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고무신 광고 속 숨은 이야기

[동아로 보는 카툰 100년]

  • 황승경 문화칼럼니스트·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24-09-0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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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북선 고무신 만화 광고, 상상력 증폭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거북선 고무신’ 광고. [동아DB]

    ‘신동아’ 창간호에 실린 ‘거북선 고무신’ 광고. [동아DB]

    혁신적인 신문물 고무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은 급성장한 독점자본주의로 조선의 경제를 삼켜버렸다. 1920년대 후반은 세계적으로 경제구조의 불안정성이 커졌지만, 인구 30만 도시 경성(서울)에는 미니카이(1929), 조지아(1929), 미쓰코시(1930), 화신(1932) 같은 백화점이 우후죽순 생기며 물질적 욕망을 달콤하게 자극했다. 경성 곳곳에는 서양식 건물과 서양 의복을 입은 청년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1930년대 들어 쌀농사는 풍년이었지만 쌀값은 대폭락해 조선인들은 생활은 어려웠지만 고급 요릿집을 드나들며 유흥에 빠진 위정자들의 모습은 극명히 대비된다. 93년 전 ‘조선의 표정’ 한 컷 이미지는 이러한 시대상을 경험하는 동시대 독자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으리라.

    신동아는 판형과 광고면수에 따라 매호 110~350면을 발행했다. 보통 50편에서 80편의 기사가 실렸지만 30전이라는 저렴한 구매가를 유지했다. 1920년부터 7년간 발행한 월간지 ‘개벽’의 가격이 매호 40~50전이었음을 감안하면 신동아의 ‘가성비’는 뛰어났다. 이는 신동아가 동아일보 잡지부 소속이기에 가능했다. 일간지 기사와 연결되는 탄탄하고 심원한 콘텐츠와 광고가 뒷받침됐기에 ‘민족문화 창달의 망라주의’가 현실화될 수 있었다. 또한 가격인하의 일등공신은 광고 유치였다. 창간호의 경우에는 23면에 35개의 광고를 게재했는데, 광고를 보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창간호 광고에선 각기 다른 3개 회사의 고무신 광고가 다양한 크기로 실렸다. 일률적인 신문 광고와 달리 크기가 각기 다른 잡지광고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인 만화적 특성을 적절히 접목했다.

    구한말 서양의 신문물 중 고무신은 가장 혁신적인 생필품이었다. 1919년 친일파 이하영이 최초로 고무신 회사인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질기고 방수가 되는 고무신은 순식간에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 됐고, 1921년 1년 동안 경성에서만 고무신 88만 켤레가 팔렸다. 이 중 일본 수입품이 70만 켤레, 나머지 18만 켤레는 조선 제조품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8월 21일자). 이후 수요가 급증하자 조선의 사업가들은 규제가 적고 소규모 자본으로 창업 가능한 고무공장을 앞다투어 설립했다. 경성, 평양, 부산 등에 밀집한 고무공장은 대부분 조선인 자본으로 운영됐는데, 그에 따른 생산 과잉과 판매 경쟁은 날로 심화됐다.

    왕실에서 신는다고 홍보해 막대한 이윤을 남겼던 이하영의 ㈜대륙고무는 자사 고무신과 유사한 상표를 붙여 판매한 평양서선고무공장을 1925년 상표법 위반으로 고소해 승소하는 일도 있었다(동아일보 1927년 3월 5일자 ‘상표위반엄계 부정경쟁도 금지’). 고무신은 성능(?)은 다를지라도 디자인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유사 상표권 침해 피해도 컸다. 결국은 차별화된 디자인이었다. 경성 동대문에 위치한 서울고무주식회사는 유사 제품과 구분되는 거북선 로고와 밑창 물결무늬를 트레이드마크 삼아 시장에 내놓았다. 광고도 마찬가지. ‘고무신은 거북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재미있게 시선을 집중시키며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전달하고 싶은 말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한 1931년 고무신 광고에는 이러한 기업들의 노고가 묻어난다.

    조선 여공들은 강압적인 작업 분위기에서 하루 15시간 노동을 하면서 기본적 인권보장은커녕 성적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다. 여기에 1930년 경제대공황은 고무 신업계를 강타한다.

    광고에 숨겨진 체공녀 이야기

    당시 조선에서 공장노동자 평균임금은 일본인 성년 남공 2원32전, 여공이 1원1전인 데 비해 조선인 남공은 1원, 여공은 59전이었다(유태철·‘일제하 국민생활수집 일제하의 민족생활사’·민중서관·1971). 생고무 원료 가격이 급등하자 일제와 결탁한 평양 고무 공장 자본가들은 17% 임금 삭감을 통보한다. 결국 터질 게 터졌다. 고무업계는 식민지 시절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노동운동이 일어난 현장이 됐다.

    지난 3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판소리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 공연 모습. [ⓒFOTOBEE 양동민]

    지난 3월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판소리 소리극 ‘체공녀 강주룡’ 공연 모습. [ⓒFOTOBEE 양동민]

    1931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평양 을밀대 체공녀’ 사진(왼쪽)과 전날 실린 기사. [동아DB]

    1931년 5월 3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평양 을밀대 체공녀’ 사진(왼쪽)과 전날 실린 기사. [동아DB]

    ‌1930년 8월 평양시내 10개 고무공장 1800여 명(평양 전체 고무직공은 2300명)은 총파업을 단행한다. 결연한 의지로 시작한 쟁의였지만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200명의 직공이 해고됐고, 결사반대하던 임금 삭감이 단행된다. 이듬해인 1931년에는 재차 임금을 삭감하는 공장도 있었다. 이에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여공 47명은 단식도 불사하며 투쟁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5월 29일 저녁, 평원고무공장 여공 강주룡은 광목천을 찢어 만든 줄을 타고 을밀대 2층 누각에 오른다. 장장 9시간 동안 목청껏 임금 원상 복귀와 처우 개선을 외쳤다. 그 모습은 ‘평양 을밀대에 체공녀(滯空女·공중에 떠 있는 여자) 돌현’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다음 날 ‘을밀대에 앉은 평원 고무여직공’이라는 설명이 달린 사진이 각각 지면에 실렸다(동아일보 1931년 5월 30일, 31일자). 이틀에 걸친 동아일보 보도로 사측은 결국 임금 삭감을 철회했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중 강주룡을 제외한 절반이 복직된다.

    남편과 사별한 여공 강주룡을 보고 과부 암탉이 지붕 위에 올랐다며 혀를 차기도 했지만, 강주룡은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고공농성을 감행한 여장부였다. 결연한 기개가 감지되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록된 강주룡의 이야기는 소설(‘체공녀 강주룡’)과 판소리 소리극 등으로 재탄생했다. 강주룡의 이야기는 한국사 교과서(두산동아, 비상교육, 천재교육, 지학사 교과서 2014)에서도 다룬다.

    신동아 1932년 6월호에서는 당시 고무공장 여공들의 생생한 작업환경을 엿볼 수 있다. 고무공장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빽빽하게 앉아 마주보며 작업을 하는 시스템이라 업무시간에 여공들 간 소통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는 1930년대 고무공장에서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유 중 하나다.

    고무여공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고무 찌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가마 문이 열리자 130도의 뜨거운 화기 속에 쪄진 검고 흰 고무신들이 지독한 냄새를 피우며 쏟아진다. 그 옆에서 온종일 이 냄새를 맡으며 휘발유를 온몸에 발라가며 여공들은 일을 하고 있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지 않나요?”

    “아뇨. 도무지 모릅니다. 한 이틀씩 쉬다가 시작하면 조금 어떤가 하지만요.”

    롤러를 잡고 고무신 바닥을 누르는 그의 얼굴은 힘이 몹시 드는지 금세 불거지며 팔에 힘줄이 굵어진다. 여자신은 만들기가 좀 힘들어도 남자고무신은 만들기가 퍽 힘들다고 한다. 옆에서는 어린애들이 젖을 달라고 보챈다.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루에 팔십전 그나마 봄과 가을에는 일거리 얻기가 힘이 든다고 한다.

    -신동아 1932년 6월호-

    이렇듯 동아 100년의 카툰과 사진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송글송글 맺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상상력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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