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숫자와 수식 때문에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라는 오해를 받아온 수학. 그러나 수학은 모든 학문의 바탕이다. 물리학은 수학을 토대로 발전했고, 물리학은 화학을, 화학은 생물학을 낳았다. 인문과학의 기본인 논리학 역시 수학과 상호작용한다. 이 때문에 수학의 원리를 알면 다른 과목에 이를 적용하기란 어렵지 않다. 물리화학자 고중숙 교수가 제안하는 학문간 경계 허물기.
이 글을 이해하는 데에 필자의 상황을 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여겨 간추리고 넘어간다. 필자는 박사과정에서 ‘레이저 분광학’을 전공했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첨단 광학의 산물인 레이저로 화학반응의 미세한 단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짐작하듯 이 분야는 수학·물리·화학이 한데 어우러지는 복합적 영역이다. 그래서 학부에서는 화학을 공부했지만 이후 수학과 물리까지 폭넓게 공부하느라 많은 고생과 노력을 했다. 그리고 박사 이후에는 과학 전반의 뿌리를 찾아 과학사와 철학도 혼자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이런 노력을 토대로 그동안 여러 책을 쓰고 외국의 과학책도 다수 번역했는데, 그중 ‘수학 바로 보기’라는 책이 있다. 필자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집필 중인 ‘과학 바로 보기’에 대한 기반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필자의 바람은 이로써 필자 자신도 학문적 기초의 올바른 틀을 갖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원형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은 20가지 정도 되지만 그 가운데 수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거센 영어 열풍도 수학의 벽은 웬만해선 넘지 못한다. 학부모들도 이런 생각으로 수학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다. 또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수학을 잘한다’로 통한다. 그래서 “수학은 잘한다”라고 조사 하나만 바꾸면 “지금 전반적인 성적은 좀 떨어지지만, 수학‘은’ 잘 하는 것을 보니 언젠가 철이 들어 공부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은연중에 수학 공부를 모든 공부의 원형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런 인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수학은 거의 모든 학문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스스로 세운 아카데메이아(Akade·#51418;meia, Academy의 어원)의 현판에 “기하를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라고 썼다. 당시 기하는 수학의 대표였는데, 이게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학은 철학과 함께 가장 오래된 학문이다. ‘mathematics’와 ‘philosophy’라는 말이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함께 만들어졌다는 데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그 뜻은 모두 ‘앎’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대체로 이들은 mathematics를 ‘모든 앎의 실체(를 찾는 활동)’, 그리고 philosophy는 ‘이 실체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활동)’으로 여겼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근대까지의 역사를 살피면 수학과 자연과학의 관계가 뚜렷이 드러난다. 물리학은 수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로 수학에 이어 두 번째로 발달한 자연과학이다. 그런데 철학과 수학이 다분히 순수한 사변적 학문임에 비해, 물리학은 과학적 도구와 과학적 인식이 먼저 충분히 발달해야 했다. 이 때문에 물리학은 수학보다 무려 2000년이 뒤진 17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리학으로 한번 물꼬가 트이자 다른 과학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를 이었다. 화학은 물리학을 토대로 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물리학에 이어 18세기부터 제대로 된 기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물리학이 점성술과 천동설이라는 기나긴 암굴을 헤매다 정식 학문이 되었듯, 화학은 연금술이라는 신비주의를 극복한 뒤 정식 학문으로 인정받았다.
다음으로 생물학은 화학이라는 토대가 필요한 학문이다. 그래서 화학에 이어 19세기부터 터를 잡았다. 생물학은 20세기 중반에 수학·물리학·화학이 합쳐 이룩한 DNA의 구조 해명으로 큰 전기를 맞아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끝으로 지구과학은 자연과학의 4대 분야 가운데 종합과학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다. 그 출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라 할 수 있으며 생물학처럼 20세기 이후에 많은 발전을 이뤘다. 한편 자연과학이 발달하는 동안 응용과학으로 각종 공학이 발전했다. 오늘날 공학은 규모 면에서 자연과학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가 되었지만 본질에서는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수학은 널리 보면 역사적으로 모든 자연과학의 바탕이다.
인문과학의 후견인
과학과 수학은 모두 언어를 토대로 하는 논리 학문이다.
하지만 쉽게 파악할 수 없던 난제들도 이런 초보적인 논리를 통해 교묘하게 증명된다. 그리스의 학문이 논리를 중요시한 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특징이라기보다 학문의 진정한 방향이었고, 이 때문에 탈레스는 학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논리학은 수학과 함께 ‘논리적 확증’을 요구하는 사변적 학문의 대표격인데, 위 예에서 보듯 형식을 따진다면 논리학은 수학의 논리적 기초다. 하지만 실제로 논리학의 이론적 체계와 실체의 대부분이 수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 점은 수학이 고대 이래 꾸준한 발전을 이룬 반면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특기할 만한 점이 거의 없다는 데에서 알 수 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수리논리학이 크게 부각되면서 논리학은 수학이라는 굳건한 동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불완전성 정리’라는 ‘20세기 최고의 정리’를 세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최고의 논리학자’로 일컬어지는 쿠르트 괴델의 업적이 그 절정을 이뤘다.
그런데 논리학은 인문학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인문학의 요체는 ‘말로 펼치는 논리’라는 점에서 이를 잘 헤아릴 수 있다. 이 사슬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휘몰아치고 있는 논술과 글쓰기 교육의 열풍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자연과학처럼 수학이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변에서 논리적 지반을 굳건히 다져주는 믿음직한 후견인이라 할 수 있다.
수학이 인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는 점은 다른 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학을 어려운 과목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원인으로 수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중요한 요소인 ‘수식’을 지목한다. 국어나 사회 과목 등 일상 언어로 된 책을 보다가 수학책을 펼치면 페이지마다 수식이 줄지어 나타나며, 이 수식들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머리가 아파 온다는 것이다.
수학은 언어
그런데 따지고 보면 수식은 ‘언어’다. 중학과정에서 배워 누구나 아는 일차함수 ‘y = aχ+b’라는 식은 ‘y는 χ의 a배에 b를 더한 것이다’라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이 식은 너무 단순해서 수식의 장점이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보통의 말로 쓰면 아주 어렵고도 혼란스러운 내용이 수식으로는 훨씬 간명하게 표현된다는 점에서 수식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역시 중요한 수식으로 꼽히는 중학과정의 이차방정식 근의 공식을 보자.
이차방정식의 근의 공식:
이것을 수식이 아닌 글로 나타내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실제로 16세기 중반에 발견된 삼차방정식 근의 공식은 아직 수식이 없던 시절이어서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긴 문장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이를 해독하기도 적용하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에 수식을 표기하는 방법들이 개발돼 수학은 커다란 도약을 하게 됐고, 그래서 이때를 근대적 대수학이 성립한 시기로 본다.
그러므로 수학도 국어, 사회 등 다른 과목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모든 학문은 인간의 생각을 언어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학은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어렵다고 여기는 대상은 수학이 아니라 ‘수학을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사고 내용’이다.
세상이 너무나 오묘하고 심오하여 인간의 사고로 감당하기가 어려워 수식을 주로 이용하는 수학도 어려워진 것일 뿐, 수학 자체는 그나마 어려운 보통 언어를 쉽게 표현해주는 고마운 수단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통해 수학에 대한 오해 내지 불필요한 선입관을 벗으면 그것만으로도 수학은 훨씬 친근해진다.
기왕 ‘수학은 언어’라 했으므로 다른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각각의 인간은 언뜻 독립체인 것 같지만 끊임없이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는 의존체다. 우주의 모든 존재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우리 우주’도 더 광활한 의미의 우주에 대한 의존체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든 의존체는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며, 이는 입력(input)과 출력(output)으로 구성된다.
‘인문계’ ‘자연계’를 없애라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등 모든 학문은 상호작용한다. 그러므로 학문간 융합은 필수적이다.
이런 뜻에서 표현은 출력이다. 입출력으로 요약되는 모든 존재의 삶 가운데 절반을 차지하는 중요한 측면인 것이다. 사람의 표현 수단은 손짓, 발짓, 눈짓과 같은 몸짓, 음성, 그림 등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사람의 음성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다채롭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사람의 ‘말’은 동물과 크게 다르다. ‘말’은 ‘글’이라는 기록 수단과 함께 ‘언어’로 불리게 됐으며, 모든 학문은 이를 통해 표현된다.
이처럼 모든 학문은 본질적으로 언어라는 점에서 서로 같다. 음악과 그림을 광의의 언어로 보면 예술도 마찬가지다. 본래 음악은 음성의 확장이며 글은 그림의 일종이다. 이에 따라 당연히 필자는 오래전부터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새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그리고 이런 움직임의 출발은 무엇보다 우리 고교과정에서 ‘인문계’와 ‘자연계’라는 계열 구분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시각을 넓혀보자. 약 100년 전만 해도 세계적으로 사람의 평균수명은 30~40세였다. 그래서 조혼(早婚)이 대세였고 30세가 넘으면 언제라도 죽을 준비를 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인생행로도 일찍 결정해야 했고, 한번 정한 길을 바꾸기도 어려웠다. 그러다 최근 수십년 사이에 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이제는 옛날 같으면 인생을 정리할 즈음에 결혼을 준비하며, 한번 정한 길을 지켜내기가 오히려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교육도 ‘정규교육’뿐 아니라 ‘평생교육’과 ‘재교육’으로 넓혀졌다. 정규교육은 인생 선배들에게서 받지만 자신보다 어린 후배들에게서 다른 교육을 받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규교육 과정도 자꾸 길어진다. 옛날에는 고등학교만 마쳐도 지식인이었지만 지금은 대학을 나와도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어떤 분야는 대학 과정을 4년제에서 6년제로 늘렸고, 아예 학부를 없애고 대학원 과정으로만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렇게 인생은 길고 넓어졌는데, 고교교육은 수십년 전부터 내려오는 울타리 속에 갇혀 있다. 시대적 추세에 비춰 고교 교육은 마땅히 앞날에 대한 ‘탐색의 시간’이 돼야 하는데도, 예전처럼 ‘결정의 시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겪은 입시 문제의 주요 원인들 중 일부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하루빨리 고교과정의 계열을 없애고, 난이도를 전반적으로 평이하게 조정해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이 넓고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인생과 우주를 한데 아울러 볼 수 있도록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창창한’ 앞날의 진로를 깊이 있게 탐색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전공의 재구성
고교과정의 계열 없애기에 이어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추진해가야 할 과업은 대학과정의 ‘전공 재구성’이다. 여기서도 대표적으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예로 든다. 흔히 우리는 “자연과학은 자연과 자연현상, 인문과학은 인간과 인문현상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학문의 본질은 언어”라는 관점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이런 구분이 피상적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인간도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차분히 각자의 몸을 살펴보자. 어느 한 구석 자연의 물질로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다. 인간의 ‘정신’을 굳이 자연과 분리해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준이나 차원만 좀 다를 뿐, 인간의 지적·감정적 현상들도 모두 다른 생물들에서 관찰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기초는 모두 자연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문과학도 자연과학의 일부다. 관점을 바꿔 생각해보자. 자연과학이 자연과 자연현상을 대상으로 한다지만 주체는 인간이다. 그리고 위에서 인문과학의 대상도 자연과학의 대상임을 밝혔다. 그렇다면 주체와 객체가 모두 인간과 얽혀 있으므로 자연과학도 인문과학으로 봐야 한다. 요컨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은 포함 관계를 떠나 본질적으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이처럼 세계는 여러 면에서 서로 긴밀히 얽혀 있기에 분류와 맞지 않다. 곧 분류는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편의에 따른 것인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원래 취지는 퇴색했다. 그리하여 분류는 ‘부자연스러운 벽’으로 변했고, 그 사이의 골이 깊어져 여러 분야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본래 떨어질 수 없는 게 한없이 멀어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최근 들어 전세계적으로 융화의 기운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 이미 꽤 오래전부터 ‘학문간’ 또는 ‘간학문적’ 등으로 번역되는 ‘interdisciplinary’라는 말이 널리 쓰여 왔지만, 앞으로는 ‘사이’를 넘어 포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런 기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느린 듯해도 어느덧 사람을 앞서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과정은 사실상 교육제도의 중추다. 따라서 앞으로 이런 조류에 제대로 부응하도록 대학의 모든 전공을 재구성하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가야 한다.
‘두 문화’의 융합
세계적으로 차츰 융화의 기운이 일고 있다 했는데, 영국의 스노우가 쓴 ‘두 문화(The Two Cultures)’는 이런 흐름을 일깨운 큰 계기 중 하나다. 그는 물리학을 전공한 소설가라는 배경 덕분에 과학과 인문 두 분야의 사람들과 두루 어울렸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지성적으로는 광활하지만 지역적으로는 좁은 케임브리지의 학자들이 깊이 단절된 ‘두 문화’ 속에 각자 갇혀서 지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예로 스노우는 인문학자들이 열역학 제2법칙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크게 아쉬워했다. 이는 엔트로피 증가법칙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우주의 엔트로피는 끊임없이 증가한다’라고 간추려진다. 그런데 단 몇 마디로 표현되는 이 법칙은 인문·사회과학의 많은 현상에 적용되며 우주의 궁극적 운명을 내다보는 데에도 쓰인다. 이처럼 심오한 철학적 깊이에 광범위한 응용성을 가진 법칙을 음미할 기회가 전공의 벽을 넘어 널리 향유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그 이해가 아주 어렵다고 할 수 없다는 데에서 더욱 그렇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보자. 수학과 물리학의 발전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수학적 도구는 뉴턴이 창안한 ‘미적분’이다. 이 때문에 뉴턴은 흔히 아인슈타인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2대 과학자’로는 물론 아르키메데스, 가우스와 함께 ‘최고의 3대 수학자’로도 꼽힌다. 이런 뜻에서 미적분은 한 사람의 업적을 떠나 인류의 위대한 지적 재산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제대로 제시될 경우 핵심 아이디어는 중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주제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교과과정 때문에 인문계는커녕 이공계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자연과학의 예만 들었지만 이밖에도 전공의 벽과 상관없이 널리 공유해야 할 고귀한 지적 유산이 많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제도나 교과과정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지엽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에 아까운 에너지를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태는 아쉬움, 안타까움과 같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어린 시절부터 ‘벽’을 실감하고, 무력과 좌절을 품게 돼 분열에 이어 혼란에 빠지는 등의 실체적 문제를 겪는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두 문화’는 나눔이 아니라 융화에서 오히려 더 각자의 진정한 본원성을 찾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을 닦는 데에 교육이 앞서야 한다.
위 논지에 따르면 수학이나 과학 공부에서도 ‘두 문화’의 융화가 절실한데, 지면관계상 한 예만 들어본다. 오늘날 많은 교사와 학생은 수학과 과학을 ‘뿌리 없는 나무’ 또는 ‘부평초’처럼 여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수학과 과학을 막연히 ‘논리적 학문’으로만 여기는 데에 있다. 하지만 강조했듯 모든 학문은 인문과학이자 자연과학이다. 따라서 수학과 과학도 사람과 사상과 역사를 소중히 다뤄야 한다.
수학과 과학의 뿌리 찾기
중요하기에 계열에 상관없이 모두 잘 알고 있는 뉴턴의 운동법칙 중 첫째인 ‘관성의 법칙’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움직이는 물체를 그대로 두면 힘을 잃어 결국 멈춘다고 보았는데, 이 잘못된 결론은 그의 엄청난 권위 때문에 2000년이 넘도록 유지돼왔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단순한 사고실험으로 외력(外力)이 없으면 운동은 무한히 지속될 것임을 추리해냈다. 다만 그는 아직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러운 운동은 완전한 운동이므로 완전한 형상인 원을 그릴 것이라고 보았다. 나중에 데카르트는 자연스러운 운동은 직선운동이라고 올바로 지적했다. 그리고 마침내 뉴턴은 여기에 다른 두 법칙을 더해 운동법칙의 체계를 완성했다.
흔히 ‘뉴턴이라는 천재의 머릿속에’ ‘어느 날 갑자기’ ‘허공에서’ ‘불현듯’‘천상의 계시처럼’ 떠오른 것으로 알고 있는 운동법칙이 실제로는 이처럼 오랫동안 수많은 현인의 철학적·인간적 고뇌를 거친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것만으로 절실히 깨달을 수 있듯, 자연과학은 결코 메마른 논리가 아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역사·철학·인간·수학·과학 등을 일관되게 통찰할 수 있으며, 자연과학도 ‘뿌리 깊은 나무’임을 깨닫게 된다.
고무적인 것은 이상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에는 더 자세한 내용을 덧붙이더라도 대략 10여 분이면 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수업 태도와 성과는 크게 달라진다. 이런 과정은 계열과 전공의 벽을 허물고 재조정하여 높은 차원의 융화를 지향할 때 가장 충실히 이뤄질 수 있으며, 그 긍정적 파급 효과는 장차 우리 사회 전반에 미치게 될 것이다.
교육과 공부의 개혁
어른들은 학창시절의 공부에 대해 아픔과 기쁨이 교묘히 공존하는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다. ‘긴 고통 끝에 틈틈이 얻는 짧지만 그지없는 깨달음의 환희.’ 이것이 공부의 열락이고 인생의 한 축복이라고 여겼다. 또한 이게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이 외로운 개인적 과정이 실제로는 거대한 교육제도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열심히 했던 공부는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이었던가?”라는 생각에 이어, “지난날의 내 공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우리 학생들은 어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위해 어찌 배려해야 할 것인가?”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독자는 처음에 이 글에서 수학 공부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이고도 구체적인 원칙들이 제시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세세한 내용에 앞서 배경부터 짚고 넘어가야 했다. 사실 필자가 개인적 공부 원칙 가운데 가장 앞세우는 것은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필자의 제1원칙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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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우리가 가진 현재의 제도적 틀 안에서는 진정한 공부를 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나 완벽한 제도를 갖춘 적은 없다. 따라서 현 제도 아래서나마 각자 최선을 다해 진정한 방향을 추구하면서, 교육과 공부가 올바르게 조화될 길을 찾아야 한다.
수학 전 분야의 기초라 할 집합론을 창시한 독일 수학자 칸토어는 “수학의 경우 문제의 해결력보다 진정한 문제의 제시력이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답보다 문제를 더 많이 제기한 셈이 되었다. 아무튼 외람되나마 이 글이 우리나라 교육과 공부의 전반적 개혁에 관한 각자의 사색에 작은 실마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