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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무도인 액션배우의 영광과 한계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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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기도 고수 황인식의 발차기는 대포알 같았다. 영화에서 그에게 맞은 이가 5m 밖으로 나가떨어져도 과장돼 보이지 않았다.
  • 황정리의 발은 손보다 재빨랐다. 발바닥으로 상대의 뺨을 갈기다 그대로 목젖을 강타해 부숴버리기도 했다. 홍콩 배우 중 어느 누구도 이들 같은 정통 액션을 구사하지 못했다.
  • 그러나 당시 한국에는 두 사람을 배우로 존중하며 이끌어줄 감독과 제작자가 한 명도 없었다.
  • 무술의 달인이면서 동시에 액션 배우이고자 했던, 1970년대 홍콩 영화시장을 열광시켰던, 그러나 끝내 쓸쓸하게 스크린을 떠나고 만 두 명의 액션 스타를 추억한다.
흑무사 황인식과 마왕 황정리

현란한 발차기 솜씨로 홍콩 영화계에서 ‘마왕’으로 군림한 배우 황정리.

이소룡 주연·감독 ‘맹룡과강’(1972)의 3막. 음산한 음악이 흐르고 로마공항의 활주로에 여객기가 도착한다. 문이 열리고 비행기 트랩에 내려서는 인물. 검은 선글라스를 쓴 태권도의 고수, 척 노리스다. 마피아 두목은 총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이소룡을 제거하기 위해 무술 고단자를 고용한 것이다. 척 노리스가 마피아 두목의 사무실에 들어서니, 두 사나이가 싸우고 있다. 한 사람은 가라테의 고수 일본인, 또 한 사람은 척 노리스의 제자다. 험상궂은 가라테 고수는 미국인 태권도 고수들인 척 노리스와 그의 제자에게 가라테를 깔보지 말라며 도발한다. 사실 그의 실력은 척 노리스보다 한 수 아래고, 그의 제자와 막상막하다.

드디어 이소룡과의 대결. 척 노리스는 마지막 대결을 위해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고, 하수인 일본인 무술가와 척 노리스의 제자가 먼저 나선다. 일본인 무술가와 이소룡의 대결. “네가 탕룽이냐?” 독기 어린 눈으로 이소룡을 쏘아보는 일본인 무술가. 이소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라테 무술가는 필살의 자세를 취하는데, 앗! 그것은 태권도의 금강역사 품새다. 멋은 있었지만 이소룡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가라테 고수로 출연해 금강역사의 품새를 취한 그 사나이는 바로 한국 합기도의 고수인 황인식이다.

내가 본 최초의 황인식 영화는 ‘흑무사’(1974)다. 홍콩 권격 영화와 한국 태권도 영화의 매력에 빠져 극장을 내 집 드나들 듯 다니던 나는 ‘흑무사’가 시작되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홍콩 배우들이 출연해 연기하고, 영화의 배경도 중국의 어느 곳이고, 등장인물의 옷과 움직임 모두 중국인의 그것인데,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색하게 더빙된 한국어 아닌가. 이게 뭔가? 중국인들이 한국말을 하다니. TV 연속극 ‘전투’의 손더슨 중사가 한국말을 하는 것은 더빙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줄 아는 나이였지만, 극장에서 더빙 장면을 본 건 처음인 나는 어리둥절했다. 게다가 중국인들이 한국 이름을 갖고 있고, 중국인이 한국인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이른바 한·홍 합작 영화였다.

나는 그것을 사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흑무사 황인식이었다. 잘생긴 주인공보다 험상궂게 생긴 그가 더 매력 있었고, 무술 실력도 월등했다. 영화가 재미가 없었던 것은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닌 악당 황인식을 보잘것없는 실력의 주인공이 이겼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선이 악을 이기려면 설득력이 있어야지 하며 혀를 찼다.

관절기, 드롭킥, 양다리 차기



그 후 황인식이 출연하는 또 다른 영화를 봤다. ‘흑연비수’(1973)였다. 이 영화 역시 중국 배우들이 한국어로 말하는 영화다. 영화가 시작되면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고, 파랗게 새싹이 돋아나는 아름다운 봄. 식민지 조선의 강나루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안젤라 마오 잉과 그의 사형인 황가달과 홍금보가 나들이 나와 망중한을 즐긴다. 이때 일본인 불량배가 나타나 아름다운 여인 마오 잉에게 치근거린다. 그들을 무시하려 하지만 식민지 여성을 노리갯감으로밖에 안 보는 불량배의 시비가 도를 넘어서고, 마침내 튀어나간 마오 잉의 돌려차기에 일본인들은 피떡이 된다. 장면이 바뀌면 마오 잉 일행은 한국까지 유학 와 합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임이 밝혀진다. 그들은 합기도 고수인 사형 황인식과 합기도장 사부 지한재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가르침을 받는다. 조선에서 합기도를 배우고 중국으로 돌아간 그들은 합기도를 시기하는 일본인과 그 밑에 기생하는 중국인 무술가들에게 시련을 겪다 홍금보의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복수를 시작하는데, 이때 조선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배를 타고 온 황인식의 도움으로 마지막 일전을 치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인식은 관절기, 드롭킥, 양다리 차기, 돌려차기 등등 화려한 무술 실력을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 뒤로 ‘흑권’(1973), ‘방랑의 영웅’(1974), ‘흑묘’(1974)와 같은 황인식 조연의 영화들을 봤는데, 그는 별다른 매력을 보이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악역 중 하나만을 했다.

1975년 ‘흑거미’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당당하게 황인식 주연. 나는 그동안 황인식이 주연을 못 맡았기 때문에 그의 화려한 무술 실력이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주연이니 얼마나 멋진 영화가 될 것인지 기대했다. 그런데 수사관으로 나온 황인식은 주연배우라고 하기에는 연기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무술도 ‘흑연비수’의 그것과 비교할 때 뛰어나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당시의 나는 영화배우와 무술가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술가라 해도 뛰어난 연출가를 만나지 못하는 이상 그의 발차기는 별 볼일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초록 물고기’라는 영화 조감독을 할 때, 주인공 한석규가 기차 안 좁은 공간에서 불량배에게 몰매를 맞는 장면을 찍었다. 불량배가 바닥에 쓰러진 한석규를 무자비하게 짓밟는데, 테이크를 거듭해도 가짜 같았다. 보다 못한 감독이 “진짜로 차라”고 했고, 이번에는 진짜로 한석규의 몸을 짓밟았다. 하지만 좀전에 가짜로 차는 시늉만 했던 연기보다 더 가짜 같았다. 그랬다. 연기를 잘 못하면 가짜 같은 것이다. 진짜로 때린다고 해도 안 되는 연기가 진짜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배우의 액션 연기 못지않게, 그걸 잘 통제해 연출하고, 제대로 된 곳에 카메라를 놓고 찍는 연출가의 역할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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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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