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부터 엄마였던 여자는 없다. 어느 여자에게나 꽃다운 젊음과 뜨거운 사랑에 대한 욕망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단어로 꼽히는 ‘엄마’는 여자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적잖은 영화가 엄마도 여자임을 조심스럽게, 때론 파격적으로 이야기했다.
‘인어공주’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지닌 독특함은 엄마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있다. 엄마가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엄마라는 인물은 누군가의 기억에 의해 재생된다. 기억은 편린이다. 조각이기 때문에 완벽한 한 인간을 완성하기보다 인간의 한 측면을 재구성해 낼 수밖에 없다. 첫째딸의 시선에서, 아들의 시선에서, 엄마는 각기 다른 인물로 조형된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세상 누구라도 보는 사람, 그리고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렇게 각기 다른 시각에서 재구성된 사람이 누구누구라는 고유명사를 지닌 한 여자가 아니라 ‘엄마’라는 보통명사의 일반형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개인이지만 엄마는 보통명사다. 엄마는 그렇게 보통명사로 기억되고 살아가고, 사라져간다.
‘맘마미아’
그래서인지 엄마는 욕망이나 욕심, 감정의 희로애락을 지닌 한 인간이기보다 성스러운 기능적 존재로 쉽게 합의된다. 이 합의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엄마답지 못하다’를 넘어서, ‘인간답지 못하다’는 비난까지 한다. 이를테면 엄마가 자식을 버렸다거나 엄마가 외도를 했을 때나 엄마가 자식의 미래보다 자신의 일이나 욕망에 충실했을 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엄마는 어떤 존재일까? 엄마라는 보통명사를 벗겨낸 후 남아 있는 여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을까?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마리아를 조형하고 있다. 무릎 위에 앙상하게 마른 아들을 걸쳐놓은 마리아의 표정에는 깊은 슬픔이 고여 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의 나이 서른셋, 그런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마치 동갑내기처럼 젊어 보인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미켈란젤로에게 물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너무, 지나치게 젊어 보이는 것이 아니요?” 이에 미켈란젤로는 대답했다. “정숙한 여인은 더디 늙는 법이오.”
여기서 말하는 정숙한 여인이란 곧 어머니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는 정숙하다’는 조건 명제가 아니라 필요충분 명제다. 정숙한 여인이 어머니고 어머니는 무릇 정숙해야 하는 셈이다. 이런 어머니 모습의 대표적인 예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다. ‘계란 반찬’이라는 귀여운 투정으로 기억되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일찍이 과부가 된 한 여인과 죽은 남편의 친구였던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고지순’이라는 수식어다.
혹시 기억하는가? 최은희가 연기했던 옥희 어머니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쪽 찐 머리에 단정한 한복차림의 옥희 엄마는 오늘날 우리 감각에 의하면 여섯 살 딸을 두었다는 점에서 삼십대 중후반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옥희 엄마는 불과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여자다. 철없는 나이에 시집와 아이를 낳고 사랑을 다 알기도 전에 남편을 잃은 여성이다. 옆방에 세 든 선생과는 계란을 매개로 감정의 교류가 있지만 사실상 연애 사건이라고 꼽을 만한 것은 없다. 옥희 엄마는 남편을 잃은 과부이기에 정절을 지켜야 하고, 더욱이 남편과 알고 지내던 남자와의 사랑은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옥희 엄마의 정절은 아름답기보다 미련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이 소설로 쓰여지고 영화로 만들어졌을 당시, 옥희 엄마는 한국적 여성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자신의 욕망을 옥희 엄마라는 이름에 가둔 여자, 그 여자가 바로 ‘엄마’이기 때문이다. 옥희 엄마의 욕망은 밤새 흐느껴 연주하는 풍금 소리에 녹아 있다. 풍금을 연주하며 우는 그 순간에만 옥희 엄마는 자신의 여성성을 허락한다. 영화에서는 옥희 엄마의 본명이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옥희 엄마는 옥희의 엄마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
최근에 ‘사랑방 선수와 어머니’같은 코믹패러디물이 개봉한 것은 아마 격세지감의 표현일 것이다. 소설가 박형서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같은 재치 있는 단편을 써낸 것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엄마’라는 보통명사에 욕망을 묻어버리기에 이십대 초반의 그녀는 너무 아름답고 아직 젊다. 그럼에도 옥희 엄마는 청순하고 정결한 사랑의 화신(化身)으로 기억되고 있다. 세월이 변해도 ‘엄마’의 욕망은 쉽게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말과 어머니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섹스를 통해 ‘나’가 잉태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엄마에 대한 배신감을 수반한다. 친구들과 남몰래 빌려 보고 돌려 본 동영상 속에서나 벌어지던 행위를 ‘우리 엄마’가 했다는 사실을 수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결하고 순정한 엄마가 보통명사를 벗고 텔레비전이나 스크린에서 보았던 그 여자들 중 하나로 다가올 때 우리는 일종의 세계의 파멸을 맛본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욕망’을 보기 원치 않는다. 하지만 정작 엄마인 그녀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세하는 데 쉽게 동의할 수 있을까? 여자 누구누구, 인간 누구누구라는 호칭을 떼어버리는 것에 그렇게 의연할 수만 있을까? 때로 엄마의 욕망을 들여다볼 때 ‘충격’이 뒤따라오는 것은 우리가 그녀들을 인간이라기보다 기능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들면 구차한 욕망이 소진될까?’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을 보면, 45번째 생일을 맞은 여성이 등장한다. 여자는 거울을 바라보며 이제는 죽고 없는 옛 애인을 생각하기도 하고, 당상관 3명에 바보 8명이 태어났다는 당상관집을 오가기도 한다. 남편이 변을 본 뒤 물을 내리지 않은 변기 속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똥, 여자는 그 똥이 너무도 낯설고 서글프다고 느낀다.
45번째 생일을 맞은 이 여자는 자신의 여성성과 결별하고 있다. 그녀가 결별하는 여성성은 젖꼭지에 매달리는 아이를 뿌리치고 애인을 만나러 달려가는 열정이며, 거즈 위로 범벅이 된 젖과 피를 보면서도 욕망에 몸이 뜨거워지던 젊음이다. 마흔다섯, 폐경이 가까워진 그녀는 몸으로 부딪치는 욕망과 열정이 아닌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옛이야기에 전해져 오는 금빛잉어의 전설처럼 그렇게 도도히 유전되는 생명력을 말이다.
폐경기 그리고 폐경 이후의 여성, 그리고 그들의 욕망은 젊은 여성의 것과 조금 다르게 묘사된다. ‘마더’라는 작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예순 살이 넘은 여성이 남편과 사별 후 겪는 격정적인 육체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딸이 좋아하는 남자의 몸에 반하게 된 엄마, 그녀의 욕망은 ‘엄마’라는 이름과 함께 이중의 단속을 받게 된다. 결국 그녀는 남자에게도 딸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길을 떠나게 된다.
‘마더’에 등장하는 엄마는 당혹스러운 어머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엄마는 욕망도 욕심도 증류된 존재를 뜻했다. 그런데 영화 ‘마더’의 엄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엄마에 대한 선입관을 위반한다. 그녀는 딸의 애인 대런을 유혹하고 욕망을 호소한다. 동년배의 늙은 남자 부르스가 그녀를 유혹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자신이 늙었음을 비추는 추악한 거울에 불과하다. 영화는 엄마라는 호칭에 여성을 끌어들이고 욕망을 휘젓는다.
그런데 왜 하필 딸의 애인과 동침하는 엄마였을까. ‘정사’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로 잘 알려진 시나리오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에게 성욕이란 존재론적 질문과도 같다. 실상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늙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아마도 나이 예순쯤 되면 지금 나를 괴롭히는 이 구차한 욕망이 고요하게 소진되지 않을까 예측할 뿐. ‘나이가 들면 겁이 없어지고 어려운 일도 잘 감당해낼 것 같은데’라는 대런의 말처럼 젊음이 상상하는 노년은 무사무욕의 고요다. 하지만 과연 늙는다고 해서, 나이를 삼십 살쯤 더 먹는다 해서 세상이 그토록 만만해질까.
엄마에게는 욕망이 허용될 수 없다. 누구나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지만 그것은 수학처럼 원리원칙일 뿐이다. 부모의 섹스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결코 목도하고 싶지 않은 비밀이다. ‘마더’의 엄마는 딸이 가진 관습적 기대를 모두 저버린다. 엄마에게도 욕망이 있지만 사회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마더’
많은 영화 관객이 기억하듯 ‘페드라’는 파국으로 결말지어진다. 아들은 어머니이자 연인인 ‘페드라’의 이름을 외치며 자동차를 과속으로 몰아 바다로 침몰한다. 자신을 보듬어줄 따뜻한 자궁으로 그녀를 받아들여야 했던 남자에게 남은 것은 거대한 관을 닮은 승용차다. 엄마의 욕망, ‘페드라’는 그 욕망의 위험성을 말해주려 한다.
엄마도 한때 젊은 여자였음을 보여주는 영화 ‘인어공주’.
박흥식 감독의 ‘인어공주’는 무식한 때밀이 아줌마가 된 ‘엄마’의 처녀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딸의 이야기다. 영화는 이런 연상으로 시작된다. 저렇게 우걱우걱 때 밀던 손으로 밥을 비벼먹는 엄마에게도 젊음과 순정이 있었을까? 전도연은 ‘인어공주’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딸’과 젊었던 ‘어머니’, 1인2역을 해낸다. 과거 속에 재구성된 ‘엄마’는 새로 돋아난 새순처럼 연약하고 갓 태어난 초란처럼 따뜻하다. 두껍고 거칠기만 한 엄마의 피부 속에도, 한때는 동네 우체부를 사랑하던 순박한 처녀의 보드라운 여성성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인형을 벗겨내면 작은 인형이 드러나는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로슈카처럼 영화 ‘인어공주’는 그렇게 엄마의 외피를 벗겨 여자를 끌어낸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작은 여자는 사랑에 울고 웃는 현재의 ‘나’와 똑같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도연의 1인2역이라는 설정은 그런 점에서 눈에 띈다. 나와 너무 다른 엄마가 결국 나와 똑같다는 수긍을 이끌어내니 말이다.
박흥식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사랑해, 말순씨’도 그런 점에서 초라하지만 애틋한 ‘엄마’를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사랑해, 말순씨’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사랑해, 말순씨’는 기억의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1980년대의 추억을 하나 둘 꺼내 보인다. 거리를 빼곡히 메웠던 에로영화 포스터, ‘아모레 아줌마’, 간호조무사 학원에 다니던 언니들, 중동에 일하러 갔다던 앞집 아저씨까지.
추억의 급소를 환기하는 영화의 언어는 또 하나의 사건을 언급한다. 바로 ‘행운의 편지’. 한때 전국을 휩쓸었던 역병과 같은 행운의 편지가 이 영화의 화자인 아들 광호에게도 전달되는 것이다. 광호는 만만한 대상들을 골라 편지를 주지만, 그들은 답장을 쓰지 않고 버린다. 예상했다시피 불행은 예언처럼 실현돼 편지를 받은 엄마는 병에 걸려 죽고 만다. ‘사랑해, 말순씨’는 화장품 방문판매원이 활약하던 당시 ‘워킹 맘’들을 추억하고 있다. 눈썹을 다 밀어버리고 위가 아프다면서 소화제만 먹는 엄마에게, 소년은 미련하다고 손사래 친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학교에서 돌아온 소년이 나뭇잎을 떼며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지 않았다’를 점치는 장면이다. 광호가 나뭇잎을 다 떼고 골목길을 돌아봤을 때 불길한 예감은 노란색 조등(弔燈)으로 실현되어 있다. 이제 소년은 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밥을 짓는다. 통박을 주고 핀잔할 수 있었던 엄마가 사라지자 엄마의 몫은 고스란히 소년에게 돌아온다. “미안해, 엄마”,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내면을 짐작해볼 요량도 못해본 그냥 엄마다. 엄마는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순간 사라지니 말이다.
엄마, ‘고독한 해결사’
박흥식 감독이 ‘엄마’라는 이름을 애틋하게 그려내고 있다면 ‘가족의 탄생’이나 ‘맘마미아’는 엄마의 욕망을 훨씬 입체적으로 또 낙천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가족의 탄생’에는 유부남과 바람을 피우는, 이해할 수 없는 욕망에 휘둘려 사는 ‘엄마’가 등장한다. 딸을 연기한 공효진은 이 엄마의 철없음에 혀를 내두른다. ‘엄마라면 적어도 딸 앞에서 그런 모습은 보여선 안 되는 것 아닌가’ 탄식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영화 막바지에 딸은 그렇게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를 수긍하게 된다. 그녀는 엄마이기 이전에 착하고 예쁜 여자였다는 것을 말이다.
‘사랑해, 말순씨’
‘맘마미아’나 ‘가족의 탄생’에 등장하는 ‘엄마’는 20대를 충동적으로 보낸 여성들이다. 그러니까 충분히 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눌러야만 했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 엄마’와는 전혀 다른 엄마다.
‘맘마미아’
우리는 간혹 영화에서 자식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그녀들을 본다. ‘아무도 모른다’의 철없는 엄마는 아이 넷을 버려두고 집을 나가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엄마는 “나도 좀 살자”며 자식을 외면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유의 엄마를 ‘엄마’의 정의에서 지우고 싶어한다. 엄마는 영원한 해결사이며 안식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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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엄마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난자 500개를 가지고 태어난 여자임에 분명하다. 종자돈 꺼내 쓰듯 난자 500개를 소진해버리고 나면, 여자는 사라지고 오롯이 엄마만 남는다. 엄마의 욕망, 내연남을 만나기 위해 보채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내고 젖이 흐르는 가슴에 거즈를 대고 집을 나서는 여자, 아이에게 수면제 탄 분유를 먹이고 남자에게 향하는 여자, 그 여자와 엄마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는 것일까? “엄마를 부탁해”, 어쩌면 엄마는 영원한 해결사이지만 영원히 고독한 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