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적 광기’로 200년간 8차례 치른 십자군전쟁
베네치아 요구로 예루살렘 대신 이집트 공격
원정의 중요 변수, ‘누가 전쟁 비용을 대느냐’
대부업 금지, 다양한 금융 기법 탄생시키다
양모 수출하던 영국, 백년전쟁 후 모직 수출국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작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은 십자군전쟁을 다룬 영화다. IMDB
기존 영토전쟁과 달리 십자군전쟁은 신의 영광을 위해서, 백년전쟁은 왕위 계승이라는 그 나름의 명분을 갖고 있었다. 두 전쟁의 성격은 확연히 달랐지만, 십자군전쟁의 결과와 백년전쟁은 서로 연결돼 있다. 백년전쟁은 십자군전쟁의 특수(特需)와 반사이익에서 소외된 두 나라의 절실함과 조급증 때문에 야기된 전쟁이었다. 두 전쟁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시작됐는지 살펴보자.
중세의 세계대전, 십자군전쟁
지난 호(신동아 3월호)에서 얘기했듯 동로마제국이 사산왕조와 이슬람 제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급속히 약해지자 그동안 손을 잡았던 교황과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는 경쟁 관계로 들어섰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이 서임권을 가지면서 우위에 서기는 했지만, 이러한 우위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셀주크튀르크의 등장은 국제 정세에 새로운 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의 발단은 이렇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바스왕조가 힘을 잃고 셀주크 왕조가 힘을 키워갔다. 셀주크튀르크는 1040년부터 1157년까지 100여 년간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했다. 셀주크의 명장 투그릴 베그는 중동 지역을 평화롭게 장악하기 위해 군대가 약탈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로 인해 군대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벌인 것이 기독교 세계에 대한 원정이었다. 투그릴 베그의 뒤를 이어 술탄이 된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은 1071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에서 동로마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를 포로로 잡았다. 동로마제국 황제의 무릎을 꿇린 알프 아르슬란은 자기 신발에 입을 맞추라 명한 뒤 그를 풀어주었다. 죽음보다 못한 치욕이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후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서유럽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신께서 원하신다’라고 외치면서 기독교 국가들에 이슬람 제국과 성전(聖戰)을 벌이자고 호소한다. 중세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십자군전쟁은 이렇게 시작한다.
십자군전쟁이 종교적 동기에 의해 발생한 것이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종교전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전쟁은 복합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고, 본질적 요인은 종교가 아닌 다른 것에 있었다. 당시에는 노르만인의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과 같이 주변 세계에서 정치·군사적 지각변동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십자군전쟁도 이런 지각변동과 관련이 있었고, 종교는 단지 명분을 제공한 것뿐이었다.
교황이 참전을 호소한 것은 세속군주들의 권위를 누를 만한 위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황은 카노사의 굴욕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세속군주들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고 있는 세속군주들이 언제까지나 교황 밑에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교황과 사제들은 십자군원정에 참여한 영주들로부터 그들의 재산, 특히 영지를 위탁받았다. 소유권을 넘긴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하는 동안 부수적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십자군전쟁은 교황에게 일석이조의 방책이었다.
교황은 영주와 기사들에게 전쟁에 참전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고, 승리해서 얻은 이슬람 제국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약속했다. 봉건영주와 하급 기사들은 영토에 대한 욕심 때문에, 농민들은 봉건제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가 위해, 상인들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욕망 때문에 저마다 원정에 뛰어들었다. 이런 현실적 동기들이 모험심 등 잡다한 동기와 뒤섞이며 하나의 신앙적 광기를 만들어냈다.

셀주크뒤르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제국 황제 로마노스 4세를 포로로 잡아 신발에 입을 맞추게 했다. 위키피디아
십자군전쟁, 8차에 걸쳐 200년간 지속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부터 8차례에 걸쳐 200년 동안 계속됐다. 제1차 십자군원정(1095~1099)은 성공적이었다. 이교도들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십자군은 수만 명의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소아시아에 네 개의 십자군 왕국을 세웠다. 제2차 십자군 원정(1147~1148)은 제1차 십자군원정 이후 팔레스타인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이슬람이 에데사 백국을 점령하자 교황은 다시 유럽의 군주들에게 십자군의 결성을 호소하면서 시작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제2차 십자군은 특별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고, 소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이슬람 군대에 패배해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 살라딘(Saladin)이 등장하면서 이슬람이 기독교를 압도하기 시작한다. 쿠르드족 출신의 수니파 이슬람이던 살라딘은 1174년에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무너지자 아이유브 왕조를 창시한다. 그는 지하드(성스러운 전쟁)를 시작했고 1187년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에 넘어갔다. 기독교의 예루살렘 통치는 100년을 넘기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살육과 파괴를 철저히 금지했기 때문에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공정하고 관대했으며 기사도적 행동으로 이슬람 세계에서뿐 아니라 기독교 세계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이때의 시대상을 느껴보고 싶다면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05년 작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을 추천한다. 강직한 장군 티베리우스가 극 중에서 내뱉는 대사는 십자군전쟁의 본질을 잘 요약해 준다. “예루살렘은 내 전부였고, 모든 걸 바쳤지. 하지만 깨달았네. 신은 핑계였을 뿐 이 전쟁의 목적은 영토와 재물이었어.”
1189년 기독교 국가들은 다시 십자군을 조직해 제3차 원정(1189~1192)을 시작했다.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리프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직접 원정에 참여한 막강한 군대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1세는 원정 도중 물에 빠져 사망하고,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불화가 생겨 프랑스로 돌아가 버렸다.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게 기독교인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왕가가 노르만족의 시칠리아를 회수했으며, 영국은 리처드 1세가 죽은 뒤 프랑스와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독일은 내전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십자군전쟁을 주장하고 나섰다. 1202년 몬페라토, 플랑드르, 발루아,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함께 십자군을 결정했다. 이것이 제4차 십자군전쟁(1202~1204)이다.
이 전쟁은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십자군은 원정에 돈을 대기로 한 베네치아의 주장을 받아들여 예루살렘이 아닌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했다. 십자군전쟁에 돈을 대기로 했던 베네치아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결정한 것이었다. 그마저도 전쟁 자금이 걷히지 않자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주장에 따라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의 차라를 공격해 일주일 만에 함락시킨다. 베네치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차라가 헝가리 왕국의 치하로 들어간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다음은 훨씬 더 황당하다. 빼앗긴 제위를 되찾으려 망명한 동로마제국 황세자의 제안에 따라 뜬금없이 기독교 세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것이다. 그들은 이 도시의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철저히 파괴했다. 당시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을 정도로 교황의 힘이 절정에 달했던 가톨릭 전성기였다. 이런 시기에조차 옳고 그름보다 실리, 즉 돈의 힘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제4차 십자군전쟁 뒤에도 명분 없는 십자군전쟁은 몇 차례 더 발발했다. 초반의 종교적 대의명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됐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누가 대느냐가 원정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됐다. 신의 도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성전(聖戰)은 그야말로 돈을 위한 전쟁으로 변질됐다. 그동안 기독교 교리에 억눌려 있던 재물에 대한 욕망은 12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함께 분출됐다. 성스러워야 할 십자군전쟁이 오히려 물적 욕망 실현의 창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란 긴 이름을 가진 템플기사단. Gettyimage
대부업자가 된 템플기사단
중세에 돈의 힘이 강하게 작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가 템플기사단이다. 이 기사단의 공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신전의 가난한 기사들’이라는 너무 긴 이름이었다. 붉은 십자가가 새겨진 흰 가운을 입고 성지 순례자를 보호했을 때 유럽 각국은 그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보내줬다. 기사단에 땅을 헌납하는 사람도 있었고 돈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 이후 이슬람 제국이 예루살렘을 포함한 소아시아를 다 차지하면서 템플기사단은 할 일이 없어졌다.
예루살렘 철수 뒤에도 명분 없는 십자군전쟁이 계속되자 템플기사단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잡았는데, 그것이 대부업이었다. 돈이 없는 영주와 기사는 궁수와 말, 무기 등을 마련하기 위해 템플기사단에 돈을 꿔서 기사단을 꾸렸고, 템플기사단은 참전 기사들을 대상으로 대금업(이자율 30~40%)을 했다. 그동안 예루살렘 원정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하고 화폐와 지급결제에 관한 지식을 쌓은 것이 대금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줬다.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가난한 기사들은 전쟁에서 전리품을 얻지 못하자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유대인들을 살육해 돈을 빼앗는 일도 허다하게 일어났다. 십자군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템플기사단의 대부업은 계속됐다.
십자군전쟁 실패 이후 교황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교황에 대항해 힘을 키워나가던 군주들이 보기에는 방대한 조직과 힘을 갖춘 템플기사단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절대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프랑스의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에게는 더욱 그랬다. 결국 필리프 4세는 템플기사단을 이단이라고 선언(1307)하고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몰수하고 모두 화형에 처했다. 기독교인들의 금융업이 권력의 철퇴를 맞은 첫 사건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프 4세 역시 템플기사단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템플기사단을 처단한 것은 어쩌면 그 돈을 갚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슷한 이유로 필리프 4세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진 거액의 빚을 갚는 대신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하기도 했다. 고리대금업자를 처벌한 것은 그 당시 시대상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기 위해 채권자를 살해한 것은 지금의 상식과 윤리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오랫동안 신용과 금융업이 프랑스에 자리 잡지 못했다.
돈의 힘이 강하게 작동했던 시대였지만 이자, 즉 돈이 돈을 낳는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돈이 교환의 매개로만 사용돼야 하고 이자를 받는 행위는 돈의 용도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교회법에서 이자를 금한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자를 주고서라도 돈을 구하고 싶은데 교회에서 이를 금하니 이자를 주는 온갖 편법이 난무했다. 외국 돈으로 갚으면서 이자를 환전수수료에 포함해 받거나 환어음을 통해 할인하는 방법 등이 사용되면서 대부업 금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금융 기법의 탄생을 불러왔다.
서유럽 교역 중심지, 플랑드르
십자군전쟁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전쟁이었지만, 중세 유럽에 미친 경제적 영향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십자군원정 과정에 로마의 도로들이 다시 살아나면서 지역과 지역을 이어줬다. 소아시아에 세워진 기독교 왕국에 물자를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교역이 활성화되고 화폐경제가 되살아났다. 유럽과 소아시아를 이어주는 거점 도시들이 생기고 번성했다. 대표적 도시가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북부 도시국가들이다. 이 도시들은 유럽과 동방 간의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형성해 나갔다.
이 지중해 상권은 점차 아우크스부르크와 같은 독일 남부의 중개 도시들을 통해 북해의 한자동맹 상권과 연결됐다. 동방과 교역이 번성하면서 동양으로부터 나침반, 화약, 종이, 아라비아 숫자 등이 전파됐다. 이 놀라운 발명품들은 후일 서유럽이 세계를 제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침반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을 이끌었고, 화약은 총포의 발명으로 이어져 서유럽 국가들의 군대를 최강으로 만들었다. 아라비아 숫자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로 전해져 상업 혁명과 회계의 발전에 기초를 제공했다. 종이는 인쇄기 발명과 함께 일반 대중에게 새로운 사상을 전파했다. 동양의 발명품들은 그 진가를 알아채서 이를 발전시키고 상용화한 유럽을 한 단계 도약시킨 강력한 도구가 됐다.
이렇듯 십자군전쟁으로 12~13세기 유럽 전역에 시장경제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러한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나라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영국과 프랑스다. 경제 물결의 두 축, 이탈리아의 지중해 무역권과 북유럽의 한자동맹 무역권, 그리고 이 두 축을 연결하는 루트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전쟁의 반사 이득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영토 확장 정책을 통해 성장의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백년전쟁(1337~1453)이다. 표면상으로는 영국 왕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전쟁이지만, 실제 전쟁의 원인은 경제 중심지였던 플랑드르(Flanders) 지방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플랑드르는 어떤 지역일까. 이곳은 한자동맹과 지중해 경제권을 연결하는 서유럽의 교역 중심지였으며, 모직물 생산의 중심지였다. 지중해 무역권은 제노바 등의 해양 루트를 통해 이베리아반도, 그리고 대서양을 돌아 플랑드르의 브뤼헤(브뤼허)와 연결됐다. 지금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플랑드르는 그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영국의 동화를 각색한 일본 만화 ‘플란다스의 개’의 플란다스가 바로 플랑드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 왕이 왜 프랑스의 왕위 계승과 플랑드르의 영유권을 주장한 것일까. 이야기의 시작은 11세기로 올라간다. 십자군전쟁이 시작되기 30년 전인 1066년 플랑드르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해 노르만 왕조를 수립했다. 정복왕 윌리엄의 선조는 바이킹인데 계속 프랑스를 침략해 오자 프랑스 왕이 이들에게 영지를 주고 프랑스인으로 귀화시켰는데 이들이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됐다. 그 후 200년이 지나 프랑스의 왕권이 강화돼 귀족들의 영지를 흡수하면서 플랑드르는 다시 프랑스 왕의 영토로 편입됐다.

백년전쟁은 표면상 영국 왕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전쟁이다. Gettyimage
잔 다르크, 프랑스를 구하다
플랑드르는 영국에 중요한 지역이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토지가 척박해서 양을 키우는 목축업이 성행했다. 당시 영국산 양모는 플랑드르에 수출됐고, 그곳에서 고도의 기술로 가공돼 제품화됐다. 영국과 플랑드르는 양모 제품의 생산공정 때문에 강한 연대감이 있었다. 영국은 당연히 플랑드르를 지키고 싶었고, 플랑드르도 양모를 공급해 주는 영국에 속해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샤를 4세가 죽자 사촌 동생인 필리프 6세가 왕위를 이으면서 카페 왕조가 단절되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됐다. 이때 영국 왕 에드워드 3세가 자신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여동생이었으니, 그는 샤를 4세의 외조카였고 혈통 상으로는 필리프 6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자 에드워드 3세는 군대를 동원해 프랑스를 침공했다.
전쟁 전반에는 영국이 우세했다. 에드워드 3세가 지휘한 영국군은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고 도버해협의 요충지 칼레를 함락시켰다. 그 후 푸아티에, 아쟁쿠르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며 전쟁에서 이기는 듯했다. 그러나 유럽에 흑사병이 퍼지는 바람에 전쟁이 중단됐다. 흑사병이 물러가자 두 나라는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반란이나 군비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전쟁은 중단과 재개를 반복했다.
영국은 전쟁 자금을 마련하고자 시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다. 1377년 영국 리처드 2세 때 정부의 실질적 수장이던 랭커스터 공작 ‘존’은 시민들에게 인두세를 부과했다. 문제는 인두세를 한 해에 그치지 않고 몇 해에 걸쳐 부과하면서 세율도 올렸다는 것이다. 더는 세금을 감당할 수 없자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농민의 난은 실패했지만, 그 영향력은 컸다. 의회는 임금 한도를 폐지했고, 영주들은 농노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줬다. 인두세를 없앴고 그 후로 300년간 영국에는 인두세가 없었다. 의회는 백년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대신 군대를 줄이기로 했다. 그 후로 튜더 왕가가 들어설 때까지 해외에서 벌이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세금 인상은 없었다.
1415년 영국의 헨리 5세와 프랑스 샤를 6세가 다시 싸우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 귀족들은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헨리 5세는 부르고뉴파와 손을 잡고 프랑스에 승리를 거두고 트루아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는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2년 후 헨리 5세와 샤를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샤를 6세의 아들 샤를 7세는 트루아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이에 프랑스 북부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프랑스 남부를 공격했고 샤를 7세는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도망쳤다. 이때 나타난 프랑스 구국의 영웅이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프랑스 군대를 지휘한다. 잔 다르크의 용기에 힘을 얻은 프랑스 군대는 오를레앙을 지켰고, 1450년 노르망디에서 영국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3년 후에 영국은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영토에서 물러나면서 백년전쟁은 막을 내렸다.
표면상으로만 보면 백년전쟁은 이와 같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영국이 프랑스에서 철수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플랑드르에 거주하던 모직물업자들이 전쟁터가 된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이전했다. 전쟁으로 영국의 양모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지 못하고 생산 활동도 쉽지 않자 원료의 생산지인 영국으로 아예 이주해 버린 것이다. 영국에는 전쟁도 없고 양모를 싼값에 구할 수 있기에 플랑드르 모직물업자들에게는 영국에서 사업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렇게 플랑드르의 기술과 자본이 영국으로 이전했다.
동로마제국 멸망, 새로운 시대 서막 알리다
백년전쟁을 시작할 당시 영국은 모직물 원료인 양모 수출국이었다. 이후 시간이 갈수록 영국에서 모직물 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에는 원료 생산에서 제품화까지 모직물의 일괄 생산공정이 영국 국내에서 구축됐고, 모직물 수출이 급증하면서 영국은 무역 대국으로 변모했다. 플랑드르 기술과 자본을 얻은 영국이 플랑드르 땅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이 비싼 비용을 치르면서 프랑스와 전쟁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백년전쟁의 종식을 고하는 1453년, 오스만제국의 대포가 허울뿐이던 동로마제국을 무너뜨렸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은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비잔티움을 정복한 이슬람 제국의 칼끝은 이제 유럽을 겨냥했다.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유럽에 국민 의식이 태동했고, 이러한 의식은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사라진 상비군 개념을 부활시켰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려는 국토회복운동은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근세는 중세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세상의 확장, 새로운 시대정신, 화약으로 인한 무기 혁신은 전 세계를 엄청난 변혁과 격동의 시대로 몰고 갔다. 그야말로 창발(創發)의 시대였다.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 같던 유럽은 15세기 말부터 100년이 넘도록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 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 ‘역사는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