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부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입력2007-12-07 13: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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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넓은 영토, 강력한 황제 권력, 국제상업도시의 성황으로 중국은 일찍부터 다양한 음식문화를 일구었다. 게다가 지난 20여 년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다원(多元)과 전통에 ‘퓨전’을 결합,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여전히 화려한 식탁 앞에 앉지 못하는 대다수 인민의 박탈감과 400여 소수민족의 전통음식문화 소멸이라는 그림자가 존재한다.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2006년 5월 초순 노동절이 막 끝난 늦봄에 나는 베이징에 갔다. 간 김에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이던 사오셴수(邵獻書) 선생을 오랜만에 만났다. 상하이 사람 특유의 사투리를 쓰면서 반갑게 나를 맞은 그는 이제 74세의 노인이 됐다. 그러나 1998년 새로 장만한 그의 집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잔다. 중국에선 식사하자는 말을 먼저 꺼낸 사람이 밥을 사게 마련이다. 요즘 중국인들의 형편이 제법 넉넉해지긴 했다지만, 비교적 값이 싼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겠구나 생각했다.

    저녁이 되어 아들이 귀가하자 선생 부부와 아들, 그리고 나는 집을 나섰다. 그런데 선생의 발걸음이 학교를 향하지 않는다. 내가 어느 식당으로 가느냐고 묻자 이 근처 호텔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데 맛이 아주 좋단다.

    내심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들을 따랐다. 식당 내부는 제법 근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저녁 6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손님도 제법 많았다. 10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무려 12개, 그리고 룸도 여러 칸 있으니 상당히 큰 식당이었다.

    자장·#47760;의 부활



    테이블에 앉은 후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한 가지씩 주문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보니 중국인의 소득수준을 고려하면 음식 값이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가격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전채(前菜)부터 시작해 일곱 가지 음식을 시켰다. 손님이 많아서 조금 시끄럽기는 했지만, 우리는 그동안 못한 이야기와 내가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주문한 음식이 모두 나오자 마지막에 면(麵)을 먹자고 선생이 제안했다.

    선생이 시킨 면은 ‘자장·#47760;(炸醬麵)’이다. 내가 베이징에 살던 1994년부터 1998년까지만 해도 자장·#47760;을 시내 식당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상하이 사람이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선생이 어떻게 자장·#47760;을 먹겠다고 하는가. 나는 대뜸 그 까닭을 물었다. 선생 대답이 재미있다. 문화대혁명 때 여름이면 먹던 베이징 음식이 요사이 부활해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맛도 괜찮아서 좋단다. 선생의 아들은 자장·#47760;을 왜 먹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선생 부부를 바라본다.

    사실 1992년에야 중국대륙과 수교를 했지만 우리에게 중국은 그다지 낯선 나라가 아니다. 역사책에서도, 역사소설에서도, 심지어 사상과 종교에서도 중국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특히 1880년대 화교들이 한반도에 처음 중국식당을 연 이래 10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들어와서 대부분 한국인의 손에 넘어갔다. 오늘날 중국식당은 한국인이 사는 동네의 골목골목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른바 ‘중국집’으로 통하는 이들 식당으로 인해 한국인에게 ‘북경요리(北京料理)’나 ‘산동요리(山東料理)’나 ‘사천요리(四川料理)’라는 단어는 너무나 익숙했다. 그래서 수교하자마자 베이징에 간 한국 사람들은 중국음식을 남의 나라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심하게 비유하면 동네 중국집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며 먹겠다고 덤벼든 경우도 많았다.

    심지어 무작정 식당에 가서 ‘탕수육’ ‘류산슬’ ‘양장피’ ‘짜장면’을 외치는 한국 관광객도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음식 이름이 중국어인줄 알았는데 그들이 알아듣질 못하자 “도대체 우리나라 중국집 음식과 베이징의 중국음식이 왜 이렇게 다르냐”고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음식에 고명으로 올라오는 ‘샹차이(香菜· 고수)’ 때문에 중국음식이 싫다는 한국인도 생겼다. 또 간이 너무 짜서 도저히 못 먹겠다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수교 이후 만난 중국의 베이징에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동네 중국집의 ‘북경요리’는 없었다. 한국에서 중국음식의 대명사가 바로 ‘자장면’인데, 그것도 없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자장면타령’을 읊조리던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에는 자장면이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요사이 이 이야기는 당연지사가 됐다.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매년 10월 ‘자장면축제’를 개최하면서 더욱 우쭐해진다. 심지어 자장면의 원조가 바로 인천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자장면을 선생은 자연스럽게 주문한다.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최근 중국에서 복원된 중국 전통음식 자장몐. 예전 베이징 사람들은 여름엔 자장몐을, 겨울엔 다루몐을 즐겨 먹었다.

    나는 이미 졸저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2000년)에서 중국에는 자장면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의 북방인들, 특히 베이징이나 산둥(山東)의 노인들은 “여름에는 자장·#47760;(炸醬麵), 겨울에는 다루·#47760;을 먹어야 제격이다”라고 말한다. 자장·#47760;은 국물이 없어서 여름에 먹기 적당하고, 다루은 돼지고기를 기름에 볶은 후 물을 붓고 각종 채소, 달걀 푼 것, 석이버섯 등을 넣어 끓인 국물에 면을 만 것이라 추운 겨울에 체온을 따뜻하게 하는데 안성맞춤이라고 여긴 사람들이 바로 베이징 토박이들이었다.

    1996년, 베이징 중심가인 중국미술관 정문 건너편에 한국식 자장면 식당이 문을 열었다. 서울 신당동에 살던 화교 부부가, 한국인이 베이징에 많이 사는데 그들이 한국식 자장면을 그리워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장·#47760;의 고장에 한국식 자장면 식당을 차린 것. 대성공이었다. 마침 그 식당이 베이징의 명동인 자금성 동편 왕푸징(王府井) 북쪽 끝 네거리에 위치해 손님 중에는 중국 젊은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들 역시 한국식 자장·#47760;을 먹어보고는 찬사를 보냈다.

    1996년 어느 날 그 식당에서 만난 27세의 왕씨는 격분했다. “왜 중국음식인 자장·#47760;을 한국식으로 바꾸어 베이징에서 파느냐. 그동안 우리는 뭘 했기에 자장·#47760;을 한국에 빼앗기고 말았나.”

    당시만 해도 중국에선 한국의 경제발전 비결을 배워야 한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일었다. 경제도 그러한데, 심지어 중국인의 자존심인 음식까지 한국에 빼앗겼다고 한탄하는 젊은이의 안타까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이런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국 경제가 세계 대국의 위상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중국 것’을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는 대도시 젊은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여기서 자장면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를 풀고 가자. 1882년 임오군란에 개입한 청나라의 리훙장(李鴻章·1823~1902)은 군사를 이끌고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입성했다. 제물포는 갑오농민전쟁 이후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조차지가 됐다. 자연스럽게 산둥 출신 중국인 노무자들이 하역작업에 동원됐다.

    중국 노무자들을 위해 중국식당이 생겼고, 그곳에서 가장 값싼 음식이 자장·#47760;이었다. 일제 강점기엔 화교를 ‘제비’라고 불렀다. 이들은 돈을 벌어 설날인 춘절만 되면 마치 강남 가는 제비처럼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산둥 출신에 비해 푸젠(福建)이나 광둥(廣東)에서 온 중국인은 대부분 거상(巨商)이었다. 이들을 위해 운영된 식당이 바로 ‘청요리(淸料理) 집’이었다. 청요릿집은 기생집이나 요정처럼 시설 규모도 크고, 메뉴도 대부분 요리라고 할만한 것이었다.

    자장·#47760;이 본격적인 대중음식으로 한국에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 이후다. 농업, 그중에서도 채소 농사를 많이 짓던 화교들에게 농토를 가지지 못하도록 법적 규제를 하자 그들이 중국식당을 차렸고, 그때부터 한국에서 ‘중국인’하면 중국식당 주방장으로 인식됐다.

    이때 주된 메뉴가 바로 자장면·짬뽕·우동이다. 짬뽕과 우동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화교를 통해 들어온 음식이라 일본식 이름이 붙었다. 특히 자장면이 인기를 누리자 맛과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진화하기 시작했다. 감자나 양파가 들어가고, 중국 된장도 단맛이 나면서 걸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중국에는 한국식 자장면’이 없다는 말이 옳다. 한국식 자장면의 진화는, 중심부에서는 사라진 문화적 요소가 주변부에서 강세를 보이는 대표적인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적어도 1990년대 베이징의 일반 식당에서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던 ‘자장·#47760;’이 왜 2006년에 부활했을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인들은 더 이상 아시아의 작은 용들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지 않게 됐다. 아시아를 강타한 ‘IMF 구제금융’ 사태 때 한국은 중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처지에 몰렸다. 중국 인민들은 당시에 자신의 조국이 아시아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1980년대 개혁개방을 하면서 외부를 향해 끝없는 경제적 구애를 펼치던 중국이 2000년이 되면서 미국과 경쟁하는 유일한 대국이 됐다. 덩달아 주머니도 두둑해진 중국인, 특히 베이징이나 상하이의 젊은이들은 더는 자신의 조국을 후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라오베이징(老北京)’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베이징 화자차위안. 200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엔 ‘소황제’들을 위한 음식점이 급격히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외식을 좋아하는 중국 소비자를 겨냥해 2000년부터 새로운 분위기의 식당들이 등장했다. 그중 하나가 ‘라오베이징(老北京)’이란 간판을 건 식당이다. 문자 그대로는 ‘오래된 베이징’이란 뜻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예전 베이징의 풍속에 대한 추억이다. 적어도 20세기 초 베이징은 상하이와 함께 아시아의 중심 도시였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당시 휘황찬란하던 베이징의 소비 행태를 오늘날 다시 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추억 즐기기’ 풍조가 나타났다.

    당시 베이징에서 가장 잘사는 동네였던 ‘야윈춘(亞運村)’에는 100년 전 베이징에서 유행하던 식당을 본뜬 식당들이 들어섰다. 종업원들은 100년 전 사람들이 즐겨 입던 옷을 갖춰 입었다. 흡사 1980년대 초반에 유행하던 홍콩 영화에 나오는 20세기 식당 같다. 더욱이 종업원들은 특유의 ‘r’ 발음이 강한 베이징 사투리로 호객을 한다. 음식 이름에도 ‘라오(老)’라는 말이 많이 붙었다. 당연히 당시 유행하던 자장·#47760;도 ‘라오’ 메뉴에 포함됐다.

    1990년대, 문화대혁명 때 고생하면서 먹던 음식들과 그 풍경을 옮겨놓은 식당이 베이징에 한 군데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0년, 이렇게 100년 전 베이징의 정취를 재현한 식당이 유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 안정이다. 잘 살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전 고생하던 시절을 긍정적인 추억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1996년부터 시작된 ‘라오자오(老照片)’이라는 사진잡지의 대성공은 중국 사회의 문화적 복고주의를 부르는 출발점이었다.

    여기에 시장경제로 인해 정신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방법으로도 ‘전통문화’는 필요했다. 193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 도시였던 상하이의 상업 발달은 중국인의 자존심을 세우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른바 ‘전통문화’와 100년 전 ‘시장경제의 꽃’을 내세우는 이 문화정책이 복고주의를 불러일으킨 두 번째 이유다.

    하지만 이러한 유행은 2003년이 되면서 퇴조하기 시작한다. 홍콩 영화 ‘정무문(精武門)’에 등장하는 식당들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초라함을 재현하여 잠깐의 향수를 느꼈지만, 경제적 부를 그곳에서만 소비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았다.

    더욱이 음식 맛과 함께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중국의 21세기 젊은 소비자에게 이러한 유행은 한국식으로 말하면 ‘선술집’의 재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좀더 전통적이면서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필요했다.

    21세기형 외식산업

    베이징 둥즈먼(東直門) 전철역의 서쪽 ‘궈제’거리에 있는 화자차위안(花家恰園)이란 식당에서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19세기 이전 베이징 사람이면 살고 싶어 하던 대저택이 사합원(四合院)이다. 베이징의 전통 가옥으로 정원과 여러 칸의 큰 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종족(宗族·가문)의 핵심 가족이 이곳에서 살았다. 화자차위안은 이 사합원을 개조해 만든 식당이다.

    입구에 전통적인 분위기가 물씬 나도록 청대 대문을 달았고, 정원에는 햇볕은 비치고 비는 들이치지 않게끔 천장을 꾸며 테이블을 배치했다.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정원의 북쪽에 작은 무대를 설치하여 중국 전통악기를 직접 연주한다. 마치 서양식 레스토랑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음식을 먹는 분위기가 중국식으로 연출된다.

    1990년대만 해도 이런 식당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주된 손님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그 양상이 바뀌었다. 여러 곳에 이런 식당이 등장했으며, 젊은이들도 이곳에서 식사하기를 즐긴다. 특히 요즘 젊은이의 취향에 맞춰 짜지도 맵지도, 그리고 식용유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 느끼하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중국음식의 기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값도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황제요리인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제공하는 식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싸다. 1인당 60위안(약 7200원)이면 충분하다. 네 사람이 함께 갈 경우, 200~300위안(약 2만4000~3만6000원)이면 전통적으로 꾸며진 장소에서 전통 음악을 들으며 맛있는 전통음식을 즐길 수 있다. 이 정도 값이면, 베이징의 대학 졸업자가 받는 월급(3000위안)의 50분의 1쯤 된다.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윈난 리장의 나시족 전통 음식인 수이먼바바를 만들어 파는 노점상.

    만일 중관춘(中關村)에서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는 사오 교수의 아들이 이 식당에 올 경우, 그다지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한 달에 1만위안 이상을 벌기 때문이다. 그래도 1500만이 넘는 베이징 인구 중에서 이 식당에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 중상류층이다. 그들의 주머니가 예전같지 않게 넉넉해졌기에 이런 식당들이 성업을 할 수 있다.

    이 식당 주인인 화(花)씨는 이제 더 이상 베이징·산둥·쓰촨·광둥(廣東)과 같이 지역 이름이 붙은 음식을 판매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베이징에서 가장 값비싼 음식은 ‘광둥요리’였다. 해산물이 많이 들어가고 맛도 담백해 인기를 누렸다. 이에 비해 ‘쓰촨요리’는 주로 중하류 계층의 사람들이 값싸게 먹는 음식이었다. 그래도 베이징 사람들은 베이징 가정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에 자주 갔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에 이러한 취향에 변화가 생겼다. 각 지역음식이 모두 고만고만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젊은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화씨는 ‘소황제’들을 주된 소비자로 겨냥한다면 지역명칭을 붙인 음식점은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 대안은 바로 전국의 음식들을 통합해 ‘신베이징인(新北京人)’의 입맛에 맞는 소위 퓨전요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이 식당에서는 ‘화자차이(花家菜)’라고 부른다.

    주인 화씨의 성을 붙인 화자차이는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를 배운 주방장에게 중국 음식을 변형하도록 한 결과 탄생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중국 음식이지만, 맛을 보면 훨씬 부드럽다. 더욱이 최근 중국 중상류층에서 화두가 된 ‘녹색식품(綠色食品)’, 즉 건강을 위해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이들이 내세우는 마케팅 전략이다.

    질보다는 양을 따지던 지난 세기 중국 식당의 표어는 이제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서울이나 도쿄나 뉴욕에서 강조되는 21세기형 외식산업이 중국의 대도시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2008년에 열릴 베이징올림픽은 21세기라는 ‘다원(多元)’에 오래된 역사라고 믿는 ‘전통’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문화적 결과물을 중국 땅에 만들어낼 것이다. 더욱이 1977년 이후 태어난 ‘소황제’ 세대가 주된 소비자로 떠오른 오늘날의 중국 대도시에서 이들이 지향하는 욕구에 외식산업도 맞춰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民以食爲天

    그러나 전체 인민을 놓고 보면, 중국은 결코 부자나라가 아니다. 아직도 개인별 연간 국민소득은 20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이 2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것과 비교한다면, 현재 중국인들 주머니 사정이 상당히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 강소백(姜小白)을 보좌하여 ‘구합제후(九合諸侯)’를 주장한 정치가 관중(管仲)은 ‘왕자이민위천(王者以民爲天),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능지천지천자(能知天之天者), 사가의(斯可矣)’란 글을 남겼다. 즉 ‘왕은 백성을 으뜸으로 여기고, 백성은 음식을 으뜸으로 여긴다. 능히 으뜸의 으뜸을 아는 자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생각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정치가들이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백성이 배 부르고 등 따스우면 나라의 운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니 말이다. 강력한 군사력과 군벌들의 협력을 받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를 물리치고,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이 1949년 10월1일 베이징의 톈안먼(天安門)에서 인민의 나라가 성립됐다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도 ‘민이식위천’의 정신을 그가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구소련의 스탈린이 집단화를 꾀하면서 인위적으로 600만명을 굶겨 죽인 경우와는 달리, 극심한 폐해를 가져온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굶어 죽은 중국인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미국과 국교를 맺는 자리에서 마오쩌둥이 “미국은 중국보다 잘살지만 거지가 많다. 이에 비해 중국은 가난하지만 거지는 없다”는 조크를 날릴 수 있었던 것도 ‘민이식위천’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절대적인 빈곤 상태에서는 나누어 먹는 데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이 내세운 개혁개방 정책 역시 문화대혁명이 가져온 절대빈곤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민이식위천’ 전략이었다. 이것의 성공이 오늘날 중국을 만들었다. 특히 개혁개방 정책 초기에 농업생산에 절대적인 지원을 한 것은 중국이 세계 농업대국이 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중국 황제들이 먹었다는 ‘만한전석’ 요리.

    사실 문화대혁명 때의 공동생산 공동소비는 생산력을 그다지 높이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개혁개방 정책은 개인적인 생산과 판매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생겨났다. 이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용어를 만들어냈지만, 중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는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이전에 강조했던 ‘평균주의’는 1990년대 중에 들어서 동서(東西)의 불균형적인 경제조건, 도농(都農)간 경제적 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부조화, 상류층과 빈곤층의 차이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는 현상을 빚었다. 1996~1997년 쓰촨성에서 현지조사를 할 때 나에게 ‘마오주시(毛主席) 때’가 지금보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차별이 없어서 좋았다는 말을 들려준 농민이 의외로 많았다.

    한국의 중국식당에서도 맛볼 수 있는 술 중에 ‘얼궈터우(二鍋頭)’라는 고량주가 있다. 이 술은 솥에서 두 번 증류했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베이징 사람이면 자신들의 술이라고 자랑할 정도로 800년 역사를 가졌다. 마오는 이 술을 인민의 술이라고 인식하고 가격을 작은 병 하나에 1위안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비록 쓰촨과 구이저우(貴州)에서 생산되는 고급 고량주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맛을 내는 얼궈터우는 베이징에서는 ‘인민의 술’이었다. 지금도 작은 병 하나 값이 2.5위안 정도다. 나는 이 술을 ‘민이식위천’ 사상이 반영된 술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의 부조화

    1990년대 중반 중국 대도시 사람들의 삶도 그다지 나은 형편은 아니었다. 식품소비 금액의 비중으로 빈부를 계산하는 엥겔지수로 환원하면 전체 수입의 60% 이상이 먹을거리 구입비로 들어가는 매우 빈곤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

    앞에 소개한 사오 교수의 1994년 월급은 600위안이었다. 당시 100달러가 830위안이었으니, 교수 생활 25년의 노교수가 받는 월급치고는 너무나 적었다. 그러나 물가가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돼지고기 혹은 양고기에 몇 가지 채소와 버섯을 넣고 볶은 맛있는 식사를 집에서 준비할 수 있었다. 여기에 집도 자신이 구입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심지어 아들 교육비도 고등학교까지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러니 600위안으로 먹을거리를 구입하는 데 수입의 대부분을 지출해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6000위안이 넘는 월급을 받는다. 학생 지도비와 기타 수당 따위를 합치면 1만위안 이상이다. 아들이 버는 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어서 박탈감이 들기도 하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물가가 그다지 크게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매우 만족한다.

    반면 공장 노동자들은 지금도 1000위안 이상을 벌지 못한다. 지난 1월 윈난의 다리(大理)에서 만난 도로공사 노무자는 한 달 내내 공장에서 일해도 600위안을 못 번다고 했다. 그는 원래 농민이었다. 농사를 지으면 각종 경비가 많이 나가서 한 달에 600위안도 벌지 못했다. 결국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이렇게 돈을 벌면 다른 경비는 들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앞에서 언급한 베이징의 21세기형 식당에 가서 손님 대접을 받을 가능성은 지금 전혀 없다. 여전히 중국인 대다수는 가난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싼값으로 제공되는 먹을거리 덕분에 가난한 사람들도 먹을거리의 양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나아진 것도 사실이다. 이 점이 중국공산당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상한 정책 아래에서도 유지시켜주는 관건이다. 하지만 지난 1990년대가 ‘부조화’의 시대였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지금의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다.

    사라지는 소수민족 음식

    사회 내부의 갈등은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에 가려진 빈곤한 중국인이 다수 존재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무리 ‘민이식위천’을 내세워 먹을거리가 풍족해졌다고 해도, 사람들의 욕망은 결코 부조화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다.

    지난 1월 나는 윈난의 다리와 리장(麗江)을 다녀왔다. 특히 리장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근래에 중국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붐빈다. 리장의 밤은 관광객에게 매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대리석이 깔린 길바닥이 불빛에 반짝이고 물이 흐르는 수로를 기준으로 좌우에 들어선 리장 나시족(納西族)의 이층 기와집 식당에서는 종업원들이 주도하고 손님들이 참여하는 노래 경쟁이 벌어진다. 왼쪽 식당들에서 한 소리를 크게 하면, 이에 질세라 오른쪽 식당에서도 맞장구를 친다.

    리장에는 대략 100여 곳의 식당이 성업 중이다. 그런데 대부분 식당 주인은 한족이다. 그중에서도 베이징·상하이·광저우(廣州) 사람들이 실제 주인인 곳이 많다. 그러나 종업원들은 나시족의 전통 옷을 입고 손님들을 유인한다. 이곳이 10년 전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원래 거주하던 나시족 주민 대부분은 리장시 외곽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약간의 보상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지역은 결코 어떤 이익도 제공하지 않았다. 일부는 다시 자신의 동네에 있는 상점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한다.

    원래 리장의 나시족은 아침에 수이먼바바(水???)라는 음식을 주식으로 먹었다. 수이먼바바는 옥수수나 피를 가루 내어 반죽해 만두피를 만들고, 여기에 볶은 양파를 넣어서 만든다. 반죽을 뜨거운 솥의 벽에 붙여서 모양을 만든 후 끓는 물에 익힌다. 그러나 요사이 나시족 사람들이 수이먼바바를 즐겨 먹는다는 이야기는 없다. 전통음식이라는 차원에서 간혹 먹거나 노인들이 먹지, 젊은이들은 쌀밥에 한족식 요리를 먹는다. 내가 리장에 갔을 때 이 음식은 식당에서 팔지도 않았다.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이 음식을 만들어 파는 노파가 있을 뿐이었다.

    리장의 상업가에 들어선 식당은 대부분 한족 음식이나 서양 음식을 만든다. 외지에서 오는 관광객 다수가 한족이거나 서양인, 아니면 한국과 일본에서 오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주류 중심의 융합

    오늘날 중국 소수민족들은 실제 삶에서 더 이상 교과서에 나오는 그들의 전통음식을 전적으로 소비하고 있지 않다. 도시에 사는 몽골족 젊은이는 한족과 다를 바 없다. 이미 그들의 말도 하지 못한다. 티베트의 라싸에 사는 14세 중학생은 비록 라싸 말을 잘 구사하지만, 베이징이나 상하이 아이들처럼 햄버거를 좋아한다. 쓰촨성의 오지인 량산(凉山)의 롤로족은 이제 더는 메밀가루를 반죽한 그들의 전통음식을 주식으로 먹지 않는다. 쌀농사를 스스로 짓기도 하고, 시장에서 쌀 구입도 가능하기 때문에 쓰촨 사람들처럼 먹는다. 단지 명절이 되면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준비할 뿐이다.

    요사이 한국 학계에서 중국 소수민족을 소개하는 글들을 보면 천편일률로 ‘중국에는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고 한다. 정말로 중국에는 한족과 함께 55개의 소수민족만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수치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민족을 구분하는 정치적 판단에서 나온 결정 사항일 뿐이다.

    1953년 제1차 인구조사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등기(民族登記)’를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스스로 민족등기에 참여한 민족집단(ethnic group)이 무려 400여 개에 달했다. 당연히 문제로 떠올랐다. 이에 중국공산당에서는 민족학자·군인·공산당원 등으로 구성된 민족식별(民族識別) 사업단을 조직하여, 민족등기를 신청한 400여 민족의 성분을 조사시켰다. 그 결과 몇 번의 변경을 거쳐서 정리된 숫자가 바로 55개다.

    실제 중국에는 이보다 더 많은 민족집단이 존재했다. 그러나 국가에서 정리한 민족 구분이 40여 년 동안 모든 생활 방면에서 적용되어왔기에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에서 소수민족은 와해의 과정에 놓여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이 와해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는 아니다. 중국이 다민족국가라고 하지만, 중심을 이루는 한족이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 절대다수의 일민족(一民族)과 절대소수의 여러 민족으로 구성됐다고 해야 옳다. 국가는 식량 정책을 펼 때 전체 인민을 상정하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음식문화가 보장되도록 식량의 다원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당연히 소수민족 가정에서 스스로 재배하지 않으면 더 이상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먹을 수 없다.

    가령 쓰촨의 량산 롤로족은 주식이 메밀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 1960년대 이후 메밀농사보다는 쌀농사를 짓도록 권장했다. 결국 시장에서 가장 싸게 대량 유통되는 곡물인 밀과 쌀을 주식으로 삼는 결정을 스스로 했다. 하지만 그 결정이 반드시 자발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 국가의 틀 속에 들어가면서 전체가 지향하는 농업정책에 그들이 포섭됐기 때문이다. 결국 ‘융합’은 주류를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으며 융합은 한족의 처지에서 보면 매우 고귀한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만 소수민족에겐 격심한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

    한족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중국에서 한족 문화의 우산 아래 놓인 소수민족의 문화와 음식은 격심한 동화 과정에 놓여 있다. 쓰촨의 롤로족은 전통적으로 알코올 농도 4~5%의 옥수수술을 마셨다. 그들에겐 차나 음료를 마시는 습관이 없었기에 평소 집에 나무로 만든 옥수수술 단지를 준비해두었다가 손님이 오거나 잔치가 있으면 이 술을 음료수로 마셨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이 민족을 병합한 후 한족의 술인 ‘바이지우(白酒)’가 싼값으로 이 지역에 보급됐다. 그들은 만드는 과정이 번거로운 자신들의 술을 버리고 한족의 술을 사서 마시기 시작했다. 비록 스스로 자신들의 민족을 미개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지만 한족과의 접촉, 특히 이념으로 무장한 공산정부와의 접촉을 통해 자신들이 마시는 술을 미개하다고 여기게 됐다. 결국 그들은 알코올 농도가 50%나 되는 한족의 소주를 옥수수술 마시듯 마시고 있다.

    ‘정신문명건설’ 운동

    이래서 소수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그들은 한족 체제에 편입된다. 한족에 비해 경제여건이 낙후된 소수민족 지역의 지식인 중에는 자민족의 음식과 음식습관이 전근대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일종의 콤플렉스다. 그래서 한족의 습관을 따르려 애쓰고, 자식들 교육은 한족 지역에서 시켜야 된다고 믿는다. 한족 음식을 먹는 것이 마치 도시화 혹은 근대화의 상징인 것으로 이해하고, 차 마시는 습관이 없던 그들이 차를 마신다. 자민족의 음식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언어와 함께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중국 소수민족의 현실이다.

    2006년 3월 베이징에서 한 통의 e메일이 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중국 문화부에서 소수민족의 축제를 조사하는데, 함께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답장 보내기를 망설였다. 왜냐하면 소수민족 문화를 올림픽 문화행사의 관광상품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한족 축제는 도시의 상업중심 지역에 자리잡은 도교의 사묘(祠廟)가 주도하는 ‘먀오후이(廟會)’였다. 그러나 공산화 이후 종교를 없애면서 도시에서는 사묘가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아직도 행해지거나 관광 축제로 유지되는 소수민족의 그것을 베이징에 모으려는 속셈이 숨어 있었다.

    이렇듯이 2008년의 베이징올림픽은 중국을 새로운 변화 속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시작된 ‘정신문명건설(精神文明建設)’ 운동은 역사상 유례 없이 전통문화를 강조한다. 당연히 중국음식이 세계에서 최고라는 관념과 역사상 위대한 음식문화의 창조과정을 밝히는 데로 학자들을 유도한다.

    중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자신들의 음식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이며,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중국음식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왕런샹(王仁湘)은 중국음식의 역사성을 고대로부터 풀어내는 재주를 가졌다. 그는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되는 조리기술이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풍부한 고대 문헌자료와 고고학 발굴 결과를 종합해 보면, 각종 발효음식의 기술도 중국에서 시작됐음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크도 중국에서 발명됐다고 내세운다. 그런데 그가 강조하는 중국 음식문화의 위대함은 오늘날 중국의 영역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세계 경제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유지되기 이전만 해도 지역마다 생산되는 먹을거리가 달랐고, 조리기술도 나름의 특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기준에서 보면, 그들이 워낙 방대한 땅과 민족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생태적 조건들이 중국 땅 내에 존재한다. 이것을 두고 고대 중국인이 위대한 음식문화를 창조했다는 주장은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오히려 역사상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권을 이룩한 고대 중국이 이 정도의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도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들은 맹목적으로 위대한 중국음식의 명성을 내세운다.

    중국음식의 명과 암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음식의 다양성 이미지가 역사적으로 강력한 황제의 존재와 상업도시의 성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송나라 때 창장(長江, 양자강) 유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상업도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시는 자급자족 사회가 아니고 분업의 직업집단이 모여 있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상업유통이 주류를 이루므로 외식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권력의 집중은 각지의 음식재료를 황제의 식탁에 모이도록 했으며, 도시의 발달은 새로운 조리법으로 만든 새로운 음식을 출현하게 만들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이뤄진 중국의 경제발전은 경제적인 부의 부분적인 집중과 함께 대도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경제적인 부를 모은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소비하는 음식을 새로운 경지로 몰고 간다. 대도시에서는 외식산업이 날로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생존하려 노력한다. 아마도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이러한 기반 아래에서 중국음식을 더욱 더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 매력은 이미 지난 100여 년 동안 소위 ‘서방세계’에서 맛본 것들이기에 속도와 적응 역시 빠르지 않을 수 없다.

    高성장 바람 타고 화려해진 식탁, 그 아래엔 상실과 박탈의 그림자
    주영하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강대 사학과, 한양대 문화인류학 석사,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민족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부교수

    주로 동아시아의 음식문화를 연구, 지역문화를 해석하는 작업을 함

    저서 :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음식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역사’ 등


    하지만 그러한 성공의 뒤안길에는 여전히 화려한 식탁 앞에 앉지 못하는 대다수의 인민이 존재한다. 이 대다수 인민에게 중국공산당이 과연 그에 비견되는 식탁을 차려주느냐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지 모른다. 이미 2006년부터 ‘중국산=가짜’ 혹은 ‘중국산=불량식품’딱지가 붙어 일본과 미국에서 중국산에 대한 거부의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언론에서는 그것이 오해라고 항변하지만, 대량생산을 통해 ‘민이식위천’을 추구하던 중국이 이제 어떻게 식품의 질적인 수준을 높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문제는 그다지 쉽지 않아 보인다.

    중국음식에 대한 외국인의 이미지에는 명과 암이 함께 존재한다. 한국인은 그동안 어떤 때는 ‘명’에만 목숨을 걸었고, 어떤 때는 ‘암’을 강조했다. 늘 순간적인 상황에 근거한 판단이었다. 이제 중국음식에는 명과 암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 명과 암을 잘 구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중국이란 양파 속에 직접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중국을 잘 알면서 동시에 한국 속에 중국을 넣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다원화 전략이 우리 자신의 명과 암도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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