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명작의 비밀

상상력의 보고 신라 금관

‘다빈치코드’ 같은 치명적 유혹의 스토리텔링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19-10-1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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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련되고 독특한 조형미, 화려한 장식과 황금빛 찬란함….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신라 금관이 빠질 수 없다. 고분 도굴을 피했고, 전시실에 침입한 도난범의 마수도 피해온 금관. 순도 90%에 육박하는 금관은 보는 이를 신비로움과 궁금증에 빠뜨린다. 금관은 누구 것인지, 실제로 착용했던 것인지, 저 특이한 모양은 어디서 온 것인지. 최근 들어 금관 연구가 부쩍 늘어났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각각 다르다. 왜 그런 것일까.
    황남대총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황남대총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927년 11월 10일 밤,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에 괴한이 침입했다. 그는 진열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금관총(金冠塚)에서 출토된 순금 허리띠와 장식물(현재 국보 제88호) 등 금제 유물을 몽땅 털어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관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났건만 수사에 진전이 없고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 어느 새벽, 경주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던 한 노인이 이상한 보따리 하나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찬란한 황금빛 유물, 바로 그 도난품들이었다. 

    범인은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이때 화를 면했던 금관총 출토 금관(5세기, 현재 국보 87호)은 1956년 결국 수난을 겪고 말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 또 침입자가 들이닥친 것이다. 범인은 1927년과 달리 이번엔 다른 금제 유물에 손도 대지 않았고 금관총 출토 금관 한 점만 훔쳐갔다. 천만다행 그게 모조품이었다. 금관총 금관은 그렇게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금관의 미학

    2013년 10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Silla Korea’s Golden Kingdom)’ 특별전 프리뷰 행사가 열렸다. [뉴시스]

    2013년 10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Silla Korea’s Golden Kingdom)’ 특별전 프리뷰 행사가 열렸다. [뉴시스]

    1997년 영국 런던 브리티시 박물관(일명 대영박물관) 한국실 개관 기념전에 금관총 금관이 출품됐다. 당시 보험가 50억 원이었다. 2013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이 열렸다. 이때 황남대총(皇南大塚) 금관(5세기, 국보 191호)이 출품됐다. 이 금관 보험가는 100억 원. 누군가는 “대단한 액수”라며 놀라워했고 누군가는 “너무 적게 책정된 것 아니냐”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 공공기관이 금관 안전을 보장했기에 굳이 수백억 원짜리 보험에 가입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이 소식에 세인들은 대체로 “역시 금관이군”이란 반응을 보였다. 

    현재 전해오는 순금제 금관은 총 8점. 이 가운데 6점이 5∼6세기 신라 것이고, 나머지 2점은 가야 금관이다.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武寜王陵)에서 왕과 왕비 금제 관장식이 나왔으나 금관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자주 만나는 관은 대부분 금동관이다. 

    신라 금관 6점은 각각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 금관총 출토 금관, 서봉총(瑞鳳冢) 출토 금관(5~6세기, 보물 339호), 금령총(金鈴塚) 출토 금관(6세기, 보물 338호), 천마총(天馬塚) 출토 금관(6세기, 국보 188호), 교동고분(校洞古墳) 출토 금관(5세기)이다. 모두 경주 도심의 신라 고분에서 출토됐다. 교동 금관을 제외하면 형태가 모두 비슷하다. 나뭇가지 모양 장식(출자형出字形 장식) 3개와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관테에 덧대 금못으로 고정하고, 곡옥(曲玉·곱은옥)과 달개(얇은 쇠붙이) 등으로 장식했다.



    3대 고분 발굴

    신라 금관이 처음 확인된 것은 1921년 9월 23일, 경북 경주 노서동의 한 집터 공사 현장에서였다. 당시 인부들의 신고를 받은 조선총독부 직원들은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봉분이 훼손된 고분 속에서 금관을 비롯해 새 날개 모양의 관모 장식, 금제 허리띠와 장식, 금제 목걸이 귀고리, 금동 신발 등 2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 무덤은 주인공이 확인되지 않아 대표적 유물인 금관의 이름을 따 금관총이라고 부르게 됐다. 경주 지역 주민들의 희망에 따라 1923년 10월 경주에 경주유물진열관을 지어 금관 등 출토유물을 상시 공개했다. 사람들은 이 진열관을 금관고(金冠庫)라고 불렀다. 금관고는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발전했다. 

    1924년 금령총에서도 금관이 발견됐다. 무덤에서 금령(金鈴·금방울)이 나왔다고 해 이런 이름이 붙은 곳이다. 1926년 서봉총에서 또다시 금관이 나왔는데, 서봉총 발굴은 그 사연이 좀 독특하다. 1926년 발굴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프가 발굴에 직접 참여했다. 무덤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황태자의 발굴 참여를 기념해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瑞)자를 땄다. 또 이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과 비슷한 새가 장식돼 있다고 해서 봉(鳳)자를 붙였다. 

    광복 후에도 경주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고분 발굴이 이어졌다. 그러나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발굴은 1970년대에 시작됐다. 1970년대는 한국 고분 발굴사에 길이 남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3대 고분 발굴로 일컬어지는 무령왕릉(1971), 천마총(1973), 황남대총(1973~1975) 발굴이 모두 이때 이뤄졌다. 무령왕릉에선 6세기 백제 유물 46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5~6세기 신라 유물이 각각 1만1000여 점과 5만8000여 점 발굴됐다. 이러한 대규모 고분 발굴 조사는 이후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주 고분의 비밀

    1973년 천마총 발굴 당시 모습. [이광표 제공]

    1973년 천마총 발굴 당시 모습. [이광표 제공]

    고고학자와 고고학 인부들이 발굴을 위해 고분을 열고 들어가면 도굴꾼들이 훑고 지나간 경우가 허다하다. 담배꽁초와 소주병, 심지어 컵라면 용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그런 고분은 대부분 내부가 석실(石室)로 이뤄져 있다. 널찍한 돌로 방을 만들고 시신과 부장품을 안치한 경우다. 도굴꾼들은 흙을 조금 파고 석실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안전하게 유물을 빼낼 수 있다. 

    우리나라 고분의 상당수가 이런 방식으로 도굴됐다. 그런데 5~6세기 신라 고분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뭘까. 천마총, 황남대총 같은 경주 시내 대형 고분은 적석목관분(積石木槨墳·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시신을 넣은 목관과 부장품을 안치한 뒤 그 위에 목곽(木槨)을 설치하고 그 위를 엄청난 양의 돌로 촘촘히 쌓은 뒤 다시 흙으로 둥글게 봉분(封墳)을 다져 만든 무덤이다. 

    공식적으로 발굴할 때는 고분 위부터 열고 들어간다. 하지만 도굴꾼들은 남의 눈을 피해 주로 고분 아래쪽에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한 구멍을 뚫고 들어가 관 속 유물을 훔쳐간다. 적석목관분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구멍을 뚫으려면 관 위에 무수히 쌓여 있는 돌의 일부를 빼내야 한다. 문제는 돌을 뽑아내면 그 위에 쌓여 있는 수많은 돌이 밑으로 쏟아져 내려 도굴꾼이 돌에 깔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적석목관분은 이처럼 외부인이 침입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다. 특이하게도 적석목곽분은 5~6세기 신라에서만 나타난다. 1500여 년 전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무덤에 훗날 누군가 침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게 아닐까. 경주 시내엔 대형 고분이 즐비하지만 현재까지 공식 발굴된 고분은 몇 곳 안 된다. 또 다른 거대 고분을 발굴한다면 천마총, 황남대총 못지않게 엄청난 유물을 토해낼 것이 분명하다.

    금관을 머리에 썼다고?

    사극을 보면 신라왕이 금관을 쓰고 나온다. “금관이니까 모자처럼 머리에 썼겠지”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상상이다. 실제로는 금관 용도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마땅한 증거물을 찾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심지어 금관이 실용품인지, 비실용품인지조차 의견이 갈린다. 

    여기서 실용품이라고 하면 신라왕이 특정 의식에서 이 금관을 직접 착용했음을 의미한다. 비실용품이라고 하면 실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고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고자 장송의례용품으로 부장했음을 의미한다. 즉 실용품=의식용, 비실용품=장송의례용이다. 

    일단 실용품이 아니라고 하는 견해의 근거를 알아보자. 첫째, 금관은 너무 약한 데다 지나치게 장식이 많아 실제 착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 금관은 얇은 금판을 오려 붙여 만들었다. 관테에 고정한 세움 장식이 매우 약하고 불안정하다. 머리에 금관을 쓸 경우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 장식이 꺾일 정도라고 한다. 

    둘째, 마감이 깔끔하지 않은 점. 신라 금관은 전체적인 디자인이나 조형미가 대단히 뛰어나고 세련됐다. 그러나 마감이 엉성하다. 왕이 사용하는 것이라면 신라 장인들이, 정교하기 짝이 없는 금목걸이와 금귀고리를 만들었던 그 솜씨를 발휘해 마감까지 매끄럽게 해놓았을 것이라는 견해다. 

    셋째, 금관과 함께 출토된 장신구 가운데 비실용품이 있다는 점. 대표적인 것이 대형 금동신발이다. 이것을 사람이 실제로 착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금관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넷째, 금관의 출토 상황. 황남대총 발굴 당시 금관은 죽은 사람(무덤 주인공) 머리 위에 씌워져 있지 않았다. 얼굴을 모두 감싼 모습으로 출토됐다. 금관 아래쪽 둥근 테는 무덤 주인공 얼굴의 턱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다. 금관 위쪽 세움 장식(나뭇가지나 사슴뿔 모양)도 끝이 모두 머리 위쪽 한 곳에서 묶여 고깔처럼 보였다. 즉 얼굴 전체를 뒤집어씌운 형태였다. 이는 신라 금관이 실용품이 아니라 장송의례품임을 보여준다는 견해다. 

    반면 금관이 의식용 실용품이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금관이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천이나 가죽 등에 부착하는 형태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 민속학자는 “신라 금관을 부장품 장례용품으로 보는 것은 식민사관의 일종”이라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왕관은 원래 의식용이다. 착용의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 신성성(神聖性)을 강조하는 것이라 굳이 실용적으로 제작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금관의 주인은 누구?

    금관이 실용품이었든 장송의례용품이었든, 사람들은 대부분 신라왕이 금관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금관의 주인이 왕이려면 금관이 출토된 고분이 왕의 무덤이어야 한다. 그러나 왕의 무덤으로 밝혀진 경우는 아직 없다. 왕릉급으로 추정할 뿐이다. 

    발굴이 이뤄진 우리나라 고대(古代) 고분 가운데 주인공이 확인된 것은 백제 무령왕릉뿐이다. 다른 고분에는 ○○왕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어 금관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금관이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北墳)을 보자. 황남대총은 동서 80m, 남북 120m, 높이 22m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 고분이다. 남북으로 무덤 두 개가 붙어 있는 쌍분이며 부부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 100% 물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물왕(내물마립간) 부부묘라는 추정이 지배적이다. 흥미로운 건 남성 무덤인 남분이 아니라 여성 무덤인 북분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점이다. 남성 무덤에서는 그보다 급이 낮은 금동관과 은관이 나왔다. 이 무덤이 축조된 5세기 전후 신라엔 여왕이 없었으니 황남대총은 여왕의 무덤일 수 없다. 그렇다면 황남대총 금관의 주인공이 왕비일 수는 있어도 왕은 아니라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서봉총 금관의 주인공이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나온다. 금령총에서 나온 금관은 지름이 16.5cm로 작은 편이다. 성인용이 아니다. 그 주인공이 어린아이라면 아마 왕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의 금관 하면 우리는 보통 왕의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발굴 결과는 그렇지 않다. 

    호기심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금관의 기원을 두고도 의견이 다양하다. 스키타이 기마민족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 시베리아 샤먼의 풍속에서 왔다는 주장, 고조선 초기부터 이어온 한민족 고유의 양식이라는 주장 등 그 폭이 상당히 넓다. 나뭇가지 장식을 두고도 의견이 많다. 생명수(生命樹)라는 견해가 있고, 경주 계림(鷄林)의 숲을 형상화했다는 견해도 있다. 계림은 김알지 탄생 설화가 서려 있는 경주 도심의 오래된 숲이다.

    곡옥과 나무장식의 숨은 뜻

    신라 금관 표면엔 비취로 만든 곡옥이 다수 장식돼 있다. 대체로 곡옥은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고 여겨지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의견이 분분하다. 용을 단순화해 표현한 것으로 보는 이가 있고, 자식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도 있다. 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곡옥이 많이 달려 있는 금관은 자식을 많이 나은 왕의 것이고 곡옥이 없는 금관은 자식 없는 왕의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객관적이고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소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금령총 금관에만 곡옥이 없는 점을 보면 이 주장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 밖에도 신라 금관의 주인이 무당이나 제사장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봉총 금관의 제작연대를 두고도, 대체로 5~6세기 것으로 보지만, 624년 진평왕 때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금관에 대한 의견은 최근 10여 년 사이에 왕성하게 제시되고 있다. 하나하나의 견해가 모두 흥미롭다. 따라가 보면 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 발짝 떨어져 밖에서 바라보면, 지나치게 주관적인 함정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연구가 늘어날수록 더 복잡해지는 형국이라고 할까. 

    국립경주박물관이 금관의 순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교동 금관 88.8%, 황남대총 금관 86.2%, 금관총 금관 85.4%, 천마총 금관 83.5%, 금령총 금관 82.2%, 서봉총 금관 80%였다. 그 결과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말로 순금이었구나.” 

    순금제 금관은 우리 고대사에서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던, 게다가 죽은 자의 무덤에서 나온, 독특하고 세련된 모양의 유물이다. 금관은 그 자체로 신비롭다. 고고학자, 역사학자, 미술사학자, 민속학자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호기심 속으로 빨아들인다. 그들은 자료를 찾고 상상도 한다. 다빈치코드 같은 상징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렇기에 금관은 상상력의 보고다. 그런데 그 상상력의 유혹은 때론 치명적이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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