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남의 상가(喪家)에 제일 먼저 달려가 팔 걷어붙이고 문상객을 접대하는 ‘직업조문객’이 자존심도 없는 한심한 녀석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런 직업조문객이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실속 있는 영업맨임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계약을 성사시켰음에도 슬쩍 아랫사람의 실적으로 넘겨주는 공자왈 부장은 또 어떤가. 그는 “즐겁게 일하면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마저 즐거운 눈으로 볼 수 있다”며 직원들에게 자율적으로 즐겁게 일하라고 독려한다. 회사의 고문인 인도자는 위에게 “배려는 선택이 아니라 공존의 원칙이다” “사람은 능력이 아니라 배려로 자신을 지킨다. 사회는 경쟁이 아니라 배려로 유지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이 우화는 해피엔딩이다. 결국 프로젝트1팀을 해체하려던 철혈이마가 몇몇 인력을 빼내 경쟁사로 옮기면서 구조조정 논의도 사라지고 회사는 더욱 탄탄해진다. 배려의 의미를 깨달은 위는 잃어버릴 뻔한 가족까지 되찾는다. 한상복이 지은 ‘배려’는 우리에게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마치 책 한 권 분량의 공익광고를 보는 기분이랄까.
늙은 생쥐들의 생존 게임
‘마키아벨리, 회사에 가다’(페터 놀·한스 루돌프 바흐만 지음, 황금가지)는 어떤가. 저자들은 마키아벨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말한다.
“회사는 문제가 터지면 희생양을 뽑는다. 절대 희생양의 후보에 들지 마라. 마음이 안 맞는 인재를 슬그머니 제거하라. 섣불리 회사를 살리겠다고 나서지 마라. 사내동맹은 필수요소, 외부 인맥은 안전장치다. 라이벌을 도와주는 척, 함정에 빠뜨려라. 지적을 받으면 화려한 통계수치를 들이대어 방어하라. 사치하지 마라. ‘멋쟁이 새’는 결코 중역이 될 수 없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1970년대 크라이슬러가 좋은 예다. 기름을 마구 삼켜버리는 덩치 큰 자동차만 만들어온 크라이슬러는 오일 쇼크 이후 위기에 봉착한다. 독일과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 오래 전부터 경제적 부담이 작은 소형 자동차를 시장에 내놓고 있었지만 크라이슬러 경영진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왜 이들은 스스로 눈뜬 장님이 됐을까.
만약 크라이슬러가 1970년대 초에 대형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소형 자동차를 생산하거나 일본 자동차회사와 제휴했다면 회사를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5년 동안은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고, 주주들은 아우성칠 것이며, 근로자들은 해고당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자,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은 50대 남성의 생존법칙이다. 왜 하필 ‘50대’ ‘남성’이냐면 아직까지 이 세상에서 회사의 경영진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50대’ ‘남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50세 무렵 회사의 중역이 된 그들은 10년 후를 생각하지 않는다. 은퇴할 날이 머지않았는데 굳이 10년 후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10년 뒤 회사가 번창하고 다음 세대가 열매를 따먹기를 원치 않으며 적어도 그들이 회사에 머물 10년 동안은 되도록 별 탈 없이 조용히 지낼 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개혁은 관심 밖의 일이다.
루이 15세 시대에는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내가 죽고 나면 대홍수가 닥치리니!”…. 어쨌든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며 건배할지도 모른다. “이대로!”
‘마키아벨리, 회사에 가다’의 두 저자는 이런 중역들을 주저 없이 ‘늙은 생쥐’라고 부른다. 늙은 생쥐들의 전공분야는 파워 게임이다. 하지만 늙은 생쥐가 아닌 부류가 자신들을 위협해올 때는 똘똘 뭉칠 줄도 안다. 그들은 사내동맹과 외부 인맥을 동원해 철밥그릇을 만들며, 일하지 않고 책임도 피하는 요령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즉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분산하거나 예측할 수 없는 외부 상황의 탓으로 돌리거나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전혀 잘못이 없으면서도 ‘미운 털 박힌’ 누군가가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희생양이 된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헤드헌터들 덕분에 늙은 생쥐들은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며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배려 or 나쁜 처세
‘마키아벨리, 회사에 가다’는 실제 비즈니스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소재로 한 풍자이자, 팍팍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배려’가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착한 처세를 가르친다면 이 책은 승리하는 법을 가르치는 나쁜 처세로 가득하다. 여기서 어느 한쪽을 고르라고 선택을 강요하진 않는다. 세상은 공익광고가 아니기에 ‘나쁜 처세’로 면역력을 기를 필요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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