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선생의 고택이 있다. 충청도에 산재한 많은 명택 가운데서 제일 먼저 추사 고택을 찾은 이유는 그가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예를 통하여 조선 후기 예술의 정수를 국제사회에 보여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표하는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한다면, 조선 후기의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추사 김정희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영·정조시대 조선 후기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이른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이끌던 세력 중심에 추사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 시대의 학문을 논할 때 정다산을 비켜갈 수 없듯이, 예술을 논하려면 김추사를 비켜갈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서예관(書藝觀)을 피력한 바 있다.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書卷氣)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
명필은 단순히 글씨 연습만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많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인문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관점이다. 문자향과 서권기는 그러한 인문적 교양을 함축한 말이다.
한자 문화권의 3대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는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은 공통적으로 인문학적 지층이 두터워야 함은 물론이다. 온축된 학문적 바탕 없이 테크닉만 가지고는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시서화 삼절 가운데서도 서(書) 부분이 특히 그렇지 않나 싶다. 시가 읽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림(畵)은 보는 예술이라는 측면이 강하고, 글씨(書)는 양쪽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서예라고 하는 장르는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를 읽는 예술인 동시에 글씨마다의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면서 감상하는 예술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서예가 시와 그림 양쪽의 중도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보니, 한자문화권에서 상대적으로 시나 그림보다도 더욱 존중되었던 예술세계다.
아무튼 추사가 창안한 ‘추사체’ 서예는 서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文字)의 향(香)이라고 하는 감성의 향기를 아울러 갖추었다는 점에서 한·중·일 삼국의 지식인 사회에 크게 반향을 일으켰다고 여겨진다. 요즈음 바둑의 천재 이창호가 천하제일의 끝내기로 삼국을 주름잡고 있는 것처럼, 19세기에는 김정희의 추사체가 그 문자향과 서권기의 품격으로 동양 삼국을 한바탕 풍미하였던 것이다.
충청도 양반론의 근거
필자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을 답사하는 이유 역시 추사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배출한 그 풍광과 토양이 어떠했나를 추적하기 위해서다.
과연 어떠한 집터였기에 이런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비범한 터에서 비범한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 감여가(堪輿家)의 지론인만큼 그 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검토할 사항은 추사가 충청도 양반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구한말의 지식인 황현(黃玹, 1855∼1910년)이 “평양은 기생 피해가 크고, 충청도는 양반 피해가 크고, 전주는 아전 피해가 크다”고 지적했듯이, 충청도는 양반이 하도 많아서 양반의 피해를 운운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는가? 충청도가 양반 살기에 적당했던 인문지리적 조건은 무엇인가? ‘택리지’에서는 충청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남쪽의 반은 차령 남쪽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가깝고, 반은 차령 북편에 있어 경기도와 이웃이다. 물산은 영남·호남에 미치지 못하나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며, 서울 남쪽에 가까운 위치여서 사대부들이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 대를 서울에 사는 집으로서 이 도에다 전답과 주택을 마련하여 생활의 근본되는 곳으로 만들지 않은 집이 없다. 또 서울과 가까워서 풍속에 심한 차이가 없으므로 터를 고르면 가장 살 만하고, 그중에서도 내포(內浦)가 제일 좋은 곳이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지세가 한모퉁이에 멀리 떨어져 있고, 또 큰 길목이 아니므로 임진년(임진왜란)과 병자년(병자호란) 두 차례의 난리에도 여기에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 또 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충청도에 양반이 많이 살았던 이유를 정리하면, 우선 정치권력이 집중된 서울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교통의 이점과, 그 다음으로는 산천이 평평하고 예쁘다는 풍수적인 장점을 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내포(內浦)라는 지역이 난리를 겪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금과 생선이 풍부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풍수적으로 볼 때 충청도는 높고 가파른 산들이 다른 도에 비해서 현저하게 적다. 대구 팔공산이나 영암의 월출산을 둘러볼 때 다가오는 위압감이나 야성적인 느낌을 주는 산들이 충청도엔 거의 없다. 돌산보다는 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야산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흔히 충청도 산세의 부드러움을 표현할 때 “개떡을 엎어놓은 것 같다”거나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고들 한다. 그만큼 야트막한 둔덕 같은 산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심리적인 안정감과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붉은 석양이 서산에 질 무렵 길가에 차를 대놓고 야트막한 둔덕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충청도 시골집들의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흰 연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고요한 충만감이 가슴에 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살기가 전혀 없는 추사 고택
추사고택이 자리잡고 있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주변의 산세 역시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은’ 충청도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추사고택은 솜이불같이 포근한 기운을 풍기는 야트막한 둔덕들이 둘러싸고 있다. 주변 사방 어디를 보아도 아주 부드러운 속살 같은 이불뿐이요, 쇠붙이 같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산이 전혀 없다.
집터 앞의 안산(案山)은 마치 누에가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듯한 야산일 뿐만 아니라, 청룡자락과 백호자락을 둘러보아도 높은 산이 없다. 그런가 하면 집 뒤의 내룡(來龍)을 보아도 해발 100m도 안되는 야산이라서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한마디로 추사고택 주변 산세의 특징은 살기(殺氣)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살기란 무엇인가? 바위나 암벽이 드러나 있는 험한 산에서 방사되는 기(氣)를 일러 살기라고 한다.
이를 쉽게 풀어보기로 하자. 지구 자체가 실은 하나의 거대한 자석(磁石)이며, 여기서 방사되는 자력 성분을 띤 일종의 에너지를 지자기(地磁氣)라고 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 지구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이 에너지를 풍수가에서는 지기(地氣)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자기는 흙으로 된 토산(土山)에 비해 바위로 된, 또는 바위나 암벽이 노출된 산에서 강하게 발산된다. 과식하면 몸에 해롭듯이 에너지가 필요 이상으로 강하면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바위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소화 흡수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서는 지기가 방사되고 있기 때문에 해를 미친다고 보고 이런 부작용을 살기라 하는 것이다. 물론 집터를 잡을 때 이러한 산세를 피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지기가 강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돌파해야 하는 무장(武將)들은 오히려 강한 곳을 좋아한다. 살기가 있는 곳에서 담력과 기백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화랑도들이 전국의 명산(名山)을 돌아다니면서 심신을 연마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명산이란 대개 바위산을 가리킨다. 김유신 장군이 칼로 바위를 베었다는 고사가 전해지는 경주 근처 단석사(斷石寺)만 하더라도 짱짱한 화강암으로 뭉친 터다.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고승들도 강한 지기가 뿜어나오는 곳을 선호한다. 검선일치(劍禪一致)의 이치에서다. 선승(禪僧)이 되려면 검객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실제로 선승과 검객은 통하는 면이 있다. 그 증거로 사찰에 가면 가끔 ‘심검당(尋劍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글자 그대로 ‘검(칼)을 찾는 방’이라는 뜻이다. 왜 산 속의 절간에서 칼을 찾아야만 하는가? 칼이 있어야 단도직입(單刀直入), 일도양단(一刀兩斷)으로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칼은 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지혜의 칼을 의미한다.
유명한 고승이 머물렀던 우리나라 불교사찰의 터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부분 바위산에 둘러싸여 있거나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산의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 월출산 도갑사, 북한산 망월사, 관악산 연주암, 삼각산 도선사, 대둔산 태고사 등이 모두 그렇다. 그것도 한결같이 아주 험한 바위산들이다.
이렇게 바위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추사고택만이 지닌 차별성을 파악할 수 있다. 야트막한 둔덕뿐이라서 주변 사방에 살기가 보이지 않는 산세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선호하던 지역이었다. 양반들이 좋아하던 산세의 모범답안이 이곳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시대는 성리학(性理學)의 시대였고, 조선의 성리학은 무(武)보다는 문(文)을 지향하던 신념체계다. 조선 초기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한 이래 쿠데타 가능성이 있는 무신들을 은근히 배제하던 분위기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조의 당파싸움이란 것도 그 성격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문신(文臣)들이 서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싸움 방식이었다.
문과 무를 놓고 볼 때 ‘이불을 덮어놓은 것과 같은’ 산세가 바로 문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바위나 암벽으로 위압감을 주는 산세는 무를 상징한다. 그래서 지나치리만큼 숭문주의에 빠진 조선조 양반사회에서는 양택과 음택을 막론하고 터 주변에 바위산이 보이는 곳은 흠이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맥락에서 추사고택은 바위산의 무기(武氣)가 보이지 않고 야트막한 둔덕의 문기(文氣)만 가득한 무릉도원(武陵桃源)이다. 애초 무릉도원의 말뜻이 무를 차단하는 큰 언덕이요, 칼이 없는 그곳에 복사꽃 만발한 복숭아 동산을 가리킨다. 전쟁과 격절된 채 평화가 흘러넘치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바로 이런 곳에서 문과 서를 애호한 나머지 문자향, 서권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추사고택이 무릉도원이라면 혹시 복숭아밭이 있나 찾아보았으나, 늦가을의 빨간 사과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사과밭이 여기저기 많다. 이 지역이 사과가 잘 되는가 보다. 꿩 대신 닭이라고 무릉사과밭도 괜찮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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