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호

환상극장

글 쓰는 기계 류광억의 존엄한 죽음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3-10-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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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근자에 한양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대신 써주고 돈을 버는 글쟁이를 거벽(巨擘)이라 부른다. 독자 제위들께선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큰 성취를 이룬 대가라는 뜻의 이 단어는 실은 반어로서 지독한 조롱의 뜻을 담고 있으렷다. 세상에 사고팔 수 없는 게 별로 없어진 세태라지만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부심이 바로 절개와 학문에 있을진대, 걸핏하면 서양 오랑캐들이 침노하는 이 난세에 태어난 양반 자제가 글이나 팔며 연명한다는 건 정녕 참기 힘든 수치가 아닐 수 없으리라.

    경상도 합천의 류광억이는 삼남 출신 최고의 거벽으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나 역시 과장에서 가끔 그와 마주치곤 했다. 서로 데면데면 지내던 터에 어느 날 그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됐다. 그가 대신 시험을 치러준 한양 북촌의 어느 대갓집 자제가 마침내 장원급제를 달성해 홍패를 앞세우고 친가를 방문하던 떠들썩한 잔칫날이었다.

    “진짜 장원급제자는 바로 여기 있건만, 도대체 아무도 알은체를 하지 않는구려!”

    으리으리한 북촌 고대광실 안마당 귀퉁이에 차려진 광억의 쓸쓸한 술상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이렇게 말했다.

    “사형께선 뉘시오? 얼굴이 익긴 하오만.”



    잔뜩 경계하는 표정의 광억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어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대처럼 문화를 본관으로 하는 한양의 류춘재라 하오. 뭐 항렬 따질 필요 없소! 내 그런 걸 벗어나 사는 달사(達士)니 말이외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광억은 말없이 술잔만 입에 가져갔다. 호기심을 자제 못 한 나는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나야 뭐 한양 출신에 집안도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는 팔자이니 비록 낙방이 다반사여도 견딜 만하고 외려 즐길 수도 있겠소만, 그대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한번 올라오려면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 분명한데, 이제 스스로를 위해 실력을 발휘해 급제해 버리는 게 어떻겠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오.”

    나를 한참 쏘아보던 광억은 벌떡 일어서더니 본채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청지기 하나가 급히 다가가 광억에게 엽전 꾸러미를 건넸다. 다시 내 옆을 스쳐 대문을 향하던 그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향시 일정에 맞춰 내려가야 해서 이만 실례하겠소. 내년 봄 성균관 과장에서 또 만납시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호젓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음 인연을 기약했건만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합천으로 내려간 몇 달 뒤 광억이 홀연 자살했기 때문이다.

    거벽의 조건

    낙방 거사들과 어울려 한양도성 홍등가를 전전하던 나는 술 잘 마시기로 치자면 장원을 열 번이라도 했을 서촌 장동 김문의 골칫덩이 김문교로부터 희한한 얘기를 듣고서는 이미 죽은 류광억의 삶과 거듭 조우했으렷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우리 아버님 잘 알지? 예판으로 퇴임하신 거 말이야. 이제 더 참지 못 하시겠다는 거야. 거벽이라도 사서 날 급제시키고야 말 태세이셔! 해서 말인데, 춘재 자네 죽은 류광억이와 말을 섞어봤다고 하지 않았나? 혹시 삼남에서 실력 좋은 거벽 하나 소개해 줄 수 있겠나? 내 먼저 환로에 들어가서 자네 올 길을 잘 닦아놓을 테니.”

    비록 내 술친구로서는 그 이상이 없을 좋은 벗이었으나 김문교는 절대 벼슬살이에 나서면 안 될 자였다. 당장이야 흥청망청 젊음을 탕진하고 있었지만 문교 같은 위인이 힘을 가지면 무서운 이기심과 교만으로 희대의 탐관오리가 될 게 뻔했다. 그 정도의 분별력은 내게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술자리의 든든한 물주 하나가 사라지는 것도 썩 마뜩지 않았음을 독자들께 솔직히 고백하는 바이다. 해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하필 왜 삼남인가? 한양도성 안에 실력은 있지만 번번이 낙방하는 준재가 어디 한둘이던가?”

    장탄식을 내뱉은 문교가 술기운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뗐다.

    “나도 아버님께 그리 말했네! 실은 남촌에 어머님께서 몰래 물색해 둔 녀석도 하나 있긴 있어.”

    “그럼 그자를 활용하시게! 자네 집안이 뭐가 두려운가?”

    “물론 그렇긴 하지! 한데 아버님께선 체통을 중시하시네. 우리 가문이 어디 돈만 많은 평범한 경화세족인가? 어이쿠, 미안하네! 자네를 모욕할 마음은 없었어. 그래도 이해하지? 우리 집안이야말로 곧 조선이고 위태로운 왕가를 보필하는 척추가 아니겠나? 그렇기 때문에 남들 하듯이 할 수 없다는 그런 말일세!”

    “남들은 어찌하는데?”

    “자네 정녕 모른 척하긴가? 거벽들이 과장에서 먹 갈아주는 시종으로 위장해 답안을 줄줄 불러주지 않던가? 감독관들이 다 알면서도 일부러 곁에 다가오지도 않고 말일세! 우리에겐 태평성대도 이런 태평성대가 따로 없어!”

    “그랬구먼! 나야 애초 시늉만 내려고 과장에 들어갔다 바로 나오곤 하질 않았겠나? 알 도리가 없지. 그리고 류광억과는 자네 친척 대과 급제하던 날 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한번 만나 안면을 튼 게 전부일세. 한데 꼭 삼남이어야 하는 것인가?”

    “한양 거벽들은 얼굴이 잘 알려져 있잖아? 까짓 그런 일로 무슨 일이 생기겠냐만 남들 눈이 그렇잖은가? 돈이 더 들더라도 삼남 사람을 데려다 쓰면 감쪽같아서 말도 탈도 덜 날 게 아닌가?”

    그날 나는 크게 취한 데다 문교 같은 뻔뻔한 위인의 앞날을 내 힘으로 막아보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상념에 빠져 몸소 광억의 고향 합천에 내려가 요즘 잘나가는 거벽을 물색해 주겠다는 거짓 약조를 하고야 말았다. 실은 문교 부친으로부터 여비나 두둑이 챙겨 영남 유람이나 하고 돌아올 요량이었다.

    과천 고을 봇짐주점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오려면 밀양과 청도를 지나 대구와 상주를 거쳐 조령을 넘었다. 이렇게 중부를 관통해 경기 이천과 광주를 거치면 마침내 과천현에 이르렀고 대부분은 남태령을 넘은 뒤 한강을 건넜다. 대충 열나흘이 소요되는 긴 여정이었다. 나는 이 길을 거꾸로 가야 했다.

    문교 부친이 붙여주겠다는 몸종을 애써 거절한 나는 혈혈단신 생전 처음으로 삼남 관광에 나섰다. 말이 몸종이지 결국엔 감시자가 됐을 하인 대신 나는 노새 한 마리를 요구해 잔뜩 짐을 실었다. 드디어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을 도사가 돼 천하 주유를 한다는 기분에 달뜬 나머지 나는 세상 무서운 줄을 까맣게 까먹고 있었다.

    여우가 많아 여싯고개라 불린 남태령을 넘어 과천고을 객점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객점 뒤채에 여장을 풀고 노새에게 먹이를 준 뒤 객사 주인이 운영하는 주점에 들어서자 꽤 많은 손님이 이미 들어차 있었다. 위풍당당하게 술을 주문한 나는 호기롭게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한양 사대문 안에서 누리던 호사를 여기라고 왜 못 누리겠냐는 자만심에 들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숙취에 몸서리를 치며 객사에서 일어났을 때, 비록 희미했지만 전날 기억이 어슴푸레 떠오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노새를 찾았다. 노새는 물론 노새 옆에 부려놓은 짐까지 보이지 않았다. 울상이 된 내게 주인이 천천히 다가와 속삭였다.

    “그러게 내 뭐랬소? 얌전한 양반 나리가 무슨 노름을 하신다고. 쯧쯧. 누누이 말렸건만 도대체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셨어!”

    망연자실해진 나는 허리춤 안쪽에 실로 꿰매둔 전대를 보전한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나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도로 한양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또 했다. 그때 객사 앞을 지나던 한 영남 선비가 주점에 들어서서 물 한 사발을 얻어먹고는 살며시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어디서 오셨소? 난 상주에서 온 박희량이라 하오. 혹시 남태령을 함께 넘으시겠소? 혼자 가려니 좀 으스스해서.”

    허탈하게 웃고 나서 내 여정은 반대쪽이라고 대답한 나는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러자 희량이 멀리 서 있는 주인을 힐끗 노려보고 속삭였다.

    “이제 보니 한양 숙맥이시로군! 이 객점은 우리 영남 사림들 사이에 꽤 유명한 곳이라오. 순진한 지방 선비들을 골탕 먹이고 지닌 봇짐까지 싹 털어가서 봇짐주점이라 불린다오.”

    희량의 말을 듣는 순간, 놀랐던 내 마음이 차츰 진정되었다. 차라리 사기꾼들에게 속수무책 당했다는 것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우매함을 의심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나는 여정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다.

    “앞으론 단단히 조심하시고, 합천이라 하셨소? 거기까지 무사히 당도하시길 빌겠소.”

    헤어지기 직전 희량이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그에게 이번엔 꼭 급제하여 이 고단한 길을 더는 다니지 말라고 축원해 주었다.

    타살 의혹

    문경새재를 넘기까지 곱게 자란 한양 선비인 내가 겪은 고초를 독자 제위들께선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렷다. 이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으려는 것은 류광억의 자취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느낀 반가움이 그 모두를 합친 것보다 비할 바 없이 컸기 때문이다.

    새재 관문을 모두 통과하고 상주 여곽에 묵었던 날, 여곽 주인 변 씨는 한양 선비가 합천을 찾는 이유를 몹시 알고 싶어 했다. 대충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점점 표정이 어두워진 변 씨가 의외의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류광억이는 과거길인 여길 자주 지나다녀서 잘 알지요. 다들 광억이 죽음을 자살이라 하지만은 쇤네 생각엔 실은 타살입니다.”

    충격에 빠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영남에서 광억이 모르면 양반도 아닙니다. 그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지요. 이 지역 향시에서도 광억이 도움 안 받은 대갓집이 없을 정도라면 말 다한 것 아닙니까?”

    고개를 끄덕인 내가 천천히 질문을 던졌다.

    “결국 류 선비 덕을 본 집이 영남에 즐비했다는 건데, 그렇다면 죽일 이유가 없지 않소? 아무리 모진 자라도 딱히 얻을 게 없는데 어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단 말이오?”

    “어찌 얻을 게 없습니까? 제 자식을 부정하게 향시에 붙인 집안들이 어디 그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한양으로 진출해 거벽 소리를 들었잖습니까? 그건 선비님께서 저보다 잘 아시겠고. 아무튼 이 객사에 묵을 때마다 빨리 거벽 노릇 그만둬야겠다며 불안해하곤 했단 말입니다.”

    듣자하니 변 씨 말이 또한 그럴듯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럼 영남 향반들과 한양 세도가들이 모의해 류 선비를 살해라도 했다는 거요? 그런 소문이 영남에 돌고 있는 거요?”

    팔짱을 낀 변 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광억이가 자살을 한 데엔 필시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누군가가 있을 거란 뜻입니다. 선비님께선 그와 성도 같으시고 또 애도의 마음으로 합천까지 가신다기에 울컥한 마음으로 그만 속마음을 떠들어봤습니다. 나머지는 합천 가셔서 직접 수소문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달만 쳐다보았다. 무릎을 세워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는 변 씨에게 내가 넌지시 또 물었다.

    “결국 돈 때문이었겠지?”

    도로 주저앉은 변 씨가 울먹이며 속삭였다.

    “광억이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말이 양반이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집안 후손이라도 돈이 없으면 차라리 서출만도 못한 게 요즘 조선 팔도 인심입니다. 쇤네도 같은 처지이지요. 광억이가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게 안타깝고도 이상하셨다고요? 돈에 굶주리면 다른 꿈을 꿀 겨를이 아예 없게 되는 탓 아니었겠습니까?”

    말을 마친 변 씨는 마치 포수를 피하는 호랑이처럼 서둘러 안채로 멀어져 갔다.

    합천 고을 원의 증언

    합천에 도착해 여장을 푼 나는 고을 원이 우리 집안의 먼 인척이라는 사실을 알고 쾌재를 불렀다. 인편을 통해 만나자는 서찰을 넣어두고 주변 명소를 탐방하던 와중에 마침내 원으로부터 답신이 당도해 그를 대면하게 됐던 것이렷다.

    “자네 어머님 정정하시다는 소식은 내 듣고 있지. 류광억이 말인데, 내가 직접 초검에 참여했었어. 헛간에서 목을 매 자결했는데 말이지. 어떤 다른 흉상도 없더란 거지. 타살일 리가 없어.”

    인척이긴 하나 집안 위세로 치자면 한참 아래인 원은 비굴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의 불안을 덜어줄 겸 나는 최대한 온건한 말투로 이렇게 속삭였다.

    “내 과장에서 자주 만난 친구로서 그의 서툰 죽음이 조금 궁금해서 이런다고만 여겨주시오, 결코 무슨 의심이 들어 하는 말은 아니니까.”

    얼굴 주름이 조금 펴진 원이 다소곳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우리 사이에 말인데, 혹시 어사로 여기 내려온 겐가? 그렇다면 한양에 내 얘길 부디 잘 올려주게. 내 비록 능력은 부족하나 자네 어머님 은혜를 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어! 우리 넝쿨처럼 뒤얽혀서 말이지, 자네 집안과 우리 집안, 어울려 다 함께 잘 살아보세!”

    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고 대답했다.

    “초시 한 번 빼곤 과거에 붙은 적 없는 내가 무슨 수로 어사가 되었겠소?”

    “허허! 자네 집안 정도라면 류광억이 같은 자 열 명은 족히 사고도 남질 않나? 어사라면 정녕 그리 해주시고, 아니라도 언젠간 조정 내직에 들지 않으시겠는가? 먼 인척이라고 잊지 마시고 항상 염두에 둬달라는 뭐 그런 부탁일세!”

    성정 자체가 관직과 맞지 않아 평생 자유자재한 몸으로 즐기다 갈 마음이었던 나로선 그의 부탁이 한편 부담스럽고 또 한편으론 계면쩍기도 했다. 입맛을 쩍 다시고 내가 다시 입을 뗐다.

    “그건 그렇고, 류광억이 자살한 데엔 뭔가 뚜렷한 이유가 있었을 게 아니요? 가정사라거나 빚이 많았다거나.”

    나를 한참 뚫어져라 바라보던 원이 침을 꼴깍 삼키더니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실은 이건 비밀이네만, 최근 한양에서 내려온 경시관이 경솔한 짓을 저지르긴 했었네.”

    “경솔? 경솔이라. 지방 향시를 관할하라고 한양에서 내려보낸 경시관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일을 저지른 건 아니고. 영남 향시에 류광억이 간여한다는 건 소나 돼지가 아닌 바에야 모를 자가 없지 않겠나? 여긴 그래. 한데 경시관이 제 손으로 합격자를 뽑아놓고는 경상감사에게 류광억이를 대구 감영으로 압송하라 했다지 뭔가.”

    “경상감사나 이곳 양반들 모두 한통속일 텐데, 왜 그런 무리한 짓을?”

    “그러게 말이야! 어차피 경시관 자신도 거벽 도움으로 급제한 자야. 감사하고도 오랜 벗이었고. 그런데도 그랬단 말이거든. 아무튼 그 소식을 들은 광억이 며칠을 끙끙 앓다가 그리 된 거지. 자세한 건 나보다 경상감사가 더 잘 알 거야.”

    경시관이 벌인 내기

    류광억의 죽음에 대한 나의 유난한 호기심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저 그런 괜찮은 인재가 속절없이 목숨을 끊는 건 조금 부당하다 느꼈을 뿐이었고, 또 한양의 너저분한 속물들에게 질린 판에 잠시 열중할 다른 일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부산에 들러 실컷 향락을 일삼은 뒤 귀경하려 할 때, 내 뇌리에는 그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하여 대구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경상감영에 들르고 만 것이렷다.

    “류광억이는 자존심 탓에 자살한 걸세. 그러니 자네 더 알려들지 말게.”

    합천 고을 원의 외삼촌이자 역시 내 먼 인척이랄 수 있는 경상감사는 단호하게 말하고 콧수염을 말아 올렸다. 지방 사또와는 비할 수 없을 위엄이 느껴졌다. 나는 문교 집안의 위세를 등에 업어보기로 작정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실은 제 벗인 김문교의 부탁으로 이리 여쭙는 것입니다. 그 집안에서 이 사안에 관심이 많거든요! 광억이 도움을 꽤 받았다던가? 아무튼 잘 알아보고 오라는 청이 있었습니다만.”

    싸늘하던 감사의 표정은 곧바로 나긋나긋한 봄바람이나 또는 오래 못 만난 한양 대감을 맞이하는 평양 기녀의 아양 섞인 미소에 버금갈 그런 얼굴로 돌변했다. 갑자기 달변이 된 그가 이렇게 술술 부는 것이었다.

    “실은 나도 화가 많이 났었네! 오해는 말고 들어주겠나? 지난번에 경시관으로 내려온 그 봉대규란 자, 내 벗이었어. 한데 감영에 오자마자 대뜸 영남에 쓸 만한 인재가 있겠냐는 거야. 슬슬 내 부화를 돋우더군, 해서 응시자라면 몰라도 한양 거벽으로 소문난 합천 류광억이가 있다 내 말했지. 그랬더니 그 솜씨라면 자기 발밑이라는 거야. 답안지 가운데 광억이 걸 금방 골라낼 수 있다더군. 해서 말이야. 우리가 내기를 했어.”

    “내기요? 무슨 내기를?”

    “대규가 광억이가 낸 답지를 찾아내면 내가 백 냥을 주기로 했어. 틀리면 대규가 하루 종일 내 몸종 노릇을 하기로 했고. 뭐 우리가 평생 그렇게 놀아왔네. 아무튼 광억이가 남을 위해 대신 써주는 답안과 자기 것으로 제출한 답안을 구별해 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거든. 광억이 솜씨가 본디 그래.”

    “류광억이가 자기 답안도 낸단 말입니까? 그건 금시초문입니다만.”

    “안 낼 도리가 있나? 향시에선 먹 갈아주는 시종을 과장에 들일 수가 없네. 당연히 응시자 수와 답안지 수가 똑같아야 하거든.”

    “그렇군요. 그럼 그 내기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니, 전혀! 내가 이겼거든. 문제라고 하면 대규 녀석에게 있었지. 뒤끝이 좀 있거든. 1등에서 3등까지 광억이 답안이라 지목한 것들이 죄 광억이가 대신 써준 것들이었단 말이거든. 대규가 심통이 단단히 났는지 광억이를 경상감영으로 압송해 달라는 거야. 아, 물론 처벌할 생각은 하등 없었지. 그냥 혼이나 좀 내주려던 거였어. 내가 그 말을 따른 건, 그래 나도 잘못은 없지 않네. 하지만 이 모든 책임은 대규에게 있음이 명백하네!”

    길게 한숨을 내쉰 내가 천천히 물었다.

    “그 소식을 들은 광억이 지레 겁을 먹고 자결한 것이로군요?”

    다 대답했다.

    “꼭 그렇진 않아. 광억이 그 녀석도 참 졸렬해! 내가 다른 인편으로 분명히 말해뒀거든. 절대 처벌할 마음 없으니 그저 경시관한테 잠시 놀림이나 받고 내려가라고. 그게 뭐 어때서? 글이야 잘하지만 제깟 게 그래 봐야 미천한 향반 주제 아니던가? 한양에서 내려온 경시관을 어찌 감히 무시하고 자결 따위를 한담. 내 속이 터졌지 뭔가.”

    그날 대구에서 하루 묵는 내내 나는 류광억이 택한 죽음의 의미에 대해 더욱 알 수 없게 돼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거벽

    이제 이글을 마치고자 하는데, 혹 독자 제위께선 이후 내 행적이 궁금하실 수도 있으렷다. 한양에 돌아온 나는 문교 부친에게 혹독하게 야단을 맞고 장동 근처엔 발도 붙일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영남에서 질펀하게 놀고 온 행각이 밝혀진 데다 광억이를 대신할 삼남의 거벽을 물색하지도 못한 탓이었다.

    대신 나는 나 스스로 문교의 거벽이 돼주기로 결심하고 과거에 적합한 글 짓는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그게 생각보다 손쉬운 잔재주란 걸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 내 덕으로 문교 놈이 대과에 급제했으니 말이다. 희대의 탐관오리가 돼 있는 문교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후회가 밀려들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조정엔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이 왕조는 오래갈 것 같지도 않노니! 대신 광억이 죽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철저히 남을 위해 글을 쓰는 삶일지라도 누군가의 놀림감만은 되지 않으리란 결기는 가지며 살고자 한다.

    *이 작품은 이옥의 ‘류광억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환상극장’은 이번 호가 마지막회입니다.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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