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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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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드라마 ‘허준’의 한 장면.

그렇다면 질병으로 고통에 빠졌으나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는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고자 했던 그가 현실적인 삶에서도 유의로서의 생활에 만족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염치없는 환자들을 향해 뼈아픈 말을 쏟아낸 그의 글에서는 인간적 면모도 물씬 묻어난다.

“현재도 의가에 가서 남의 바쁜 시간은 생각지도 않고 병 이야기를 두세 시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말 없는 말 다해가며 처방을 얻어가지고 가면서 미안하거나 감사하다는 표정도 없이 가는 무례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유의학자들의 인술에 어린 양하던 민중의 버릇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선생이 저술한 ‘통속한의학원론’은 현대 한의학의 시작이 됐다. 그는 전통적인 한의학에서 벗어나 현대의학과의 접합점을 찾고 이를 보편적,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각기 다른 진리는 진리가 될 수 없으며 동양과 서양의 진리는 단지 다른 모양으로 나누어진 것일 뿐이라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장(腎臟)의 개념에 대해 현대의학적 관점을 차용, 신장이 비뇨뿐 아니라 생식, 내분비작용을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보면서도 호르몬작용에 맞춰 한의학적으로 신장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침구학에서도 동서양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을 도입했다. 음적인 경락은 간지럼을 잘 타며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움츠린다고 말했다. 구타당할 때 복부를 움츠리는 것도 이런 경락작용의 연장이라는 설명이었다.

동의보감 번역에 참여

그가 동서양의 의학을 보편적으로 통합할 필요를 느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한의학이 현대의학적 방법을 채택하면서 한의학적인 치료법을 상실해갔기 때문이다. 조 선생은 일본한의학이 증상에 따른 개인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약물로 치료하는 현대의학적 한방요법을 일방적으로 도입, 시행해 한의학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의학이 합쳐져 키메라 같은 괴물이 나왔다고 봤다. 1950년 보사부가 보건의료행정법안의 의료인 규정에서 한의사를 배제하는 법안을 제출하자 민족의학을 말살시켜서는 안 된다며 한의사제도를 지켜낸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려 했던  유의(儒醫) 조헌영
이상곤

1965년 경북 경주 출생

現 갑산한의원 원장. 대한한의사협회 외관과 이사, 한의학 박사

前 대구한의대 안이비인후피부과 교수

저서 : ‘콧속에 건강이 보인다’ ‘코 박사의 코 이야기’


6·25전쟁 때 납북되어 북으로 간 뒤에도 그는 한의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적 문화유물인 동의보감을 번역하는 작업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동의보감의 경우 한자를 해석한 번역본은 있어도 의미를 번역한 완역본은 현재도 별로 나온 게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는 동의보감 번역은 글자적인 해석뿐만 아니라 시대에 맞게 문화, 음식, 관제, 복식, 의료 등의 전반적 삶을 고증한 작품으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책은 북한 보건부 동의원이 만들고 여강이라는 회사에서 출간했다.

한의학 개혁에 대한 그의 마지막 열망은 유의의 부활에 있었다. 유의적 한의사를 배출하는 것인데 그는 한의사를 뽑는 면접에서 인격적 신망을 가장 중시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배경에는 민중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의료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한 그의 원칙이 있었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유의로서의 한의사는 우리 시대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 갑자기 우리의 모습이 두렵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신동아 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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