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한국 언론의 정명(正名)은 무엇인가

  • 입력2009-02-05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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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월터 리프만(1889~1974)은 “매스미디어가 우리들 머릿속 상(像)을 구축한다”고 했다. 매스미디어가 특정한 이슈를 중요한 것으로 강조해 부각시키면 수용자들도 그것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문제가 중요하다고 하면 독자나 시청자는 아, 저 문제가 중요하구나 생각하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이러한 효과가 모든 수용자에게 똑같이 작용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독자 및 시청자의 인식 수준이나 경험의 폭, 이해관계, 이념적 성향 등에 따라 다양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매스미디어의 효과란 대개 완벽하게 검증되지 못한 가설(假說)의 수준에 머문다.

    그러나 ‘매스미디어가 보여주는 것이 곧 현실이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가설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많은 사람은 대중매체라는 창(窓)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읽는다. 따라서 창이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읽는 눈이 달라질 수 있다. MBC 뉴스데스크의 신경민 앵커는 1월1일 밤 방송 마무리 발언에서 KBS의 제야 타종 방송은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준 현장실습 교재”라고 했다. 보신각 주위에서 ‘MB 아웃’을 외치던 일단의 시위대 모습을 비춰주지 않은 KBS의 ‘창’을 비꼰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창을 통한 현실의 모습이 여론을 만들고, 여론은 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바퀴다. 여론은 권력을 작동하게 하지만 그것을 무력화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어떤 정권도 여론을 만들어내는 창인 매스미디어, 그중에서도 대중적 영향력이 높은 방송을 내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애쓸 필요가 없었다. 밤 9시 ‘땡’ 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던 ‘땡전 뉴스’는 이름만 공영이었던 관영방송의 적나라한 몰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권력의 입맛대로 하기가 쉽지 않다. 방송의 공공성과 산업성이 충돌하면서 문제는 대번에 여 대 야, 신문 대 방송, 신문 대 신문의 격렬한 싸움으로 치닫는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한복판에 있다.

    언론 관련법 개정안의 1월 임시국회 내 처리가 야당의 결사 저지로 무산된 후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MBC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공영화나 민영화에 대해 논의한 바가 없다”고 했다. “민영이든 공영이든 MBC가 자체적으로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정부는 방송을 장악할 의도가 전혀 없고 또 장악할 수도 없다”고 했다. 이들의 말을 거짓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온전한 신뢰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민의 신뢰다



    그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현재 추진하는 다른 여러 일과 마찬가지로 ‘속도전’에 쫓기듯 설명과 설득의 과정을 생략한 데서 비롯된다.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대미문의 대책이 필요하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전이 필요한데 설명하고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란 말이냐, 대통령은 그렇게 마음이 급할지 모른다. 정권의 핵심 인사들은 대통령 의중을 읽고 그 뜻을 좇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은 개발독재 시대가 아니다. ‘정주영 신화’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로 국정을 운영할 수도 없다. 소수 야당이 폭력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무너뜨렸다고 하지만 언론관계법 개정이 벽에 부딪힌 근본 원인은 국민 다수가 정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앞세운 ‘미디어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가 야당과 반대세력이 내세운 ‘정권의 언론장악 음모’에 밀렸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름 붙이기 싸움에서 밀린 게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밀린 것이다. 다수 국민이 정권의 말을 신뢰하고 지지한다면 야당과 반대세력은 결코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정권이 국민을 설득해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국회 의석수만으로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얘기가 된다. 방송의 공공적 가치와 산업적 가치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비판세력이 주장하는 여론의 독과점 우려는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다수 국민이 그만하면 믿을만하다고 해야 한다. 미디어 문제를 단순히 산업적 측면, 즉 경제논리만으로 보자고 해서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경제 살리기용 민생법안’이라고 거듭 강조한다고 해서 언론의 공적인 가치, 즉 공공성의 논리를 제압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정권 측은 벼락치기로 해치우려 했다. 정부와 여당 간 협의도 없었고 공청회 등을 통해 문제점을 수렴하는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조차 법안 내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지 못했다고 불평할 정도다. 그러니 야당과 반대세력이 이름 붙인 ‘정권의 방송장악 음모’가 힘을 얻은 것이다. 지나치게 서두르다가 ‘보수 권력과 재벌, 메이저 신문의 카르텔’이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규제 완화 및 경쟁 활성화를 통한 미디어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는 옹색한 꼴이 되고 말았다.

    언론관계법 개정, 힘겨루기로 될 일인가

    1980년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에 비추어 언론기관의 과점화는 공익과 배치되므로 어느 개인이나 법인이 신문과 방송을 함께 소유함으로써 민주적 여론 조성을 저해하는 언론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는가. ‘땡전 뉴스’와 ‘보도지침’으로 상징되는 군부독재 정권의 언론정책은 민주적 여론 조성은커녕 억압과 통제 일변도였다. 이는 방송의 소유구조만으로 공공성과 다양성이 담보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방송민주화란 권력과 언론, 시민사회 간 힘의 관계를 반영한다. 독재 권력이 시민사회를 제압하면 방송은 그 이름이 공영이든 민영이든 권력의 하수 기능을 하며, 시민사회의 민주적 역량이 권력을 감시 견제할 수 있으면 상업방송이라 할지라도 방송의 공적 기능에서 일탈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사회가 19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경제위기에 위축됐다고는 해도 한국 사회의 민주적 역량이 일부 방송에 휘둘릴 만큼 약화됐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재벌과 메이저 신문이 방송에 진출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여론의 과점화로 이어진다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경직된 논리일 수 있다. 시민사회의 발전, 특히 쌍방향 소통의 인터넷 미디어의 급속한 확산에 비추어볼 때 더욱 그렇다. 다만 권력이든 재벌이든 방송을 사익화(私益化)하려는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를 방지할 제도적 장치가 세밀하게 마련돼야 한다.

    한나라당은 2월 임시국회에 언론관계법 개정안을 재상정한다고 하고, 민주당은 상정 자체를 반대하겠다고 한다. 딱한 노릇이다. 그런 힘겨루기로 해결될 문제인가.

    MBC가 정명(正名)을 찾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이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한국 언론 전체의 신뢰도는 급락할 것이다. 사실 이것이 언론관계법 개정보다 훨씬 더 중대한 문제일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서 매스미디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그 사회공동체의 공론장(公論場)은 붕괴할 것이고, 공론장이 붕괴되면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다. 포퓰리즘으로 부풀려진 다수 의견이 소수 의견을 묵살하거나, 응집된 소수가 이완된 다수를 지배하는 여론의 왜곡이 일상화한다면 민주주의는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 언론은 이른바 보수 신문 대 진보 신문, 신문 대 방송, 방송 대 방송의 중층적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보수 신문과 진보 신문을 번갈아보다 보면 전혀 다른 두 개의 세상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물론 언론은 일정부분 정파성(政派性)을 지닐 수밖에 없다.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 중 한쪽을 선호할 수 있다. 그에 따라 논조가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뢰도 회복 노력 선행돼야

    문제는 종종 사실의 선택조차 논조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실이 뉴스가 되는 건 아니다. 선택된 사실만이 뉴스가 된다. 뉴스의 가치를 판별하는 기준도 다를 수 있다. 의제 또한 마찬가지다. 언론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으며 관점에 따라 제각각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은 여론의 다양성에 기여한다. 그러나 최소한 공적 영역의 사실은 사실 그 자체로 다뤄져야 한다. 이른바 객관성이다. 객관적인 사실이 논조라는 주관성에 의해 확대되거나 축소되고, 왜곡되거나 배제된다면 공론은 비틀어질 수밖에 없다. 기자나 편집자가 신념이라는 명분하에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면 공론은 설자리를 잃는다. 하물며 자사(自社) 이익에 맞는 사실이나 의견만 골라 쓰거나 부풀린다면 공정성은 실종되고 신뢰도는 추락한다.

    이를 막는 최소한의 장치는 사실과 의견보도를 분리하는 것이다. 객관적 사실은 사실대로 보도하고 의견은 의견대로 피력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지금 보수 진보의 양 진영으로 나뉘어 사실과 의견을 뒤섞어 자기 논리를 합리화하거나 선전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데 급급한 듯하다.

    한국 언론의 정명(正名)은 무엇인가
    전진우

    1949년 서울출생

    동아방송 기자

    월간 신동아 편집장

    동아일보 논설실장·대기자

    現 경원대·한성대 초빙교수

    저서: 작품집 ‘하얀 행렬’ ‘서울의 땀’, 칼럼집 ‘역사에 대한 예의’


    사이버 공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하는 저열한 댓글들이 익명성의 뒤에 숨어 활개 친다. 이 또한 공론을 심각하게 왜곡시킬 수 있다. 표현의 자유에는 일정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이는 우파-좌파의 문제가 아니다.

    작금의 사태와 맞물려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방송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도 좋고, 미디어산업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창으로서 매스미디어의 신뢰를 회복하는 노력이 선행되지 못한다면 공론장은 황폐화되고, 미디어는 단지 산업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이 정부가 그걸 원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국민이 그걸 원할 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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