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가전략’ 박세일 지음/ 21세기북스/ 367쪽/ 2만원
대한민국 국가전략은 필연적으로 세계전략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계화가 진척되어 국경 없는 경제, 세계적 범위의 생산, 정보와 자본의 실시간 유통이 실현된 오늘날, 문제와 위험 또한 세계적 범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수십 년 동안 공고하던 국가 간의 서열과 세계질서 또한 크게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 격동의 시기일수록 지도자들에겐 냉철한 이성과 미래의 감수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박세일 교수는 법경제학과 노동경제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학자이나 자신의 전공영역에 국한되지 않은 폭 넓은 식견과 복합적 사고로 세계의 흐름을 관조함으로써 부분적 지식에 집착하여 전체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일반적 오류를 극복하고 있다. 한반도선진화재단의 학제 간 논의는 바로 박세일 이사장이 이끄는 체계화 작업 속에서 실질적 가치를 발휘한다.
박세일 교수가 제시하는 전략이 나열식이거나 일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세계의 변화를 수용하면서 구체적 전략의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체계적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체계화 작업은 올바른 국가전략과 올바른 사상, 철학과 이념 사이의 상관관계 속에서 더욱 빛난다. 원칙 없는 실용의 한계성을 지적하나 이념의 틀에 묶여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못하는 경직성을 배격하는 것이다.
창조적 선진화
세계화 전략을 세울 때 위에 언급된 복합적 대응과 체계적 대응 이외에도 자주적 대응과 유연한 대응이 필수불가결하다.
서구적인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를 좀 더 빨리 수용하고 이를 우리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의 것과 서구의 것, 전통과 현대를 융합함으로써 ‘창조적 선진화’를 이룩해야 한다. 이것이 박세일 교수가 주장하는 자주적 대응이다. 유연한 대응이란 변화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변화의 폭이 넓어서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끊임없는 혁신과 자기개혁을 통하여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순발력을 키우는 것을 의미한다. 유연한 대응을 할 수 있을 때에만 변화 이후의 기획을 주도할 수 있다.
유연한 대응의 전제는 융합적 사고다. 박세일 교수가 제시하는 공동체자유주의는 융합적 사고의 결과다. 우리 사회의 이념은 사회를 발전시키면서도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극좌와 극우의 양축에서 제시한 이념들은 사회나 국가의 이익만을 강조하는 집단주의적 경향이나 개인의 자유나 이익만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에 치우쳐 있었다. 국가전략의 ABC는 이들 양극단이 아닌 개인의 가치와 발전을 도모함과 동시에 ‘사회공동체’와 ‘자연공동체’의 가치와 발전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공동체 자유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공동체주의 (communitarianism)의 합칠 수 없는 이념의 양 축 사이에서 고심하던 앤터니 기든스가 ‘제 3의 길 (the third way)’를 제시했던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앤터니 기든스가 이념적 토대를 닦았으므로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권이 성립할 수 있었다. 이는 이념이 공허한 논쟁이나 선동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전략으로서 중요하며 제대로 된 나라라면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박세일 교수의 공동체 자유주의는 서양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적 문맥에서 발전한 ‘제 3의 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동양의 실재론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사상으로 철학적 지평을 확장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선진화의 전제가 되는 바른 법치, 바른 도덕은 건강하고 유덕한 공동체에서 나오고, 바른 법치와 바른 도덕이 있어야만 ‘좋은 자유’가 성립하며, ‘좋은 자유’가 있어야만 좋은 삶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 자유주의’는 선진화를 위하여 꼭 필요한 이념이란 결과가 나온다.
상호통합의 전략
대한민국의 세계전략은 전 지구를 시야에 두고 전개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동아시아 4강과의 관계설정과, 북한 변화전략 내지 통일전략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특별한 관련성을 갖는다.
박세일 교수는 첫째로, 동아시아 4강과의 관계에서 친중인가, 친미인가의 논의가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지적하고 있다. 국가의 명운은 엄중한 것이다. 단순히 감상적인 편 가르기 식으로 이편, 저편을 가를 수는 없는 일이다. 4강과의 관계설정에서 박 교수가 제시하는 방안은 우선 한미동맹을 기축으로 한다. 이는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나 4강이 에워싼 동아시아의 세력균형(均勢)을 위해서도 당연한 전제다.
그 다음으로 중국, 일본과는 우의적이면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되 어느 한 나라라도 패권을 추구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적절한 전략만 세울 수 있다면 동아시아의 어느 한 나라가 패권을 추구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으며, 중국과 일본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올바른 전략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증진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동아시아 국가들의 평화공동체, 시장공동체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북한 변화 및 통일전략은 시급성을 요구하는 사안이다. 북한에 대한 전략은 대한민국이 주도해야 하며,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특정국가의 패권추구 방편이 되어서도 안 되고, 북한의 통일전략을 수용하는 것이어서는 더더군다나 안 된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벌어지면 북한이 친중(親中)적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가 아니면 친한(親韓)적 방향으로 변화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선택의 시간을 맞게 될 것이다.
이때 친중정권이 들어서서 적당한 수준의 개혁 개방을 하고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이를 용인한다면 북한은 중국의 완충지대가 될 것이며, 우리의 통일은 요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은 (1) 북한의 근대화혁명을 위하여 (2) 북한의 정상국가화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북한에 개입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그러나 이때의 개입정책은 과거 10년간의 햇볕정책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햇볕정책은 “북한의 변화라는 본래의 목표를 버리고, 실제로는 남한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원칙 없는 교류와 지원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박세일 교수가 제시하는 대(對)북한전략은 원칙과 목표가 뚜렷한 개입전략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박세일 교수의 안보와 지역통합전략은 20세기적 자강, 동맹, 균세의 전략을 넘어 “21세기적 발상에 기초한 상호통합의 네트워크 전략”이다. 이어 박세일 교수는 국민번영을 위한 세계전략으로서 (1)시장의 확대와 (2)과학기술력의 제고를 제시하는데 이 단락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21세기 지식정보사회에서 세계지식생산의 핵심네트워크(core network of global knowledge production)에 파이프라인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식생산의 배타적 네트워크 형성과 지식생산의 원청-하청관계 나아가 지식생산을 위한 물적·인적 인프라를 정확하게 이해했을 때에 나올 수 있다.
체계화된 전략
결국 거대한 세계 지식 피라미드의 최상층을 차지하기 위하여 혹은 핵심으로부터 주변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지식 네트워크의 핵심에 진입하기 위하여 우리나라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취해야 하는 당위성이 나온다.
필자 역시 21세기형 세계지식질서에서 대한민국은 과연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IT전략연구원: 미래전략포럼 2003 참조). 창조적 인재 육성 전략이나 강소국형 발전전략, 도시경쟁력에 무게를 두는 박세일 교수의 평소 주장은 세계지식 네트워크의 핵심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의 분수령에서 선진화 혁명을 완수하느라 분투하는 선각자의 절규다.
박세일 교수의 최신 저서 ‘대한민국 국가전략’은 대한민국의 세계화 전략과 선진화 혁명을 위하여 여기서 언급된 내용보다 훨씬 방대한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나 지면 관계상 더 상세한 소개는 불가능하다. 다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제시된 국가전략은 단순한 전략의 나열이 아니라 전략이 나오게 된 철학적 바탕, 역사적 성찰, 전략의 당위성, 목표, 전략을 수행할 주체세력을 단계별로 연구한 매우 체계화된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야말로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knowledge processing)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전략이 갖는 시대적 함의를 이해하고 그 전략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그 전략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지 등을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박세일 교수는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중시하는 학자이자 경세가다. 그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을 창립하는 데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고, 김영삼 정부에서 세계화를 통한 개혁을 선도했다. 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태로워” 국회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후 한반도선진화재단을 창립하여 선진화혁명을 위한 싱크탱크를 이끌고 있다.
이러한 실천의식이 그의 해박한 지식과 합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 책 ‘대한민국 국가전략’이다. 이 책은 앞서 나온 책 ‘대한민국 선진화전략’과 앞으로 나올 책 ‘대한민국 세계화전략’의 중간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