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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18세 이세돌이 빚어내는 盤上의 질풍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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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한 명의 바둑 천재가 반상(盤上)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다. 2월 말 열린 LG배 결승에서 거함 이창호(李昌鎬)를 2판 연속 격침시킨 이세돌(李世乭) 3단이 그 주인공. 중학교 3년 중퇴학력의 18세 소년, 이세돌은 과연 ‘포스트 이창호’의 대안(代案)이 될 수 있을까.
지난 2월26, 28일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1, 2국에서 세계최강자 이창호 9단을 연파해 세계타이틀 획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이세돌 3단을 만났다.

오후 3시경 한국기원 근처의 찻집. “점심식사를 겸해 자연스럽게 이야기나 좀 나누려고 했는데 딱딱한 인터뷰가 돼 버리겠다”고 말하자 소년은 씩 웃으며 자리에 앉는다. 괜찮다는 뜻이겠지?

짧은 머리 때문일까. 아니면 이마 양옆이며 두 뺨에 언뜻언뜻 보이는 보송보송한 솜털 때문일까. 4월2일이면 만 18세가 된다는 소년의 얼굴은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인다. 잡티 없이 반듯한 이마에는 윤기가 돌고 그 아래 황금비를 따르듯 알맞은 간격으로 자리잡은 두 눈썹은 먹물을 쿡 찍어 한일자를 써놓은 듯 짙은데, 붓의 끌림처럼 엷게 미간을 타고 이어진 형상이 꿈틀거리는 용의 비늘처럼 수려하다.

긴 속눈썹을 깜박일 때마다 그 뒤로 감춰지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두 눈이 작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찬찬히 살펴보니 알겠다. 검은 동자가 커서 눈을 내리깔거나 웃을 때면 흰 자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부드럽게 가라앉은 콧날 끝의 도톰한 콧방울, 단정한 선이 또렷한 입술, 동그란 두 귀와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가 슬기로운 인상을 주긴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 얼굴은 귀여운 개구쟁이다. 냉혹한 승부세계에서 정상을 노리는 프로의 얼굴과는 거리가 먼데….



그러나 소년은 분명 한국바둑계에 거센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 풍운아다. 질풍노도와 같은 32연승으로 연간 최다승(75승 20패)을 기록하고, 배달왕·천원전을 쟁취해 이창호의 6년 독주를 저지하며 2000년도 최우수기사로 선정된 정상의 프로인 것이다.



목표는 ‘최고’가 되는 것

―LG배 결승 1, 2국에서 연승을 거둔 후 인터뷰 요청이 많았을 것 같다. 그때마다 비슷한 질문이 반복됐을 텐데….

“신문, 주간지…음, 특히 여러 월간지에서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좀 피곤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LG배에서 이창호 9단에게 연승을 거둔 원동력은 무엇인가. 준비된 전략이 있었나.

“준비는 좀 있었다. 이 9단은 종반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먼저 실리를 챙기고 싸움을 유도하는 전략을 세웠다. 1승1패 정도가 목표였는데 이 9단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고, 또 후배와 승부한다는 데 부담을 많이 느껴서인지 예전에는 거의 없던 실수가 나왔고, 그 때문에 내가 연승을 거둘 수 있었다.”

―연승을 했으니 타이틀획득까지는 이제 1승만 거두면 되는데?

“결승 2국은 좋은 내용이 아니었다. 무리한 승부수를 뒀는데 그게 통해서 이겼다. 연승했지만 승부는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열심히 둘 생각이다.”

―95년 입단 이후 기대주로 주목받기는 했어도 정상의 3인(이창호, 조훈현, 유창혁)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2000년부터 갑자기 급성장한 것 같은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32연승의 기세를 타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어느 순간 실력이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와 둬도 질 것 같지 않았고….”

―정상 3인(이창호, 조훈현, 유창혁)의 강점을 짚는다면….

“이창호: 강점도 뚜렷하지 않지만, 약점도 뚜렷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특히 종반 마무리는 독보적이다.

조훈현: 경쾌하다. 초반 감각이 뛰어나고 중반전 행마의 감각도 탁월하다. 꼭 닮고(배우고) 싶은 기사다.

유창혁: 두텁다. 공격은 최고다. 그러나 상대의 돌을 잡는 공격이 아니라, 이득을 취하는 공격에 초점을 둔다. 두텁게 두면서도 실리의 밸런스를 갖추는 능력이 놀랍다.”

―평소에 공부는 얼마나, 어떻게 하나?

“공부는 별로 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시간을 정해서 하는 건 없다. 더 이상의 공부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공부를 더 한다고 실력이 늘 것 같지도 않다. 그냥 한국기원이나 연구실에 들러 바둑을 놓아보고…. 혼자 생각한다.”

조금 뜻밖이다. ‘공부를 별로 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한다. N세대다운 솔직함일까. 그런데 답변 중 ‘혼자 생각한다’는 끝말이 인상적이다.

종횡 19선, 361로(路)의 무한세계. 문득 소년의 말 속에서 끝없는 사유(思惟)의 지평을 느꼈다면 그건 착각일까. 어쩌면 ‘혼자 생각한다’는 그 한마디야말로 이 소년을 가장 적확하게 특징짓는 수식어인지도 모른다.

―공부를 별로 하지 않는데도 세계 최강자와 겨루는 무대 위에 섰다? 그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한 말 아닌가? 특히 요즘 신예들은 공부량이 많은 걸로 아는데….

“신예들이 공부를 많이 한다고…. 난, 잘 모르겠다.”

말은 더 하지 않고 그냥 씩 웃는다. 무엇을 잘 모른다는 걸까. 신예들이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도리질을 하면서 웃기만 하니 알 수가 없다.

―대국을 하다 보면 유독 거북한 상대가 있기 마련인데 특별히 그런 기사가 있나? 아니면 ‘아, 이 사람은 진짜 강하다’고 느꼈던 상대라든가….

“없다. 상대를 의식하지 않는다.”

대답이 거침없이 나온다. 대단한 자신감, 최고의 위치에 올라 꾸밈없이 드러내는 오만은 일종의 매력이다. 소년은 어느새 그런 자격을 갖춘 것 같다. 거부감보다 호감이 앞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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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수 < 전 ‘바둑세계’ 편집장· 바둑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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