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 대다수가 기성복을 입는 한국에서 맞춤 슈트는 낯선 존재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한 벌의 정장을 넘어 나를 이해하고, 나아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문화’다. 의사가 환자의 몸을 꼼꼼히 살피고 처방을 내리듯 테일러들은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선사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남성은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을 수 있을지 간절하게 알고 싶어한다. 물론 이에 대한 답은 간단치 않다. 압축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함께 배려한 옷을 찾는 것이 좋은 스타일을 찾는 최선의 방법이라 하겠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개성이 제각각이듯, 남성들의 몸, 즉 체형도 제각각이다. 어깨의 높이, 좌우 팔의 길이는 물론 옷을 입고 서 있는 자세와 행동패턴도 천차만별인 이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배려한 평균적인 옷이 있을까.
맞춤복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성복이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이즈를 평균으로 단순화해 대량 생산과 대량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공산품이라면, 맞춤복은 그 옷을 입는 사람만 배려하는 것이다. 즉, 사람을 인위적으로 옷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각기 다른 몸과 마음에 최대한 맞추는 데 집중한다. 또한 기계적인 작업을 배제하고 장인이 직접 오랜 시간 제작하기에, 소수를 위한 한정품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맞춤복을 찾아온 사람들이 남성복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성복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는데, 사실 그 이전엔 남성을 위한 모든 옷이 맞춤으로만 제작됐다. 흥미로운 것은 귀족들의 기호를 잘 읽고 있던 영국의 테일러들이 지금 전세계인이 입는 모든 종류의 옷차림을 창조했다는 사실. 이들은 몸무게나 허리선 차이는 물론 각기 다른 크기의 어깨나 팔 길이를 반영한 옷 즉,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살려주는 맞춤복을 정교하게 제작하는 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맞춤복, 남성복의 시작
요컨대 남성복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슈트는 애초에 영국 귀족들만의 맞춤복으로 시작했고, 둘째 맞춤복의 전통으로부터 셔츠, 타이, 구두와 양말에 이르기까지 정장을 입는 기본적인 법칙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남성복 브랜드들은 결국 이 맞춤복의 전통에 얼마나 근접해 있느냐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
즉, 정통 슈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맞춤복이라면 몸을 구속하지 않는 최고의 소재, 깃털처럼 가벼운 부자재, 그리고 숙련된 장인의 뛰어난 손바느질 기술이 필수적이며 거기에 가능한 한 신체의 많은 부분을 정밀하게 측정하고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제작하는 과정이 포함돼야 한다. 이와 같은 절차를 모두 밟은 맞춤복은 브랜드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하루에 많은 양을 제작할 수 없으므로 당연히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충족시키기 어렵다. 한국에서도 100% 손으로 제작한 최고급 맞춤복은 일반 기성복보다 그 가격이 월등히 높고 실제 그 옷이 손에 쥐어지기까지 시간도 3~4주 소요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용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몸에 잘 맞는 좋은 맞춤복은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은 기본이고 제작한 지 수십 년이 흘러도 변형이 적고 전체적인 바느질도 튼튼하다. 기성복 브랜드들은 신상품이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디자인이 출시돼 언제나 입고 있는 것이 트렌드를 벗어난 건 아닌지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맞춤 슈트는 처음엔 고가이지만 오랫동안 그 품위를 잃지 않고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 관점에서라면 결코 비싸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몸에 잘 맞는 맞춤복은 몸의 결점을 가려줘 자신감을 높여주고 바느질도 튼튼한 게 특징이다.
당신의 첫 번째 맞춤복
하지만 모든 학문이나 예술에 그 본류가 있는 것처럼, 남자의 품위를 표현하는 정장 역시 맞춤복의 철학과 정신으로부터 불멸의 생명력을 획득했다. 복식 문화가 발달한 유럽의 경우, 남성용 기성복과 맞춤복의 비중은 8:2 정도로 나뉘지만 한국은 96:4 정도로 기성복에 치우쳐 있다.
따라서 맞춤복을 생소하게 느끼는 분위기가 강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맞춤복은 단순한 정장 한 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문화임을 알게 된다. 결국 맞춤복이란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맞춤복 매장에 가는 데 필요한 것은 엄청난 금액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이며 작은 용기다. 특히 맞춤복에 관심 있다면 백화점이나 유명 브랜드네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조용하고 품위 있는 브랜드, 매체 광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입소문으로만 알려진 매장을 찾는 것도 맞춤복에 익숙해지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맞춤이라는 세계 속에는 슈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셔츠, 코트, 구두와 타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므로 자신의 예산에 맞게 합리적으로 순서를 정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예식이 그러하듯 맞춤복을 만드는 예식 또한 나름의 순서대로 거행된다. 맞춤복을 시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며 우선시되는 절차는 맞춤복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는 매니저 혹은 테일러를 만나는 것이다. 맞춤 슈트를 원하는 남자는 오늘 저녁 모임에 급히 입을 옷을 찾으러 매장에 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방문하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 넉넉히 할애해서 꼼꼼하게 물어보는 게 좋다. 혹시라도 옷에 대해 한없이 까다로워 보이는 그들이 내 옷이나 신체적 약점을 들추어내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섬세한 맞춤복을 입은 그가 예의바르게 내 옷을 순식간에 훑어 내려가더라도 그것은 마치 의사가 환자의 몸 상태를 정밀하게 살피고 그 대안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고객의 몸 사이즈를 꼼꼼하게 재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어깨의 불균형이나 오른손의 길이가 왼손보다 2cm가량 더 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약점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콤플렉스로 생각해온 모든 신체적인 문제를 그야말로 멋지게 상쇄해줄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으로 보는 게 맞다.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런 제반 과정은 처음에는 좀 민망하지만, 이때 가능한한 자신의 몸과 행동의 패턴, 그리고 선호하는 스타일에 대해 본인의 의사를 잘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슈트를 입는 환경, 즉 본인이 책상 앞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지, 재킷을 계속 입고 있는지, 옷걸이에 걸어두는지, 자동차를 자주 이용하는지 또는 기차와 비행기 출장이 잦은지 등 몸과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그리고 취향이 구체적일수록 품질 좋고 스타일도 우수한 맞춤복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예를 들어 장인정신이 투철한 맞춤복 테일러라면 어깨가 불균형한 손님을 위해 다른 한쪽의 어깨를 부드럽게 보정한 슈트를 제시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손목시계 차는 습관까지 배려해서 양쪽의 소매 넓이가 다른 재킷을 만들어낼 것이다.
혹시 본인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에 대해 확신이 없다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대부분 매니저, 마스터 테일러와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고객이 어떤 종류의 옷을 원하는지 감을 잡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객이 아주 특수한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을 때는 예외지만 대부분의 경우 맞춤복에 관해서는 그들이 제안하는 대로 따라도 무방하다. 슈트와 신체에 대해 그들보다 발군인 사람도 드물기 때문이다.
내 몸에 맞춘 편안함 & 고르는 재미
맞춤복의 또 다른 매력은 슈트든 재킷이든 그 소재뿐 아니라 버튼의 세부, 주머니의 모양, 뒤트임의 종류, 옷깃의 스타일, 그리고 박음질 같은 옷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처음엔 그 과정을 조금 어렵고 복잡하게 느낄 수 있지만, 세상에서 오직 한 벌, 오직 내 몸을 위해 만들어지는 핸드메이드 맞춤복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성복과 비교할 수 없는 만족을 안겨줄 것이 분명하다. 가봉(假縫)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한 번 더 당신의 신체 사이즈에 완벽히 맞추는 맞춤 슈트는 통상 3~4주 걸리지만, 소재에 따라 6주 이상 소요되는 것도 있다. 속전속결이라는 한국식 스피드에 익숙한 당신에게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시간들이 지난 다음에야 슈트는 비로소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된다. 거울에 비춰볼 필요도 없다. 분명 한 치 한 푼 어긋남 없이 딱 들어맞으며 모든 게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어쩌면 새 옷이라는 느낌조차 없을지 모른다. 가족처럼 편한 슈트란 이를 두고 말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맞춤복이 전지전능한 옷은 아니다. 취향이 조금 까다롭다면 두세 번의 가봉 과정을 거쳐서 더욱 정교하게 옷을 만드는 편이 좋다. 그리고 최초의 맞춤복이 정말 몸에 잘 들어맞는다면 옷을 만든 테일러를 칭찬해주기를 권한다. 고객이 형편없는 슈트를 입은 채 매장을 나서게 하는 테일러는 돈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렇다고 하인처럼 부리는 것은 삼가도록 한다. 테일러를 전문가로서 대우한다면 아마도 오랜 시간에 걸쳐 당신의 몸과 마음에 모두 적합한 슈트를 입는 호사를 누리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