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바로티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자 숙원이던 합창단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먼 곳에 있는 극장에 아들을 데리고 가는 열성팬이자 아마추어 테너였다. 빵가게와 가정에는 항상 음악이 넘쳐났고, 그도 아들과 함께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파바로티 음악세계의 자양분이었다. 파바로티는 누가 보아도 기골이 장대하고 기운이 넘쳤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일까. 파바로티는 어릴 적부터 성악에 두각을 나타내 아버지와 함께 아마추어합창단과 교회성가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지금까지의 태도와 달리 직업 성악가의 길을 가려는 아들을 말렸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의 책임감 때문에 그 길의 선택하지 못한 아버지는 성악가의 길이 험난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체육교사가 되려던 아들의 마음을 잡아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보험설계사 파바로티
당시 이탈리아 국민은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였다. 마음의 치료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오페라극장으로 몰려갔고, 자연히 오페라가수는 최고 인기를 누렸다. 파바로티는 어머니의 든든한 지원사격 덕에 아리고 폴라, 에토레 캄포갈리아니 교수를 사사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보조교사와 보험설계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운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많은 여성 고객을 유치해 보험업계에서 ‘정규직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단역이지만 꾸준하게 일이 맡겨지자 그는 미련 없이 보험설계사를 그만두고 성악에만 전념했다. 동갑내기 ‘절친’인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는 일찌감치 데뷔해 세계 유수의 극장 무대에 올랐지만 파바로티는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극장의 조역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를 회상할 때 파바로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에는 깜깜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조마조마했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배부르게 먹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음식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를 이끈 원동력은 꾸준한 노력이었겠지만 이 말은 밝고 낙천적인 성격과 음식을 사랑하는 그의 절대미각을 보여준다. 1961년 모데나 극장에서 오페라 ‘라보엠’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한 그는 승승장구해 단숨에 세계를 아우르는 테너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무대 위의 암투가 데뷔 전의 불안감보다 그를 더욱 초조하게 했는지 그는 맛있는 음식에 더욱 의지했다. 나날이 살이 쪘다. 몸무게가 180kg이라는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왔지만, 초창기의 파바로티는 무대를 꽉 채워주는 건실하고 듬직한 테너임은 분명해보였다.
리처드 보닝과의 만남

2003년 12월 13일 35세 연하의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 파바로티가 아내와 11개월 된 딸 알리체와 함께 찍은 사진.
파바로티의 음색, 레퍼토리, 180cm의 신장까지 모든 면에서 서덜랜드의 상대역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후 찰떡궁합을 과시하며 둘은 세계를 누비며 30년 가까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파바로티는 더 이상 프리마돈나의 비호를 받는 초보 테너가 아니었다. 상황이 역전되어도 보닝 부부는 파바로티를 30년 전 파바로티로 대우해 그들의 관계는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이미 거동이 불편하고 생명이 4개월도 안 남은 시점에서 파바로티는 거주지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의 볼로냐에 공로상을 받으러 온 서덜랜드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는 영상을 보냈다. 세 사람은 다시 45년 전 처음 만난 날처럼 신뢰와 존중의 관계로 해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