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림-장영희 교수님이 오늘 오후 1시에 돌아가셨대요.’봄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5월9일. 대학 후배가 보낸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는 길을 걷다 눈물을 쏟았다.
“스승의 날 연락드리려 했는데, 이렇게 빨리 가시면 어떡해요….”
때를 놓치고 후회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원고 써 달라” “인터뷰 해달라”며 급할 때만 은사를 찾던 제자는, 속죄의 마음으로 스승을 추억하고자 한다. 봄 햇살보다 환한 스승의 미소를 그리면서 말이다.
이렇게 빨리 가시면 어떡해요…
고 장영희 교수(서강대 영미어문·영미문화학부)의 제자라는 사실은 내게 훈장이었다. 소아마비, 그리고 세 번씩 찾아온 암과 싸우면서도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던 스승의 숭고한 삶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대학 시절 2주에 한 편씩 영어 소설을 읽을 때마다 ‘공포의 퀴즈’를 치르고, 빨간 펜 코멘트로 너덜해진 영어 리포트를 돌려받으며 치열하게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 제자로, 조교로, 기자로 교수님과 인연을 이어간 건 내게 커다란 행운이었다.

뛰어난 영문학자이자 번역작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필가로 평가받은 그의 삶은 역경과 극복의 연속이었다.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첫돌을 앞두고 소아마비를 앓았다. 두 다리와 오른팔이 불편해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어머니의 등에 업혀 학교를 다녔다. 어머니는 눈이 오면 길에 연탄재를 깔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든 채 딸의 등하굣길을 지켰다. 그래서일까. 평소 “죽은 사람들의 유언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던 은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어는 ‘엄마’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그는 중·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때마다 버팀목이 돼준 사람은, ‘한국 영문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장 교수의 아버지 고 장왕록 선생(서울대 명예교수·1994년 작고). 일반학교에서 장애 학생을 쉽게 받아주지 않던 시절, 아버지는 딸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교장실을 찾아가 입학을 간청했다. 딸의 문학적 재능과 풍부한 상상력을 일찌감치 알아봤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2004년 4월호 ‘신동아’의 ‘나의 삶, 나의 아버지’ 기고문에서 “1급 신체장애를 가진 딸을 이 사회에서 살아남게 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필사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회상했다.
학교 성적은 우수했지만,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도 험난했다. 여러 대학이 신체장애를 이유로 시험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를 두 팔 벌려 맞이한 유일한 학교가 서강대다. “제발 입학시험만이라도 치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장왕록 선생에게 당시 영문과 과장이던 브루닉 신부는 이렇게 반문했다.
“아니, 시험을 머리로 보지 다리로 보나요. 장애인이라고 시험 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더 큰 세상을 열어준’ 서강대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니, 절대적이었다. “등록금 인상 거부 투쟁 때문에 수업에 빠진다”고 말하는 학생에게 그는 “서강대가 얼마나 훌륭한 학교인데 그렇게 철없는 짓을 하느냐”고 꾸짖었다.
그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도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A대학의 면접관은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우리는 장애인을 학부 학생으로도 선발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당시 그가 부모님께 낙방 소식을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추려고 찾아간 곳은 영화관. 상영 중인 작품은 ‘킹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