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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무림을 평정한 전설의 태권 스타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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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년대 권격 영화 전성시대, 수많은 액션배우 중 왕호는 단연 돋보였다. 맨손으로 무쇠를 격파하는 무술 실력에 큰 키, 매서운 눈매까지 갖춘 그에게선 이소룡을 이어 아시아 영화계를 평정할 자질이 엿보였다. 홍콩에서 러브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독이었다.
  • “현지 배우들이 못하는 것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몸에 무리가 오더라도 참고 일했다”고 고백하던 왕호는 때 이른 나이에 한국·홍콩 모두에서 소모되고 만다. 한때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로 불렸던 액션 배우, 왕호를 추억한다.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중원호객’에서 시원한 발차기 실력을 선보인 왕호.

1970년대 중반. 한국 극장가는 맨손으로 격투를 벌이는 권격 영화의 세상이었다. 홍콩에서는 쿵푸 영화가 만들어졌고, 한국에서는 태권도 영화, 일본에서는 가라테 영화가 만들어졌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새로운 유형의 권격 액션 영화들이 저마다 대문짝만하게 내거는 홍보문구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소룡을 뛰어넘는 권격 스타의 등장’이었다. 1960년대 중반 홍콩에서 등장한 홍콩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신무협 영화들은 단숨에 홍콩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화교 시장을 점령하고 이웃 한국에 상륙, 흥행에 성공했다. 1970년대 초, 동남아 화교 시장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한 이소룡의 ‘당산대형’은 홍콩과 대만을 넘어 한국과 동남아시아 전역을 휩쓸었고 당시 아시아 영화의 대표 선수였던 일본 극장가까지 점령해버린다. 아직 할리우드를 넘볼 수 없었던 그 시절, 이소룡 영화는 아시아 전역을 점령한 최초의 흥행작이었다.

갑자기 나타났다 너무 빨리 사라져버린 이소룡은 아시아 영화인들과 배우 지망생에게 성공 신화가 됐다. 이소룡 사후 모두 이소룡의 성공 신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성공 신화를 이루기 위해 꼭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었으니, 그것은 이소룡이었다. 그래서인지 이소룡과의 친분이나 그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을 지닌 배우를 내세운 홍콩 영화가 등장한다. 이소룡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소기린도 그와의 친분을 내세워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가 이소룡 친구인 것은 개인 사정일 뿐,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이소룡 영화를 뛰어넘는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 확인시킨 처참한 사례였다.

포스트 이소룡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이소룡의 친구였다고 주장하는 사나이가 주연을 한 영화가 등장했다. 신문 광고 상단에는 이소룡과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서있는 사나이의 사진이 월계수 이파리로 테두리가 장식된 채 대문짝만하게 놓이고, 그 밑에는 ‘친우 이소룡과 다정했던 한때’라고 적혀 있다.

광고 문구를 그대로 옮겨보면 “이소룡 너의 뒤를 이어 나 바비킴이 왔다!” “동양의 찰스 브론슨. 찰스 브론슨과 닮았다! 그렇다! 아니다! 그러나 바비킴은 태권과 남성미를 갖춘 사나이 중의 사나이다” “새로운 액션 황제의 등극” “미 공군사관학교 태권도 교관. 미국의 무술 잡지 블랙벨트에서 선정한 발재간의 사나이” “이소룡에서 점보 사나이 바비킴의 새 시대가 왔다.”



광고 문구가 사실이라면 대단한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하여튼 영화 제목은 ‘죽엄의 승부’. 신문 광고를 본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 전 이소룡의 뒤를 이어 액션 영화계를 평정했다는 양소룡이 출연한 ‘홍콩에서 온 불사신’이라는, 이소룡의 ‘맹룡과강’ ‘짝퉁’영화를 보고 매우 실망한 터라 이제야말로 진짜 이소룡의 후계자가 한국에서 등장했다 생각하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물론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이소룡과 찰스 브론슨까지 동원해 영화를 홍보하는 것이 혹시 과대선전은 아닐까 하는. 과연 그랬다. 재미없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바비킴이 이소룡의 카리스마와 연기를 따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TV 프로그램 묘기 대행진을 보고 있던 나는 태권도 묘기를 선보이는 사나이에게 빠져들었다. 그의 이름은 김용호. 당시 진행자였던 변웅전 아저씨가 화려한 경력을 소개했는데, 이건 뭐, 이소룡을 뛰어넘을 단 한 명의 태권 천재가 나타난 대사건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로 전국태권도 대회에 전북 남원 대표로 출전해 준우승을 하고, 중3 때는 태권도 대회 단체전 우승. 1970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태권도 체육관을 개설해 사범을 지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해병대 태권도 선수단에 입단, 제대 후에는 세계태권도 선수대회 시범단으로 활약. 그리고 1976년 태권도 영화 ‘흑룡강’으로 데뷔했고, 현재 홍콩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홍콩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화려한 경력의 사나이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키였던 변웅전 아저씨보다 키도 더 크고, 눈매가 아주 매섭고, 약간의 촌티가 흘렀지만, 그래도 남자 액션 배우로 보자면 그럴듯한 얼굴과 몸이었다. 사나이는 먼저 자신의 주특기인 발차기를 보여주었다.

핵폭탄 같은 발차기

돌이켜보면 그보다 2년 전 혜성과 같이 등장한 태권 스타 챠리셸이 있었다. 나팔바지를 입은 늘씬하고 긴 다리로 돌려차기를 하며 한국 태권도 영화의 탄생을 알린 첫 스타였다. 이소룡 닮은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지만 그의 성공은 뭐니 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 덕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무술 실력보다 멋진 외모와 늘씬하고 긴 다리를 가진 배우를 찾아내려 했다. 신체조건이 좋은 배우라면 태권도 실력이 보잘것없어도 멋진 액션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 믿었고 영화는 그 믿음을 증명했다. 챠리셸이 발차기로 상대방의 뺨따귀를 스무 번 이상 연타로 날리는 통쾌함은 그의 무술 실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챠리셸이 발을 들어 올리면 바로 클로즈업해 쾌감을 극대화한 감독의 연출력이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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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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