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호

환상극장

조선 여인 초옥의 사랑 없는 인생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3-07-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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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양노파라 불린 한 조선 여인의 기묘했던 일생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건 식민지 조선 경성시의 경부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염탐하고 묘사하기를 즐겼던 비밀스러운 문학도로서 나 하라다 요시오가 지은 창작물로 보아도 좋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양노파는 실존 인물이며, 그녀의 체험 역시 경찰로서의 내 후각에 비춰 판단할 때 거의 진실에 가깝다.

    3·1 만세운동 직후 반도로 발령받은 나는 드디어 동경하던 외국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 기쁨은 경성 경무국의 분주한 일상 속에 급속히 시들어갔고, 어느덧 나는 식민지를 관리하는 진부한 일본인 경찰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알 수 없는 인간 욕망의 내부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이를 추리소설로 멋지게 가공하려던 문학도로서의 내 꿈은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양노파를 만나기 전까지는.

    조선어에 제법 익숙해지고 있던 어느 가을 밤, 직속 선배인 히라카와 경시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본정통이라 부르던 황금정 유흥가의 한 주점을 방문했다. 아름답게 분칠한 젊은 여종업원들보다는 그녀들을 불러내 손님들과 짝을 맺어주던 한 조선인 노파에게 눈길이 갔다. 소변이 마렵다는 핑계로 방을 벗어나 데스크를 지키던 마담에게 그녀가 누군지 물었다. 눈이 동그래진 마담은 미묘한 표정을 머금고 이렇게 되물어왔다.

    “경부님 취향이 혹시? 그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인간 본성이란 다양해서.”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던 난 긴 한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세상을 흑과 백,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늙은이, 내지인과 반도인 등으로만 나눠 보려는 자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없는 자이며, 따라서 어쩌다 태어난 인생의 진짜 의미를 탐구할 자격이 아예 없다고 마담에게 말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담배의 인연

    양노파는 처음 보는 이와 선뜻 대화를 나눠줄 그런 개방적 품성이 결코 아니었다. 총명하고 호기심 많아 보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일본인에 대한 깊은 의심과 두려움으로 인해 두텁게 위장돼 있었다. 예컨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영롱히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곧장 속이 빈 우매함이나 건조한 냉기로 자기 실체를 감춰버리곤 했다. 물론 그럴수록 그녀에 대한 내 관심은 증폭됐는데, 단단히 웅크린 그 불투명성을 통과하기만 하면 조선 문화의 은밀한 참모습과 맞닥뜨릴 것이라는 막연한 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늘 그렇듯 만취한 히라카와 경시를 부축해 인력거에 태워 보내고는 혼자 멍하니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어느 저녁, 주점 건너편 골목길 귀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던 양노파를 발견했다. 목적 없이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성격이 아닌지라 몹시 망설여졌지만 적잖은 취기에 의지해 그녀에게 몇 걸음 다가가 보았다. 벌떡 일어선 그녀가 나를 스쳐 지나 주점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 등에 대고 급히 물었다.

    “통성명이나 하면 어떨지요?”

    내 조선어가 꽤 근사했는지, 아니면 결코 취할 때까지는 마시지 않는 내 평소의 절제력을 높이 산 것인지 그녀는 멈춰 섰다.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가 시키시마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일본에선 최고급 담배요. 피워보겠소?”

    긴장한 양노파는 약간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받아 입가에 가져갔다. 불을 붙여주자 양노파는 서툴게 몇 모금 빨더니 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러느냐는 뜻으로 고개를 갸웃하자 그녀가 의외로 밀도 있는 굵은 중저음으로 대답했다.

    “약해요. 연초보다 너무 약해서.”

    알고 보니 그날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양담배를 피운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세 개비를 연이어 건네며 거듭 불을 붙여줬다. 하얀 담배 연기가 감청색 밤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을 함께 구경하며 우리는 그날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날 밤 우연히 함께 담배를 피운 뒤부터 난 주점을 들를 때마다 말없이 양노파에게 담배를 건네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경계를 조금씩 푼 그녀는 자신이 1850년에 태어난 것 같으며, 어린 시절 조선의 유명한 부마 가문의 시녀였다고 밝혔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신분이 경찰인 난 그녀와 일정 거리를 두려 더욱 노력했고, 궁극의 인간적 신뢰를 얻어낼 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다고 스스로 결심했다.

    남영위궁 시녀의 삶

    엄청난 애연가인 양노파의 담배 친구로 계속 남기 위해 난 훨씬 저렴한 파고다 담배를 피워야만 했다. 이후 파고다 담배 맛에 싫증이 난 우리는 총독부에서 새로 출시한 피죤 담배로 갈아탔는데, 이 글은 그러니까 파고다 담배 시대에서 피죤 담배 시대로 넘어가던 무렵 경성의 숨겨진 역사라고 할 만하다.

    “문학이 꿈이셨던 분이 어쩌다 경찰이 되신 겁니까?”

    양노파가 내게 처음으로 한 질문이다. 난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그녀에 비해선 터무니없이 짧아 보일 과거의 삶을 장황하게 펼쳐놓았다. 다시 담배를 피워 문 그녀가 아래로 깊게 깔리는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경무국에서 조선의 책이나 신문을 분석하는 일을 하신다고요? 언뜻 무해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그 역시 우리 조선을 탄압하려는 일임에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제가 비록 늙었지만 사리 분별은 제법 합니다.”

    늘 그렇듯 우리 사이엔 다시 긴 침묵이 찾아왔고,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마음의 고랑을 담배 연기가 메워주었다. 그녀가 한숨 서린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전 정확한 제 나이도, 진짜 성도 모릅니다. 세 살 무렵 남영위궁 몸종으로 들여보내졌다는데, 절 그 부마 집안에 넘긴 부모는 이후 행방불명됐다는 게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양씨 성은 저를 속량해 준 시아버지 것이었지요. 속량이란 노비에게 양인 신분을 회복해 주는 걸 말합니다. 더 들어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날 향해 그녀가 해준 이야기를 여기 다 옮겨 적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서툰 아마추어 작가가 요약하기 힘들 정도로 어린 궁녀로서의 그녀 삶이 다사다난했기 때문이다. 다만 부마 남영위의 첩 가운데 한 명을 모시게 된 그녀가 꽤나 운이 좋아 한학을 익힐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언급해 두고 싶다. 주점에서 허드렛일을 하기에 그녀는 무척 지적이었는데, 우리 사이의 사귐은 바로 그 위에 쌓아올린 우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배움의 열망이 강했던 부마의 첩을 모신 덕분에 어린 양노파는 수많은 역사서와 문학선집을 탐독했다. 그녀는 부마가 첩의 침소로 드는 날이면 어김없이 불려가 그들의 말동무가 돼줬고 심지어 운에 맞춰 함께 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의 일반적 풍습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두 분께서 동침하시는 내내 떠나지 말고 곁을 지키라는 명까지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께선 절 벗이라 부르시며 애지중지하셨거든요.”

    자기 인생의 황금기를 회고하는 그녀의 흥을 무참히 깨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부마라면 왕의 사위이고, 비록 첩이라지만 그런 자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라면 시녀 한 명쯤은 얼마든 보호할 수 있었을 듯한데, 어쩌다 남영위궁에서 쫓겨난 겁니까?”

    마침 피죤이 떨어져 싸구려 마코 담배를 피워 문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전 일개 애완용이었습니다. 방 안에서 기르는 앵무새 같은 것이었다고나 할까? 비록 타고난 머리로 서책들을 읽고 문리는 깨쳤지만, 그래 봤자 심심한 부마 첩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다 절 짝사랑하던 젊은 청지기 하나가 마치 저와 사통한 것처럼 투서를 했고, 이를 보신 남영위께선 진위를 살피지도 않으신 채 절 내치셨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1864년 한양 남촌의 죽동

    남영위궁에서 추방됐을 때 양노파의 나이는 갓 열다섯 살에 불과했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그녀를 돈을 주고 속량해 데려간 이가 바로 그녀의 시아버지가 된 양 씨였다. 양 씨는 그녀를 며느리로 들여 집안 대를 이어보려 했지만 문제는 당시 열아홉 살이던 철부지 아들이었다.

    “달리 살아갈 도리가 없어 운명을 받아들였지만, 밤낮 술독에 빠져 산 남편이란 자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아버님이 듬직할 정도였어요.”

    이렇게 말하는 양노파의 눈에 처음으로 눈물이 살짝 맺혔다. 당시 미혼이던 난 그녀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사랑 없는 결혼이 빚는 비극에 대해선 익히 짐작하는 바였다.

    “저를 속량하시느라 재산을 많이 허문 시아버님께선 남산자락 죽동의 장진사라는 부잣집 행랑채로 이사를 가셔야만 했습니다. 그곳이 제 신혼집이기도 했는데, 처음엔 너무 허름해서 충격을 받았지요.”

    불행한 결혼 생활에 대해 듣던 나는 문득 젊은 시절 그녀 이름이 궁금해져 물어보았다.

    “남영위궁에선 초옥이라 불렸습니다. 하지만 더는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고, 모두들 양 씨네 며느리란 뜻으로 양소부라 했더랬지요.”

    난 그 이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그 순간부터 그녀를 양노파 대신에 초옥 씨라 불렀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성이나 국적을 떠나 우애를 맺은 김에 그렇게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초옥 씨는 주름 가득한 얼굴을 찌푸리며 퉁명스레 이렇게 말했다.

    “가뜩이나 젊은 일본인 경부가 늙은 조선 할미를 좋아한다고 수군대는데, 호칭마저 그리 되면 서로 곤란합니다.”

    나는 그런 따위의 잡음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상관인 히라카와 경시에겐 그녀를 황금정 주변 조선인 동태를 살필 밀정으로 거짓 보고해 둔 바 있었고, 나 자신을 제국의 신실한 공무원이라 단 한 번도 여겨본 적 없었기에 대충 뭔가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녀도 마침내 그 재미있는 호칭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오래된 담배 친구이니 단둘이 있을 때는 그리 부르기로 하십시다. 하지만 여종업원들이나 마담 앞에선 각별히 주의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아스라이 추억에 잠겨드는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죽동 신혼 시절 전 꽤 큰 물의를 빚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자 문제지요. 어릴 때 전 꽤나 잘나가는 미모여서 추근거리는 남자가 끊이질 않았었거든요. 남편이요? 그런 자가 어디 남편이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뭐라고요? 바람이요? 글쎄요. 그게 과연 바람이라 할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포의의 사귐

    조선어로 ‘포의’라고 하면 벼슬살이하지 않는 재야의 선비란 뜻 이외에도 절의를 숭상하는 기개 있는 남자라는 의미까지 담긴 표현이다. 초옥 씨는 스스로를 포의로 여겨 여염집 여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길가에서 추파를 던지는 사내들을 지푸라기 보듯 멸시했다고 한다. 존엄한 가문에서 고급 교양을 익힌 그녀로선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겠지만, 조선 문화의 보수적 풍토 속에선 좀체 상상하기 힘든 인격이 아니었을까?

    “제 몸뚱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제 삶의 근본적 장애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비록 한때 몸종이었지만 이미 속량돼 양인 신분이었고, 그렇다면 학업을 닦아 나랏일에 몸담아도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여자에게 과거 시험을 허락해 줄 일은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강호에는 영웅호걸이 넘칠 테니, 그들과 뜻을 합쳐 대의를 이룰 수 있을 거란 실낱같은 희망마저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처음 황금정 주점에서 만나자마자 그녀가 풍기는 기이한 인력에 이끌려 들어갔던 이유를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난세였습니다.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나 조선의 어려움을 구제할 뜻을 품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선비라 할 수 있습니까? 전 남영위궁에서 자라며 나라 돌아가는 사정을 자못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배우고 익힌 게 있는데 어찌 그걸 버려두고 필부의 삶을 산단 말입니까?”

    죽동 행랑채에서 보내던 빈한한 삶 속에서도 그녀는 남영위궁을 떠나올 때 지니고 온 서책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이해할 길 없던 남편은 더욱 엇나가기만 했다는데, 다행히도 초옥 씨의 재주를 자랑스러워하던 시아버지만이 이웃들 입단속을 하며 며느리 대신 밥도 짓고 청소도 했다. 그러던 차에 충청도에서 온 낯선 손님 하나가 행랑채 옆 서헌에 나타났다.

    “주인집 친척의 친구라는 이 선비였습니다. 과거 준비를 하러 잠시 묵는다고 했습니다. 나이요? 전 그런 걸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에 대한 흥미는 오로지 포의 대 포의로서의 그런 것이었다고 믿었거든요. 40대였던 그분은 심지어 자식 딸린 유부남이었지요. 외모요? 그런 걸 따지지 않았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전 포의의 사귐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 생각보다 훨씬 속물이었던 이 선비는 초옥 씨의 외모에 홀려 그녀 내부에 도사린 웅대한 뜻을 알아챌 리 없었다. 그는 적당히 과거에 통과해 미관말직이라도 받게 되면 저런 예쁜 상것의 아내쯤은 얼마든 첩실로 들일 수 있으리란 미망에 빠져 있었을 터였다.

    “그 정도로 못난 분이었다고 믿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오직 제 미색에만 빠져 제가 한 말들을 귀담아듣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비극이 된 사귐

    이 선비에 대한 초옥 씨의 집착은 순전히 그녀의 오만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환상은 여러 번 깨질 기회가 있었지만 그녀는 결코 현실을 직시하려 들지 않았다.

    “우물가 마당을 지나다가 그분이 전날 소란을 피운 동네 사내들을 매로 다스리는 모습을 봤습니다. 노름판이나 오입질 얘기로만 날을 새우는 사내들만 봐서인지 그 광경이 그렇게 거룩할 수가 없었지요. 마음속으로 흠모의 감정이 일렁여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저 선비님이라면 더불어 시대를 논하고 대의를 맺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꽃을 바쳐 제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우리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상대를 바라보게 됐던 것입니다. 처음엔 그분 학식이 생각보다 얕아 놀랐습니다. 애써 그 정도는 문제 될 것 없다 스스로를 타일렀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제가 채우면 될 일이라 여겼거든요. 하루라도 빨리 과거에 급제해 저 대신 큰 뜻을 세상에 펼치시라 간청하고 간청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저를 보면 욕정을 억누를 길 없어 죽기보다 고통스럽다는 말이었습니다.”

    초옥 씨가 그 단계에서 사귐을 멈췄다면 그녀 인생은 달라졌을까? 크게 달라지진 않았더라도 다른 멋진 조선 사내를 만날 가능성이 더 높아졌으리란 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무튼 그녀는 이해할 길 없는 논리로 자신의 몸을 그런 자에게 바치고야 말았다.

    “포의끼리 우정을 나눌 때 그깟 몸이 뭔 대수란 말입니까? 벗이 내 몸 탓에 고통스럽다면 줘버리면 될 일이라 여겼습니다. 어차피 그분은 남자 몸으로, 전 여자 몸으로 태어났고, 남녀가 서로 느껴 육체를 섞는 건 자연의 순리니까요.”

    둘의 잦은 밀회가 만들어낸 추문이 마침내 남편 귀에 들어가자 모진 폭력이 이어졌다. 남편의 구타와 살해 협박, 시아버지의 회유와 읍소를 모두 견뎌낸 그녀의 용기와 신념은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무엇보다 온 마을 사람들의 조롱 섞인 시선을 꿋꿋이 버텨낸 근성은 남자인 나로서도 경악할 정도라 말할 수 있다.

    “그분과의 사귐을 인정받으려 열 번 이상 자살을 시도했었습니다. 칼로 목을 긋고 우물에 거듭 빠지고 들보에 목을 맸습니다. 그때마다 시아버님께서 기적처럼 살려내시더군요. 왜 죽으려고까지 했냐고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의 의로운 사귐을 증명하려 했던 겁니다. 마침내 시아버님께서 저희들의 만남을 인정해 주시더군요. 남편이요? 그 사람은 아버지와도 의절하고 흥인문 밖에 딴살림을 차렸습니다.”

    주점 응접실에 앉아 담배 연기를 뿜어 샹들리에 쪽으로 올려 보낸 초옥 씨는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나 역시 늘 그렇듯 담담하게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1866년 민궁 가례

    “이 선비님과의 헤어짐은 갑작스러웠습니다. 그분은 과거 공부를 핑계로 친구들과 자주 산사로 올라갔고, 가끔은 지방 친척 집에도 다녀오곤 했습니다. 산사로 올라갈 때면 갖은 음식과 옷가지를 마련해 보냈고, 지방으로 내려가 서헌 방을 비울 때면 오직 그쪽만 바라보며 하루해를 넘겼습니다. 간혹 이 선비님 친구라는 자들이 절 그분의 노리개 정도로 취급하는 말을 건네도 그저 농이려니 무시했지요. 그러던 차에 장중약이라는 선비가 절 심하게 희롱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장중약이라는 인물은 초옥 씨가 빌려 살던 집의 주인이던 장진사의 조카였다. 그는 이 선비와도 교분을 트고 지냈는데, 알고 보니 오래전부터 초옥 씨를 노리고 있던 터였다.

    “그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군요. 이 선비님이 절 자기에게 넘기겠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격분한 저는 더 듣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습니다. 그런데 지방에서 오랜만에 올라온 이 선비님 역시 비슷한 말을 제게 하는 거였습니다. 장중약이란 자가 젊고 잘생긴 데다 재산도 많으니 그와 좋은 인연을 맺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말을 이어가던 초옥 씨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제가 노발대발하자 이 선비님 말이 바뀌긴 했습니다. 자주 한양 집을 비우다 보니 평소 절 탐하던 장중약을 의심하게 됐고, 그 정도 조건이라면 저 역시 그자에게 넘어갔을지도 몰라 한번 떠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분과 쌓아오던 모든 게 부서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옷고름을 풀려는 이 선비님의 얼굴을 때리고야 말았습니다. 대의는 사라졌고 포의의 사귐인 줄 알았던 우리 만남이 실은 미천하고 속된 것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겁니다.”

    헤어진 두 사람은 1866년 민궁 가례 때 우연히 다시 만났다고 했다. 민궁 가례란 조선의 왕 고종과 민비가 올린 혼례를 말한다. 국혼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안국방 운현궁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시아버지와 한양 여기저기 떠돌며 살고 있던 초옥 씨가 여령으로 뽑혀 운현궁에 잡혀와 있었다.

    “여령이란 게 결국 부족한 기생 숫자를 채우려 만든 거였습니다. 한양에 사는 서른 살 미만의 상민 유부녀 가운데 자식 없는 자들을 강제로 징집했지요. 실은 못사는 집 여자들을 착취하는 거였습니다. 예조에 돈을 내고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전 꼼짝없이 잔칫날 노리개 신세로 전락할 위기였습니다. 기녀들 무리에 섞여 가마 안에 앉아 있는데 밖을 지키시던 시아버님께서 갑자기 절 보고 소리치셨습니다. ‘아가야! 빨리 밖으로 나와봐라. 살길이 생긴 것 같다’라고.”

    당시 민비의 먼 친척인 민참봉이란 인물과 사귀고 있던 이 선비는 민씨 집안 위세를 앞세워 기생들과 놀아볼 요량으로 운현궁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때마침 초옥 씨의 시아버지를 멀리서 알아본 그가 화급히 가마 근처로 다가왔던 것이다.

    “민참봉이란 자는 민씨 집안 실세도 뭐도 아니었지만 마침 고향도 왕비와 같은 여흥이었던지라 호기를 부려 절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예조 하급관리들이 벌벌 떨며 절 풀어주더군요. 전 진심으로 이 선비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었는데, 또 그게 영원한 하직 인사가 된 셈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초옥 씨는 어딘가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찬란했던 한 시절의 희비극을 내 앞에서 다 토해내고 나니 무언가 홀가분하고 개운했었는지도 모르겠다. 빙그레 미소를 머금으며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초옥 씨가 그 나이에도 독립투사로 살아남은 이유를 이제 다 알겠군요. 약속한 것처럼 난 절대 당신을 체포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요. 아직 듣고 싶은 얘기가 많이 남아 있소. 물론 그 이야기가 다 끝날 때쯤이면 이 세상은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고.”

    *이 작품은 19세기 한문소설 ‘포의교집’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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