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에서 사업하기란 비위가 웬만큼 강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코리안’을 봉으로 아는 주민들, 잊을 만하면 운동자금을 요구하는 독립군, 회사 임원을 바꾸라고 호통치는 군수…. 곳곳에서 걸어오는 시비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이런 여건을 이겨내고 사업 뿌리내리기에 성공한 ‘현지화의 신화(神話)’가 있다. 코린도 회장 승은호씨. 그는 2001년 1월 파푸아에서 일어난 한국인 직원 납치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소설가 이상락씨가 승 회장 등 당시 납치사건 당사자들과 함께 파푸아에 다녀왔다.
지난 8월초, 보름 동안의 시간을 여투어 인도네시아에 다녀왔다. 보름, 아니 반 달이라면 집 떠나 있었던 시간으로야 짧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네시아 여행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내가 자카르타의 코린도그룹 총무부에 들렀다가 현지인 여직원이 흥얼거리는 노래가 하도 흥겹게 들리기에 그 제목을 물었더니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라고 했다. 세계 최대의 회교국가인 인도네시아는 2억2000여 명의 인구에다 1만7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서국가다.
그 많은 섬 중에서 아주 ‘굵은 놈들’만 몇몇 거론하자면 말레이시아와 경계를 이루는 서쪽 끝에 수마트라(Sumatra)가 있고, 수도 자카르타(Jakarta)가 위치한 자바(Java), 우리에게 보르네오 섬으로 더 잘 알려진 칼리만탄(Kalimantan)과 그 동쪽의 술라웨시(Sulawesi), 그리고 동쪽 끝에 이리안자야(Irian Jaya)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파푸아(Papua)가 있다.
메단(Medan)은 수도 자카르타를 기준으로 할 때 서북쪽 끝에 있는 수마트라의 중심도시이고, 머라우케(Merauke)는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파푸아 섬의 남단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그러니까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라는 노래 제목은 인도네시아의 서북쪽 끝에서 동남쪽 끝을 나타내기 때문에 우리 식으로 하자면 ‘백두에서 한라까지’쯤이 될 것이다. 그 말이 남녀의 사랑을 읊조리는 노랫말에 차용되어서 ‘이 세상 끝까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메단은 수마트라의 수도격인 대도시이고, 인도네시아 영토의 서북쪽 맨 끝에 있는 지역의 실질적인 이름을 대자면 사방(Sabang)이다. 그래서 유행가 제목은 ‘메단에서 머라우케까지’이지만 우리의 ‘삼천리 방방곡곡’이나 ‘백두에서 한라까지’에 해당하는 실제 표현은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장기 집권한 수하르토는 자국 영토에 대한 자부심을 앞세워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사방에서 머라우케까지의 실제 거리는 5120km나 되는데, 이는 유럽과 단순비교하면 영국 런던에서 터키 앙카라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무슨 얘기냐 하면 이처럼 광활한 영토를 가진 인도네시아 전체를 기껏 보름 동안 둘러보고 기행문을 쓰겠다고 나선다면 몰매 맞을 일일 터, 나는 올해 여름에 내가 둘러볼 권역을 바로 그 머라우케가 있는 파푸아(옛 이리안자야)로 한정했다. 그래봐야 주마간산이겠지만.
‘현지화 신화’와 재회
자, 이제 이 여행을 누구와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차례다. 나는 꽤 여러 해 동안 ‘신동아’의 인물탐방 꼭지인 ‘이 사람의 삶’을 맡아 쓴 적이 있다. 서기 2000년의 마지막 호인 12월호에 소개한 인물은 인도네시아에서 ‘코린도’라는 목재회사를 창업하여 굴지의 기업집단으로 키워낸 한국인 승은호(承銀鎬·65) 회장이다.
부친이 경영하던 목재회사(동화기업)의 미국 LA지사장으로 근무하던 1970년대 중반 아버지가 ‘시대와의 불화’를 모질게 겪게 되면서 부도사태에 직면, 그 동안 거래해오던 일본 회사로부터 순전히 신용을 담보로 원목 벌채장비 구입비를 얻어 인도네시아에 ‘망명기업’ 코린도 창업, 인도네시아 각지에 네 군데의 합판공장을 비롯하여 제지·조림·금융·화학·운송 등 30개가 넘는 기업군을 거느린 거대 그룹으로 성장….
머라우케에 세워진,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모에르다니 장군상.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얘기들을 현지에 가보기는커녕 코린도의 서울사무소에서 승 회장과의 인터뷰만으로 독자에게 소개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내가 말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현지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 특히 이리안자야에.”
그때 승은호 회장이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에 없다. 아마 “기회를 한번 만들어봅시다”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꼭 7년이 지난 2007년 여름, 뜻밖에도 승 회장으로부터 “이리안자야 탐사 팀을 구성 중인데 참여하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탐사’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두말없이 “좋다”고 했다.
더군다나 내가 ‘신동아’에 ‘이 사람의 삶-승은호’편을 쓴 지 한 달 뒤인 2001년 1월, 파푸아에서 한국인 임원이 포함된 코린도 직원 열몇 명이 분리독립운동(자유파푸아운동) 단체 소속 게릴라들에 의해 정글 속으로 납치된 사건이 벌어졌다. 게릴라들이 요구한 몸값이 무려 20억달러. 언론사마다 자카르타로 기자들을 특파해 취재경쟁을 벌이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 피랍사건의 결과는 나중에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 여행길에 당시 게릴라들에게 피랍됐던 한국인 임직원을 직접 만나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취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출발 전에 이미 받아둔 터였다. 우리가 여행길에 오르던 때는 마침 한국인 선교단이 탈레반 무장세력에 집단으로 납치, 억류돼 있던 시점이라 7년 전 납치사건의 전말을 더듬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신동아’ 독자 여러분이 이 여행기를 2000년 12월호 ‘이 사람의 삶’에 대한 ‘애프터서비스’ 쯤으로 생각해주시면 좋겠다. 달리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태극기와 ‘I Love Indonesia’
2007년 8월1일 밤 9시. 자카르타 공항에 6명의 사내가 모였다. 거창하게 말해서 ‘파푸아 탐사대’다. 이 탐사대의 대장은 물론 코린도그룹의 승은호 회장이다. 회장이라고 사업장을 무시로 드나드는 것은 아니다. 처음 파푸아에 합판공장을 세울 때에야 직접 현지에 가서 부지선정을 하는 등 부단히 드나들었으나 경영이 궤도에 오르고 나서는 (워낙 교통의 오지여서) 쉽게 걸음하게 되지 않더라 했다. 그에게는 3년 만의 파푸아행인데, 단순한 사업장 방문이 아닌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파푸아를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나와 함께 서울에서 내려간 오세윤(64) 코린교역 사장은, 코린도그룹의 서울지사장 격인데, 업무상 자카르타에는 몇 번 다녀왔으나 파푸아에 다녀온 적은 없다 했다. 그는 어쩌다 나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아, 그 꼬데까(성기 가리개) 차고 다니는 원시종족 얘기 들어보셨지요? 그런 풍습 사라지기 전에 이리안자야에 꼭 한 번 다녀와야 하는데…”를 입에 달고 지냈다. 소원성취를 한 셈이다. 이번 여행의 사진을 책임지겠다며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 세트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원우(58) 전무. 코린도에서 파이프 코팅 사업을 새로 시작하면서 외부에서 영입한 임원이다. 자신이 맡은 분야뿐 아니라 코린도그룹의 모태가 된 원목사업의 현지상황도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이번 탐사대에 자원했다고 한다. 김문태(54) 상무는 그룹의 총무를 담당하고 있는데 이번 탐사팀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됐다.
또 한 명이 있다. 우리의 파푸아 여행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증(?)해줄 사람이다. 주(駐)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의 정용칠(54) 공사다. 그곳도 우리 교민이 거주하는 곳인데 생판 몰라서야 되겠느냐며 실태 파악을 겸해서 따라나섰다. 이렇게 여섯. 코린도 식구가 아닌 사람은 정 공사와 나뿐이고, 그중에서도 인도네시아어 구사에 깡통인 사람은 나 하나다. 하지만 무슨 걱정이랴. 그곳에 가면 인도네시아어뿐만 아니라 소수 종족의 언어에도 도가 튼 코린도의 임직원이 즐비하다 했으니.
밤 10시. 자카르타 공항에서 보잉 737기(126인승) 국내선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야간비행으로 스케줄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카르타에서 파푸아 남단의 머라우케까지 직항하는 항공편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중간에 두 군데 혹은 세 군데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야 어떻든 난 본시 낮밤을 거꾸로 살아온 올빼미 체질이라 비행기가 밤중에 하품을 하든 지쳐 드러눕든 상관할 바 아니다.
당연히 첫 번째 관광 대상으로 삼은 곳은 ‘꼬데까’로 유명한 다니족의 전통마을. 일정액의 기부금을 지급해야 그 마을에 갈 수 있다 하니 그들의 전통생활 양식이 관광상품이 된 셈이다. 사타구니에 성기 가리개인 꼬데까를 차고 저마다 죽창 등의 무기를 챙긴 남자 전사들이 벌판으로 나선다. 손님이 왔으니 공연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군사들이 양편으로 나뉘더니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매복-공격-방어’로 구성된 전쟁 상황극을 구경꾼들 앞에서 연출해 보인다. 초원을 무대로 한 ‘공연’이다. 어떤 전사는 창을 들고 금방이라도 찌를 듯이 우리 앞으로 돌격하며 겁주는 시늉을 하는데 그마저 너무 작위의 냄새가 나서 실감은커녕 서글픈 느낌이 든다.
남자들의 경우 항문 쪽에 기다란 헝겊 조각을 마치 꼬리처럼 매달고 있었는데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대변을 보고 씻지 않아서 항문에 파리가 꼬이기 때문에 그 헝겊 꼬리를 나풀거려서 파리를 쫓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여자들은 상체는 벗었으나 아래쪽에는 털실로 짠 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헝겊의 올을 세로로 늘어뜨려 직조한 것은 살리(salli)라 하는데 처녀의 치마이고, 가로로 된 것은 요카르(yokar)라 부르고 기혼녀의 그것이라 했다. 우리가 만난 다니족 여자들 중에서는 손가락 마디를 잘라내버린 여자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부모나 남편, 자식이 먼저 죽을 때마다 손가락 마디 하나씩을 잘라서 함께 묻는 풍습 때문이라 했다. 고대의 순장(殉葬)이 바로 그 단지(斷指) 풍습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중요 부위를 가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벌거벗고 지낸다. 대신에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라 추위를 이겨낸다고 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을 보면 읍루족 역시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서 추위를 견뎌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돼지기름이 방한용으로 쓰인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보편적인 지혜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돼지를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다.
추장 격인 노인을 만나서 “내가 다니족의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돼지 두 마리만 바치면 처녀를 짝으로 줄 수 있다”는 대답이 건너왔다. 그 노인은 또 한 가지 보여줄 것이 있노라면서 우리 일행을 자기 집 안마당으로 데려가더니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 앉은 형상의 미라를 가지고 나와 보여주었다. 그는 그 미라의 주인공을 자기 부족을 이끌던 장군이라고 했다. 365년이나 살다가 죽었다는데 죽으면서 그 자신을 그런 형상의 미라로 만들어주도록 유언했다고 설명한다.
다니족은 일부다처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했다. 그들은 남녀가 한방에서 자는 법이 없고 따로 모여서 잔다. 그렇다면 자녀 생산을 위한 행사는 어떻게 할까? 낮 시간에 남자와 여자가 언제 어디서 만날 것인지 미리 약속해둔다. 약속 장소에서 만나면, 우선 흰 천을 나뭇가지에 걸어놓는다. 지금 아주 중요하고도 신성한 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니 아무도 범접 말라는 표시이다. 여자가 나무를 잡고 서고 남자가 여자의 뒤로 다가가 교접한다. 와메나의 박물관이나 기념품 판매점에 가니 남녀가 그런 체위로 교접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목공예품이 무수히 많았다.
와메나 공항 근방의 공원에는 후꾸미야렉이라는 전설적인 추장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는 아내를 무려 73명이나 거느렸다고 한다. 그 추장이 미국의 여성 인류학자 한 사람도 첩으로 거느렸다는 얘기도 전승되고 있다. 그러나 그건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이고, 후꾸미야렉이라는 추장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 마침 그곳을 방문 중이던 미국의 여류학자가 신부 복장으로 꾸미고서 기념촬영을 했던 것이 와전됐다고 한다. 그 소문이 진짜인지 그 소문에 대한 해명이 진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와메나에는 비행기 이외에는 외부로 통하는 어떤 교통수단도 없다. 심지어는 건축용 불도저도 군용 화물수송기로 공수해왔다고 했다. 그러니 물가가 비싼 것은 당연지사. 빈땅이라는 캔맥주 하나에 자카르타 식당에서 1만5000루피아를 받는데, 와메나의 상점에서 7만루피아를 받았다. 그렇다고 의지의 한국인들이 술을 굶을 수 있나. 김문태 상무가 가방에서 양주병을 꺼냈고, 우리는 그날 밤 와메나의 허름한 호텔에서 폭탄주로 건배를 했다.
오몽 꼬송? 바구스!
와메나에서 1박을 한 일행은 다음날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북쪽으로 달려 파푸아의 주도(州都)인 자야푸라에 도착했다. 호텔방에 들자마자 이원우 전무가 보여줄 게 있다면서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거울 앞에 있는 탁자 서랍을 열어보였다.
“이게 뭔지 아세요?”
“KIBLAT? 모르겠는데요.”
서랍 밑바닥에 붙어 있는 화살표 모양의 스티커에 ‘끼블랏’이라 씌어 있었다.
“모슬렘 투숙객들을 위해서 붙여놓은 겁니다. 인도네시아 말로 ‘메카의 방향’ 혹은 메카 쪽이라는 의미지요.”
“아, 그쪽을 향해서 기도하라는 뜻이로군요. 어느 호텔에서는 천장 귀퉁이에 화살표가 있던데…. 왜 잘 보이는 현관문 같은 데에다 표시하지 않고 이렇게 귀퉁이에 숨겨놨을까요?”
“투숙객 중에는 모슬렘 아닌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아, 그렇구나. 그럼 종교가 따로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어딜 향해서 기도해야 하나. 그런데 지도를 펴놓고 서랍 밑바닥의 화살표 방향을 이러저리 가늠해보니 대한민국의 방향과 거의 일치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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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로 돌아와 이틀을 지낸 뒤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배웅 나온 김문태 상무가 물었다.
“이번 여행 어땠어요?”
나는 여행 중에 그에게서 배운 인도네시아 말로 대답했다.
“오몽 꼬송!(Omong kosong)”
“뭐라고요?”
그가 두 눈동자를 동그랗게 키우고는 놀라는 표정을 했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실수였다. 오몽 꼬송은 “빈 말이야” 혹은 “뻥이야” 그런 뜻이고, 정작 내가 하려던 말은 ‘좋았다’는 의미의 “바구스(Bagus)!”였는데…. 이 여행기가 적어도 ‘오몽 꼬송’은 아니지만 재미가 덜하다는 핀잔을 들을지 자못 걱정이다.
‘꼬데까(성기 가리개)’로 유명한 다니족. 벌거벗은 채 생활하는 이들은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이겨낸다.
“7월11일 한국-사우디 경기에 교민들이 대거 응원에 나섰지요. 최성국이 한 골을 넣어서 1대 1 무승부가 됐어요. 꼭 이겨야 맛인가? 교민들이 함께했다는 게 중요하지.”
교민회 회장을 겸하고 있는 승은호 회장의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일주일 뒤에 자카르타의 붕카르노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인도네시아와의 예선 마지막 경기에는 응원하러 가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민 역시 경기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의 8강 진출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경기였는데, 더군다나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였는데 왜 그랬을까?
“이 나라 사람들은 선거 때면 축제 분위기로 거리를 누비다가도 어느 순간에 성난 사자로 변할지 모릅니다. 1998년에 독재자 수하르토의 하야를 요구하는 정치집회가 열렸는데, 데모 군중이 갑자기 약탈자로 변해서 중국인 상점에 난입해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계는 전체 인구의 6% 내외에 불과한데 그 ‘왕서방들’이 인도네시아 전체 자본의 70%를 넘게 점하고 있어서 평소 인도네시아 국민이 중국인에게 품고 있던 박탈감이 터져 나와 폭동으로 변한 것이다. 문제는 죄 없는 한국교민들이 중국인과 외모가 비슷해서 시위 군중의 타깃이 된 것. 교민회에서는 부랴부랴 대책을 논의한 끝에 교민들의 승용차 양쪽에 태극기와 인도네시아 국기를 나란히 달고 앞쪽 범퍼에는 ‘I Love Indonesia’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다녀 위기를 모면했다. 중국교민들이 테러를 피하기 위해 우리 교민회에 와서 그 스티커를 얻어가기도 했다. 동티모르 파병이 현안으로 대두됐을 때 인도네시아의 한국교민들이 ‘정치적 오해’를 무릅쓰고 파병반대를 외친 것 역시 인도네시아인의 그러한 군중심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라우케의 마린족
정용칠 공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희는 모름지기 한국대사관 직원인데 인도네시아 관중의 군중심리가 두렵다고 우리 국가대표 축구 경기에 응원 안 갈 수 있나요. 한국-인도네시아 전 때 대사관 직원이 모두 경기장에 나갔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요? 허허허, 우리가 김정우의 선취골로 인도네시아를 1대 0으로 이기자 인도네시아 응원석에서 온갖 물건이 우리 응원석으로 날아왔고 결국 대사관 직원 한 사람이 물병에 맞아서 눈자위가 찢어져서….”
인도네시아 주재 교민들이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왜 ‘현지화’를 꼽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두 시간쯤 지났다. 비행기가 술라웨시 섬의 마카사르 공항에 착륙했다. 탑승객은 일단 모두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서 대기했다가 안내방송에 따라 다시 탑승해야 한다고 했다.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다시 탑승하여 두 시간 반 만에 또 내린 곳이 인도네시아의 동북단에 있는 비악(Biak) 공항. 이번에는 체류시간이 한 시간을 넘긴다. 인도네시아 터줏대감 격인 김문태 상무가 얘기한다.
“여기서 국내선 항공기를 탈 때에는 ‘정시에 뜨고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속 터져서 여행 못 해요. 한번은 이륙 예정시간이 한 시간도 넘게 지체돼 가서 따졌더니 조종사가 공항 휴게실에서 권투 중계를 보느라고 늦었다는 거예요.”
비악을 출발한 비행기는 한 시간여 만에 파푸아의 주도(州都)인 자야푸라(Jayapure)에 도착했고, 거기서 또 얼마를 머무르다 출발해 드디어 목적지인 머라우케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자카르타에서 보던 주민들과 아주 다른 모습의 얼굴들이었다.
인도네시아에는 300여 종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자카르타에서 만난 자바인들이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하며 이목구비도 오밀조밀한 편이라면 머라우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마린족은 키도 훤칠하고 이목구비도 우락부락하여 억센 인상을 풍겼다.
“야, 무섭게 생겼네.” 일행 중 누군가가 그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눈에 비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일단 여장을 푼 곳은 공항 인근에 있는 코린도의 머라우케 출장소. 그 곳에서 코린도 합판공장이 있는 아시키까지는 자동차로 10시간 남짓 걸린다. 코린도의 임직원들이 자카르타 본사를 출발해 아시키의 생산본부까지 하루에 도착하기 어렵게 때문에 머라우케에 숙소를 갖춘 출장소를 따로 마련해둔 것이다.
머라우케에서 처음 관광 대상으로 삼은 곳은 바닷가 근처의 한적한 도로 한복판에 세워진 군인 동상. 붉은 베레모를 쓴 채 낙하산을 타고 금방 내려온 듯한 형상의 이 군인은 베니 모에르다니 장군이다.
‘자유파푸아운동’
국경마을의 명물인 거대한 개미집.
1969년에 유엔의 중재에 따라 주민투표를 실시해 인도네시아의 한 주로 편입됐으나 분리독립운동을 해온 자유파푸아운동(OPM)은 인도네시아로의 합병이 진정한 주민의 뜻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1975년 이후 무장투쟁을 해왔던 것이다. 2002년 1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는 이리안자야의 공식 명칭을 ‘파푸아’로 변경하고 그동안 엄격히 금지해온 독립깃발 ‘샛별기’의 게양도 허용함과 동시에 파푸아를 특별자치주로 인정함으로써 유화정책을 펴고 있다. 파푸아의 분리독립운동 내력은 대략 이러하다.
일행 중 누군가의 설명에 따르면 동상의 주인공인 베니 모에르다니 장군은 3년 전에 사망했는데, 1960년대 말에 주한 인도네시아대표부의 책임자로 임명돼 서울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고, 그때 한국 여성과의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으며, 그 딸이 지금 한국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했다. 확인된 얘기는 아니지만 없는 얘기를 꾸며서 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점심을 먹은 다음, 자동차를 타고 머라우케 공항에서 동북쪽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달리자 파푸아뉴기니와 인도네시아의 국경지대에 다다랐다. 이상한 것은 길바닥의 색깔이었다. 노면이 온전히 흙바닥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스팔트길도 아니었다. 안내하는 이가 말했다.
“도로 포장하겠다고 중앙정부에 예산 신청을 해서 공사비가 나왔는데 이놈이 떼먹고 저놈이 떼먹고 하다 보니 아스팔트 두께가 2cm도 안 되게 날림으로 해치워진 거지요. 그러니 화물트럭 몇 번 지나가면 길바닥이 곰보딱지가 될 수밖에요. 그래서 도로 포장 공사비를 또 신청해 놓았다니까요.”
아스팔트를 도로에 깔았다기보다는 칠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지방자치제도를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에 관리들의 그런 행태를 선거 때 표로 심판하는 데까지 주민들의 인식이 미치지 못했다니 그 도로는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그런 누더기 옷을 걸쳤다 벗을지 모를 판이다.
국경마을의 개미집
말이 국경이지 인도네시아와 파푸아 뉴기니를 경계 짓는 지점은 우리네 시골 동네의 갈림길과 진배없었다. 조그만 경계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양쪽의 국경수비대원 예닐곱 명이 소총을 거꾸로 멘 채로 어울려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뉴기니 섬의 서반부가 인도네시아 영토인 파푸아이고 동반부는 영국제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1975년에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파푸아뉴기니가 되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에는 750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한다는데, 이것은 그 종류로만 따지면 세계 토착 언어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그러나 교육받은 파푸아뉴기니 사람들은 보통 영어를 사용한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자전거를 타고 인도네시아 쪽 마을의 상점에 와서 국수 등 생필품을 사가는 남자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자신을 초등학교 교사라고 소개한 바우노(Bauno)라는 그 남자는 한국에 돌아가거든 편지를 보내달라며 내 수첩을 빼앗듯이 가져가서는 주소를 적어줬다.
우리가 파푸아뉴기니의 화폐에 관심을 보이자 그쪽 수비대원 한 사람이 20키나(KINA)짜리 지폐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전면에는 파푸아뉴기니의 국가문양이라는 극락조의 모습이, 그리고 후면엔 멧돼지 머리와 조가비 장식품이 새겨져 있다. 인도네시아의 루피아는 교환가치가 우리 원화의 10분의 1이고 파푸아뉴기니의 키나는 오히려 원화의 300~400배에 달한다 하는데, 그 국경마을의 구멍가게 주인들이 전자계산기도 없이 환율을 어떻게 환산해서 물건을 사고파는지, 셈이 둔한 나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맨발로 팜송이를 딛고 선 원주민 청년. 오일팜 사업은 코린도의 주력사업 가운데 하나다.
국경마을 또 하나의 명물(?)은 파푸아뉴기니 쪽 관청에서 내세운 것으로 보이는 주민 계도용 영문 경고판. 머라우케 지역은 바다를 면하고 있어서 외부 선원들의 출입이 빈번하기 때문에 에이즈 감염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국경 갈림길에 전봇대만한 철주를 세우고는 ‘에이즈 바이러스인 HIV를 예방하려면 섹스를 하지 말라’든지 ‘파트너에게 콘돔을 사용하게 하라’ 혹은 ‘마약주사를 쓰지 말라’ 따위의 경구를 잔뜩 멋을 부린 글씨로 써 공중 게시판에 매달아놓았다. 실사구시의 직설화법이 시원시원하게 읽혔다.
일상화한 부패
파푸아의 남단 머라우케에서 보낸 1박2일간의 일정이 끝났다. 애당초 스케줄은 그곳에서 코린도의 파푸아 지역 생산본부가 있는 아시키까지 자동차로 이동하게 돼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여남은 시간이나 달리는 강행군이라기에 제법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한편으로 호기심과 기대감에 마음이 들떴다. 일행 중에서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달려본 사람은 승은호 회장과 김문태 상무뿐이다. 도중에 자동차 바퀴가 진흙 수렁에 빠져 그걸 빼내는 데에만 한나절이 걸렸다는 김 상무의 고생담에 약간 겁이 나기도 했으나, 모처럼 모험심이 발동해서 운동화 끈을 바짝 조이고 기다렸지만 파푸아를 자동차로 종단하려던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중간쯤 지점의 도로가 끊겨서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김문태 상무가 말했다.
“중간에 나무다리가 여러 군데 있는데 다리 인근에 사는 아이들이 일부러 불을 질러서 다리를 불태워버리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자동차가 가다가 할 수 없이 멈춰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초콜릿을 달라. 돈을 달라’ 하며 매달려요. 안 줄 수 있나요. 과자가 없으면 돈이라도 몇 푼 집어주지. 어른들이 다리를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어요. 다리를 임시방편으로 수리해주고 자동차 여행객들로부터 돈을 받으려는 계산으로.”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공무원의 경우도 처우가 워낙 형편없어서 일정부분은 아예 부정과 비리로 충당하도록 조장한 측면이 있다. 사업 초기에 코린도에서 머라우케 출장소에 한국인 직원을 뽑아 파견하면 머라우케 이민국 관리가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물고 늘어져 그 직원을 감방에 가둬버리기 일쑤였다. 자기들도 먹고 살아야겠으니 돈을 가지고 와서 빼가라는 것이다.
위정자들의 부패상은 이미 국제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카르타 시내에서 공항으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있다. 수하르토 대통령 시절, 그는 그 도로를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주었다(도로의 소유권을 어떻게 개인에게 주느냐고? 대통령 마음이다). 톨게이트 통행료는 한국 돈으로 400원쯤에 해당하는 4000루피아. 그런데 그 통행료의 배분을 둘러싸고 남매 사이에 티격태격 싸움이 벌어졌다. 얼마 지나고 나니 공항 가는 고속도로에 톨게이트가 하나 더 생겨 둘이 되었다. 처음 진입하는 톨게이트에서 아들 몫으로 2000루피아 받고 한참 가다 보면 중간에서 대통령의 딸 몫으로 또 2000루피아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파푸아의 오지 주민들은 힘이 없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겠으니 우리 마을 앞을 지나려면 통행세를 내고 가라’며 자동차의 앞길을 막고 선들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나무다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지 모른다.
“왜,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있나?”
오지 주민들의 방화
우리는 10시간짜리 자동차 여행을 포기하고 하늘을 날기로 했다. 머라우케 공항에서 코린도의 생산본부가 있는 아시키까지 소형 비행기인 세스나(CESSNA)기를 전세 내기로 한 것이다. 그 비행기는 본래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선교단의 왕래를 위해서 운항을 시작했다는데 그 때문인지 조종사도 선교사 출신의 백인남자였다.
8인승이라 탑승 전에 짐 가방을 저울에 올려 계량하고 각자의 몸뚱이도 ‘근수’를 달아야 했다. 이착륙을 뭍에서도 할 수 있고 물위에서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륙양용, 아니 수륙공(水陸空) 삼용(三用)의 전천후 비행기다. 흡사 제비가 양쪽 발에 나막신 한 짝씩을 신고 날아가는 형상인데, 그 나막신에 해당하는 부분은 공중을 날아갈 땐 승객의 짐 가방을 넣는 화물칸이 되고, 강물에 내려앉으면 비행기의 동체를 부력으로 지탱해주는 보트가 된다. 승 회장에게 물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아시키 합판공장.
그러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즉각 건너왔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닙니다. 그런데 코린도의 임직원들이 다 반댑니다. 헬기, 그거 사놓으면 말이 코린도 전용이지 사업장 부근의 현지인 공무원들이 자기들 자가용처럼 이용하려들 게 뻔하거든요.”
괜히 말 건넸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세스나가 떠올랐다. 보잉 어쩌고 하는 대형 여객기의 경우 말이 비행기 여행이지 ‘내가 공중을 날아간다’는 느낌을 갖기에는 턱없는 데 반해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면 비행기의 좌우 창으로 사위가 내려다보이는 세스나의 경우, 내가 좌석에서 몸을 왼쪽으로 틀면 비행기도 따라서 왼쪽으로 기수를 돌릴 것 같은 느낌…. 사타구니가 찌릿찌릿하고 오금이 저릿저릿한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서 비행기라기보다는 ‘날틀’이라야 어울릴 듯하다.
비행기가 궤도를 잡아 날아간 지 30여 분이 지나자 발 아래로 파푸아의 열대우림이 끝 간 데 모르게 펼쳐진다. 이 비행기가 저 밀림의 한복판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설령 다치지 않고 사뿐히 밀림 속에 내렸다 하더라도 ‘살려달라’ 외친들 어느 나뭇가지에서 매미 하나 울었느냐일 텐데…. 잘난 것 없음을 인정하고 거기 서식한다는 악어나 개미핥기나 날여우박쥐나 깃털왜가리 등속과 어울려 그 많은 숲 속 동물 중의 ‘1인분’으로 살다가 겸손하게 누군가의 먹이가 되어 사라질 수 있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등줄기로 쭈르르 소름 한 줄기가 내리고, 제발 그 막막한 밀림지대만은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그렇지. 나도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던가.
이리안자야 혹은 파푸아의 밀림이 워낙 깊고 광대하다 보니 거기 얽힌 얘기도 많다.
“어떤 사람이 이리안자야의 밀림 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원시종족이 사는 마을에 잡혔는데 거긴 남자는 없고 여인천국이었대요. 경찰이 실종신고를 받고 수색을 하다가 그 여인천국을 급습했는데, 수십명의 여자가 그 남자를 포박해서 우리 안에 가둬놓고 씨종자로 기르고 있더래요.”
김문태 상무가 그런 황당한 얘기를 신이 나서 나에게 건네는데, 듣고 있던 승 회장이 “김 상무 얘기는 구라가 반이니까 새겨들으세요” 하는 바람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파푸아 혹은 파푸아뉴기니에는 아직도 식인풍습을 가진 종족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1960년대 말에 미국인 선교사와 호주인 선교사가 산행 도중 식인종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고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대부호인 록펠러 가문의 2세 마이클 록펠러에 관한 얘기다. 공식적으로는 1961년에 탐험에 나선 마이클이 파푸아뉴기니의 남쪽 아스맛(Asmat) 지방에서 실종된 사건인데, 거기에 “원시 종족의 식인풍습으로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가설이 붙었고, 또한 당사자가 워낙 유명한 집안의 아들이다 보니, 식인종들이 록펠러 아들을 잡아서 구워 먹은 것이 확인되었다는 따위의 가담항설(街談巷說)이 난무하기도 했다.
우리는 다행히 정글 속의 맹수나 식인종들의 먹이가 되는 일 없이 한 시간 만에 무사히 코린도의 아시키 현장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디굴(Digoel)강을 끼고 자리 잡은 거대한 합판공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물 위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세스나기는 공항 활주로에서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강물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코린도의 합판공장 부지가 그곳으로 결정된 데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역시 김문태 상무의 설명이다.
“1994년에 여기다 합판공장을 착공했는데, 애당초 우리가 공장 부지로 사놓은 땅은 여기서 한참 하류 쪽으로 내려간 지역이었습니다. 공장을 짓기 전에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공장 부지를 둘러보러 왔지요. 터도 널찍하고 그만하면 됐다 싶었어요. 대충 둘러본 다음에 내가 오줌이 마려워서 강물을 향해 소변을 보고 있었단 말예요. 그런데 나무 막대기 하나가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자꾸만 건들거리면서 올라가요. 이상하다 싶어서 괴춤을 여미고 낚시질하는 주민한테 물었지요. 왜 막대기가 하류로 내려가지 않고 상류로 자꾸만 올라가느냐고…. 그랬더니 밀물 때가 되어서 바닷물이 올라오기 때문이라지 뭡니까. 아차, 싶었어요. 공장이 들어설 제1의 입지조건이 공장용수 확보 아닙니까.”
황금알 낳는 팜트리 농장
추장이 보여준 다니족 지도자의 미라.
“지금 들려준 김 상무 얘기에는 구라가 안 섞였어요.”
코린도의 아시키 생산본부 사업분야는 합판과 원목 생산말고도 조림사업과 오일팜사업으로 나눌 수 있다. 합판을 만들려면 원목이 필요해 원목벌채 사업을 병행해야 하고, 벌채를 하고나면 그 자리에 의무적으로 조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또 조림사업을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정부 당국에서 조림상황에 대한 검열을 실시한다. 열대우림 지역이라 속성수(樹)는 3년만 지나면 다시 벌목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는 것이 코린도측의 설명이다.
아시키 생산본부에서 요즘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분야가 바로 오일팜 재배 사업이다. 승은호 회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의무 조림을 하되 이리안자야 지역에는 기후조건을 감안해서 팜트리를 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지역은 1년이면 280일가량 비가 내리기 때문에 팜이 적합한 수종이다, 이런 전문가의 추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성장하는 수종인데다 그 열매에서 나오는 팜유는 라면회사나 화장품회사에 공급할 수 있어 경제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어놓고 보니 조림 면적이 너무 거대해서 처치 곤란한 상황이 되지 않나 걱정을 했어요. 여의도 면적이 840ha인데 우리가 이 지역에 조성한 팜트리 농장 면적이 3만5000ha에 이릅니다. 너무 겁 없이 크게 시작하지 않았나, 걱정을 하던 차에 갑자기 자동차 연료로 바이오 디젤이 각광받게 된 겁니다. t당 200달러에 불과하던 시세가 세 배가 넘는 700달러로 치솟는 바람에 그 사업이 우리 그룹의 유망한 주력 업종 중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거지요.
의무 조림이라 해서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했더라면 이런 결과는 엄두를 못 냈겠지요. 물론 팜트리 조림 당시에는 바이오디젤이 자동차 연료로 각광받을지 몰랐으니까 사실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인데, 팜트리를 조림했던 것이 마치 바이오 연료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한 것처럼 딱 맞아 돌아가는 바람에 제가 대단한 선견지명을 발휘한 것처럼 돼버렸습니다.”
팜트리 농장을 둘러보러 나섰다. 농장 한가운데 들어서니 10여 m에 이르는 팜트리가 터널을 이루고 있다. 장대에 달린 낫으로 가지를 잘라내면 거기에 팜 열매 송이가 숨어 있다. 송이의 크기는 4kg에서 80kg에 이를 만큼 다양한데 나무 한 그루의 수명이 25년가량 된다고 한다. 팜 송이에 가시가 돋아 있어 함부로 집어들기가 겁날 지경인데 원주민 고용인은 아예 맨발로 팜송이 더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발바닥을 보여달라 하여 만져보니 평생 신발을 신은 적이 없어서 발바닥이 숫제 돌덩어리다. 농장에서 채취, 수집된 팜 열매는 인근에 있는 팜유 생산 공장으로 운송되어서 기름을 생산한다.
아시키 생산본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임직원은 50여 명이고 고용된 현지인은 2000여 명이다. 이들 중 파푸아 원주민 출신은 많지 않고 대부분 멀리 자바나 칼리만탄 등 다른 섬에서 온 직공들이다.
우리가 세스나기로 아시키의 합판공장에 도착했을 때 월요일의 근무시간인데도 선착장에 구경꾼이 몰려나와 있었다. 그들은 코린도의 종업원이 아니라 종업원들과 더부살이하는 객식구들이라고 했다. 초기에 합판공장을 열었을 때 점심 때가 되자 산에서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나오는 바람에 부랴부랴 밥을 더 하느라고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월급날이 되면 숲속에서 친척이며 마을 주민들이 모두 내려와서 직공이 탄 월급을 함께 나누더라고 했다.
“총책임자 갈아치워라”
코린도에서는 사업장 하나를 개설하면 인근에 현지인 직공들이 살 집을 지어서 공급하고,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학교와 예배당까지 마련해주기 때문에 거대한 코린도타운이 생겨난다. 애당초 인도네시아 전통가옥 구조를 본떠 나무로 공동주택을 지어 종업원 한 명당 방 2칸에 부엌이 딸린 집을 공급했는데 그 종업원이 형제자매 친척들을 데리고 와서는 방을 이리저리 쪼개서 사용하고 세간들을 안팎에다 마구 늘어놓는가 하면 빨래를 여기저기 널고 하다 보니 코린도타운 전체가 슬럼화했다. 이제 그 때 지었던 집들의 수명이 다해 가기 때문에 우리 일행이 갔을 때 코린도타운에서는 새집을 짓느라 분주했다. 한국에서 기술자를 초빙, 현지에 풍부하게 널려 있는 황토를 이용하여 이른바 웰빙주택으로 지어보겠다는 것이 회사측의 계획이다.
아시키 사업장에서의 셋째 날. 우리 일행은 코린도 사업장이 소속된 보벤디굴 군(郡)의 군청으로 유삭(Yusak)이라는 이름의 군수를 만나러 갔다. 코린도 본사에서 회장이 오고, 한국대사관의 공사도 함께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시키 생산본부 본부장인 이헌 부사장에게 자신을 면담하러 오라고 연락했던 것.
면담 약속 시각인 10시에 맞춰 군수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집무실 바깥 나무의자에 앉아서 10시 반까지 기다렸는데도 군수는 나타날 낌새가 안 보였다. 비서라는 사내에게 지금 사무실 안에 군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있긴 한데 기다리라고 했다.
“일부러 안 나오는 거야. 이 몸이 귀한 몸이니 너희들 밖에서 좀 기다려봐라 이거지.”
이헌 부사장이 말했다. 그러자 정 공사와 나만 군수의 행태를 불쾌하게 여길 뿐 코린도 사람들은 아예 그러려니 했다. 40분이 지나서야 군수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이 왔다. 서른몇 살쯤 돼 보이는 군수와 마주 앉았다. 김문태 상무가 통역을 맡았는데 나를 일컬어 ‘한국에서 온 유명한 기자’라고 했다. 난 기자가 아닌데 왜 그렇게 소개하느냐고 따졌더니 그 편이 더 끗발이 있어 보여 그랬단다. 그런 자리에 소설가는 영 시세가 없다는 얘기렷다!
면담이 시작되었다. 유삭이 혼자서 일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이곳이 면소재지였는데 이제는 군 소재지로 승격했다. 외지에서 온 투자자든 누구든 모두 군수인 내 밑에 존재한다. 지금부터 내가 코린도 회장에게 요청하겠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헌 본부장)이 이곳의 총책임자인데 이 사람을 갈아치워야 한다. 이 사람은 나이가 많아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고 고집이 너무 세다. 그러니까 총책임자를 우리 인도네시아 사람으로 바꿔라. 2인자, 3인자는 한국 사람을 앉혀놔도 상관없다….”
우리는 남의 회사 임원 인사까지 제멋대로 해보겠다는 그의 좌충우돌식 발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더군다나 면전에서 갈아치워야 할 대상으로 지목된 이헌 부사장은 낯빛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지난번에 자카르타에서 산림청 장관이 여기 와서 우리 보벤디굴 군청에는 들르지도 않고 코린도 사업장에만 들렀다가 바로 자카르타로 돌아가버렸는데 이것은 코린도가 아주 잘못한 것이다. 장관이 왔으면 군수인 나에게 보고를 해야 하지 않나!”
그의 발언이 계속됐다. 코린도에서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서 닦아놓은 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해달라, 코린도 사업장에 마련된 진료소는 마치 닭장 같아서 우리 주민이 이용할 수 없으니 병원 하나를 따로 지어서 군에 헌납하고 운영에 따른 비용을 너희가 다 대어라, 그 외에도 이런저런 요구사항들을 한 보따리나 쏟아놓았다.
이제 이쪽 차례가 되었다. 승 회장이 그 젊은 군수의 얘기가 어째서 합리적이지 않은지를 조목조목 설명했으나 우이독경이었다. 보다 못해서 제3자 격인 정 공사와 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국에서는 자치단체의 장들이 중소기업 하나라도 유치하려고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하는지 아느냐, 남의 회사 임원을 갈아 치우라고 한 얘기가 얼마나 몰상식한 발언이냐…어쩌고 항변했지만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파푸아 주(州)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덩치가 큰 사업장이라야 ‘템바가푸라’라는 지역에 있는 구리광산을 제외하면 코린도그룹의 사업장이 유일하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가령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삼성중공업의 거제 조선소를 시찰하기 위해서 거제도에 들렀는데 거제군수가 그를 군청으로 불러다가 야단을 친 것과 진배없다 할 것이다.
그날 면담은 승 회장이 이런저런 작은 민원 몇 가지를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평소 군수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당장 자르라고 했던 이헌 부사장과도 웃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우리는 일부러 코린도 사업장 내에 있는 진료소를 불시 방문했다. 중국인 여의사가 근무시간이 지났음에도 진료소를 지키고 있었다. 약제실이며 병상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고 깔끔했다.
“군수가 이곳을 닭장 같은 곳이라 하던데, 그 친구가 여기 들른 적 있나?”
“무슨 소리예요. 군수 코빼기도 구경한 적 없는데.”
우린 그냥 웃었다.
독립운동자금으로 1조원 요구
“이리안자야에 왜 인구가 늘지 않는지 아세요? 유아 사망률이 높기 때문이에요. 유아가 왜 많이 죽는 줄 아세요? 원주민이 사는 곳에 가보면 자기 아들딸하고 멧돼지 새끼한테 동시에 젖꼭지 하나씩을 나눠 물리고 있더라니까요.”
현지 직원이 그렇게 말했다.
이리안자야, 그러니까 파푸아에 목재사업을 벌인 회사가 코린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중국인 회사를 비롯해서 꽤 여러 회사가 원목사업을 시도했으나 결국 모두 철수하고 코린도만 남은 것은 코린도의 한국인 임직원이 목숨을 건 현지화 노력 덕분이었다. 갖가지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파푸아 독립군과의 갈등으로 큰 곤욕을 치렀다.
“우리가 처음 이리안자야에 합판공장을 차렸을 때, 어느 날 여기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 대항해 분리 독립운동을 하는 게릴라군 사령부에서 공문을 가지고 찾아왔어요.”
승은호 회장이 당시 게릴라 본부에서 보낸 공문을 내게 내밀었다. 그 공문을 살펴보니 내용이 대충 이러하다.
‘현금 10억달러를 우리의 독립자금으로 지급할 것. 그뿐만 아니라 타자기, 타자기 리본, 먹지, 종이 등과 공책 40권, 필기도구와 클립을 제공할 것. 담배도 줄 것. 우리의 요구사항을 거부할 경우 공장을 폐쇄시키고 불태울 것임.’
코린도측으로서는 앞길이 막막했다. 무엇보다 10억달러의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으라는 요구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환율을 1000원으로 친다면 무려 1조원이다. 그런데 무려 1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요구하면서 타자기 리본이니 공책이니 담배 따위를 달라는 내용을 부대사항으로 첨부해놓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었다.
협상이 시작됐다.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고?
“이리안자야에 우리 코린도말고 변변한 사업장이 있느냐? 너희가 독립을 하더라도 나라를 운영하려면 세금 낼 기업체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1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그런 큰돈이 있으면 미쳤다고 여기다 합판공장 짓겠냐?”
그렇게 따지고 담판을 벌인 끝에 매월 100만루피아를 생필품 등 현물로 제공하는 선에서 타결되었다. 현금으로 줄 경우 무기 구입자금으로 쓸 수가 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촉각을 곤두세운다. 100만루피아면 우리 돈으로 10만원이다. 1조원을 요구했다가 10만원에 흥정을 끝낸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10억달러가 어느 정도의 액수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요구를 했던 것이다. 승 회장은 그들이 요구한 10억달러를 ‘부시맨의 콜라병’ 같은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런데 그런 요구사항을 적은 공문에 사인을 한 그 지역 게릴라 부대의 작전사령관이 윌리엄 온데(William Onde)라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저녁, 게릴라에 피랍됐던 당사자, 이헌 부사장과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2001년 1월16일이었어요. 저녁 7시쯤 됐는데 갑자기 우리가 개척해놓은 임도(林道) 59km 지점에서 현장 소장인 권오덕 차장하고 인도네시아 현지 직원 열두 명이 납치됐다는 보고가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직원들을 납치한 당사자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반군대장 온데라는 겁니다. 그래서….”
게릴라 인질극
여기서 ‘59km’는 당시 독립운동을 펼치던 게릴라의 초소가 있던 지점을 일컫는다. 온데는 처음 코린도 합판공장이 들어섰을 때 10억달러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바 있는 바로 그 친구였다. 이후 이헌 본부장과는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의 부하직원들을 납치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혼자 가려고 했으나 마침 팜오일 농장 책임자인 이종명 차장이 함께 가겠다고 했다. 현지인 직원 한 명도 따라나섰다. 세 사람이 지프를 타고 59km 지점으로 향했다. 저들이 혹시 군인들을 대동하고 온 것으로 판단한다면 선제공격을 해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므로 지프의 불을 다 켜서 우리밖에 탑승하지 않았다는 걸 밝히고 접근했다. 클랙슨을 울려 신호를 보냈더니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는 고함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이헌 본부장은 군인도 없고 경찰도 함께 오지 않았다고 알렸으나 ‘내일 아침에나 오라’는 반응이 건너왔다. 그래서 준비해간 담배 몇 보루를 내려놓고 돌아왔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이미 현지 주둔 군인과 경찰이 완전무장을 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절대로 군사적전을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고 이튿날 아침 다시 그 초소로 갔다. 게릴라들의 안내를 받아 초소가 있던 지점으로부터 두 시간쯤 더 걸어들어가자 그들의 아지트가 나왔다. 캥거루 한 마리를 잡아서 굽고 있던 그들이 먹으라고 권했으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엔 그들에게 왜 사람을 납치했느냐고 따지러 갔는데 이헌 본부장 자신도 졸지에 그들의 인질이 돼버렸다.
밤새도록 다른 인질들과 함께 모기에 시달리고 낮에 한숨 자려는데 문제의 인물 온데가 나타나더니 공포를 쏘아대며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소리 질러대며 위협했다. 이 본부장은 코린도의 인질들이 공포에 질려 있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온데라는 사령관을 향해 “우리는 너희를 도와온 사람들인데 어찌 이럴 수 있느냐!”며 소리를 질러가며 따졌다.
몇 시간 뒤에 전령이 와서 이헌 본부장을 온데가 부른다고 했다. 따라갔더니 온데가 씨익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깐 왜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나?”
“부하들 앞이라 그냥 그렇게 했다.”
“그건 그렇고 우릴 왜 납치했나?”
“우리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만나서 요구사항을 얘기해야 하는데 만나주지 않는다. 외국인을 납치해야 우리를 상대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그리 알고 기다려달라.”
다음날 한국인 인질 3명은 조그만 배를 타고 밀림 속의 하천을 따라 한참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인도네시아에서 혹 군사작전을 감행해올 경우 여차하면 국경을 넘어 파푸아뉴기니로 도망치겠다는 계산인 성싶었다. 이후 온데는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 없었다.
온데의 최후
납치 3일째가 됐다. 이제 대사관에서 긴장하기 시작했고 서울의 언론사 특파원들이 자카르타로 모여들었다. 그들의 요구사항이 전달되었다. ‘대통령을 면담하여 독립을 요구하겠으니 면담을 보장하고 코린도 직원의 몸값으로 20억달러를 가져오라.’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정글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이헌 본부장은 게릴라 작전사령관 온데를 앉혀놓고 야단을 쳤다.
“야 임마, 우리 코린도가 여기 이리안자야 공장에 투자한 돈이 1억달러 정돈데 20억달러를 달라고 하면 그게 되는 소리냐. 그리고 몸값을 달라고 하면 너희들은 테러리스트밖에 안 된다. 그러니 내일 기자들 만나거든 20억달러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하지 말고 대통령 면담만 조건으로 내걸어라.”
그러자 순진한 온데는 다음날 기자들을 만나서 그렇게 얘기했노라고 이헌 본부장에게 착실히 보고하기도 했다.
반군 게릴라측에서는 대통령 면담을 약속하고 게릴라들의 신변이 보장된다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제의한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 당국자로부터 대통령 면담 일정과 자신들의 신변보장을 확약받고 나서 인질들을 석방했다. 이헌 본부장은 13일 만에, 나머지 두 명의 한국인 인질과 현지인 인질들은 21일 만에 석방됨으로써 인질극은 막을 내렸다.
그러면 이후의 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온데를 비롯한 분리독립운동 게릴라 대표들이 대통령 별장에서 구스둘(와히드의 별명) 대통령을 면담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그 자리에 피랍 당사자였던 이헌 본부장 등 코린도 관계자들도 함께했다.
“온데를 비롯한 이 친구들이 이리안자야 독립을 얘기하니까 구스둘이 듣고 있더니 ‘독립은 안 되고 그 지역을 발전시키도록 힘쓰겠다’고 딱 잘라버리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게릴라 대표들이 지금까지 자기들이 탄압받아온 내력을 죽 설명하는데 갑자기 구스둘 대통령이 의자에 앉은 채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곯며 잠들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인질까지 납치해가면서 대통령 면담을 고대했던 게릴라들로서는 김이 새버렸고, 그걸로 끝이었다. 구스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면담할 당시 승은호 회장이 배석했는데, 그때도 김 대통령 얘기 중에 꾸벅꾸벅 졸더라고 했다.
분리독립운동 사령관으로서 코린도 직원을 납치했던 게릴라부대 작전사령관 온데는 얼마 뒤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열린, 파푸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해외 단체의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온 사실을 이헌 부사장에게 자랑하기도 했다.
온데는 오토바이를 타고 밤길을 가다가 갑자기 숲 속에서 나타난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사살됐다. 이헌 부사장을 만나고 돌아가다가 변을 당한 것. 사람들은 인도네시아의 특전사에 의해 사살된 것이라고들 했다. 그의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는데 두어 달 뒤에 물고기들이 다 뜯어먹고 남은 시신이 발견돼 그의 누나가 수습했다. 게릴라 사령관 온데는 그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았다. 이제는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밀려 게릴라들은 정글 깊은 곳으로 들어가버렸다.
첩 73명 거느린 전설의 추장
우리는 이헌 본부장으로부터 게릴라 초소가 있던 59km 지점에서 당시 피랍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거기서 두 시간쯤 걸어 들어가면 분리 독립운동 게릴라들의 본거지가 나타날 거라고 했다. “가서 게릴라들을 좀 만나볼까요?”라고 농 삼아 건넸는데 “지금 탈레반에 납치된 선교단 일행 때문에 나라 안팎이 야단인데 여기서 당신이 또 납치당했다가 욕을 얼마나 얻어먹으려 하느냐”는 핀잔이 쏟아졌다.
8월6일. 아시키 생산본부에서 다시 세스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여 만에 와메나(Wamena)에 도착했다. wam은 인도네시아 말로 돼지를 일컫고 ena는 ‘키우다’의 뜻이라 하니 그 어원이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