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저주: 경제현상의 패러독스와 행동경제학’ 리처드 H. 세일러 지음, 최정규·하승아 옮김, 이음
그러나 경매의 승자가 실제로 패배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승자는 다음 중 하나의 방식으로 저주를 받는다. 첫째, 경매에서 너무 높은 금액을 부르는 바람에 시추권의 실제 가치보다 많은 돈을 들여 금전적 손실을 입는다. 둘째, 운 좋게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으로 시추권을 따냈더라도 이후 실제 얻은 이윤의 크기가 처음 예상한 것에 미치지 못해 실망한다.
입찰자가 많은 경매에선 이기기 위해 공세적인 입찰가격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는 곧 입찰 대상의 가치를 과대평가했다는 의미다. 손실을 줄이려면 수위를 조절해 입찰가격을 제시할 필요가 있는데, 그러면 입찰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딜레마에서 많은 사람이 ‘승자의 저주’라는 덫에 걸려든다.
이기고도 실패하는 이유
‘승자의 저주’를 쓴 시카고대 리처드 H. 세일러 교수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융합한 ‘행동경제학’의 이론적 틀을 마련했다. 그는 경제주체의 합리성과 이기성을 기본으로 한 기존 경제이론에서 ‘승자의 저주’는 이상(異常)현상이라고 했다. 합리적 입찰 이론에 따른다면 경매 참여자의 수가 많을수록 입찰가를 낮춰야 마땅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입찰가를 높이려는 경향을 보이니 말이다.
케이펜과 동료들이 제시한 데이터 가운데 이런 사례도 있다. 1969년 알래스카 노스 슬로프 지역 구매 건의 경우 낙찰가가 9억달러였는데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은 겨우 3억7000만달러였다. 전체 입찰 대상 지역 중 26%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최고 입찰금액과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간 차이가 4배 이상 났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그 차이가 최소 2배 이상이었다. 두 번째로 높은 입찰금액보다 조금만 더 높게 적어도 낙찰받을 수 있는데 2배 또는 4배 이상 높게 가격을 쓰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승자의 저주’는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이상현상이 아니라, 경매와 입찰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일반적이라 할 만큼 자주 벌어지는 현상이다. 또 한 번 ‘승자의 저주’에 걸려들면 다음에는 이를 교훈 삼아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데, 현실에서 경매 입찰자들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 케이펜과 동료들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상품 꾸러미가 가치 있을 것 같아서 입찰에 참가한다면, 언젠가는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
‘승자의 저주’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남의 얘기가 아니네” 하고 중얼거렸다. 국내에서 거래되는 해외 저작권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본 판권은 선(先)인세 400만~500만원이 최고치였는데 이제는 웬만한 작품이 1000만원 안팎에서 입찰이 시작되며, 몇몇 인기 작가는 4000만~5000만원도 모자라 1억원은 ‘질러야’ 한다.
인기 있는 해외 저작물에 대한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제한되어 있으니 몸값이 오르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거래를 중계하는 에이전시들이 시작부터 1만달러 이상 쓰라고 주문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1만1000달러를 썼으니 조금 더 높이 써보라고 친절하게 귀띔하니 저작권료는 자꾸자꾸 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한국시장을 잘 아는 눈치 빠른 해외 메이저 출판사들은 처음부터 ‘입찰가 얼마 이상’이라고 하한가를 못 박기도 한다. 심지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책을 찾아서 오퍼를 넣겠다고 하면, 재빨리 이 사실을 다른 출판사에 알려 입찰경쟁을 유도하는 에이전시도 있다.
책값이 자꾸 비싸지는 이유
원죄는 출판사들에 있다. 누구의 작품이 한국시장에서 먹힌다거나 무슨 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우르르 몰려가서 그 작가의 초기작까지 싹쓸이해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자금력 있는’ 출판사 사장은 사고자 하는 해외 저작권이 나오면 무조건 “최고 입찰가에 10% 더”를 외친다.
자, 이렇게 비싼 선인세를 치렀으니 흥행은 맡아놓았다? 천만의 말씀이다. 여기서도 ‘승자의 저주’가 통한다. 출판계의 오랜 불황으로 ‘다품종 소량 생산’ 체제가 굳어진 지 오래다. 대한출판협회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신간도서는 4만5521종, 1억1313만9668부 발행. 2005년에 비해 종수는 4.4% 늘어나고 부수는 5.5% 줄었다. 종당 평균 발행부수도 2485부로 전년(2746부)에 비해 9.5%나 줄었다.
이런 현실에서 수천만원 또는 억대의 선인세를 지급한 책을 출판한 뒤 가만히 앉아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출판사는 없을 것이다. 이제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이 뒤따른다. 선인세가 1억원이라면 그만큼의 마케팅 비용을 들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 광고가 실리고,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의 눈길 머무는 곳마다 광고가 붙어 있다. 할인쿠폰에 ‘배보다 배꼽이 큰’ 발간기념 선물까지 끼워준다. 천문학적인 선인세를 지급한 책은 정가가 비싸질 수밖에 없다.
비싼 선인세에 마케팅 비용까지 아낌없이 쓰는 책들을 볼 때마다 궁금한 게 있다. 도대체 몇 부나 팔아야 손익분기를 넘을까 하는 점이다. 흔히 하는 말처럼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음 싶다. 1981년 디사우어라는 연구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는 사례연구를 통해 “경매를 통해 출판권을 얻은 책들 대부분이 출판권을 사들이는 데 지급한 선수금 이상을 벌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이 책들은 참담한 패배로 이어진다”고 보고했다.
설령 이 책들이 초기에 베스트셀러 순위 진입에 성공해 손익분기를 넘기고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해도 해당 출판사에는 경사일지 모르나 국내 출판계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시멜로 이야기’에서 보듯이 베스트셀러에 대한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 국내 출판계에서 이렇게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어 만든 베스트셀러가 몇 종 등장하면 웬만한 책들은 명함도 못 내밀고 종당 평균 발행부수 2485부에서 사라져야 한다. 또 높은 선인세에 길든 해외 출판사들이 알아서 몸값을 낮출 리 없으니, 자금력 없는 출판사들은 해외 유명 작품에 입질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극단적인 예측인가?
협조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자. 세일러 교수는 현실 경제에서 이기적인 탐욕 대신 ‘협조’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서로 모르는 사람 7명이 한 그룹을 이룬다. 이들에게 각각 5달러씩 준다. 이들은 5달러를 공공재 생산에 기여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갖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7명 중 전액을 공공재 생산에 기여한 사람의 수가 일정 기준(예를 들어 5명 이상)을 넘으면 그 집단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들의 기여 여부에 관계없이 10달러를 받는다. 그러니까 그룹내 기여자의 수가 일정 기준을 넘으면 기여한 사람들은 애초 받은 돈의 2배인 10달러를 상으로 받고, 기여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의 5달러에 상으로 받은 10달러까지 15달러를 받는다. 그러나 만약 기여자가 기준치를 밑돌면 아무런 보상이 없다. 즉 기여자는 5달러를 날리고, 기여하지 않은 사람은 원래의 5달러를 그대로 갖게 된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무임승차자(기여하지 않은 사람)는 기여자가 5명 이상이면 15달러, 기여자가 5명 미만이어도 5달러는 챙길 수 있는데 기여자는 한 푼도 받지 못할 수 있으니 불공평하다.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 경우 무임승차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많은 사람이 금전적 보상에 상관없이 ‘옳은 일을 한다는 신념’ 때문에 기여를 선택했다. 보통 기여율은 40~60%에 달한다.
이제 출판계는 ‘승자의 저주’에서 벗어나 ‘협조의 규범’에 눈을 돌려야 한다. 점점 더 높은 입찰가를 써내야 하는 저작권 경매 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값비싼 경품과 할인쿠폰, 1+1식의 무한 마케팅 대신 도서정가제라는 ‘협조의 규범’을 받아들인다면, 그 혜택은 모든 출판사에 골고루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