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땀이 흐르는 건 더위가 유난했던 이번 여름뿐만이 아니다. 난데없이 들릴 수도 있는 서원(書院)을 혼자 지어놓고, 혼자 꾸려가고 있는데 ― 원장이라기보다는 ― ‘3인분 노비’가 공식 명칭이라고 주장할 만큼 사역이 많다. 그렇다고 노비 노릇만 할 수는 없고, 우선 나 자신부터 ‘서원’에 부합하는 일을 찾아 하다 보니 주경야독이 극에 달한 형편이다. 뭣 하러 그럴까. 사람들이 가끔 묻기도 하고 나도 자문한다.
요즘 세상에 연구소도 아니고 서원을 지은 뜻은, 젊은이들에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생활을 잠깐 벗어나 숨 한 번 고르고, 자기 자신이며 전통을 돌아볼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달려만 오느라 우리가 버린 것이 좀 많은가. 허겁지겁 살다보니 자신마저 까마득하다. 그래서 서원 이름도 여백이다. ‘여백(餘白)’으로 오해받기를 바라며 지은 동음이어 ‘여백(如白)’이다. 흰빛 같은, 즉 맑은 사람들을 위한 책 집이다.
서원을 지은 이유
서원을 짓는 건, 돈도 힘도 시간도 없는 사람이 혼자서 벌일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듯 어찌어찌 되었고, 매우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찾아주고 있어 힘든 걸 잊는다.그 노비 사역 틈틈이 질문 보따리를 들고, 혹은 강연 원고를 들고 독일로 달려간다. 퇴임하고 서울 학교보다 독일에 훨씬 더 많이 갔다. 초청도 끊이지 않지만 질문 보따리가 더 자주 꾸려지는 것은, 읽고 쓰는 일이 많아서다.
‘괴테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 누가 혼자 할 일이 아니고 세상에 아직 그런 예도 없다.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무엇보다 괴테가 참 많이 썼기 때문이다. 그의 사후에 나온 전집 바이마르판은 본문만 143권이다. 주석이 많이 달린 뮌헨판, 프랑크푸르트판은 각각 33권, 46권에 불과하지만 한 권이 보통 1000~1500쪽에 달한다. 게다가 문학만이 아니라 식물학 동물학 광학 등 여러 학문 분야가 다채롭게 망라돼 있다.
이 가운데 스무 권 정도를 선별해 전집을 만들고 연구서를 네 권 더 할 생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괴테가 쓴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역할 수는 없거니와 지금 이곳에 있는 독자에게 쓸모가 있자면 안목을 가지고 전체를 조감해 선별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그나마 공부가 조금 쌓인 이제 시작한 일이다.
스물네 권 중 여덟 권은 작업이 끝났는데, 운문답기를 바라며 새로 번역한 ‘파우스트’ ‘서·동 시집’ ‘시 전집’ 같은 가장 어렵고 방대한 책들과 연구서 세 권, ‘식물변형론’ ‘색채론’ 같은 자연과학 부분이 어느 정도 완성됐다. 이제 내게 마무리할 시간만 허락된다면 나머지도 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큰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국내에 아직 번듯한 괴테 전집 하나 없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고 자존심마저 상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공동 작업을 이끌 힘도 없어 그냥 혼자 시작해버렸다, 죽을 때까지 해본다는 생각으로.
우리나라에서 괴테 전집 번역·출간 작업은 시작됐다가 초장에 무산된 일이 한 차례 있고, 다음에는 여러 사람의 힘으로 상당히 나왔으나 마무리가 없었다. 일을 주도하시던 분이 일찍 물러섰고, 뒤를 이어 추진할 사람은 오늘날 출판 현실에서 나오기 어렵다. (힘만 들고 돈은 안 되는 책이다! 내가 번역한 ‘괴테 시전집’만 해도 나오는 데 15년이 걸렸다. 번역에 3년, 이후 출판사에서 잠잔 시간이 12년이었다.)
괴테 전집 번역을 시작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전통 서원의 현실이다. 대개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서원들은 집만 덩그러니 남았을 뿐, 하나같이 내용이 비어 있다. 막상 찾아보면 비감이 느껴진다. 옛 학통을 이을 만큼 전통학문이 깊은 후손이 있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학문하는 이들도 세계와 보조도 맞추어가며 서원까지 유념할 여력이 없다.
여백서원에서 괴테가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독문학 하는 사람이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독일과 세계에서 괴테의 자릿값 때문이다. 괴테는 그가 살 때만 해도 지방어라는 인식을 면치 못한 독일어로 쓴 문학을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올린 인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일이 문화적·민족적 자부심을 부각하고 싶을 때는 바이마르가 거론되는데 바이마르는 인구 6만 정도의 소국이었다. 부러운 일이고, 작은 나라가 세우기 좋은 전략의 한 예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사례와 우리 전통을 서원에 포섭해보고 싶었다.
그런 이유들로 전집 번역 작업을 겁 없이 시작했다. 이리저리 재다 보면 못 할 일이라 그냥 시작했다. 고맙게도 누가 나서서 출판사 한 곳을 주선해주었다. 유능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는 하나 단 세 명이 하는 출판사다. 뜻은 크나, 아직 한 권도 출간하지 못했다. 성의가 고맙고,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 같아 독촉은커녕 연락조차 못 해보고 있지만 걱정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생각한다. 해놓은 일이 어디로 가기야 하겠는가….
중국의 괴테 번역 국책 사업
큰일을 이렇게 막막하게 해나가다 보니 자주 떠오르는 곳이 있다. 상하이의 루쉰 공원이다. 우리의 불행한 근세사에서 일제에 대한 항거 무대로 등장해 그 이름이 친숙한 ‘상해(上海) 홍구 공원’의 새 이름이다. 그저 동네 이름일 ‘홍구’에서 ‘루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분명 자국의 대문호를 드높이려는 중국인들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 공원 안에서는 실제로 루쉰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도시의 다른 구역에 잘 보존돼 있는 루신이 살던 집과 더불어 상하이의, 아니 중국의 ‘글(文)’이 돋보이는 지점이다.이 공원 다른 한편에는 세계문학 코너라 할 곳이 있다. 괴테,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발자크 등 온갖 세계 문호를 실물 크기 동상(銅像)으로 제작해 한데 모아놓아 사진 촬영지가 되기도 하는데, 그 모두를 루쉰 한 사람이 대척점에서 포섭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공원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내가 여백서원을 지으며 생각한 전통과 동시대, 세계를 향한 열림의 조용한 공존이 거기서는 - 그야말로 중국식으로 - 시끌벅적, 요란법석으로 현시돼 있었다.
루쉰 공원을 찾은 것은 그의 작품 ‘아큐정전’의 인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원 입구에 있는 상지대학에 며칠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대학 주도로 엄청난 예산을 쏟는, 대규모 국책사업이 시작됐는데 바로 괴테 전집 번역 프로젝트다. 당 간부인 대학총장까지 나서서 학회를 열고, 경험 있는 학자들 -독일학자 둘과 일본 번역가 하나 그리고 나-을 주빈으로 불렀다.
현장에 가서 보니 중국의 이 프로젝트는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120명이 달려들어 한다고 했다. 중국통인 한 베를린대 교수의 진단에 따르면 그래도 50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중국 독문학자들은 나를 비롯한 경험자의 말을 경청했고 대접도 극진했지만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물량 공세로 이루어지는 큰일을, 제아무리 몸 바쳐 평생 공부해왔다 한들 개인이 다 해내도록 과연 하늘이 허락할지.
자주 그 루쉰 공원이며 푸둥(浦東)의 고압적으로 치솟는 고층건물군이 중국 번역자 120명과 겹쳐 떠오르지만, 그래도 이제 또 한 번 결실의 계절이 오니, 어떻게든 한 단어라도 더 반듯하게 옮겨보겠다고 질문 보따리를 꾸리며 마음을 다잡아본다.
전영애
●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 서울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바이마르 고전주의재단 연구원
●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괴테 금메달’ 수상(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