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SE1001 books-pluck off, 131.5X105X2.5㎝, 2008
사진 박해윤기자
지금 그는 ‘도서관 프로젝트’라는 방대한 작업에 매달려 있다. 전국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책의 사진을 찍고, 그 책들을 나름의 주제로 재분류해 가상의 도서관 서재를 만든 뒤 다시 촬영한 사진을 뜯어내고 붙이는 것이다. 책의 표면을 뜯어내 뚫는 작업은 그의 고유한 방식이다. 종이를 송곳처럼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일정한 간격으로 뜯는 그의 노동은 ‘안광이 지배를 철’하도록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고양스튜디오 레지던스를 거쳐 현재는 파주출판단지의 갤러리박영 레지던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전시를 열고 있다. 도를 닦듯, 혹은 모범적인 직장인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책과 종이의 표면을 뚫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부조리한 운명을 이겨내는 창조적이고 영웅적인 인간’의 힘이 바로 예술임을 확인하게 된다. 일찍이 알베르 카뮈가 말했듯이.
▼ 책을 소재로 한 이유는.
“책은 내 자신과 우리 시대의 ‘스토리’다. 내가 배운 국어, 교련, 국사 교과서, 지방에서 법무사를 하신 아버지가 갖고 오시던 촌스러운 달력들, 치과에 가서 기다리며 보던 김찬삼의 여행기 같은 책들은 내 삶을 연결해온 고리들이다. 또한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 세대가 쌓아온 시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해외 비평가들이 관심을 가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008 NO 1701 nine books-time’, 55.5X23X16㎝, 2008
“책의 표피, 내지, 아우트라인을 바꾸고 해체하여 오브제로 만드는 게 나의 작업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해체되기 전, 책이 어떤 내용이었냐고 물어보곤 한다. 결국 책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텍스트 너머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묻게 하는 것이 내 작업이 됐다.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해 글을 쓰는 행위와 조금씩 면과 공간을 채우는 미술 작업은 같지 않을까.”
‘008 OC 2401, dreaming book’, 23X18X118㎝, 2008
“여기서 북 페어가 열리면 중고책을 사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아이디어도 많이 얻는다. 집에 온 것처럼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 미니멀하게 보이는 작품에 비해 작업 과정은 지난하고, 노동집약적이고 수공예적이다. ‘도서관 프로젝트’의 경우 작업 과정은 다 묻혀버리고 작품은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어렵다는 말을 듣지 않나.
“예술이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대중에게 더 친절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전국 방방곡곡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나만의 도서관을 만드는 과정과 이유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도 느낀다. 책의 종이를 하나하나 뚫고, 견고한 오브제로 만들기 위해 각종 화학처리를 하는 이유와 과정도 설명하고 싶다. 앞으로 전시의 디스플레이 등을 통해 작업의 개념에 대해 설명할 기회를 가지려 한다.”
갤러리 박영
작가 이지현의 레지던스로 그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갤러리박영(대표 유연옥)은 2008년 11월20일 파주출판단지에서 문을 연 갤러리 겸 작가 스튜디오다. 도서출판 박영사가 기업의 문화적 기여를 위해 설치한 복합문화공간으로 3개의 전시공간과 디지털 영상을 볼 수 있는 아트카페도 갖추고 있다. 갤러리박영의 1기 레지던스 작가로 한지석, 낸시랭, 김태중, 이지현, 이진준, 최진아 등이 선정됐다. 031-955-4071, www.gallerypakyo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