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는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한국 대표 지성들의 릴레이 강연회를 마련했다. 지난 5월 시작한 이 행사는 2012년 4월까지 1년간 이어진다. 6월22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 컨벤션홀에서 열린 2회 강연의 강사는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다. “지금의 세계인은 현존하는 다수의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을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 인간을 위한 인간의 문명을 구축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역설한 그의 강연을 지상중계한다.<편집자>
100년이라면 좀 멀어 보이긴 해도 그 역시 지금부터 20년쯤 후인 2030년대에 태어날 세대의 생애기간에 포함될 만한 시간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 속에는 그 세대의 다음 세대가 살게 될 시대가 거의 몽땅 포함된다. 그렇게 보면 100년도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게다가 인간은 계산상 그가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시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는 동물이다. 살아생전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한 후속 세대를 위해 걱정하고 그 후대가 살게 될 날들의 아침과 저녁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도모한다는 점에서도 인간은 기이하고 독특한 동물이다. 이 별난 동물이 미래를 생각해본다는 일은 안 그래도 분주한 그에게는 결코 한가한 점괘놀이나 심심풀이 공상놀음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의 ‘오늘’ 자체가 몹시 궁핍해지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시각의 한 모퉁이에서 50년 혹은 100년 후의 세계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미래예측’ 작업이 아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감당할 만한 다른 학문 분야가 얼마든지 있고, 노상 틀리긴 해도 예측을 전문으로 하는 ‘미래학’ 계열 업종의 종사자도 많다. 다음 시대의 문명을 인문학적으로 상상해본다고 할 때의 ‘상상하기’는 미래 문명에 대한 예측이기보다는 어제와 오늘의 인간 문명을 ‘성찰하기’이며 그 성찰의 바탕 위에서 미래 문명의 모습을 미리 ‘점검하기’다. 아직 오지도 않은 문명을 미리 점검하는 일은 가능한가?
인문학적 관점에서 미래 문명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명의 조건’에 대한 점검, 다시 말해 어떤 문명이 문명이라 불리자면 거기 요구되는 최소 조건 혹은 기본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는 일이다.
지금까지는 문명을 말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적용돼온 일정한 기준들이 있다. 그 기준들은 “힘이 센가?”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요약된다. 이 ‘힘’을 측정하는 잣대도 예외 없이 정치적 힘, 경제적 힘, 군사적 힘이라는 잣대다. 그러나 문명사의 전개 5000년을 지나오는 사이에,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문명을 보는 인간의 눈에는 상당한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문명을 보는 ‘눈’의 변화는 문명에 대한 질문의 변화다. 문명에 대한 질문이 “힘이 센가?”에서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문명을 말하는 기준이 힘의 관점에서 ‘기본조건’의 관점으로, 다시 말해 “그 문명은 문명이라 불릴 만한 기본적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가?”라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미래 문명의 조건
세계의 현존 문명은 이 같은 질문의 변화와 관점 이동에 대해 아직 매우 둔감하다. 그러나 앞으로 50년 혹은 100년 동안에도 그럴까? 앞으로도 계속 인간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의 잣대만으로 문명을 말할까? 이것이 미래 문명을 미리 점검한다고 할 때 그 ‘점검’이 지니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다. 미래의 인간 문명, 특히 세계를 감히 ‘주도’하고자 하는 국가나 문명은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조건의 구비 여부라는 현대적 기준을 결코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세계 질서가 상당기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될 것인지 아니면 어떤 새로운 질서에 의해 대체될 것인지의 두 전망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도 물론 점검 작업에 속한다. 지난 60년간 세계를 주도해온 나라는 미국이고, 결정적으로 18세기 이후 200년 이상 세계를 장악해온 문명은 미국이 포함된 서유럽 문명이다. (‘주도’라는 용어는 비판적 관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현실적 관점에서는 그것을 대체할 다른 마땅한 용어가 없다.)
국가로서는 미국, 문명권으로서는 서유럽 문명이 주도하는 세계의 현상 질서는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21세기 안에, 그 지배 세력을 대체할 만한 다른 세력으로서 지금 사람들의 가시권 안에 들어오는 나라나 문명이 있는가? 동아시아의 중국은 가장 눈에 띄는 강력하고 야심만만한 대체 후보의 하나다. 세계의 눈은 지금 중국으로 쏠리고 있다. 세계가 미국과 중국의 한판 경쟁을 보고 있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판도 변화를 정치적 영향력, 경제력, 군사력 등 힘을 기준으로 예측하는 것은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거의 무의미하다. 그런 예측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통계상의 수치 변화를 따라가는 일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자산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중국은 세계의 주도국으로 올라설 만한 ‘문명의 자산(civilizational assets)’을 갖고 있는가? 미국은 경쟁국들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세계를 주도해나갈 만한 문명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가? 중국이 힘을 길러 세계의 주도국으로 부상한다면 그 중국은 어느 문명에 속하고 어떤 문명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미국이 주도국의 지위를 유지한다면 그 능력은 미국이 가진 어떤 문명적 자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미국도 중국도 아닌 또 다른 제3의 세력이 나타난다면 그 새로운 세력은 어떤 문명적 자산을 힘의 기반으로 하는 것일까?
어떤 국가도 ‘문명’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 세계의 주도국으로 올라서는 일은 없다. 이것이 문명의 중요성이며, 국가와 문명이 다른 이유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이렇다 할 문명의 기반 없이 제국을 구축할 수 있었던 예의 하나다. 로마는 어떤 문명을 기반으로 해서 출발하고 또 제 손으로 문명을 만들어나갔던 제국의 예에 속한다. 그러나 몽골은 바람처럼 한때 중앙아시아를 제패했던 제국의 이름으로만 기억될 뿐 어떤 문명적 유산으로 현재에 살아 있지 못하다. 로마제국도 몽골제국처럼 멸망했지만 몽골과는 달리 로마가 남긴 문명적 자산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미래의 상당 기간에도 국가라는 것이 존속하는 한 모든 국가는 국익(國益)추구라는 명령으로부터 놓여나기 어려울 것이지만, 어떤 국가도 자국 이익의 추구만으로 세계의 주도국이 될 수는 없다. 이 결정적 차이를 만드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문명적 자산’이라 부른 것의 유무다. 국익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명적 자산은 국가들 사이에 공유될 수 있다. 이 공유 가능한 자산의 있고 없음을 점검하기-이것이 앞에서 우리가 인문학의 관점으로 미래 문명의 모습을 미리 점검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 ‘점검’의 두 번째 중요한 의미다.
그런데 그 문명적 자산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리는 계몽철학자 볼테르에게서 쉬운 예를 하나 꿔올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문명적 자산이라는 것과 유사한 의미에서 볼테르가 문명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생각한 것은 ‘관용(tolerance)’이다. 관용의 핵심은 타자의 인정과 존중이다. 나와 다른 사람, 내 생각과 다른 생각, 내가 가치라고 여기는 것과는 다른 가치, 내 삶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런 것이 통틀어 ‘타자’다. 이 타자를 인정하고, 단순 인정을 넘어 존중하는 것이 관용이다.
관용은 타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라는 점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자비, 용서, 관대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타자가 존재할 권리, 그의 자유, 그의 존엄과 품위에 대한 인정이자 존중이다. 관용은 쉬운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독선과 편협, 나의 진리 주장과 이해관계 관철의 욕망을 희생하도록 내게 요구하고 (물론 이 희생은 포기가 아니다) 내가 내 속에 타자의 공간을 만들어줄 것을 요구한다. 쉽지 않기 때문에 관용은 문명이 힘들게 만들고 지켜가려는 ‘자산’이다.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것은 이런 자산이다. 관용의 가장 큰 자산적 가치는 그것이 없거나 무시될 때, 바스라지고 파괴될 때, 인간들 사이의, 국가와 국가들 사이의 공존이 가능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공존은 문명의 정의(正義)다. 어떤 문명이 정의로운 문명(just civilization)인지 아닌지, 문명의 거죽을 쓴 야만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공존의 가능성 유무이며, 공존의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자산은 관용이다.
문명의 자체 교정력
인문학의 관점에서 정의할 때 문명은 무엇보다도 ‘야만에 대한 저항과 거부’다. 물론 역사상 모든 문명이 야만에 대한 저항이자 거부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문명사에 오르내리는 과거의 문명들은 거의 예외 없이 그 자체로 야만의 체제였거나 야만의 요소를 잔뜩 내장한 폭력체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이 예외 없이 야만의 체제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인간 문명의 내부에는 문명을 문명일 수 있게 하는 조건들을 생각하고 그 조건들을 만들어내려는 강력한 정신적 도덕적 지향도 존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문명을 외적 물리적 조건만으로 규정하는 습관은 문명이 지닌 이 내적 지향성을 무시하는 데서 생겨난다.
독일 제3제국의 나치즘은 서유럽 문명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야만성이고 야수성이다. 그러나 그 야만성 때문에 서유럽 문명 전체가 야만의 체제로 규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녀사냥, 이단 화형, 이교도 박해, 진리독점주의 등은 기독교 문명이 노정했던 야만의 역사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 야만성 때문에 기독교 문명 전체가 야만의 체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문명이 자신의 오류를 수정하고 야만성을 제어하려는 정신적 도덕적 지향을 그 내부에 갖고 있는가 어떤가-이런 자체 교정력의 유무가 한 문명의 성패를 좌우하고 그 운명을 결정한다. 그 교정력은 말할 것도 없이 한 문명을 문명이게 하고 그 문명을 지속시키는 강력한 자산의 하나다. 이 자산의 유무를 점검하는 것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미구(未久)의 문명을 점검한다고 할 때의 그 점검이 지니는 세 번째 중요한 의미다. 그 자산이 없거나 미미한 문명은 단명한다. 그런 문명은 제아무리 강한 물리적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어도 세계의 주도적 문명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국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우리는 어떤 국가나 문명이 세계 주도적 세력으로 올라설 수 있게 하는 조건들과 그 조건들을 점검한다는 것의 인문학적 의미를 탐색해보았는데, 이런 기준으로 50년 혹은 100년 후의 주도국이나 주도 문명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까? 이 작업은 현재에 대한 재고 점검으로 출발한다. 국가의 경우, 중국이 50년 안팎의 기간 안에 세계 주도국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무망하다. 산업생산량과 교역량을 합친 중국의 경제력은 향후 10년 안팎에 미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믿을 만한 통계들이 나오고 있다. 경제력의 신장은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증대시킬 것이고 군사력에서도 상당한 힘의 과시가 가능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은 정치, 경제, 군사의 세 측면에서 조만간 세계의 주도국으로 올라설 만한 힘을 비축해가고 있다. 그런데 왜 중국은 “아니다”로 판정되는가? 가장 큰 이유는 현재 중국 지도부의 머릿속에는 중국의 과거 영광을 재현하고 주변국들, 특히 한국과 일본을 완전히 제압해서 중국의 패권 아래 두려는 야심 말고는 이렇다 할 다른 세계적 비전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 왜소성
대학생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망라한 350여 명의 청중이 도정일 교수의 강의를 듣고 있다.
지난 10년 남짓한 사이에 중국에서는 두 사람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는데, 한 사람은 2000년 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高行健)이고 다른 한 사람은 2010년 평화상 수상자 류샤오보(劉曉波)다. 둘 다 중국 정부의 박해 대상이다. 가오싱젠은 ‘반국가적’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입국이 금지돼 프랑스로 망명한 인물이고 (사실 그는 반국가적인 작품을 쓸 정도의 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류샤오보는 ‘반정부’ 인사라는 이유로 투옥되어 노벨상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에 대한 박해는 위대한 부활을 꿈꾸는 거대한 나라 중국의 도덕적 왜소성을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이런 왜소성을 보여주는 중국적 사례는 물론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설혹 반체제 인사라 하더라도 그들을 박해해야만 중국의 국가적 권위가 바로 서고 힘이 과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의 세계에서 불관용은 힘이 아니라 수치이며 권위주의적 국가 체제는 모델이 아니라 타기의 대상이다. 세계는 이미 불관용의 권위주의 시대를 넘어서 있다. 중국 현 지도부는 물론이고 다음 세대의 지도부가 이런 왜소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한 중국이 세계의 주도국으로 올라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미래의 세계에서 권위주의 국가가 세계를 이끌 가능성은 전체주의 국가에 의한 세계 장악 가능성만큼이나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국이건 다른 어떤 나라이건 간에 도덕적 권위의 상실은 현대 세계에서 한 국가가 저지를 수 있는 실패 가운데 최악의 것이다. 그런데 국가로서의 중국을 넘어서서 그 국가의 실패를 교정할 ‘중국 문명’이 있다면 그 문명은 무엇인가? 그런 내적 교정력을 가진 문명이란 중국의 경우 무슨 문명을 말하는가? 유교문명, 사회주의 문명, 아니면 자본주의 문명?
인간 존재의 품위와 가치
앞서 우리는 한 문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힘이 ‘문명적 자산’의 유무에 달려 있다는 주장과 함께 ‘관용’을 그런 자산의 한 예로 들었는데 관용 외에도 그 자산 목록에 들어갈 항목은 여럿이다. 그 다수의 항목을 인간 문명의 자산 목록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은 어떤 자산이 공유 가능한 가치를 지녔느냐라는 단 하나의 기준이다. ‘공유 가능한 가치’란 표현은 ‘보편가치’라는 말의 현대적 수정판이다. ‘보편’이라는 말에 대한 반감과 비판이 워낙 드센 시대에 그것을 대체할 거의 유일해 보이는 다른 용어가 ‘공유 가능한’이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표현 자체의 운명이 아니라 그렇게 표현해야 할 어떤 공통 가치의 유무-세계 어디서이건 간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그래서 ‘공통성(commonality)’의 범주 속에 묶어 존중할 만한 가치 혹은 가치들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공유 가능한 공통의 가치란 그것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입증된’ 가치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구성되는 추상적 가치도 가설적 가치도 아닌, 문명의 오랜 과정을 통해 인간의 삶의 경험이 지속적으로 그 필요성을 증거해낸 가치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요약하면 그것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의 기쁨’을 경험하게 하는 가치, 그것 없이는 삶이 초라해지고 비참해지는 그런 가치, 무의미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 존재의 ‘품위와 영광’을 드러내는 가치다.
‘인권’(human rights)은 그런 가치들의 목록 첫머리에 오를 만한 토대적 가치다. 이 가치의 존중이 아니고서는 인간의 품위와 삶의 영광이 보장될 길이 없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경험적 진실의 확인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노예들의 거듭된 반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오랜 투쟁, 인간 품위의 근거를 확립해보려는 수천 년에 걸친 긴 윤리적 모색 등은 인권이라는 가치의 토대가치적 성격을 드러내는 역사상의 증거다. 그 인권은 서양 근대문명의 ‘발명품’이다.
물론 인간 존중의 사상은 지성사적 의미에서는 동서양에 걸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존중의 토대가 되고 근거가 될 인권 개념을 사상 차원을 넘어 제도와 법률로 옮겨내고 정착시킨 것은 근대문명의 업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근대 헌법은 인권 개념을 ‘양도할 수 없는 기본 권리’로 제도와 법률에 정착시킨 근대문명의 대표적 업적이다. 인권, 민주주의, 근대 헌법 등은 말하자면 근대문명이 만든 문명적 자산이며 그 문명의 유산이다. 그 자산과 유산은 지금 이 시대에도 고스란히 효력을 이어가고 있다.
인문학적 판단 기준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 하나는 근대문명의 그 자산이 아직도 서유럽 문명만의 것인지 아니면 어떤 지구적 보편성, 혹은 앞에서 우리가 ‘공통가치’라 부른 인류 전체의 공유 자산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민감한 사안이다. 이슬람 문명권의 일부에서는 인권, 자유민주주의, 근대 헌법이 세속주의와 함께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와해시키려는 ‘서구적’ 근대성(modernity)의 대표 상품이라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의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인문학의 관점은 어떤 것일 수 있는가? 특정의 정치적 입장이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어느 한쪽에 줄 서지 않는 것은 인문학의 전통이다. 가치에 관한 문제에서 인문학의 제1 관심사는 어느 하늘 밑에 살건 인간의 품위를 높이고 그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탐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적 판단 기준은 어떤 가치가 바로 그 같은 공통성을 인정받을 만한 것인지 아닌지로 좁혀진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미래 문명이 근대문명의 문명적 자산들을 거부하거나 부정하고서도 문명으로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 자산의 상당 부분은 인간 문명을 문명이게 하는 ‘최소’ 조건이 아닌가? 더 분명한 말로 내 판단을 말하라면, 그 최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문명은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쌓아도 미래 세계를 이끌 주도 문명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결여의 문명, 저항을 촉발하는 불만의 문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에 감히 ‘인문학적 관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대 서구문명은 그 업적 못지않게 치욕으로 가득 찬 문명이다. 제국주의, 자원 수탈, 대규모 노예장사, 전쟁, 환경파괴는 문명의 이름으로 야만의 체제를 연출한 그런 치욕의 장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그 야만을 벗어나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자기 교정력이 그 문명의 내부에 있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가 앞에서 문명적 자산에 중요성을 부여한 것은 그 자산이 무엇보다도 그 같은 자기 치유와 교정의 능력을 발동시키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원천이 없거나 파괴되면 어떤 문명도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이 역시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라 문명사의 진실이다. 우리가 서유럽문명의 지속적 주도성 여부를 판단코자 할 때 동원할 수 있는 기준도 그것이다. 또 이 관점에서 미국을 포함한 현재의 서유럽문명이 안고 있는 위기의 진단도 가능하다.
서유럽문명은 그 문명을 강한 문명이게 할 수 있었던 문명적 자산의 점진적 약화라는 위기를 안고 있다. 강점이 되레 약점이 되고 있다. 이것은 유럽문명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상실해가는 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문명의 약속’ 그 자체가 문명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기인한다. 유럽문명은 이 아이러니의 파괴성을 타넘을 수 있을까? 유럽문명의 미래는 이 문제에 달려 있다.
우연과 비우연
역사의, 또는 문명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미래는 인간이 가진 어떤 예측력도 벗어나는 우연성의 영역이어서 그 미래를 전망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용한 작업이라는 관점이 없지 않다. 이 관점은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이런저런 문명들이 우연한 사건에 의해 그 흥망성쇠의 순간을 맞았던 경우가 없지 않다. 화산폭발, 홍수와 가뭄을 포함한 기후변화, (한때의) 역병 등은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우연성의 개입 사례에 속한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종류의 우연성이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게르만의 오도아케르가 로마 성문을 밀치고 들어선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듯 로마문명은 우연히 붕괴된 것이 아니다. 서유럽 근대문명이 세계의 지배 문명으로 올라선 것은 우연이 아니며 19세기 말 동아시아 유교문명의 쇠락도 우연한 사건이나 불운한 사건의 연속에 의해서가 아니다. 이슬람문명은 14세기 이후부터 서유럽문명에 밀리기 시작했는데, 이 후퇴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국가의 경우도 그러하다. 청조(淸朝)의 멸망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면 대한제국의 쇠망도 우연은 아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라는 한 인물이 어느 날 난데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혹은 다른 어떤 우연요소의 불가해한 발생 때문에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없어진 것은 아니다.
문명을 포함한 인간 역사가 우연과 비우연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교직되어왔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어법 같아 보인다. 그러나 문명의 흥망사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비우연’의 요소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어떤 문명도 이유 없이 쇠락하거나 패망하지 않듯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대체하거나 어떤 문명이 독특한 발전과 흥융을 보이게 되는 데는 합리적 설명의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이유와 원인들이 존재한다. 성공하는 국가가 있듯 실패하는 국가가 있고, 성공하는 문명이 있듯 실패하는 문명이 있다. 국가나 문명의 실패에서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힘의 작용을 제외했을 때 남는 것은 ‘비우연적 요소’다.
왜 실패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책임의 문제가 제기되고 책임은 행위자(actor)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 집단행위자는 ‘인간’이다. 인간의 행동과 비행동, 그의 선택과 오판, 결정과 비결정 같은 것은 문명의 성패를 좌우하는 비우연적 요소다. 이런 요소를 빼버리면 국가, 사회, 문명에 발생하는 실패는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는 실패, 이유를 알 수 없는 실패, 설명불가의 모호한 실패로 돌아간다.
문명의 미래
문명의 미래 혹은 미래의 문명을 전망하는 데도 우리는 같은 방식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문명은 이유 없이 쇠락하거나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명의 미래가 ‘알 수 없는’ 다수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는 생각, 인간의 예측기술로는 그 다수의 가능성을 모두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는 거의 전적으로 어둠에 가려진 영역이라는 등의 생각은 인간의 오만을 경계하는 데는 유용할 수 있어도 인간사에 대한 ‘인간 자신의 책임’을 깊게 고려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 시기의 문명을 인문학적으로 상상해보는 일은 무엇보다도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을 떠나서는 가능하지 않은 작업이다. 문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란 오류와 수치, 억압과 파괴의 문명을 가능한 한 차단하고, 그런 문명을 미래에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임이다. 그것은 야만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책임과 동일하다.
지금의 세계인은 현존하는 다수의 문명으로부터 이어받을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어 인간을 위한 인간의 문명을 구축 또는 재구축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최종적 책임은 인간 그 자신의 행동에 달려 있다. 이것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미래 문명을 점검한다는 일의 마지막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