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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에베레스트

제49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나의 에베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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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사우스콜(South Col)

나의 에베레스트

일러스트레이션·박용인

“노 굿 웨더. 위 캔 낫 클라이밍(No good weather, We can not climbing)….”

내 텐트로 건너온 아파 셰르파(Sherpa)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에베레스트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고. 두꺼운 우모(牛毛)복을 입은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어도 이미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든 지 오래다. 몇 마디 말을 나누느라 산소 마스크를 잠시 벗었을 뿐인데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곳은 신들의 영역이라는 해발 8000m의 사우스콜 아닌가. 산소도 지상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죽음의 지대. 인공산소를 마시고 있다 해도 평지와 같을 순 없다.

이곳 마지막 4캠프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동남릉은 네팔과 티베트를 가르는 경계다. 동시에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고산(高山)에서 무리한 욕심은 죽음을 낳는다. 이미 많은 경험과 자료를 통해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가. 첨단 과학이 동원된 점보비행기가 날 수 있는 고도를 순전히 내 발로 올라왔다. 눈앞의 에베레스트 정상을 포기하기엔 억울하다.



내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시아 변방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네팔까지는 물리적인 거리도 멀지만, 그것만이 억울한 마음이 들게 한 전부가 아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기 위해 지난 10년간 지독한 훈련을 해왔다. 마라톤 풀코스를 수십 번 완주했고, 주말 훈련 산행을 빼먹지 않았다. 이 산에 오기 직전,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고소증에 대비하려고 LA에서 가까운 멕시코 최고봉에도 올랐다. 내가 정상에서 보낼 무전을 베이스캠프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을 동료 이정현과 함께.

이번 등반의 목적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 기록 경신도 포함돼 있다. 훈련 기간을 뺀 지난 6년 동안 여섯 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올랐다. 1999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963m)에서 시작해 남미 아콩카과(6959m), 유럽 엘부르즈(5642m), 북미 매킨리(6194m), 남극 빈슨매시프(4897m), 오세아니아 칼스텐츠(4884m)를 차례로 올랐다. 이제 아시아의 에베레스트만 남았다. 이 산을 오르기만 한다면,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긴 여정이 비로소 끝난다.

세븐 서미터

이곳 8000m 최종 캠프에 닿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가. 베이스캠프에서 1캠프, 2캠프, 3캠프를 오르내리며 한 달 넘게 전투처럼 등반해왔다. 정말이지 너무도 안타까운 희생도 있었다. 악마의 입 같았던 얼음폭포 아이스폴에서 일어난 사고. 얼음기둥이 무너지는 바람에 우리 팀 셰르파 두 명을 잃었다. 그런 희생과 고생을 감내하며 겨우 오른 마지막 캠프에서 그만 멈춰야 한다니.

오르고 싶다. 7대륙 최고봉을 모조리 오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세븐 서밋(Seven Summit)’이라고 한다. 나 역시 ‘세븐 서미터(Seven Summiter)’가 되기 위해 에베레스트의 위험과 맞설 의지와 준비가 충분하다. 하지만 히말라야 등반은 하늘이 도와줘야 한다. 준비가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오늘처럼 일기가 나쁘면 등반은 끝이다. 눈보라가 계속되면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하산도 위험천만한 일이된다.

억울하지만, 신뢰하는 파트너 아파 셰르파의 경험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 그는 이미 에베레스트를 15번이나 올랐고, 네팔에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셰르파니까. 고산 등반에서 욕심은 죽음과 항상 붙어 다닌다. 네팔에서 불어와 이 고개를 넘어 티베트로 달리는 바람은 쇳소리를 낸다. 물어뜯고 할퀴고 모든 걸 날려버리려는 바람 탓에 꽁꽁 얼어붙은 텐트는 쉬지 않고 서걱거린다.

두꺼운 침낭 속에 웅크리고 있지만 파고드는 추위는 어쩔 수 없다. 텐트 안을 온통 코팅시켜버린 성애가 내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별처럼 반짝인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히 그립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하루 종일 굶었다. 낮은 기압 때문에 밥맛도 없지만, 입술이 터져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 달콤한 사탕을 먹어도 쓴맛이 난다.

내 나이 예순넷. 체력엔 자신 있으나 성공 여부는 모를 일이다. 날이 좋아 예정대로 출발하더라도 밤새워 위험천만한 고공의 칼날 능선을 가야 한다. 12시간쯤 실수 없이 형극의 길을 올라야 정상이다. 정상에 무사히 오른다는 보장도 없으니 억울해하지 말자. 셰르파의 등반 포기 선언은, 나를 살리려는 어떤 운명의 계시인지도 모른다.

내가 4캠프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1시였던가. 내가 어떻게 이곳 8000m까지 올라왔지?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오른 셰르파들이 드넓은 사우스콜에 두 동의 텐트를 치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바람을 피한다며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저 멀거니 그들을 바라만 봤다. 티베트로 넘어가는 미친 바람이 텐트를 빼앗아가려는 듯 세차게 불었다. 텐트는 잔뜩 부풀기만 할 뿐 도무지 작업에 진척이 없었다.

텐트가 겨우 완성됐고 셰르파들은 내게 그 속에 들어가 쉬라고 손짓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침낭 속에서 잠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도 아닌 무중력 속을 헤매는 중이다.

베이스캠프가 그립다. 지금쯤 더그는 베이스캠프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곳을 떠난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 좋은 그가 무척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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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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