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호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로마시대의 해적

  • 김석균│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1@yahoo.co.kr

    입력2013-11-20 13: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해적 소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폼페이우스, 해적에 잡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카이사르. 로마의 대권을 놓고 벌어진 두 사람의 운명적 대결의 고리가 해적이었다고 하면 비약일까. 로마를 이끈 영웅들과 지중해를 주름잡던 해적의 흥미진진한 인연.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로미시대 지중해에서 활약한 갤리선.

    로마의 역사는 바구니에 담겨 테베레 강물에 버려진 로물루스·레무스 쌍둥이 형제를 어미 늑대가 젖을 먹여 키우는 것을 발견한 양치기가 데려가 키웠다는 전설에서 시작한다. 양치기의 손에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형제는 곧 주변 양치기들의 우두머리가 됐고 점차 세력권을 넓혀 그곳을 통치하던 왕국을 쓰러뜨린다. 두 형제는 테베레 강 하구에서 점령한 지역을 분할해 통치했으나 형제 사이는 나빠졌고 기원전 753년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오늘날의 로마를 건국했다. ‘로마’라는 국호는 건국자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조그만 부족국가에 불과하던 로마는 점차 세력을 넓혀 이탈리아 반도의 부족국가들을 점령했고 마침내 기원전 270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된다. 로마를 비롯한 아테네· 페르시아 등 고대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들은 세력권을 넓혀가면서 주변 국가들과 교역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 해양으로 본격 진출하게 된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 반도, 펠로폰네소스 반도, 소아시아 해안을 중심으로 지중해와 에게 해에서 다양한 해양교역 네트워크가 형성돼 밀 등의 곡물 교역이 이뤄졌다. 해양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해양교역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도시국가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종국에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테네와 페르시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 등이 해양 패권을 둘러싼 고대 도시국가들의 대표적 전쟁이다.

    도시국가들의 해양 패권 전쟁

    로마가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오늘날 튀니지 만에 자리 잡고 있던 해양 도시국가 카르타고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세 차례 맞붙은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였다. 1차 전쟁(기원전 264∼241)은 서부 지중해 패권을 놓고 시칠리아와 싸웠으며 로마의 승리로 시칠리아가 로마의 속령이 됐다. 2차 전쟁(기원전 218∼201)에서 로마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격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로마의 영웅 스키피오가 전장을 아프리카로 옮기는 탁월한 전략을 구사해 자마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했다.



    전투 코끼리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한 한니발 군대는 16년간 로마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로마를 괴롭혔다. 풍전등화의 로마는 스키피오의 전략에 따라 지중해를 건너 카르타고를 치는 역공을 감행했다. 본국의 안전이 위협받게 된 상황에서 한니발은 군대를 퇴각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전장은 아프리카로 옮겨졌다. 기원전 202년 북부 아프리카 평원 자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니발 군은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 대패했다. 이 공로로 스키피오(大스키피오)는 원로원으로부터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르타고는 이 패전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줬다. 로마는 해양국가 카르타고로부터 지중해 서부의 제해권과 이권을 넘겨받았다.

    3차 전쟁(기원전 149∼146)에서는 로마의 원정군이 카르타고를 괴멸해 카르타고는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부(富)와 해운력을 키운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계기로 기원전 149년 로마에 대항했다. 로마군에 맞서 카르타고는 여자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활시위로 쓸 만큼 3년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여한 아들 스키피오(小스키피오)에게 정복됐다. 카르타고를 정복한 스키피오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그 자리에 소금을 뿌려 생명이 자라지 못하도록 할 만큼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로마의 엄청난 공세에도 집요하게 저항하던 카르타고가 마침내 함락되던 날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시내의 뒷산에 올랐다. 그리고 700년 동안 영화를 누린 도시가 검은 연기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것을 보면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역사가 폴리비오스가 의아해하며 “승리했는데 왜 눈물을 흘리느냐”고 물었다. 스키피오는 한숨을 지으며 “언젠가 로마도 저 아래 불타고 있는 카르타고와 같은 운명이 될 것 같은 비애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스키피오는 어떤 국가도 흥하면 쇠락의 길을 거쳐 결국 이름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흥망성쇠의 이치에 앞으로 로마에 닥쳐올 운명을 대입해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로마가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고 대제국으로 거침없이 성장해가는 시기였지만, 스키피오는 수백 년 뒤 야만족의 침입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로마 제국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로마 해군력 위협한 해적들

    한낱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는 지중해 건너편 북아프리카 연안의 강력한 해양 도시국가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해갔다. 이제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나 다름없었다. 사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는 오랜 내전을 거치면서 지상군 중심의 국가로 성장했고 변변한 함정과 해군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건설했고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한 해군력을 갖게 됐다.

    지중해를 둘러싼 대제국을 건설해나가던 로마를 내부에서 괴롭히는 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해적들이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서부에서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동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는 바람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그 틈을 타 해적집단이 준동했다. 로마의 속지에서 해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곳곳에서 해적이 발호해 피해가 막대해지자 해적 소탕은 로마의 국민적 염원으로 떠올랐고 가장 중요한 국가 현안이 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해적은 공화정 말기 로마의 두 주역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권력과 운명에도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는 바다로 활발하게 진출해 해양을 이용했다. 성경의 사도행전 27장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로마와 지중해 연안에서 전도에 앞장선 바울이 정치범으로 체포돼 예루살렘에서 크레타와 몰타를 거쳐 로마로 이송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배를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친숙하게 이용했다는 것과 로마시대 초기의 활발했던 항해 및 해운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내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발전한 로마는 지중해의 해양지배권을 확립한 후 바다 이용에 대한 개념과 해양질서를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2세기 로마의 법학자 마르시아누스는 “해양은 자연법의 일부로서 만민에게 공유(公有)된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로마는 6세기경 공유물로서의 해양의 지위를 로마법에 법전화했다.

    바다는 모두의 공유물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로마의 해양사상이자 정책이었다. 이러한 열린 해양사상은 여러 대륙에 걸친 속주의 다양한 인종·언어·종교·문화의 차이와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한 로마의 개방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논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해양을 개방했어도 로마가 해양의 질서를 주도하고 통제권을 행사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사상 최대 해적 근거지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카이사르.

    기원전 59년 로마 공화정 말기에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체제 시대를 함께 연 폼페이우스(기원전 106∼48)와 카이사르(기원전 100∼44)의 권력과 운명도 당시 로마를 괴롭히던 해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전장을 누비며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집정관에 올랐고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소탕해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유학을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에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극적으로 탈출한 일이 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서 만나게 됐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과 정략결혼을 해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가지기 어려운 법. 권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두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귀족 편을 든 폼페이우스와 민중 편에 선 카이사르 두 사람은 처음부터 권력기반이 달랐고 결국엔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내전을 벌이게 됐다.

    폼페이우스는 18세 때 동맹시 전쟁(로마연합 중 이탈리아 본토의 동맹시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전쟁)이 벌어지자 아버지를 도와 군단을 이끌 정도로 청년기부터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집정관 독재자 술라와 손잡고 내전에 패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와 에스파냐로 도망친 마리우스파의 잔당을 소탕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환해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와 검투사를 이끌고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73년 야심만만한 자신의 집정관 취임에 반대하는 원로원을 압박해 크라수스와 공동 집정관에 올랐다.

    당시 소아시아의 남서부 해안과 에게 해의 여러 섬에는 해적이 준동했다. 섬이 많고 복잡한 해안에는 작은 출입구가 많아 은신하기 좋았다. 오늘날의 터키 남부 해안지역인 실리시아(Cilicia·라틴어로 킬리키아)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적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실리시아 연안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해상무역 무대이면서 소아시아와 속주 시리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해적이 그곳에 본거지를 두고 로마로 오가는 선박을 약탈했기 때문에 로마로선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해적은 수천 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기원전 86년에는 로마의 함대를 무찌를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당시 해적 세력이 로마 정치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벌어진 일로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72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패퇴해 이탈리아 반도 끝 부분에 고립됐을 때 9만 명의 패잔병을 배로 탈출시키기 위해 그 지역의 해적 세력과 흥정을 했다. 거래가 성사됐으나 이행되지는 않았다. 반란군이 약속한 뱃삯보다 더 많은 돈을 크라수스가 해적에게 줬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

    로마가 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하기 훨씬 전부터 해적은 지중해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해적은 주로 금은보화를 실은 페니키아 상선을 공격하거나 곡물을 실은 선박을 약탈했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도 해적을 소탕하고자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해적이 이집트와 로마를 잇는 항로를 가로막아 이집트로부터 수입하는 옥수수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로마의 안전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자 마침내 로마는 해적 소탕을 위한 칼을 빼들었다.

    기원전 101년 제정된 반(反)해적법에 따라 기원전 67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해적 소탕을 위한 3년 임기의 대권(大權), 즉 임페리움(imperium)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폼페이우스는 6000탈란트의 군사비용과 전함 500척, 보병 12만 명, 기병 5000명의 군대를 지휘하고 원로원의 동의 없이 연안으로부터 80㎞의 내륙지역에서 징집하고 과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오늘날 계엄사령관보다 더 큰 권한을 폼페이우스에게 맡긴 것이다. 그만큼 해적 문제 해결이 절박했고 국가적 현안이었음을 보여준다.

    보수적인 원로원은 처음에 젊은 실력자 폼페이우스에게 압도적인 군권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해적 소탕이 무엇보다 시급한 데다 정치적 부상을 꾀하는 폼페이우스와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손잡고 무력시위를 벌이자 원로원은 결국 손을 들었다.

    원로원과 귀족 세력이 해적 소탕을 반대한 것은 해적으로부터 얻던 경제적 이익을 잃게 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로마 귀족층에게 영지에서 부릴 노예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해적은 그들에게 필요한 노예를 값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하지만 상인과 평민의 사정은 달랐다. 해적의 준동으로 교역이 중단됐기 때문에 하층 상인과 일꾼은 일자리를 잃었고 평민은 높은 생필품 가격 때문에 큰 고통을 받았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해적 소탕 법안이 제출된 것만으로도 각종 물가가 크게 떨어질 정도였다. 평민은 해적 소탕 법안을 크게 지지했다. 법안은 하루 연기된 후 수정된 형태로 원로원을 통과했다. 법안이 통과될 수 있었던 데는 민중 편에 섰던 카이사르의 지지가 큰 힘이 됐다.

    논란 끝에 해적 소탕의 대권을 부여받은 폼페이우스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40여 일 만에 이탈리아 반도 연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3개월 만에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진압했다. 이후 지중해 연안의 해적은 꼬리를 감추고 바다의 질서는 회복됐다.

    폼페이우스는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일소할 수 있었을까. 소탕 작전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대권과 함께 바다와 육지에 걸쳐 해적을 동시에 소탕하는 이른바 ‘수륙병진’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는 오늘날 스페인 연안에서부터 터키 연안, 흑해에 걸쳐 지중해 전 해역을 13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사령관을 임명했다. 또한 최상의 전함 60여 척으로 구성된 예비부대를 지휘하면서 구역사령관들로 하여금 해당 지역 해적들의 해상 진출을 막고 육상으로 내몰게 했다. 스페인 해안에서부터 해적 소탕을 시작했고 해적들은 터키 남부 해안으로 내몰렸다.

    폼페이우스는 육상으로 내몰린 해적을 육상기지에서 궤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해적도 바다에 나가 해적질할 때를 제외하고는 육지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육상 근거지가 없어지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러한 전략이 주효해 수많은 해적선과 120여 군데의 육상기지가 궤멸됐다. 도망친 해적 잔당은 극소수였다. 폼페이우스는 투항한 해적은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고 사면했다.

    해적 소탕 후 해상 교역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로마 시장은 지중해 곳곳의 식료품으로 가득 차고 가격도 안정됐다. 지중해는 로마 멸망 후 해적이 다시 발호할 때까지 평온을 되찾았다. 로마의 숙원인 해적 소탕으로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에 올라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다.

    해적에게 잡힌 카이사르

    카이사르는 젊은 날 변호사로 활동했다. 독재자 술라가 죽은 뒤 그는 술라의 측근인 돌라베라의 비리를 원로원이 고소한 사건을 맡게 됐다. 당시 변호사는 피고소인뿐 아니라 고소인의 변론도 할 수 있어 오늘날의 검사 직무까지 수행했다. 카이사르는 돌라베라의 유죄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배심원들에게 열정적인 변론을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문제는 재판이 끝난 후였다. 술라가 죽은 후에도 그의 추종세력은 곳곳에서 득세하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술라 세력의 핵심인 돌라베라를 탄핵해 감옥에 보내려 했으니 술라 세력의 적이 된 것은 당연했다.

    재판에서 진 카이사르는 신변 안전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그때 24세의 젊은 카이사르가 선택한 것은 로마를 떠나 공부하면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아테네와 함께 당시 최고의 학부로 이름 높던 로도스 섬으로 가기로 했다. 왜 로도스 섬이었을까.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 사이에 있는 로도스 섬은 그리스 초기 도시국가들의 무역 중심지였다. 로도스의 부와 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기원전 290년 마케도니아 데메트리우스 1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거대한 태양의 신 헬리오스 상에서 엿볼 수 있다. ‘로도스의 거상’(‘크로이소스 거상’으로도 불린다)으로 알려진 34m 높이의 거대한 청동(당시 청동은 금값 못지않게 비쌌다) 거상은 한쪽 다리는 땅 위에, 다른 쪽 다리는 방파제를 딛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로 배가 지나갈 정도였다니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청동 거상은 기원전 225년경 지진으로 무너졌고 653년 로도스 섬을 공격한 사라센인들에 의해 해체돼 팔렸다고 전해진다.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로마시대 해적이 활약했던 지중해는 오늘날 크루즈 여행의 필수코스로 유명하다.

    로도스 섬은 해양법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항해와 해상무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제관습법이라 할 수 있는 초기의 해양법이 생성됐다. 로도스 섬의 이름을 따서 초기의 해양관습법을 ‘로도스 해양법(Rhodian Sea Law)’이라고 한다. 로도스 해양법이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근세 들어 해양으로 본격 진출하는 사상적 근간이 된 ‘해양자유의 원칙’이 이 법을 통해 정착됐기 때문이다.

    기원전 75년 청년 카이사르는 로도스 섬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의 습격을 받아 졸지에 해적의 포로가 됐다.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기 10여 년 전이었다. 해적들은 나포한 선박에 승선한 승객들의 몸값을 매겼다. 카이사르에겐 20탈란트를 매겼다. 당시 20탈란트는 군인 4300여 명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몸값을 내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거나 목숨을 보전할 수 없는 처지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이사르는 기지를 발휘했다. 해적들이 책정한 몸값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임을 자처하며 자신의 몸값을 50탈란트로 올려 제시하면서 시간을 버는 작전을 구사했다. 카이사르는 흉포한 해적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하려면 20탈란트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적은 젊은 카이사르의 호기로운 제안에 혹했다. 책정된 몸값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내겠다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괜찮은 거래였다. 돈을 구해오지 못하면 그때 가서 처리해도 늦지 않으니까.

    카이사르는 돈을 마련하러 종자 한 명을 보내고 종자 두 명과 함께 몸값을 구해 올 때까지 인질이 됐다. 해적은 로마의 대단한 귀족 자제를 인질로 잡은 줄 알고 엄청난 횡재를 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카이사르는 풀려나기만 하면 자신을 붙잡은 해적을 소탕해 하나도 남김없이 사형에 처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해적은 그를 허풍이나 떠는 거만하고 가소로운 졸부쯤으로 여겼는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여하튼 카이사르는 종자가 몸값을 구해 올 때까지 40일 동안 몸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카이사르는 곧장 가까운 밀레토스로 가서 배를 빌리고 사람을 모아 해적을 치러 갔다. 이어 밀레토스 근처에 정박해 있던 해적선을 기습해 자신을 인질로 삼았던 해적을 모두 붙잡는 데 성공했다. 붙잡은 해적 처리를 속주 총독으로부터 위임받은 카이사르는 그들을 모두 교수형에 처했다.

    카이사르는 이후 로도스 섬에서 2년여 유학하다가 로마 정계로 복귀했다. 훗날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귀족의 반대 속에서도 정적 폼페이우스에게 해적 소탕의 대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적극 지지한 것은 해적 문제 해결이 당시 로마의 최대 현안이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해적에게 나포돼 목숨을 잃을 뻔한 자신의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8년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던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에 맞서 휘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해 왔다.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카이사르가 일인자에 오르면서 로마의 정치체제는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 바뀌게 된다.

    해적이 동지중해에서 활개를 치면서 약탈하고 무역을 방해했는데도 로마는 왜 해적 퇴치에 곧장 나서지 않고 오랫동안 망설였을까. 그것은 해적질 덕분에 로마가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이익 때문이었다.

    해적의 노예무역

    로마뿐 아니라 상당한 부를 축적한 다른 지중해 도시들은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예가 필요했는데, 해적의 주된 약탈품이 노예였던 것이다. 로마의 지주들은 거대한 농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해적에게 로마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었다. 로마의 처지에서 해적은 노동력을 대주는 안정적 공급처였다. 앞서 언급했듯 로마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해적 소탕 계획에 반대한 이유는 해적이 소탕되면 자신들이 소유한 농장에 필요한 노예를 구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노예가 필요한 시칠리아 섬에서는 더욱 그랬다. 시클라데스의 델로스 섬은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됐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로도스 섬에서도 노예시장이 성행했다. 이런 노예시장에서는 하루 최다 1만 명까지 끌려와 매매됐다. 오늘날 터키의 지중해 연안인 리시아 해안에 있는 파셀리스 같은 여러 도시는 노예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해적과 협정을 맺었다. 또한 터키에 있는 해양도시 시드는 해적이 부두를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했다.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김석균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미국 듀크대 visiting scholar

    37회 행정고시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기획조정관, 해양경찰청 차장

    2013년 3월~제13대 해양경찰청장


    해적은 도시국가들의 비호 아래 노예무역에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다. 이러다 보니 그들의 행동도 더욱 대담해졌고 활동범위도 확대됐다. 해적은 키프로스와 동부 터키에서부터 아프리카, 멀리 로마가 통치하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활동 반경을 넓혀 지중해 전역에서 발호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