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일 만에 해결된 소말리아 해적의 마부노호 납치 사건. 이와 관련해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가 청와대의 지시 아래 군사적 대응방안을 검토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러나 한 달 반이 걸려 김장수 국방장관이 직접 제출한 보고서엔 구체적 기획안 없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반대의견만 제시돼 있었다. 이에 대해 전현직 군 관계자들은 “반대의견이 있더라도 최소한 작전기획은 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11월13일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다 풀려난 마부노호(왼쪽)가 예멘 해안경비대의 안내를 받으며 남부 아덴 항에 정박할 준비를 하고 있다.
10월30일 소말리아 모가디슈 근해에서 해적들의 습격을 받은 북한 선박 대홍단호 승무원들이 맨손으로 격투를 벌여 해적들을 제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목소리는 더욱 힘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 미 해군 구축함이 한국인 선원 2명이 탑승한 파나마 선적 골든모리호를 납치한 해적선을 추적해 격침시켰다는 보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해적에 대한 미 해군의 작전이 구축함 한 척과 전투헬기 한 대로 이뤄졌다는 사실은 “우리 해군은 그만한 능력이 없단 말인가”라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당국자들과 군 관계자들은 9월부터 10월 중순 사이 한국 정부도 소말리아에 병력을 보내 마부노호 선원들을 구출해낼 방법을 논의한 바 있다고 밝혔다. 합동참모본부의 작전본부 합동작전과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러한 검토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피랍사태가 100일을 넘긴 9월초, 타협점을 찾는 듯했던 해적과 마부노호 선주의 몸값 협상이 해적들 사이의 내분으로 수포로 돌아간 직후부터였다. 해적들의 3분의 2가 마부노호에서 내리는 등 거의 해결 막바지에 이르렀다가 원점으로 되돌아간 상황이었다.
사태가 다시 엉키자 정부 내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대두됐다고 한다. 안보부처 장관들이 모인 관련 회의에서 아프간 인질사태처럼 정부가 주도적으로 상황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가 하면, 협상에 대한 회의론과 함께 무력 사용에 대한 의견도 제시됐다는 것. 특히 무력 사용 의견은 “몸값을 주고 풀려나는 일이 반복되어 한국인이 ‘봉’으로 인식되는 상황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근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합동참모본부가 청와대로부터 가능한 작전구성안을 실무 차원에서 기획해보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대략 이 시기와 일치한다.
한 달 반 걸린 보고서
9월 하순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회의에서는 병력투입에 관한 이야기가 정식으로 테이블에 올라오기도 했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말이다. 이에 대해 김장수 국방부 장관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함에 따라 공식적인 차원의 논의는 중단하기로 했다는 것. 그러나 합동참모본부는 별도의 루트를 통해 병력투입에 관한 세부사항을 계속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10월 중순 이에 관한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고서를 작성한 실무주체는 합참 합동작전과였지만 정보본부와의 협의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서 한국 정부 정보활동이 극히 미미하다는 점을 들어 정보본부가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는 것. 결국 보고서는 구체적인 작전 기획안은 포함되지 않은 채 “병력투입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결론과 그 이유만이 담겨 김장수 장관에게 보고됐고, 김 장관은 이를 10월 중순 청와대에서 열린 안보관계장관회의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처음 합참이 관련 기획을 시작한 시점이 9월초였음을 감안하면 대략 한 달 반 가까운 시일이 걸린 셈이다.
김 장관이 이를 반대한 요지는 우선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는 탓에 작전을 준비하기 쉽지 않고, 만에 하나 작전과정에서 인질이 살해당할 경우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와는 별도로 소말리아 영해에 군대가 진입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간단치 않은 문제라는 의견도 정부 일각에서 제시됐다고 한다. 법적으로 마부노호가 케냐 국적인 데다 소속회사도 한국이 아닌 케냐에 적을 두고 있다는 사실 역시 정부의 대응 움직임을 제한한 것으로 보인다.
해적에게 풀려난 마부노 1, 2호의 한국인 선원들. 한석호 선장, 이송렬 총기관감독, 양칠태 기관장, 조문갑 기관장(왼쪽부터).
“합참이 작전구성안을 아예 작성하지 않았다면 이는 분명 비판받아야 할 소지가 있다. 애초에 청와대로부터 가능한 군사적 방안 검토를 지시받았으면, 일단 가능한 옵션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기획안을 만들어 보고하면서 이 작전방안에 이러저러한 애로사항이나 장애요소가 있다는 의견을 덧붙이는 것이 순서다. 반대로 이러저러한 전제조건이 해결되면 군사작전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내용 없이 ‘불가능하다’는 의견만을 제출하는 건 군답지 못한 방법이다. 미국을 포함해 세계 어느 나라든 군의 존재 이유는 가능한 군사적 옵션을 대통령에게 제시하고 그 장단점을 설명하는 것이다.”
국방부가 제시한 ‘불가능의 이유’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가 있다. 우선 소말리아 영해 침범 문제는 외교통상부 등 다른 부처가 고민할 부분이지 국방부나 합참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진압작전 개시와 동시에 소말리아 정부에 통보하고, 추후 반발이 예상되면 무상원조 약속 등으로 무마하는 다양한 ‘우회로’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작전 종료 이후까지 소말리아 정부가 끝내 납득하지 못한다 해도 해적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 공통의 인식을 감안하면 크게 불거질 리는 없다는 게 외교부 산하 연구기관 전문가들의 평가다.
현지 정보가 부족하다는 문제는 이 지역에서 이미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과의 협조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으로 보인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외교채널을 통해 협의하면 설득이 불가능한 사안은 아니라는 것. 특히 PSI(대량살상무기방지구상) 등 공해상에서의 공동행동에 힘을 쏟고 있는 미국의 형편상 완강하게 마다할 리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부노호가 해적들의 손을 벗어난 11월3일, 합참은 미 중부사령부의 협조를 받아 해적선의 항로를 봉쇄하고 있는 미 5함대에 뱃길을 터줄 것을 요청하는 등 24시간에 걸쳐 미국측과 긴밀한 협조체계를 가동했다. 이에 따라 중부사령부는 바레인에 주둔 중인 5함대에 마부노호를 호위할 함정 1척을 급파하고 건강상태 점검과 유류, 식량을 제공하기도 했다.
합참과 국방부 공보담당자들은 이러한 소식을 출입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1월6일 ‘중앙일보’는 “해적과 테러집단에 비타협적 입장을 고수하는 미군이 우리 선박의 안전을 우선시해 즉각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은 것은 오랜 군사동맹 관계를 고려한 조치”라는 합참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해적에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미군이 한국의 진압작전 수립에 정보 등을 협조할 리 없다고 판단한 근거를 의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원래 민간인 일에 안 나서려 해”
한편 지난해 동원호 납치사건 당시에도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국방부와 합참의 결론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설명한 9월 하순의 마부노호 대책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직접 동원호 사건 때의 검토안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 특히 동원호 사건 때는 정부가 피랍선박의 위치 등을 파악하고 있었던 반면 이번에는 그러한 기본정보조차 확인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국방부의 반대의견이 명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미 군사당국의 협조를 받으면 어렵지 않았을 마부노호의 위치추적 작업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의 무성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아프간 인질사태 당시에도 군의 움직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정부 일각에서 제시된 바 있다고 군 관계자들은 말한다. 당시 현지에 나가 있던 연락담당관과는 별도로 육군 특수전사령부 등의 장성급 관계자가 피랍지역 주변을 돌아보는 등의 방식으로 ‘한국이 무력사용 카드를 검토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기미를 내비치면 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언론에 사진이 찍히되 보도가 나오면 ‘부대 철수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고 부인하는 식으로 핑계 대기가 가능한 압박을 시도하자는 구체적 방법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도 공식적인 차원에서 끝내 수용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파트에서 오래 일한 전직 고위 장성은 “군은 원래 민간인의 일에 잘 나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기본적으로 ‘전쟁 이외의 작전(MOOTW·Military Operation Other Than War)’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해적 문제만 해도 군 내부에서는 ‘해양경찰도 특공대를 운용하고 있으니 그쪽에서 담당해야 할 몫’이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이 전직 장성은 말했다. 다만 그는 “군의 역할범위가 점차 넓어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니만큼 이러한 태도에도 변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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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군사행동의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해도, 그에 대한 준비는 반드시 협상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상황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경우 사전준비가 없으면 아무런 대응방법이 없다는 것. 정책파트에서 오래 일한 한 장성의 말이다.
“군사적 옵션이 최후의 선택일 뿐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섣부른 군사행동은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다가 갑자기 상황이 나빠져 인질들이 마구 죽어 나가기라도 하면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인가. 한쪽에서 협상이 잘 되어간다 해도 다른 한쪽에서는 군사적 옵션을 세워 미리 부대와 인원을 선정하고 침투대상의 모형을 만들어 훈련을 하는 등 준비를 진행하는 것이 옳다. 그러다 잘 풀리면 없던 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언급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
11월9일 ‘신동아’는 국방부의 공식 해명을 듣기 위한 질의서를 보냈다. 김장수 장관의 보고에 구체적인 작전기획안이 포함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며, 현재의 판단에도 변함이 없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11월13일 국방부 정책홍보본부측은 “합참과의 협의 끝에 그에 관해서는 언론에 공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같은 날 오후 4시30분, 해적들로부터 풀려난 마부노 1, 2호는 예멘 남부 아덴 항에 입항했다.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에 지친 표정의 선원들은 “피랍기간 내내 끊임없는 구타와 살해위협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기자회견 자리에는 국민 모금을 통해 이들의 석방자금을 마련한 비상대책위원회 관계자도 참석했다. 피랍 184일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