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김수영

온몸으로 밀고 나간 참여시의 거침없는 삿대질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입력2009-02-03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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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온한’ 시인 김수영은 마흔여덟에 세상을 달리했다. 혹자는 30대 김소월의 죽음보다 김수영의 죽음을 더 안타까운 요절로 느낀다. 갑갑하게 옥죄는 사회검열에 반동하고, 자기검열의 압박에 가슴을 풀어헤치며 온몸으로 자유를 이행(履行)하려 했던 그는 누구보다 젊었기 때문이다.
    김수영
    1968 년 ‘사상계’ 1월호(잡지 사정상 2월에야 발간)에 ‘지식인의 사회참여’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도전적인 평론이 실렸다. 일간신문의 논설을 상대로 해서 쓴 이 글에서 김수영은 언론이 현실문제에 대해 ‘이 빠진’ 소리를 하거나, ‘방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예컨대 1967년의 6·8 부정선거 규탄이나 서울대생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세칭 ‘민비(民比)’)사건과 관련, 시위자들의 발언이 지하로 매장되거나 피고인들을 두둔하는 발언은 “모조리 휴지통에 쓸어넣는” 등 언론이 사실상 ‘검열관’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해 ‘조선일보’ 사설란에 이어령의 ‘우리 문화의 방향’이 실렸다. 이어령은 이 글의 서두에 “우리 사회는 경제건설 다음에 문화발전을 이룩한다는 서열을 매기지 말고 발전의 표리로서 문화를 생각해야 한다”는 전제를 내세우면서, “(문화)의 방향의 문제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동백림사건”이라며, “상당수 문화인이 그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자체는 간첩행위 이상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 행위의 밑에 만의 일이라도 ‘인터내셔널’한 생각이 깔린 소치였다면, 이는 관련자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일반문화인의 성향과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김수영은 이 사설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전제에 대해 너무나 당연한 것을 내세우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가장 전형적인 안이함에서 비롯됐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 사설은 ‘본론’인 동백림사건에 대해 ‘인터내셔널’이란 애매한 표현을 써서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일반 문화인의 성향’과 ‘관련시켜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한다고 수사를 늘어놓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관련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힐난했다.

    요컨대 문화와 예술의 자유 원칙을 인정한다면, 학문이나 작품의 독립성은 어떤 권력의 심판에도 굴할 수 없고 굴해서도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무식한 위정자들은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김수영은 주장했다.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하다”



    김수영은 이 평론에서 이어령이 1967년 말 ‘조선일보’에 발표한 ‘에비가 지배하는 문화’라는 시론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창작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있는 것 같은 감을 주는 것이 불쾌하다. 우리나라 문화인이 허약하고 비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을 그렇게 만든 더 큰 원인으로 근대화해가는 자본주의의 고도한 위협의 복잡하고 거대하고 민첩하고 조용한 파괴 작업을 이 글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김수영은 이어서 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에비’는 이어령이 보는 것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가 아닌, “가상적인 어떤 금제(禁制)의 힘”이 아닌, “가장 명확한 금제의 힘”이라고 주장했다. 김수영에게 그것은 바로 ‘상상적 강박관념’이었고, 그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모든 ‘불온한’ 작품이 거리낌 없이 쏟아져 나오지 않는 한 위기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있다”고 했다.

    다소 길다는 느낌이 들겠지만 논쟁의 진행을 좀 더 따라가 보자. 1968년 2월20일자 ‘조선일보’에 이어령의 ‘오늘의 한국문학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문예시평’이 게재됐다. 이에 김수영은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를 발표, 문학의 전위성과 정치적 자유의 문제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밀착해 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이해가 뒷받침된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반격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이어령)는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은 그것이 내향적인 것이 될 때는-즉 내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우에는-기존의 문학형식에 대한 위협이 되고, 외향적인 것이 될 때에는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이 된다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한 철칙을 소홀히 하고 있거나, 혹은 일방적으로 적용하려들고 있다.”(김수영 산문선집 ‘퓨리턴의 초상’, 1976, 민음사)

    김수영

    김수영 시인의 여동생 김수명씨(왼쪽에서 네 번째)가 후원하고 있는 ‘김수영 문학상’.

    김수영은 모든 실험적인 문학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진보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에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문화를 정치사회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나치스가 뭉크의 회화까지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그 전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듯이, 하나의 정치사회 이데올로기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문학과 예술의 전위성 내지 실험성이 제대로 순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문화의 조종(弔鐘)을 치는가

    김수영은 획일주의가 강요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서 유형·무형 대제도(문화기관)의 ‘검열관’과 ‘대중의 검열’을 공존시켜-이들의 대명사를 김수영은 ‘질서’라고 했다-거기에서 얻은 균형을 현대문학의 창조적 출발점으로 인정할 수는 없을까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공존의 모색이다. 사실 김수영이 보기에 ‘대중의 검열자’는 문화에 대해 ‘조종(弔鐘)’을 칠 만한 능력도 없는 ‘종지기’에 불과했다. 글을 씀에 있어 자기검열을 몰랐고 직선의 산문가이기도 했던 김수영은 이 글의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질서는 위대한 예술이다’-이것은 정치권력의 시정(施政)구호로서는 알맞지만, 문학백년의 대계를 세워야 할 전위적인 평가가 내세울 만한 기발한 시사는 못된다.”

    이어령도 물러서지 않았다. 곧바로 ‘문학은 권력이나 정치이념의 시녀가 아니다’라는 반론을 폈다. 이어령은 이 글에서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하다”는 김수영의 표현에 의미를 두고, “불온하니까 그 작품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불온하니까 그 작품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만 그 주장과 판단이 다를 뿐 문학작품을 문학작품으로 읽지 않으려는 태도에 있어 서로 일치한다”고 했다. 이어령은 문화의 창조적 자유와 진정한 전위성은 역사의 진보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역사, 그것을 보수와 진보의 두 토막으로 칼질해놓은 고정관념과 도식화된 이데올로기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수영은 다시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을 발표하고 이어령의 ‘불온성’ 시비에 대해 반박했다. 이어령이 ‘전위’나 ‘불온’을 “정치적인 불온성으로만 고의적으로 좁혀 규정하면서, 자신의 지론을 이데올로기에 부응하는 전체주의의 동조자 정도의 것으로 규정하는데… 인간의 사상사·문화사·예술사는 그런 전위성이 창조하고 이끌어온 역사”라고 반박했다.

    김수영과 이어령의 이 유명한 논쟁은, 문학작품은 사회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판독되어야 한다, 문학작품은 문학내적 현상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두 가지 극명한 대립적 입장에서 나왔다. 그런 면에서 이 논쟁은 한국인들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내재해 있던 ‘금제의 소리’를 밖으로 드러내 논리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대응논리 또한 인간성·순수성 같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넘어 문학내적 문제로 전개되었다는 데 크나큰 의미가 있다. 이들의 논쟁은 우리 문단사(史)에 기록될 전설적인 사건의 하나로서, 문학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으레 화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지식사회 전반에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헛소리가 참말 되는 詩의 기적

    이 논쟁이 있은 뒤인 1968년 4월13일, 김수영은 백철·이헌구·안수길·모윤숙 등과 함께 부산펜클럽 주최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했다. 김수영은 연단에서 40여 분에 걸쳐 우리 문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시론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김수영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민음사, 1975)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은 바로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고, 시의 세계에서 볼 때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은 사랑이고, 그것이 바로 시의 형식이라고 김수영은 주장했다.

    김수영

    서울 도봉산 자락에 세워진 김수영 시비.

    시의 형식 및 내용과 관련,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실상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로,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 지껄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계속 지껄이는 것이 김수영에게는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이며, 시인의 그런 ‘헛소리’가 계속되다 보면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김수영에게 자유는 아무런 원군도 없는, 원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그는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는 문학풍토, 정치적 금기에 의해 상처 입지 않는 풍토에서 새로운 문학은 결코 나올 수 없다고 했다.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 한 혼란은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 혼란은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이고, 그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라고 했다. 김수영이 이날 정열적인 어조로 표현한 시론은 우리 문단은 물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널리 회자된 유명한 선언이었다.

    ‘거대한 뿌리’ 시인의 초상

    1968년 6월15일 김수영은 신동문·이병주·정달영과 함께 청진동에서 소주를 마시고 다시 무교동으로 옮겨 맥주를 마셨다. 김수영은 취해 있었고 걸음은 비틀거렸다. 그가 을지로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 내린 것은 자정을 바로 앞둔 시간이었다. 김수영은 인적이 끊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때 좌석버스가 인도로 뛰어들면서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았다. 김수영은 곧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아침 눈을 감았다. 향년 48세였다. 장례식은 6월18일 예총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오른쪽) 광장에서 문인장(葬)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서울 도봉산 선영에 묻혔다.

    김수영은 과거적 의미보다 현재성으로 ‘살아 있는’ 인문정신에 가깝다. 그가 만약 살아서 오늘과 같은 지구문명의 거대한 폭풍을 만났다면, 인류문명의 앞날에 대해 과연 어떤 전위적 패러다임을 내놓을까. 팍스아메리카나의 종언 속에서 과연 어떤 미래에의 꿈과 ‘예지’를 보여줄까. 그리고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우리 사회의 총체적 위기국면과 혼란, 갈등의 회오리 속에서 그는 어떻게 ‘사랑의 변주곡’에 표현된 ‘고요한 단단함’을 배우라고 했을까.

    48세의 짧았으나 ‘거대한 뿌리’ 같았던 자유인 김수영의 생애를, 자칫 역(逆)주행으로 치달을지 모르는 오늘의 시대상황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보자.

    김수영은 1921년생으로 서울 종로바닥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잔병치레가 잦았다. 1935년에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해 1941년에 졸업했다. 그해에 도쿄로 건너가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 들어갔다. 유학시절 함께 하숙생활을 했던 영문학자 이종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소련의 사실주의적 연극이론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예술과 나의 생애’에 심취해 있었다.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의 전신은 쓰키지(築地)소극장으로, 1920년대에 주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렸으며, 연극이 끝난 후에는 젊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천황제를 전복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해방공간에서 김수영은 박인환이 경영하던 말리서사(茉莉書舍)에서 당시 첨단을 걷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김병욱 이시우 박일영 같은 예술가들과 교유했다. 이 무렵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 이미 상당한 습작을 하고 있었으며, 광복 후 최초로 나온 동인지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했다. 활자로 나온 김수영의 첫 작품이다.

    말리서사가 사라지고 얼마 뒤 전후 모더니즘의 효시가 되는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엄격히 말하면 ‘신시론’ 동인의 동인지. 1949년 4월에 발간)이 첫선을 보였다. 이 사화집(詞華集)은 김기림, 이상의 1930년대적 모더니즘을 1950년대 모더니즘으로 확산시키는 길목에서 징검다리가 되었다.

    김수영은 이 사화집에 ‘공자의 생활난’이란 모더니즘 계열의 전형적인 난해시를 발표했다.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너는 줄넘기를 한다”로 제1연을 시작한 시는 의미의 혼란과 단절, 돌연한 전환, 엉뚱한 비약 같은 것을 노렸다는 해석에서, 종래의 시적 관습의 굴레를 대담하게 벗어나면서 시인의 구도적 자세가 이미 그 싹을 보였다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을 낳았다.

    “생활은 고절이며 비애”

    광복 후 초기 모더니즘 시운동은 우리 문학사에 기록할 만한 자취였으나, ‘신시론’ 동인이 해체되고 ‘후반기’ 동인의 형성이 모색되는 과정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김수영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혹심한 고통을 겪었다. 1953년에 발표된 ‘달나라의 장난’에서 그는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생활이며” “생활은 고절(孤絶)이며 비애이었다/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고 처절하게 독백했다.

    1953년이 저물어가는 10월 어느 날 김수영은 서울로 올라왔다. 전쟁통에 모든 것이 그야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였다. 그의 가족은 이제 집도 없었다. 시를 써서는 입에 풀칠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그 무렵 김수영은 수없이 많은 번역을 했다. 미국 잡지나 단행본을 파는 노점에서 번역할 자료를 찾아 재미있는 글들을 추려내어 여기저기 잡지사나 출판사를 기웃거려 보여주고 밤을 새워 번역했다.

    1953년 12월부터 이듬해 12월 사이에 쓴 그의 시를 보면 ‘설움’이란 단어가 밀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의 가족’에 이런 대목이 있다.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유순한 가족들이 모여서/죄 없는 말을 주고 받는/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방 안에서/나의 위대의 소재를 더듬어보고 짚어보지 않았으면” ‘한없이 순하고 아득한 바람과 물결’ 같은 사랑, 낡아도 좋은 사랑을 갈망했던 것이다. 1955년 6월 김수영은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김수영은 채소를 가꾸고 닭을 길렀다. 그런 생활이 김수영의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오랜만에 안정시켜주었다. 사실 그는 양계나 밭일에 있어 아내의 ‘조수’에 불과했다.

    “4월은 맹렬히 작열하고 있소”

    현대에 와서 우리나라의 서정시들은 낡기 쉬운데, 김수영은 모더니즘적 실험의 유산과 자신의 서정적 자질을 독자적인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그중 1957년에 발표된 ‘폭포’ 같은 작품은 단순한 서정을 넘어 지적으로 견고한 진술을 이루고 있다. 4·19 직후의 수작인 ‘푸른 하늘을’은 ‘폭포’의 연장선에서 오랜 시적 수련을 쌓고 역사적 사건을 막 목격한 시인의 성숙함을 보여준다고 백낙청은 평가했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 없이 떨어진다…”

    1958년 11월1일 김수영은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폭포’를 비롯해 ‘꽃’ ‘봄밤’ 등이 수상작으로 열거됐다. 이듬해 춘조사(春潮社)에서 ‘오늘의 시인선집’ 제1권으로 김수영의 시집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했다. 제2권은 김춘수의 시집, 제3권은 전봉건의 시집이 선정됐다. 김수영은 인세로 받은 책들을 보자기에 싸들고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기증했다. 가슴이 뿌듯했다. 첫 시집을 교도소에 뿌렸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해될 듯했다.

    1950년대는 실로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김수영에게 이 연대는 각박한 생활에서 오는 한없는 고달픔, 정직하고 진실되게 살려는 갈망, 생활의 궁핍과 정신의 갈증에서 오는 자책과 죄의식, 그리고 이 모든 것에 깃들어 있는 비애와 우수의 시절이었다. 강인한 사회의식과 열렬한 참여정신은 김수영 문학의 상표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것은 실상 1950년대 전 기간에 걸친 이런 고뇌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뤄진 결정이다.

    4·19혁명 당일 김수영은 라디오 앞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시내로 나갔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이승만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기까지 김수영은 미친 듯이 거리와 골목, 다방과 술집을 쏘다녔다. 김수영은 4·19혁명일에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는 전율에 빠졌다. 그 무렵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시를 썼다. 그러면서 불과 몇 달 사이에 1년치 시를 지었다. ‘기도’ ‘육법전서와 혁명’ ‘만시지탄은 있지만’ ‘나는 아리조나 카우보이야’ 등이 이때 발표됐다. 그중 ‘가다오 나가다오’ 같은 시는 당시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한 구절만 보자.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가다오 가다오”

    1960년에 김수영은 마침내 난해의 껍질을 벗고 ‘푸른 하늘을’을 발표한다. 오늘에 와서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시의 2연을 보자.

    “자유를 위해서/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

    4·19 당시 김수영의 흥분과 환희, 사랑, 사상의 격동성과 전진성·예각성은 북으로 올라간 그의 친구 김병욱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수신자도 적어 넣을 수 없었던, 그래서 차라리 방백(傍白)에 불과했던 이 편지에서 김수영은 4·19혁명에 대한 감동을 민족통일과 시, 자유에 대한 단상으로 전개하고 있다. 중요한 한 대목만 보자.

    “사실 4·19 때에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통일’을 느꼈소. 이 ‘느꼈다’는 것은 정말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위대성을 모를 것이오. 그때는 정말 ‘남’도 ‘북’도 없고 ‘미국’도 ‘소련’도 아무 두려울 것이 없습디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자주독립’ 그것뿐입디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이 그처럼 아름다워 보일 수가 있습디까! 그러니까 나의 몸은 전부가 바로 ‘주장’입디다. ‘자유’입디다. …이남은 ‘4월’을 계기로 해서 다시 태어났고, 그는 아직까지도 작열하고 있소. 맹렬히 작열하고 있소. 이북은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반드시 이 ‘작열’을 느껴야 하오. 그렇지 않고서는 통일은 안되오.”(‘詩友 김병욱형에게’, ‘민족일보’ 1961년 5월9일자. 이 글은 계간 ‘세계의 문학’ 1993년 여름호에도 실렸음)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이행

    4·19는 김수영의 문학적 생애에 있어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의 문학에서 사회적인 성격이 짙어졌고, 인간의 삶을 규정 짓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관심이 나타났다. 김수영은 모더니즘의 김기림적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한편으로 그 허위와 기만성을 통렬하게 공격했다. 한국의 모더니즘은 하나의 관념으로서는 존재하나 당대의 구체적 현실로부터 유리돼 있었고, 따라서 대다수의 독자에겐 난해하고 공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종의 문학적 허위가 자리 잡아간 것이다. 염무웅은 이에 대해 “좋은 이상의 시가 가짜의 누명을 쓸 여지를 남겨놓고 있는 반면에, 나쁜 악류의 모더니즘의 시가 실격의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또한 생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했다. (‘김수영론’, ‘창작과 비평’ 1976년 봄호)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시인이 바로 김수영이다. 그는 ‘모든 진정한 새로운 문학’을 ‘기성사회의 질서에 대한 불가피한 위협’으로 파악했다. 당대에 김수영은 위험스러울 정도의 과격한 급진 자유주의자로 알려졌으나, 그는 모더니즘 시의 내용 없는 형식주의에 건강한 사회의식을 결합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형식과 내용은 탁월한 의미에서 동시적인 것이고 고도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다. 나는 우리의 현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부끄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보다도 더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은 이 뒤떨어진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이다.” (‘모더니티의 문제’, ‘퓨리턴의 초상’, 민음사, 1976)

    시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 사상이고, 사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생활의 변화라고 하면, 새로운 시는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실천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김수영은 자기 시대의 현실이 너무나 열악한 조건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그 무엇보다 자유가 너무나 억압받고 감금돼 있다고 했다. 심지어는 ‘자유의 회복’이야말로 자신의 신앙이라고까지 고백한다. (‘나의 신앙은 자유의 회복’, ‘시여 침을 뱉어라’)

    사랑은 자유의 실천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저항이며 실천의 총체였다. 김수영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자유를 추구함으로써 자유의 완전에 ‘이르려’ 하고 있다. 그는 완전한 자유, 완전한 혁명을 꿈꾸었다. 그러나 ‘완전한’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이르려’는 꿈, 불완전한 혁명(자유)을 ‘완전혁명’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꿈’이 필요하며, 그에게는 그 ‘꿈’이 곧 시였다. 김수영은 1960년 6월17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말하자면 혁명은 ‘상대적 완전’을, 그러나 시는 절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 현대에 있어서 혁명을 방조 혹은 동조하는 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적 완전을 수행하는 혁명을 절대적 완전에까지 승화시키는, 혹은 승화시켜 보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수영전집’ 2권 ‘산문’편, 민음사, 1982)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황송하다”

    5·16은 김수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뒤엎어버리는, 반동 그 자체였다. 5·16 직후 쓴 ‘격문(檄文)’ ‘모르지?’ 등 연작시에는 5·16을 빗대 쓴 시구가 자주 나타난다. 그는 ‘복중(伏中)’이란 시에서 “미친놈처럼 라디오를 튼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미칠 것 같아서”라고 했고, ‘이놈이 무엇이지?’에서는 아무 데나 담뱃재를 떨 만큼 성급해지며, “이데올로기도 없다/밀모(密謀)는/전혀 없다… 낚시질도 안 간다… 하물며 중립사상연구소에는 그림자조차 비친 적이 없다”고 조급성을 보이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1960년대 중반부터, 그러니까 후기시로 들어서면서부터 김수영은 특유의 반복과 역설, 비약과 반전, 단절과 압축 등 갖가지 기법을 동원해 뛰어난 작품을 쏟아냈다. 달라진 것은 과거의 팽팽한 긴장감과 속도감의 여운이 남아있는 가운데, 좀 더 폭이 넓어지고 너그러워졌으며, 역동적인 개념의 ‘사랑’으로 집약되어가는 것이라고 평론가들은 해석했다. ‘거대한 뿌리’(1964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1965년), ‘눈’ ‘설사의 알리바이’(1966년), ‘VOGUE야’ ‘사랑의 변주곡’ ‘꽃잎 1·2·3’(1967년)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풀’(1968년) 등이 이때 발표됐다.

    1964년에 발표된 ‘거대한 뿌리’는 시적 이미지 정돈에 역행하는 산문체로 일상의 경험적 제약을 넘어 역사적 체험에까지 거침없이 육박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더러운 역사라도 좋다/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김수영은 이 시에서 역사의 기억을 반추하며 미래진행형의 역사로 힘차게 나아가고자 상상력을 극화한다. 김수영은 이 시에서 요강·망건·장죽·종묘상·장전·구리개 약방·신전·피혁점·곰보·애꾸·무식쟁이 등을 ‘카니발적’으로 호명, ‘내가 뿌리박기 위해’ 어떻게 보면 하찮은 것들과 지지리 못난 이들을 공동체적 운명으로 포옹하려는 치열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후기 대표작인 ‘사랑의 변주곡’은 첫마디에서부터 대도시의 욕망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겠다는 당당하고 거침없는 어조를 드러낸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서” 김수영은 이 시에서 도시의 온갖 소음마저 창조적 혼돈의 힘 또는 일상의 구체성을 띤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랑과 욕망이 뒤엉킨 도시의 정글과 ‘가시밭’ 길을 매순간 헤쳐가는 삶에서 욕망을 사랑으로 끌어올리는 희망을 담보할 수 있다고 외친다.

    도취적·환상적 현대시

    김수영은 프랑스혁명과 4·19혁명을 포함, 인류가 겪은 모든 혁명이 결코 단번에 성취될 수 없으며, 혁명의 시초를 배반하는 숱한 반혁명을 통해 혁명은 단련된다고 했다. 그는 역사를 바꾸는 힘을 ‘사랑의 변주곡’으로 봤다.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혁명 후에도 ‘열렬한 사랑의 열도’를 내면화할 줄 아는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그는 이 시에서 묘출(描出)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존재의 뿌리까지 뒤흔드는 온갖 시련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난 뒤의 ‘고요한 사랑’이야말로 폭풍에 쓰러지면서도 폭풍을 일으킬 수 있으며, 사랑의 ‘고요한 단단함’을 알 때까지 성숙해야 한다고 힘찬 목소리를 내뿜는다. ‘사랑의 변주곡’의 마지막 행들은 우리 현대시의 가장 도취적이고 환상적이며 장엄한 행복의 약속을 보여주는 잔치다운 대목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인류의 종언의 날에/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미대륙의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 거다!/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싸구려 번역의 원고료, 6부 이자로 빌려온 돈, 헌책방에서 사온 책, 술, 라디오, 메밀국수, 양계, VOGUE 잡지 등 생활현실의 세목(細目)을 자주 도입하던 김수영은 이제 ‘인류의 종언의 날’이 암시하는 까마득한 시간, ‘미대륙’으로 환기되는 공간적 거리까지 시작(詩作)의 세계를 거칠 것 없이 펼쳐나갔다.

    1968년에 발표된 ‘풀’은 김수영의 최후 작품이며 드물게도 단시(短詩)의 형식을 띠고 있다. 흔히 ‘김수영 문학의 극점’이며 ‘행복한 시간의 우연’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절제와 함축의 묘미가 탁월하게 직조(織組)된, 그의 시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작품으로 평가된다. ‘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는 단순한 자연적 현상을 대상으로 했다고 보는가 하면, 뿌리 뽑힌 존재, 정치사회적 알레고리로 보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해석이 있다. 이 시에는 마치 동요와도 같은 소리의 울림과 더불어 무궁무진한 ‘의미의 울림’이 담겨 있다. ‘풀’과도 같은 민중의 삶에 대한 생각은 이 시에서 결코 군더더기가 아니다.

    ‘세계의 개진(開陳)’으로서의 산문

    여기서 김수영의 산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영의 식을 줄 모르는 싱싱한 젊음과 자유에 대한 간구, 그리고 진실에 대한 갈증은 일체의 우회와 곡사(曲事)를 거부하는 직선적 산문에서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김수영은 대중할 수 없는 무책임한 글이나 거짓말이나 흐리터분한 말은 일절 하지 말라고 동료시인이나 지인들에게 강조했다. 김수영의 산문은 이상(李箱) 이래의 일품이며, 상쾌한 정신의 환기장치였다. 그의 산문은 그의 시와 더불어 꼭 있어야 할 ‘시간과 공간의 필연’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김수영이 남긴 산문은 일기초, 미완성 소설 한편(‘의용군’), 시작(詩作)노트, 서간문, 시의 월평 및 서평, 그리고 에세이 등이다. 김수영의 명쾌한 회화조 산문은 1950년대에 사적인 수준에 머물렀으나, 1960년대 들어 ‘세계의 개진(開陳)’으로 진전한다. 4·19에서 5·16까지의 산문들은 급진적 자유주의와 시적 감수성의 정치를 주제로 삼고 있다. 가령 라이트 밀스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통해 혁명의 당위적 방향을 가늠하는가 하면, 1961년에 쓴 ‘시의 뉴프런티어’에서 “알맹이는 다 이북 가고 여기 남은 것은 다 찌꺼기뿐이냐”라고 탄식했다.

    1960년대의 산문들에서는 이 글의 처음에 언급된 이어령과의 논쟁에서와 같이 ‘불온할 자유’를 옹호하는가 하면,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청맥’ 1966년 5월호)에서는 “4·19를 공휴일로 지정하지 못하고, 통행금지가 해제되지 않고, 월남파병을 반대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이 질식하고, 언론자유가 없는” 현실을 개탄한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한국사회에 미만했던 정의·자유·평화 정신의 후진성과 인류문명에 대한 안이한 도피 등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고자 했던 김수영만의 삿대질이었다. 한마디로 김수영의 산문은 1950,60년대 현실 속에서 세계사적 동시성을 추구했던 변혁적 지식인이 당대를 향해 내리꽂은 가장 웅변적인 선언이었다.

    자아의 확장, 사회적 해방

    신동문은 김수영을 목소리가 다듬어지지 않은 성서의 요한과 같았다고 보았다. 신동엽은 김수영의 죽음은 이 민족의 ‘가슴아픈 손실’이라고 슬퍼했다. “30대에 맞은 김소월의 죽음보다 40대 후반에 당한 김수영의 죽음을 더욱 요절로 느끼게 하는 것은 거푸 태어날 수 있었던 그의 젊음 때문”이라며 유종호는 아까워했다.

    지난해 김수영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됐다. ‘창작과 비평’은 여름호에 그의 서랍 속에 묻혀 있던 ‘불온한’ 시와 일기 여러 편을 찾아내 발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염무웅은 이들 작품을 통해 김수영은 “시인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자기검열의 메커니즘에 도전”했고, 김수영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의 확장과 사회적 해방을 한몸 안에 통합한 ‘자유의 이행(履行)’을 이루려고 했다.

    김수영은 분명 하나의 도전이었다. 인물이건 작품이건 어떤 문학사적 사실이 후세 사람들의 삶과 의식에 끊임없이 회자되고 새롭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오늘에도 분명 ‘살아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문학사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 인문학과 지식사회 전반에 걸쳐 함석헌·김지하 등과 함께 광복 후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의 속도감 있는 참여 궤적은 문학사의 긴장감은 물론, 당대 및 후대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에도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사랑의 변주곡’에 등장하는 ‘인류의 종언의 날에’나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같은 구절은 오늘의 인류가 당면한 한계상황을 묵시록적 서사로 예지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김수영
    윤무한

    1943년 대구 출생

    고려대 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수료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경향신문 정경문화부장·부국장, 민주일보 편집국장

    1993~98년 대통령비서실 통치사료비서관, 강원대 사학과 초빙교수

    저서 및 논문 : ‘인물대한민국사’ ‘한국사 정립을 위한 새로운 시론’


    순수와 참여, 첨단과 ‘정지’, 해탈과 풍자 사이의 간극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혹은 시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무의미’로 ‘의미’를 뛰어넘으려 한 김수영은 지금 서울 도봉산 자락 시비(詩碑) 아래 ‘풀’처럼 누워 있다.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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