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카트만두 북서쪽 누와콧 언덕에 산다. 카트만두에서 누와콧으로 가는 길은 가팔랐다. 벼랑에 매달린 버스가 아찔하다. 4년 전 추락했는데 지금껏 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4륜구동으로 기어를 바꿨는데도 도요타 랜드크루즈가 낑낑댄다.
히말라야 산맥이 굽이치는 언덕길을 내려다본다. 칠흑 같은 밤에도 설산(雪山)은 웅혼하다. 럭시미는 히말라야를 ‘히말’이라고 부른다. 히말은 눈 덮인 산을 가리키는 네팔어 보통명사.
럭시미의 나라에선 해발 4000m가 넘어야 산(mountain)이라고 부른다. 누와콧은 4000m에 못 미치는 언덕(hill). 누와콧 여인숙에서 에베레스트를 들이켠다. 맥주병에 셰르파족 남자가 그려져 있다. 에드먼드 힐러리 경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데려다준 그 사내다.
네팔은 굶주린다는 북한(1인당 GNI 960달러·2009년 기준)보다 더 가난하다. 1인당 GNI가 500달러에 못 미친다. 인구 2900만명의 40%가 빈곤선(하루 1.25달러) 밑에서 살아간다. 유아 사망률, 임신부 사망률은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 국가들과 최악을 다툰다.
네팔의 환경은 발전을 이루는 게 요원해 보일 만큼 열악하다. 럭시미는 “한국처럼”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2009년 12월의 한강을 기억한다. 1950년대 한국은 네팔보다 더 가난했다. 쓰레기더미에서도 장미는 핀다.
“전기 나가면 그냥 자요. 하하”
럭시미 따망은 대구에서 다리수술을 받았다.
깡통 안에 사람을 구겨 넣은 것처럼 도시가 빽빽하다. JICA(일본국제협력단)가 닦아준 길에 올라 카트만두에서 티미로 이동했다. 갓길을 갖춘 4차선 도로가 반갑다. 시내 도로와 다르게 정비를 잘 했다.
US-AID(미국 국제개발처) 차량이 JICA가 닦은 길을 내달린다. 다리 교각엔 일장기가 새겨져 있다. 서남아시아 국가들이 지어준 병원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난다. 중국이 세운 병원도 서 있다.
한국-네팔 친선병원은 티미의 유일한 종합병원. 내과 전문의 이용만(66) 박사가 회진을 돌고 있다. 배에 물이 찬 83세 노인이 응급실에 누워 있다. 한국어 영어 네팔어가 뒤섞여 오가면서 진료가 이뤄진다.
이 병원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134만달러를 원조해 지은 것이다. 매달 1200명가량이 진료를 받는다. 이용만 박사는 KOICA 시니어 해외 봉사단원. 네팔의 한국인 슈바이처로 불리는 사람이다.
이용만 박사(왼쪽)가 순마야 따망을 진료하고 있다.
순마야는 산골마을에서 1시간을 걸어 내려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5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 호르몬 이상으로 젖가슴이 거대해지는 희귀한 병에 걸렸다. 유방 축소술을 검토 중이라고 이용만 박사는 말했다.
한국-네팔 친선병원이 터 잡은 티미는 인구밀도가 1㎢당 4298명에 달하는데도 3곳의 보건지소와 2곳의 보건소를 제외하면 의료시설이 전무했다. 2009년 4월 이 병원 개원식 때 람 바란 야다브 네팔 대통령이 참석해 원조에 감사를 표했다.
순마야가 병원을 찾은 것은 이번이 난생처음이다. 농구공 크기로 부푼 젖가슴을 내려다보는 표정이 안쓰럽다. 빈혈을 앓고 있는 탓에 혈액도 투여받고 있다.
충만한 삶
이용만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순마야의 젖가슴을 살펴본다. 정종하(61)씨가 네팔말로 순마야를 위로한다. 정종하씨는 32년간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치료방사선사로 일했다. “슈바이처 같은 분”이라고 그가 이용만 박사를 추어올린다.
이용만 박사가 멋쩍게 웃는다. 그는 돈 잘 버는 개업의였다. 삶의 의미를 고민하다 1993년 KOICA 봉사단에 지원해 방글라데시에 둥지를 틀었다. 1997년 네팔 박타풀국립병원으로 옮겼다. 2009년 한국-네팔 친선병원이 개원할 때 이곳으로 왔다.
“처음엔 한국이 그립더군요. 한국에 전화하려면 사흘씩 기다려야 했어요. 지금은 한국에 가면 불편해요.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이용만 박사가 KOICA로부터 받는 활동비는 월 940달러. 50세 넘은 시니어 단원은 940달러, 50세 미만 일반단원은 470달러를 생활비로 받는다. 이용만 박사는 한국을 떠날 때 전 재산을 처분했다. 지갑은 얇지만, 마음은 부유하다.
이용만 박사의 부인 박영례(61)씨는 2002년부터 네팔에서 고아원을 운영한다. 2층 주택을 임차해 고아원을 꾸몄다. ‘자식’ 12명을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부부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따른다. 의사가 되겠단 녀석도 있다.
부부에게 충만한 삶은 그저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다.
KOICA 단원 여섯 명이 한국-네팔 친선병원에서 일한다. 조지훈(31·외과 전문의)·김정현(31·마취과 전문의)씨는 군의관·공중보건의 복무 대신 KOICA 협력의사를 선택했다. 조지훈씨가 말했다.
“외과는 선발인원보다 지원자가 적었어요. 이등병으로 입대해 외교부 소속으로 일하다가 이등병으로 제대하는 형식이에요. 환경이 열악하지만 배우는 게 적지 않아요. 진료 외의 것에서 느끼는 게 많습니다. 아내와 두 살 된 딸도 함께 왔어요. 난방이나 전기 이런 게 아무래도 불편하죠.”
임상병리사 강하나(29)씨가 너스레를 떤다.
“전기 나가면 전 그냥 자요. 하하.”
카푸치노 한 잔 값
박채연(가운데) 간호사가 견습 나온 학생들과 포즈를 취했다.
“산부인과에서 아이를 받고 있어요. 산모 힘주기, 아이 울음 터뜨리기도 도와주고요.” 실습 나온 샤라다 간호학교 학생들이 박채연씨를 둘러싸고 수다를 떤다. 취재용 카메라가 신기한지 앞 다퉈 사진을 찍어달라고 조른다.
“아이가 똥을 싸면 침으로 밑을 닦아줄 만큼 위생 관념이 없어요.”
차병원에서 일하다 네팔에 온 박채연씨는 씩씩하고, 반듯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환자들의 눈길이 사랑스럽다. “일도 야무지게 한다”고 도영아 KOICA 네팔사무소장은 말했다.
“한국에서 3교대로 일할 때는 환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못했어요. 밥 먹을 시간도 부족했거든요. 네팔에 와서 충만한 삶이 어떤 건지 배우고 있습니다.”
그녀처럼 표정이 맑은 사람을 살면서 몇 차례 보지 못했다. 천사가 있다면 아마도 그녀를 닮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박채연씨에게 돌봄을 받은 네팔 사람들은 한국인이 다 그녀 같은 줄 알 것이다. 그녀와 같은 국적을 가졌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녀가 세면실을 개조했다면서 팔을 잡아끈다.
“깨끗하죠. 하하. 병원 세면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어요. 예전 모습을 보셨다면 기절하셨을지도 몰라요.”
봉사단원은 1인당 5만달러까지 KOICA로부터 지원받아 개인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다. 박채연씨는 병원 시설을 리모델링하는 데 돈을 썼다.
“이 벽도 새로 칠한 거예요. 원래는…. 심난했거든요.”
무상원조 기관인 KOICA 예산은 우리가 낸 세금이다. 한국은 GDP의 0.1%를 원조에 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GDP 대비 원조액 평균은 0.3%.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를 12개월로 나누면 월 소득이 200만원쯤 된다. 200만원에 0.1%를 곱하면 2000원. 국민 한 명이 월 2000원을 원조에 쓰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2015년까지 원조액을 GDP의 0.25%까지 늘리기로 했다. 국민 1인당 월 지원액이 5000원가량으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봐야 카푸치노 한 잔 마실 돈이다. 지구촌 빈곤 퇴치에 동참하는 건 국격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박대원 KOICA 이사장은 봉사단원을 2만명으로 늘리겠다고 말했다.
김종석(30)씨는 박타풀 병원에서 방사선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들병원에서 일하다 지난해 3월 네팔에 왔다. 103세 노인이 병상에 누워 있다.
“골절인데, 뼈가 어린아이 수준이에요. 치료가 쉽지 않겠는데요.”
인터뷰 시간을 내달라고 말하기 미안할 만큼 그는 바빴다. 병상과 설비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며 네팔 의료진과 대화하던 그가 103세 노인의 손을 꼭 잡아준다.
“네팔에 와서 제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 알았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였죠. 삶을 들여다보는 방식이 바뀌었어요. 미국 유학을 준비 중입니다. 네팔 경험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보탬이 될 것 같아요.”
‘임시’자 떼지 못한 ‘공화국’ 정부
1996년 마오이스트 반군이 군주제 폐지, 공산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봉기한 후 10년간 이어진 내전은 네팔을 저발전의 늪으로 내몰았다. 2006년 11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2007년 마오이스트가 참여한 임시정부가 구성됐다. 2008년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이 출범했다.
정치 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정치가 안정돼야 경제발전도 가능한데, 정치 상황이 아직도 불안정하다”고 ‘더 라이징 네팔’ 아런 란짓 편집국장은 말했다. 정파 간 다툼 탓에 헌법을 제정하지 못해 정부는 이제껏 ‘임시’자를 떼지 못하고 있다. 마오이스트의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
“내전을 겪으면서 공공시설이 쑥대밭이 됐습니다. 병을 앓으면 집안이 망합니다. 중산층이 하류층으로 전락해요.”
네팔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이용만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의료보장, 의무교육은 경제 발전의 기초 체력이다.
KOICA 사람들은 의료보험 모델 개발도 돕고 있다. 단기 목표는 6개 지역에서 의료보험 시범사업을 실시하는 것.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가 이 프로젝트의 좌장이다. 네팔 현지 책임자인 서울대 보건대학원 김화준 박사(예방의학 전문의)가 말했다.
“올해부터 2년간 100만달러를 투입합니다. 네팔 전 지역에서 의료보험 제도를 도입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게 목표예요. 한국의 성공 사례를 네팔에 이식할 겁니다.”
원조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 현금 원조 무용론이 대두되면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쪽으로 원조 형태가 바뀌고 있는 것.
박대원 KOICA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유럽 원조기관은 가난과 허기를 모릅니다. 개발도상국을 발전시키는 데 실제로 필요한 게 뭔지를 몰라요. 그렇지만 한국은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개발 경험을 갖고 있어요. 한 세대 만에 빈곤을 이겨내고 신흥 공여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의 개발 경험은 개발 원조를 하는 데 있어 소중한 자산입니다. 한국의 성공요소 중 하나가 인적 자원 개발이었습니다. 네팔 같은 개발도상국의 인적, 조직적 역량을 키워주는 게 한국형 원조의 핵심입니다.”
랄 산카르 기미레 네팔 재무부 원조총괄국장은 “원조를 받아 경제를 발전시킨 한국의 경제개발 경험은 독특합니다. 네팔도 60년 전부터 원조를 받았는데 한국처럼 발전하지 못했어요.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람 살 곳이 못 돼요”
기미레 원조총괄국장과 1시간 넘게 인터뷰한 뒤 정부종합청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국인 네팔인이 뒤섞여 ‘달밧’을 먹었다. 달밧과 비슷한 한국말을 고르면 백반이다. 녹두를 졸인 수프, 닭고기를 넣은 카레, 튀긴 쌀이 나왔다. 수프를 ‘달’이라고 부르고 ‘밧’은 밥을 가리킨다. 식당은, 빈곤과 허기를 모르고 자란, 1975년생인 내가 지금껏 가본 곳 중 가장 초라했다. 네팔의 보통사람들은 점심을 먹지 않는다. 하루 두 끼를 먹는다. 한국인이 점심을 먹은 게 근대 이후라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아 그랬구나, 하고 중얼거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네팔 트리부반대 수업 모습. KOICA가 이 학교 ICT센터를 지어줄 예정이다.
“현대산업개발, 동부건설에서 일했어요.”
그가 1993년부터 한국에서 일했다면서 대전, 광주의 지명을 또렷하게 발음한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죠?”라고 묻자 마스크를 가리키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저분해요. 사람 살 곳이 못 돼요.”
삶의 만족도 조사를 하면 네팔은 상위권에 든다. 경제발전이 삶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외국 생활을 오래한 네팔인은 네팔 생활을 못 견뎌한다”고 백운호 KOICA 네팔사무소 관리요원은 말했다.
새르산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부동산업을 한다”는 답이 돌아온다.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귀국한 이들은 네팔에서 부자다. “한국에서 왔어요?”라고 나에게 한국말로 물은 네팔인이 적지 않은데, 상당수가 부동산업을 한다고 답했다.
신선영 KOICA 네팔사무소 관리요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국에서 일하다 돌아온 이들 때문에 카트만두 부동산값이 치솟고 있어요. 생산적인 곳에 돈을 쓰지 않고 땅이나 집을 사서 임대업을 합니다.”
생산적인 곳에 돈을 쓰고 싶어도 쓸 곳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선진국 정부가 주는 장학금을 받고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이들도 네팔에선 일자리를 찾기 어렵다.
아눕 반스코타 네팔 정부통합데이터센터 소장은 “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가 네팔로 돌아오지 않아요. 한국은 어때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반스코타가 일하는 정부통합데이터센터도 KOICA 지원으로 꾸린 곳이다. 인도에서 공부한 그가 한국 덕분에 일자리를 얻은 셈이다. 정부통합데이터센터는 전자정부 인프라 시설인데, 공무원을 상대로 IT 교육도 실시한다.
이대봉(59)씨는 정부통합데이터센터에서 기술 고문으로 일한다. 한국전력에서 정년퇴임한 뒤 2009년 12월 KOICA 단원으로 네팔에 왔다.
“한국전력이란 좋은 회사에 들어가 정년 때까지 회사와 집만 오가면서 내 가족을 위해 살았어요. 이웃을 위해 살아야겠단 마음이 들어 봉사단원에 지원했습니다. 배전, 전기 분야에서 34년을 기술자로 일했습니다. 네팔은 전기 문제가 가장 급해요. 전기가 부족해 다국적 기업 공장이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KOICA는 모디강 수력발전소 설계를 지원해 포카라 지역 전력난 해소에 도움을 줬다. 박대원 이사장은 “해외 원조는 일자리 창출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대봉씨 같이 은퇴한 엔지니어가 할 일이 개발도상국에 널려 있다.
누와콧의 여인숙에선 악취가 났다. 투숙객이 함께 쓰는 변소에는 땟국이 흘렀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물이 나오지 않는다. 밖에서 문을 잠가놓아 여인숙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화장지도 없다. 물이 나오지 않고, 화장지도 없으니 난감하다. 네팔 사람은 왼손으로 밑을 닦고,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게 전통이다. 동행한 사진기자는 씻는 일, 싸는 일을 포기했다.
“고기 잡는 법 가르쳐주고 떠났다”
럭시미는 2009년 11월 대구에서 화상 치료와 다리 수술을 받았다. 누와콧에서 KOICA 단원으로 봉사하던 박지원(31)씨가 NGO ‘아름다운가게’와 그녀를 연결해줬고, 아름다운가게가 수술비를 융통했다.
“2009년 12월의 한강을 또렷이 기억해요. 여자도 뭔가를 할 수 있고, 뭔가가 될 수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누와콧의 한국 사람처럼, 한국처럼.”
도서관 사서는 누와콧에서 반듯한 일자리다. 할 일 없는 젊은이들은 아침부터 논다. 나는 그녀를 도와준 적이 없지만 그녀는 나에게도 고마워했다.
황연희(29)씨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다 네팔에 왔다. 개인 프로젝트로 리모델링한 누와콧의 한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노는 모습이 아름답다. 키가 훌쩍한 미인이다. “아유 레디!”라는 구호를 외치면 아이들은 “오~예스”라고 외친 뒤 노래를 부른다.
“시설은 차치하고 시스템과 커리큘럼이 엉망이에요. 동요를 녹음해서 전국에 보급하려고 해요.”
전형섭(26)씨는 중앙대 컴퓨터공학과를 다니다가 군대 대신 KOICA 봉사단원으로 네팔에 왔다. 그는 누와콧에서 맥가이버로 통한다. 누와콧에서 자동차로 2시간 떨어진 오지에 엄홍길휴먼재단이 학교를 세웠는데, 전형섭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파른 산길을 오가면서 이 학교 컴퓨터실을 꾸몄다. 강가 랄 투라다 네팔 교육부 장관은 그가 꾸려놓은 컴퓨터실을 살펴본 뒤 “좋은 학교를 지어준 한국인에게 감사한다.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배워 복지국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주영(32)씨는 아름다운가게와 함께 럭시미가 일하는 도서관을 지었다. 화장실 지원 사업과 돼지, 염소 분양 프로젝트도 수행한다. 한국에서도 정신장애인복지시설에서 일했으니 봉사가 직업인 셈이다.
“저소득층 가구에 화장실도 지어주고 있어요. 화장실을 갖춘 집이 별로 없어요. 보통은 자연에서 해결하죠. 상위 카스트는 돼지를 먹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아요. 아무리 가난해도 돼지는 안 받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염소, 돼지를 무상으로 준 뒤 새끼를 낳으면 2마리를 돌려받습니다. 새끼는 다른 집에 지원하고요.”
이종명(31)씨는 미국에서 국제개발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에 들어가기에 앞서 현장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KOICA 봉사단에 지원했다. 그는 누와콧지역개발국에서 일한다.
“책상머리 공부가 아닌 필드 워크(field work)를 해보고 싶었어요. 개발경제학 교과서는 적도기니아와 네팔을 가장 가망 없는 나라로 꼽고 있습니다.”
이종명씨가 지역개발국 동료인 람허리 판데이(52)를 소개해줬다. 그가 자신이 사는 마을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는 마을 자치기구인 선라이즈 소셜 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 다르게 정비가 잘돼 있다. 판데이는 1시간 넘게 마을 구석구석을 보여주면서 신찬수라는 사람을 칭찬했다.
“올데이, 워크, 워크. 클린, 클린. 신찬수는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다. 이 길을 신찬수가 닦았다. 이 창고도 신찬수가 만든 것이다. 이 회관도 신찬수가 지었다. 신찬수는 일흔이 넘었는데도 하드 워커다. 신찬수가 마을을 바꿔놓았다.”
이랑에 맞춰 씨 심기
신찬수씨는 이종명씨의 선임자다. KOICA 단원으로 새마을운동을 개발도상국에 퍼뜨리고 있다. 판데이의 마을은 한국의 농촌을 닮아 있다. “신찬수 선생님이 떠났어도 마을사람들이 알아서 일을 잘한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고 떠난 것이다”라고 이종명씨는 말했다.
케샵 바하둘 쓰레스터 누와콧 부시장은 “한국인들이 누와콧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별것 없다. 한국 원조는 실제로 도움이 된다.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네팔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만들고 싶다. 누와콧이 교통의 요지로 바뀐다. 중국, 인도로 가는 도로가 뚫린다. 기대가 크다”고 했다.
이틀간 묵은 여인숙 앞에선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아시아개발은행(ADB) 돈으로 닦는 길이다. 여인숙의 음식과 잠자리는 불편했지만, US-AID 사람들도 함께 머물러 외롭지 않았다.
30인승 쌍발기를 타고 카필바스투로 향했다. 판데이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신찬수씨가 누와콧을 떠나 터 잡은 곳이다.
비행기가 산보다 낮게 난다. 오른쪽 창으로 히말라야가 근육을 드러낸다. 눈앞의 장관을 표현할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신찬수씨는 일흔 살의 노인이다.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유엔한국재건단이 정읍에 왔어요. 그 사람들한테 많은 걸 배웠습니다. 은혜를 되갚고 있는 셈이죠.”
그는 전북농업진흥원에서 31년을 근무한 뒤 정년퇴임했다. 2001년부터 KOICA 단원으로 일했다. 필리핀엔 ‘찬수로드’라고 불리는 길이 있다고 KOICA 관계자가 귀띔했다.
“필리핀에서 4년을 일한 뒤 네팔로 옮겨왔어요. 새마을운동이란 게 정신을 바꾸는 겁니다.”
그는 카필바스투에서도 마을회관을 세우고, 농로와 배수로를 정비했다. 기계를 사용한 농법도 가르쳤다. 마을사람들이 이젠 이랑에 맞춰 씨를 심는다. 예전엔 손으로 씨를 흩뿌렸다고 한다.
“농법이 한국의 1960년대보다도 못해요. 소출이 적을 수밖에 없죠. 마을회관이 있어야 어떻게 발전시킬지 논의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회관부터 지었어요. TV도 제일 좋은 걸로 사다놓고요.”
KOICA 단원인 권태형(27)·이진범(30)씨가 “신찬수 선생님이 한국에서 손님 온다고 새벽부터 사람들을 불러내 다 함께 구석구석을 청소했다”면서 웃었다.
이진범씨는 카필바스투에 2주 전 도착했다. 교사다. 마을회관에서 학생들이 네팔 전통춤을 연습한다. 안면이 있는 아이들이 그를 보고 알은체한다. 아이들과 섞여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답다.
카필바스투에서 자동차로 30분 남짓 떨어진 브뚜왈에선 직업훈련원 공사가 한창이다. KOICA가 돈을 댔고, 삼부건설이 시공을 맡았다. 전문 기능 인력을 양성하는 곳이다. 브뚜왈에선 김용현(31), 김태식(31) 단원이 일하고 있다.
“한국처럼”
럭시미의 나라도 발전이라는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쓰레기더미에서도 장미는 핀다. “한국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