겼다. 막둥은 결국 과거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는 파주 사람들의 성화 탓만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세월 품에 지니고 있던 책들을 꺼내놓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오래전 주인 정근이 분철해 줬던 그 책들이었다. 막둥은 버리고 온 가족들과 주인 정근을 생각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막둥이 과거에 합격하기까지는 두 해가 걸렸다. 마침내 조정에 나아간 그는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 뒤 당상관 통정대부에까지 올랐다.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게 된 막둥은 남몰래 사람을 시켜 충청도 송씨 마을에 가보게 했다. 주인이었던 정근은 이미 죽었지만, 놀랍게도 부모 형제는 모두 살아 있었다. 막둥은 이름을 감추고 막대한 재물을 가족들에게 보냈다. 그의 가족들은 영문도 모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막둥은 정근이 죽고 난 뒤 몰락해 버린 그의 직계 후손들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노년에 접어든 막둥은 자신의 지나친 행운이 오히려 재앙이 돼 돌아올까 두려웠다. 그는 고민 끝에 양반 출신 아내와 슬하의 다섯 남매 그리고 그들이 이룬 가족 모두를 이끌고 강원도 고성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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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 최씨 마을

    고성으로 내려간 막둥은 충청도 송씨 마을과 똑같은 최씨 마을을 이뤘다. 혼인한 아들과 딸들은 물론 손자 손녀들 모두에게 땅을 나눠준 그는 으리으리한 기와집만으로 가족 마을 하나를 만들었다. 고성 사람들은 그곳을 최승선 마을이라 불렀는데, 승선이란 막둥이 했던 마지막 벼슬인 승지의 다른 명칭이었다.
    모든 욕심을 버린 채 자연 속에 노니는 그를 인근 유생들은 신선처럼 떠받들며 따랐다. 막둥도 더는 신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지 않고 남은 삶을 평온하게 마치고 싶었다. 어느 날 저녁, 예기치 않은 낯선 손님이 찾아오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살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강원도가 초행이던 한 충청도 선비가 하루 저녁 묵을 객점을 찾지 못해 최승선 마을에 들어선 건 아주 늦은 저녁이었다. 외진 산골짜기에서 전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멋진 마을을 발견한 선비는 뛸 듯이 기뻤지만, 어느 집 문부터 두드려야 할지 망설였다. 집들이 모두 똑같이 으리으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집이나 골라 문을 두드렸다. 눈을 비비며 나타난 젊은 주인이 손님의 사정을 자세히 듣더니 반색을 하며 말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 윗집에 가시면 제게 조부 되시는 최승선이란 분께서 사시는데, 과객들과 밤새워 얘기꽃 피우시길 유난히 좋아하십니다. 이 마을은 다 그분 후손인 최씨들만 살고 있으니, 어딜 가셔도 똑같은 말을 들으실 겁니다. 어서, 어서 올라가 보십시오!”

    선비는 깨끗이 닦인 길을 따라 올라가 최승선 댁에 이르러 문을 두드렸다. 나이 지긋한 여성이 나타나 손님과 몇 번 대화를 나누더니 반색하며 맞아들였다. 그녀는 최승선의 아내였다. 잠든 하인들을 깨워 주안상을 차려내도록 한 승선의 아내는 급히 안방으로 가 자던 승선을 깨웠다. 잠시 후 나타난 승선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쁜 표정으로 손님에게 예를 갖췄다.

    “제가 이곳에 내려온 지 스무 해가 넘었습니다. 주변 풍광도 좋고 마을 곳곳이 후손들로 넘치지만 적적한 게 사실이거든요. 이렇게 지나가는 손님을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게 유일한 낙입니다.”

    한양 조정에서 남부럽지 않은 벼슬까지 지낸 노인이라기엔 최승선의 태도는 너무나 겸손하고 소박해 보였다. 손님은 그 점이 더욱 놀랍고 존경스러워 승선이 주는 술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마침내 두 사람이 불콰하게 취기가 돌자 서로 사사로운 집안 얘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최승선은 극구 자기 얘기를 꺼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이 칠십이 넘은 몸입니다. 이제 와서 지난 얘기는 부질없지요. 그보단 손님 집안 얘기가 궁금하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 한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뜻밖의 만남

    손님의 이야기를 듣던 승선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지더니 나중엔 심하게 일그러졌다. 놀란 손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승선 어르신! 어디 불편하십니까? 이만 자리를 파하고 주무시는 게 어떨지요?”

    승선은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서려는 손님을 제자리에 앉혔다. 잠시 바닥만 내려다보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서 손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당황한 손님도 맞절을 하려 하자 승선이 대성통곡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울던 승선은 놀라 뛰어나온 아내와 하인들을 돌려보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선 절 몰라보시겠지요? 저 막둥이입니다. 돌아가신 송정근 좌수 어른께서 총애하셨던 노비 막둥이입니다.”

    승선의 말을 들은 손님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한동안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손님이 물었다.

    “제 선친 성함이 맞긴 한데, 막둥이란 노비는 금시초문입니다. 뭔가 취하셔서 착오가 있는 건 아닙니까? 노비가 어찌 승선에 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절 놀리시는 건지요?”

    정중히 무릎을 꿇은 승선이 말했다.

    “아닙니다. 틀림없습니다! 쇤네가 주인집을 도망쳐 나올 때, 도련님 나이가 다섯 살이었을 겁니다. 함자가 경 자 충 자 아니신지요? 주인님께서 그 함자를 지으실 때 제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그제야 승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손님이 말했다.

    “제가 송경충이 맞긴 합니다만, 너무 놀라운 말씀이라, 뭐라고 답을 드려야 할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승선이 말했다.

    “도련님을 찾으려고 충청도 마을 곳곳을 뒤져봤었습니다. 어디에도 자취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 계셨습니까?”

    잠시 뜸을 들인 경충이 대답했다.

    “아버님께서 황망히 떠나시고 나서, 가진 재산 없던 우리 형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지게 됐습니다. 큰형님께선 노모를 모시고 한양 처가에 얹혀살고 계십니다. 문과를 포기하고 역관 일을 하신다고 들었지요. 다른 형제들도 전국 곳곳에 퍼져 근근이 먹고산다 알고는 있습니다. 저는 충주 외가로 내려가 글공부를 하다가 결국 낙방거사로 늙고 말았습니다. 가족들 볼 낯도 없어 강원도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요.”

    크게 한숨을 몰아쉰 승선이 자기 살아온 내력을 길게 풀어내더니 말했다.

    “이제 도련님께선 아무 걱정 마십시오! 쇤네가 주인님께 불충했던 죄를 수십, 아니 수백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 돈이라면 돈을, 땅이라면 땅을 사 드리겠습니다. 가난 걱정은 더는 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약속

    그날 밤 송경충은 승선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되, 자신도 굳은 약속 하나를 해줬다. 그건 승선이 평생 쫓겨왔던 불안의 핵심을 없애주는 것이었으니,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이익이었는지는 하늘도 모를 일일 것이다. 승선은 이런 부탁을 했다.

    “쇤네는 남은 생 동안 쇤네가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할 작정입니다. 다만 도련님께서도 약조 하나만 해주십시오! 비록 거짓으로 쌓아온 삶이긴 하나, 그 덕분에 쇤네의 후손들이 마을 하나를 이뤘습니다. 그들은 다 자기가 최씨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쇤네는 그들의 마음만은 무너뜨리고 싶지 않군요. 그러니 황송하오나 도련님께선 내일 아침부터 쇤네 어미 쪽의 먼 인척이 되시면 어떨까요?”

    경충은 승선의 부탁을 받아들이며 자기가 아는 사실을 평생 비밀에 부치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그건 승선에게 받을 막대한 재물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도 아무도 몰랐을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밝힌 막둥의 진심에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자라도 그렇게 진실하기란 쉽지 않을 터, 막둥과 비교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주장할 자 어찌 많겠는가.

    이제 이 긴 이야기를 마치며 내 이름 석 자를 숨기는 것도 온당치 못할 것 같으니, 독자 제위께 내가 송경충이라고 당당히 밝히는 바이다. 나는 승선으로부터 큰 재산을 넘겨받아 충주에 큰 집을 짓고 부귀영화를 누릴 만큼 누렸으며, 아들 셋에 딸 둘을 모두 좋은 집안에 혼인시켜 주위의 큰 부러움까지 샀다. 다만 후손 중 누구도 과거에 붙어 벼슬은 하지 못했으니, 아! 운명이란 얼마나 오묘하며 또 놀라운 것이란 말인가.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야담집 ‘청구야담’ 속 한 작품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고담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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