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대중음악의 중심지가 방송이지만 TV의 힘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1960~70년대 가수들의 주요 활동무대는 극장 쇼였다.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던 ‘10대 가수 쇼’를 비롯, 스타의 이름을 내건 ‘리사이틀’이 전국 극장이나 야간업소에서 열려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 시절 가수와 관객은 무대에서 직접 만났다. 어떤 측면에서 지금보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겼고 그만큼 많은 일화를 쏟아냈다. 1960~70년대 극장 무대를 주름잡던 쇼단으로는 김영호 단장이 이끈 ‘AAA’와 최봉호 단장이 주도했던 ‘777’이 꼽힌다. 한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들은 거의 이곳에서 배출됐고 그 유명세를 등에 업고 TV로 진출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아무리 얼굴을 많이 내밀어도 결국 수입원은 극장 쇼였다. 그래서 트로트 가수든 포크 가수든 극장 쇼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원로가수나 음악관계자들이 이때를 ‘가요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다. 당시 쇼 무대 사회자들이 털어놓는 스타들의 비화(秘話)를 통해 그 시절 가요계로 돌아가 본다.
‘열대지방 펭귄’ 최희준
극장 쇼의 전성기를 이끈 가수로 먼저 묵직하면서도 안정된 저음으로 ‘하숙생’ ‘나는 곰이다’ ‘진고개 신사’ 등을 히트시킨 최희준이 있다. 그는 간혹 외국 쇼 단체가 내한공연을 가질 때마다 한국을 대표해 마이크를 잡았던 ‘국가대표’ 가수였다. 학벌과는 인연이 멀었던 당시 가요계에서 서울대 법대라는 간판은 그에게 누구도 갖지 못한 위세를 제공해주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가요계 신사’였고, 이러한 후광은 1990년대 들어 국회의원으로 그를 견인하는 밑거름이 된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최희준이 보여준 면모는 영락없는 ‘코미디언’이었다. 작은 키, ‘능글맞은’ 유머, 위트감각 때문이었다. 기성세대들은 지금도 그가 TV에 나와 능숙한 말솜씨를 뽐내던 순간을 기억하겠지만, 무대 뒤에서도 그의 언변은 가요계가 알아주는 수준이었다.
1970년 그가 가수분과위원장이었을 당시 쇼 무대 유명 사회자였던 고(故) 최성일씨와 입씨름이 벌어졌다. 최성일씨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참, 너도 딱하다. 법대를 나왔다는 놈이 코에 땀내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냐? 지금쯤 재판소를 차렸어야지, 가수는 무슨 얼어죽을 가수냐? 참, 한심하다 야!”
그러자 최희준은 여유 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반격했다. “성일아! 너는 그래 공대(工大)를 나와 가지고 공장을 짓거나 하다못해 ‘자전거포’나 차려야지. 사회자? 그거 순 이빨만 가지고 벌어먹는 거 아냐? 그래도 난 마이크나 들고 다니지만, 도대체 넌 가진 게 뭐 있냐?”
그러나 최성일씨는 사실 공대를 졸업하기는커녕 대학 문도 두드려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최희준은 말하자면 최성일의 자존심을 한치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준급의 카운터 펀치를 날린 셈이었다. 그는 이처럼 약을 올리면서도 상대방의 기를 살려주는 유머에 능했다.
최희준에게는 별명도 많았다. ‘신사’ 외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찐빵’은 1969년 코미디언 구봉서씨가 ‘은방울 금방울’이란 코미디 쇼에서 아들역으로 나온 최희준을 보더니 대뜸 부른 뒤 히트를 쳐서 오랫동안 유행했다. 최희준은 때로 ‘웨이터’나 ‘열대지방의 펭귄’으로 불리기도 했다. 후자는 사시사철 검정 양복,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차림에다 조금만 열창해도 코에서 땀이 수돗물처럼 나오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실수가 없고 딱 부러지는 생활태도를 가진 최희준이 아무리 ‘짜다짜다’ 했어도 커피 인심은 넉넉했다. 누구를 만나도 “커피 한잔 드세요”가 그의 인사였다.
‘잔소리의 여왕’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는 인정이 많았다. 경찰의 검문검색이 많았던 그 시절 행여 쇼단원 가운데 누군가가 경찰서에 끌려가면 부리나케 달려가 사정을 호소해 풀어주게 한 일도 있었다. 쇼 무대의 사회자였던 이대성이 나중에 텔레비전의 톱 코미디언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자의 도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69년 장안의 화제였던 TBC 코미디 ‘웃음의 파노라마’의 연출자였던 고 김경태씨에게 틀림없이 잘 해낼 것이라며 이대성의 출연을 알선해준 사람이 바로 이미자였다.
그는 연예인위문단 시절인 1962년, 그러니까 최숙자가 한창 인기 정상을 구가할 때 홀연히 가요계에 등장했다. 데뷔 무렵 그에 대한 팬들의 열화 같은 호응은 상상을 초월했다. 공연에서 톱스타 최숙자가 앙코르로 한 곡을 부를 때 유망주에 불과하던 이미자는 2곡을 불렀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자는 ‘국가대표 여가수’로 부상한 이후에도 거의 지방공연을 다니지 않고 중앙무대에서만 활동했다. 어쩌면 이것은 인정이 많은 대신, 대수롭지 않은 일에 시도 때도 없이 투덜거리는 까다로운 성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미자만큼 잔소리 많은 사람도 없었다고 당시 쇼 무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 시절 이미자의 별명은 그래서 ‘쨍쨍이’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대놓고 말하기 무서워했지만, 최희준만은 가끔 ‘쨍쨍이’라고 부르며 이미자를 약올렸다. 그가 한참 공연을 다니던 1968년 연예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팔던 30대 아주머니가 있었다. 외상값을 받으려고 졸졸 따라다녀서 그 아주머니의 별명도 ‘쨍쨍이’였다. 최희준은 그 아주머니가 나타나면 이미자 들으라고 “쨍쨍이 아줌마 왔어요?” 하며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그때마다 이미자의 표정이 일그러지곤 했다.
1970년 서울 동대문극장 공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원맨쇼의 개척자’ 남보원은 본의 아닌 실수로 이미자의 원성을 산 적이 있다. “이미자!”라고 소개해야 되는데 그만 “조미자!”라고 해버린 것이다(당시 실제로 조미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여가수가 있었다). 여기에 심사가 뒤틀린 이미자는 노래를 마치고 무대 뒤로 돌아와 “아니, 저 놈 실성한 것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성을 바꿔?” 하며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핀잔을 퍼부었다.
그의 직설적인 성격은 어쩌면 노래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히트곡이 많다 보니 이미자는 공연중에 객석으로부터 보통 20곡이 넘는 리퀘스트를 받았다. 그러면 보통 사회자나 악단은 손님들이 많이 요청한 곡을 준비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이미자는 다른 곡을 부르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결과는 악단이 판단한 곡보다 이미자가 선택한 곡이 항상 많은 박수를 받았다. 어느 곡이 그 순간에 가장 알맞은가를 예측할 줄 아는 ‘무대의 천재’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의 천부적인 센스에 대해 당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고봉산씨의 평. “이미자는 그날로 곡을 받아서 단숨에 가사를 외우고 취입에 임할 수 있는 가수다. 국내에 그런 능력을 갖춘 가수는 이미자 한 사람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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