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상상력으로 세운 서양 문화 바벨탑

  • 박기현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dumal@chonnam.ac.kr

    입력2007-12-06 14: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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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질베르 뒤랑 지음/진형준 옮김/문학동네/712쪽/3만8000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질베르 뒤랑(1921~)이 근 50년 전에 출간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한국어 번역 작업 11년 만에 마침내 홍익대 진형준 교수에 의해 완역됐다. 그간 여러 사정이 있었겠으나 한 권의 인문서적을 11년 동안 붙들고 인내한 출판사의 노고도 치하할 일이고, 번역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닐 거라고 독자도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사실 상상력 연구의 고전(古典)으로 알려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단숨에 읽히는 책이 아니다. 특히 20세기에 이르러 이미지와 상상력의 발견에 공헌한 사상가들의 편력과 연구 방법을 소개하는 서론 부분은, 생소한 고유명사와 더불어 종교, 민속학, 상징학, 심리학, 철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개념이 자칫 독자의 기를 꺾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책 전체가 난삽하다는 말은 결코 동의어가 아니다.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개 단거리 경주용이 아닌 마라톤용이다. 일단 준비 과정이 필요하고 적절한 호흡법도 필요하다. 그래도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닥치지만 이겨내야 한다.

    충동과 억압을 넘나드는 상상력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1960년대 프랑스 구조주의의 산물이다. 하지만 질베르 뒤랑이 추구하는 구조주의 방법은 다른 구조주의자들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다.



    우선 인간의 상상력이 자유롭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상상력의 절대성 및 자주성을 주장하는 자신의 스승 바슐라르의 뒤를 따르면서도, 바슐라르의 현상학이 시의 현상학에 국한된다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시와 과학을 감싸는 상상력의 힘을 강조하며, 레비스트로스가 행한 신화의 구조 연구에 매혹을 느끼면서 동시에 신화의 의미 연구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형식적 구조주의와 역사적인 연구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셈이다.

    뒤랑이 보기에 하나의 이미지는 결코 하나의 기호가 아니다. 하나의 이미지는 물질적으로 의미를 지니며, 그 이미지는 각각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 상징성은 인간이 진화해온 환경과 인간 정신 고유의 특성이 낳은 산물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이미지의 세계는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현실, 사회 구조, 여성의 다산성이나 남성의 힘에 대한 의식 등 지각의 모든 객관적 여건이 내면 깊은 곳의 충동과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다.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면 충동과, 억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실, 이 두 차원 사이를 상상력이 끊임없이 왕복하는데, 뒤랑은 이 정신적 움직임의 궤적을 인류학적으로 따라간다. 그래서 인간 활동 전반에 걸쳐 이미지를 관찰하고, 정신분석, 의례와 제도, 종교와 상징, 시와 신화, 도상학 혹은 정신병리학까지 포괄하는 상상계의 문법과 체계를 분류한다.

    상상력에 대한 바슐라르의 4원소론에 한계를 느낀 뒤랑은 아동심리학에서 출발하는 이미지 분류 원칙을 참조한다. 그 어떤 문화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보편적 심리 토대를 지니고 있는 갓난아이의 행태에서 인간 사유의 근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베흐테레프 반사학에서 분류의 원칙과 ‘지배 반사’ 개념을 차용한다. 베흐테레프를 비롯한 반사학자들은 인간에게 세 가지의 다른 모든 반사를 억제하는 ‘지배 반사’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들은 우선 갓난아이에게서 두 가지 지배 반사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첫 번째 지배 반사는 ‘자세’ 지배 반사로서 인간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반사다. 만일 어린아이의 몸을 수직으로 세우면 그 지배 반사가 다른 모든 반사를 조정하고 억제한다.

    두 번째 지배 반사는 신생아의 ‘영양 섭취’ 지배 반사다. 이는 ‘입술로 빨아들이기 반사’와 ‘머리를 적절한 방향으로 위치시키는 반사’를 말한다. 신생아가 젖을 빨 때 영양 섭취 반사는 다른 반사들을 제어한다.

    세 번째 지배 반사는 ‘짝짓기’ 지배 반사다. 사실 이 반사는 성장한 수컷 동물을 통해 밝혀낸 반사다. 이 지배 반사는 실험적인 증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뒤랑은 이 난점을 정신분석학과 생리심리학에서 보충하고자 한다. 이들 학문에서는 성적인 충동이 동물의 행동에서 매우 강력한 지배 요소가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갓난아이의 ‘지배 반사’

    뒤랑은 이러한 반사학을 길잡이 삼아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의 500여 쪽(번역판 목차 중 제1권과 제2권)에 달하는 원형과 상징의 거대한 분류 체계를 세운다. 그는 세 가지 지배 반사에 입각해 상상계의 주된 내용을 세 가지 구조 혹은 도식 그룹으로 분류한다.

    첫째는 분열형태 구조로서 이는 자세 지배 반사와 연관된다. 분열형태 구조라고 뒤랑이 명명한 것은 이 구조가 분열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분열, 분할, 대조가 중시된다.

    둘째는 신비 구조로서 이는 분열형태 구조와 상반되는데, 영양섭취 지배 반사와 연관된다. 동화(同化), 동일시, 결합 같은 행위가 이 구조의 특징을 이룬다.

    그리고 마지막은 종합 구조인데, 상이한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과정을 강조하기에 ‘종합적’이라는 형용사를 부가했다. 그러나 이는 정립과 반정립의 지양을 의미하는 헤겔식 종합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후일 뒤랑은 헤겔적인 함의를 피하기 위해 ‘종합적’이라는 형용사 대신에 ‘산종적(散種的)’ 혹은 ‘드라마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구조는 짝짓기 지배 반사와 결부된다. 무한한 반복의 힘을 표현하는 바퀴나 나무 원형으로 분화되는 리듬 도식들이 이 구조로 분류된다.

    뒤랑은 이 세 구조를 두 개의 체제로 설명한다. 분열형태 구조는 이미지의 낮 체제에, 그리고 신비 구조와 종합 구조는 이미지의 밤 체제에 배속된다. 이처럼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은 경험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인간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와 상징을 이 두 ‘체제’와 세 ‘구조’의 틀 속에 분류함으로써 상상계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실재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동양의 상상계다

    이미 50년 전에 상상력의 거대한 문법체계를 완성한 질베르 뒤랑이 최근 20여 년에 걸쳐 관심을 가진 주제는 문화적이면서 예술적인 상상계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 연구를 통해 상상계의 변화가 주기적이며, 리듬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랑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공시태(共時態)적이라면, 이후의 연구들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에 나타난 오류를 교정하면서 상상계의 또 다른 면, 즉 차이나 서로 구별되는 변별성 있는 요소들을 신화 분석 혹은 신화 비평이라는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와 20세기는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 그리고 최근에는 헤르메스라는 세 신화 구조가 연이어 서양을 지배해왔다고 지적한다.

    질베르 뒤랑의 이러한 최근의 업적은 이미 진형준·유평근(전 서울대 불문과 교수)에 의해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살림, 1997), ‘신화비평과 신화분석’(살림, 1998)이란 제목으로 번역 소개된 바 있다. 마침내 두툼한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마저 번역됐으니 상상학에 관한 기본적인 저서들은 대부분 번역된 셈이다.

    이제 우리는 서구의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참조하면서 동양의 상상계 구조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우리나라의 문화 원형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질문할 차례다. 그래야 뒤랑이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 한국어판 서문에서 우리에게 던진 질문 - “한국 불교의 ‘상징 사전’을 언제나 가질 수 있나요?”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신화 백과사전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요?” -에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족이지만, 번역에 기나긴 시간을 투자한 번역자의 노고를 치하하며, 다만 신화와 종교, 철학에 대한 주석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려웠음을 밝힌다. 서양 문명 전체를 아우르는 종합서이기에 이미 많은 원주와 번역자 주석이 있음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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