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블 채널에서 방송 중인 인기 프로그램들. 왼쪽부터 <화성인 바이러스>, <롤러코스터>, <슈퍼스타 K>.
위의 글을 보며 서혜정 성우의 감정 없는 목소리와 함께 tvN ‘남녀탐구생활’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위의 ‘여러분’에 포함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만약 지난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 만들어 배포한 ‘한나라당 선거남녀탐구생활’을 보며 -그 문제 많았던 내용과는 별개로-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좋은 포맷을 센스 있게 선점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면 당신은 케이블 콘텐츠를 즐기는 건 아니라도 그 문화적 파급력에 대해 어느 정도 숙지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당신에게도 이 기사가 유용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낯설다면, 혹은 낯설지는 않더라도 이들 케이블 예능 프로그램이 왜 많은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런 당신에게야말로 이 기사가 유용한 입문이 되길 바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난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남녀탐구생활’의 몇몇 요소를 패러디해 인터넷에 배포한 바 있다. 서로 다른 성향의 남녀가 같은 상황에서 얼마나 다른 반응을 보이는지 소소한 디테일과 독특한 내레이션을 통해 보여주는 ‘남녀탐구생활’이 과연 선거 캠페인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인터넷을 통한 UCC 시청이 일상이 된 세대에게 그 캠페인은 이해불가의 텍스트가 아닌, ‘남녀탐구생활’의 패러디로 당연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남녀탐구생활’은 20~30대에게 매우 일상적인 콘텐츠인 셈이다.
하위 채널의 반란
하지만 하위문화로서 케이블 예능 프로그램이 특정 세대에게만 어필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말 의 평균 시청률은 4%를 넘었다. 당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장 부침을 겪고 있던, 하지만 그 브랜드 인지도는 여전했던 MBC 의 시청률이 3%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놀라운 수치다. 케이블과는 비교도 안 되는 프로모션의 기회를 갖고 있고, 계획 시청이 가능하다는 공중파의 절대적 우위까지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언젠가부터 케이블 콘텐츠는 공중파 바깥의 마이너리그가 아닌, 콘텐츠 대 콘텐츠로 공중파와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저력과 점유율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선언이 단순한 레토릭 같다면 수치를 보자. 2010년의 가장 ‘핫한’ 케이블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M.net 시즌 2는 최근 케이블 최초로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했다. 절대강자인 KBS ‘1박2일’이나 MBC 정도를 제외하면 두 자릿수 시청률은 공중파 예능에서도 결코 쉬운 수치가 아니다. 강호동이 진행하는 SBS 의 시청률은 12% 근처에 머물러 있고, KBS 은 6%대, 는 8%대, 유재석이 출연하는 SBS 역시 9%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 차원, 즉 플랫폼과 콘텐츠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편의상 공중파와 케이블 채널이라는 말로 구분하지만, 현재 공중파 콘텐츠를 안테나를 통해, 말 그대로 공중파를 수신하며 보는 가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케이블 가입자가 1400만 가구에 달하는 현재, 방송 3사의 프로그램도 소위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처럼 기술적으로는 케이블망을 통해 보는 상황이다. 송수신 방식으로 채널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 게 현실이다.
물론 6번 SBS, 7번 KBS2, 9번 KBS1, 11번 MBC, 13번 EBS처럼 번호를 익숙하게 외우고 있는 채널의 경우 계획 시청이 가능하긴 하지만, 최소한 기술적인 면에서 여타 케이블 채널과 공중파 채널 모두 원칙적으로는 동등한 차원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 재핑(zapping·광고를 피하기 위해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바꾸는 행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재핑의 짧은 과정에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우리의 시청계획에 케이블 채널이 당당히 자리 잡는 것도 신기한 일은 아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 주목할 만한 콘텐츠들이 등장하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점을 정확하게 잡을 수는 없겠지만 종합오락채널 tvN의 등장은 그 변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