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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심청과 바리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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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흔히 효성 지극한 딸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심청과 바리공주 이야기는 부모의 기대와 달리 자녀들에게 반발심을 부추긴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과 용서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강요로 비치기 때문이다. 언뜻 효(孝)를 강조하기 위한 억지로 보이는 두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 읽어보면 영웅서사시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효녀’ 틀에 담기 힘든 버려진 딸들의 엄청난 에너지

국립창극단의 창극 ‘심청전’. 심청은 ‘내 아버지’ 한 명뿐 아니라 수많은 맹인을 눈 뜨게 한 지혜와 사랑의 여인이다.

그래 어허, 저 자손아 부모 목숨 구하러 가겠느냐?”

“아흔아홉 빗장 속에서 청사 흑사 이불에 진주 안석을 귀하게 기른 여섯 형님네는 어찌 못 가나이까?”

-아비 오구대왕의 질문에 대한 바리의 대답-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운 고전문학 중 가장 ‘투덜거리면서’ 읽은 작품이 바로 ‘심청전’이다. 세상에, 눈먼 아버지와 살며 고생하다 아버지 눈뜨게 해주겠다고 목숨을 파는 심청을 ‘여성 롤 모델’로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삐딱한 반발심과 함께 죄책감이 밀려왔다. 나는 심청이만큼 부모님을 향해 ‘올인’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궁여지책으로 어떻게 부모님을 위해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혹을 애써 뒤로한 채, 열심히 ‘효’와 ‘권선징악’이라는 교육용 키워드를 우격다짐으로 머릿속에 구겨넣었다. 그러면서도 간교하게 내심 우리 엄마 아빠는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인당수에 밀어넣지는 않을 거라고, 위안했다. 말하자면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잔혹한 장면이 일종의 트라우마(외상성 신경증)로 자리 잡아버렸던 것 같다.

안색을 변치 않고 뱃전에 나서 보니 티 없이 푸른 물은 월러렁 콸넝 뒤둥구리 구비쳐서 물거품 북적찌데한데, 심청이 기가 막혀 뒤로 벌떡 주저앉아 뱃전을 다시 잡고 기절하여 엎딘 양은 차마 보지 못할 지경이라.



심청이 다시 정신 차려 할 수 없이 일어나서 온몸을 잔뜩 끼고 치마폭을 뒤집어 쓰고,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바다 속에 몸을 던지며,

“애고 애고, 아버지 나는 죽소.”

뱃전이 한 발이 지칫하며 거꾸로 풍덩.

-완판본 ‘심청전’ 중에서

겨우 열다섯 살인, 그러니까 심청전을 읽을 당시 나와 동갑인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그 장면. 이 장면이 유발하는 극한 공포 때문에 나는 심청이 다시 살아나 황후가 된다는 이후의 스토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공포는 꽤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서 자가 증식했던 것 같다. 나에겐 부모님을 위해 죽을 용기(?)가 정말 없을까봐, 부모님을 위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할 일이 정말 생길까봐 말이다.

아동착취 아동학대 합리화?

대학생이 되어 심청전을 다시 읽었을 때, “이건 ‘효도’를 핑계로 아동학대를 합리화하는 엽기살인극이 아닐까”라고까지 생각했다. 태어나서 겪어본 것은 ‘고생’밖에 없는 심청이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마침내 자살해버린 것이라고도 상상해보았다. 여하튼 어린 마음에도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던 것은, 심청전은, 아니 심청전을 추앙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지나친 ‘강요’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청전 이후에 접한 ‘바리데기’ 신화는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켰다. 말하자면 두 작품은 이 세상 모든 딸에게 일방적으로 효도를 강요하는 일종의 ‘커플 사기단(?)’으로 인식되었고, 나는 늘 심청과 바리의 자발적 선택보다 심청과 바리를 그렇게 만든 ‘상황’에 분노하곤 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부모를 원망하느라 그들이 모험을 통해 만난 ‘새로운 세상’은 간과한 것이다. 고전문학 속 바리데기와 심청은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효성(孝誠) 담론 자체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무럭무럭 키웠다.

내가 커서 아이를 낳으면 자식들에게 ‘치사하게’ 효심 따위를 바라진 않으리라, 그렇게 코믹하고도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자식에게 대놓고 효도를 요구하는(!) 부모는 정말 나약하고 무능하고 파렴치해 보였다. 우리 세대는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지만, 아직 집안에서는 기존의 ‘수직적 관습’과 최근의 ‘수평적 욕망’ 사이의 균열이 완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었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즈’에 등장하는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만만하고 친밀한 엄마가 마음속 이상형이지만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웠다.

나는 심청과 바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의식 속에서 혐오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혹시 나는 이 사회가 부과하는 장녀 콤플렉스와 ‘엄친딸’ 콤플렉스에 시달린 끝에 효도 자체를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효도란 자식의 노동력을 합법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고안된, 철저히 부모 중심적인 판타지가 아닐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로 심청과 바리의 진정한 테마가 ‘효도’가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날 바리데기 신화를 다시 읽으며 무릎을 치고 기뻐했다. 맞아, 맞아! 바리공주의 스케일이 겨우 효도 따위에 그칠 리 없어. 바리의 무대는 우주요, 그녀의 적수는 운명이고, 그녀의 무기는 사랑이었다. 바리데기의 사랑은 자신을 버린 인간 모두를 구원하고 그 구원의 대가를 한 톨도 바라지 않는, 부피도 경계도 측정할 수 없는 가없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효성의 틀로 심청의 캐릭터를 가두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각종 문학작품에서 다양한 패러디 형식을 빌려 실현된 바 있다.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 현대 여성으로 각색된 심청은 인당수에 빠지는 대신 어머니께 점자책을 사드린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지 못하여

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

결코 인당수에는 빠지지 않겠습니다.

(……)

그 대신 점자책을 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점자 읽는 법도 가르쳐 드리지요

우리의 삶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외국어와 같은 것.

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 합니다.

-김승희, ‘배꼽을 위한 연가 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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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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