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호

일본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바이올린 장인(匠人) 진창현

“차별과 역경이 나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 이민호│통일일보 서울지사장 doithu@chol.com│

    입력2009-02-05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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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명해지기는 쉬워도 존경받기는 어렵다고들 한다. 재일한국인 1세 바이올린 제작자 진창현(陳昌鉉·80)은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의 삶은 일본에서 책과 만화, TV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지난해에는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일본 고교 영어교과서에 소개됐다.
    일본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바이올린 장인(匠人) 진창현

    도쿄 센가와에 있는 공방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는진창현씨

    그의 바이올린은 전설적인 명기(名器)인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경화와 강동석, 아이작스턴, 로스트로포비치, 헨릭 쉐링 같은 내로라하는 세계적 명연주자들이 그의 고객들이다. 그는 세계에서 감사(監査)를 받지 않고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만들 수 있는 5명 중 한 사람이다.

    명실상부 현역 최고의 바이올린 제작자로 우뚝 선 진창현, 그 비결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나를 그토록 서럽게 했던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진 역경”이라고 대답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차별의 장벽을 어떻게 반전의 동력으로 삼은 것일까? 그가 스승도 없이 일류 장인의 반열에 오른 비결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구하러 도쿄 센가와(仙川)에 있는 ‘진(陳)공방’을 찾았다.

    “젊은 시절 나가노(長野) 오두막의 어두운 석유램프 불빛 아래에서 바이올린을 깎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2008년 10월2일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던 날, 진창현은 이 말을 하면서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두 달 뒤 찾아간 그의 센가와 공방, 기자의 눈에는 지금의 공방도 컴컴한 오두막 같아 보였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부터 작업등으로 사용하는 백열등, 벽에 정연하게 붙어있는 갖가지 공구들까지 족히 수십년은 넘음직했다. 10평(33㎡)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방이 세계적인 명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라고 하니 ‘미스터리 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장에 걸려 있는 은은한 광채를 내는 여러 대의 바이올린과 벽에 걸린 세계적인 명연주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은 그의 세월을 엿보게 했다.

    그의 바이올린 이야기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바이올린 제작을 결심한 195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젊은 시절 저에게 가장 큰 역경을 안겨준 건 국적 차별이었습니다. 당시 재일한국인은 일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바이올린을 깎게 된 동기요? 그저 먹고살려고 시작한 겁니다.”

    막혀버린 영어교사의 꿈

    청년 진창현에게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은 인생의 고비마다 걸림돌이었다. 메이지(明治)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영어교사가 되려 할 때, 바이올린 제작자가 되려고 스승을 찾아다닐 때, 국적은 번번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본은 한국청년의 소박한 꿈조차 이룰 수 없는 폐쇄 공간이었다.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남보다 영어실력이 뛰어난 데도 교사가 될 수 없는가? 그렇게 많은 장인 중에 나를 제자로 받아줄 이는 어찌 한 명도 없는가?”

    하지만 그를 옥죄던 차별의 공간은 진창현을 강하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기술을 전수해줄 일본인 스승을 구하지 못해 외톨이가 되자, 그는 비로소 어떤 구애도 없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무한히 펼칠 수 있게 됐다. 어떤 이가 건설현장에 내버려진 폐자재들을 바이올린 재료로 쓰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진창현은 그렇게 무모하게 바이올린 제작인생을 시작했다.

    “그때는 하루에 3시간밖에 안 잤어요. 만드는 족족 오두막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올렸죠. 160대쯤 되니 앉을 자리조차 없는 겁니다. 먹을거리도 다 떨어지고 해서 바이올린을 팔기로 했어요.”

    진창현은 그중에서 고르고 또 골랐다. 나가노의 산골 오두막에서 하산할 때만 해도 마음이 설레었다.‘내 바이올린의 첫 주인은 누가 될까?’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온종일 거리를 누비고 다녔지만 그의 바이올린을 사겠다는 악기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맡기고 갈 테니 팔리면 값을 치르라 애원해도 마찬가지였다. 낙담하고 있던 그에게 한 악기상이 “모양이 이상해도 소리만 좋으면 사는 괴짜 고객이 있다”며 주소를 건네주었다.

    그 길로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괴짜는 중년의 일본인 신사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살펴보더니 ‘허허’웃으면서 대당 3000엔씩에 9대를 모두 사는 것이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진창현 바이올린을 사준 일본인 신사는 당시 일본에서 3대 바이올린 연주거장으로 불리던 시노자키(篠崎弘嗣) 선생이었다.

    홍난파 친구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

    진창현은 이 만남을 계기로 시노자키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던 학교 근방으로 이사를 왔다. 선생이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학생용 바이올린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곳이 지금까지 50여 년간 살고 있는 센가와로 여기에서 진창현은 쓸모없는 폐자재를 명기로 탈바꿈시켰다.

    시노자키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2년쯤 지난 어느 날 선생은 뜬금없이 진창현에게 물었다. “기미 코란하 싯테루노?(君, 洪蘭坡 知ってるの. 자네 홍난파 아는가?)”

    그때 진창현은 홍난파가 조국 한국과 일본에서 이름을 날린 천재 작곡가인 줄 모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진창현에게 선생은 도쿄음악대학 동기생 홍난파에 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하숙을 했을 정도로 절친한 친구 사이로 선생은 홍난파가 지은 곡을 들고 아사쿠사(淺草)로 나가 바이올린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솔직히 선생처럼 고명한 일본인이 왜 보잘것없는 나에게 잘해줄까 의아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선생은 대학시절 만난 조선학생들과의 교류로 조선인에게 친밀감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고 애환까지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제 바이올린 제작의 운명을 바꿔준 인연은 선배 재일동포들이 맺어주신 것이더군요.”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지독한 가난의 늪에서 탈출하고, 시노자키 선생과 대당 3000엔으로 시작한 바이올린 가격은 7000엔까지 올랐다. 생활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2남1녀의 자식도 태어났다.

    한국 국가인 애국가(愛國歌) 작곡가인 안익태(安益泰) 선생도 시노자키 선생과 음대 동창으로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안 선생은 일본으로 연주회 지휘를 하러 올 때면 진창현의 집을 찾았다. 그때마다 망가진 현악기들을 맡겼고 진창현은 정성을 들여 고쳤다.

    “훗날 고향 어머니를 만나니 ‘넌 대체 일본에서 무슨 일을 하길래 외국에서 온 지체 높은 양반이 나에게 그렇게 큰돈을 쥐어주느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안 선생은 아무 내색 않고 저를 도와주셨던 겁니다. 당시엔 한일 간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라 한국으로 송금하기 힘들었거든요.”

    알고 보니 안 선생은 서울에 들를 때마다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본점)로 진창현의 모친을 불러 사례를 했던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는 듯 보였다.

    간첩 혐의로 끌려가 고문 받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을 것 같던 그에게 다시 한번 큰 시련이 찾아왔다. 사건은 한일 국교가 수립된 뒤 조국을 찾았을 때 벌어졌다. 1968년 5월 도일 25년 만에 고향인 경북 김천의 이천(梨川)마을을 찾아간 진창현을, 이복형이 북한 스파이로 밀고한 것이다.

    “그땐 참 운이 없었어요. 그해 초 북한공비들이 청와대로 침투(1·21사태)하고 푸에블로호 사건이 있어 정국이 뒤숭숭했잖아요. 하지만 고문을 받으며 겪은 신비한 체험은 제 바이올린 제작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 여태껏 살아온 풍경들이 필름처럼 떠올라 지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의욕이 솟구치는 거예요.”

    진창현은 얼굴이 물속에 거듭 처박히고 온몸에 전기가 관통되는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가 끔찍한 고통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하자 곁에 있던 부인 이남이(李南伊) 여사가 손사래를 치며 그의 말문을 가로막았다.

    “말도 마세요.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에요. 무혐의로 풀려나 일본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에도 무서워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둘이서 손을 꼭 붙잡고서 ‘제발 빨리 이륙해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붙들려 갈까 봐서….”

    ‘차라리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더라면 이런 수난은 겪지 않았을 텐데….’ 일본에서 온갖 서러움과 조롱을 당하며 한국 국적을 지켜온 그에게 조국은 잊지 못할 상처를 안겨줬다. 일본으로 돌아온 진창현은 매일 밤 악몽과 환청에 시달렸다. 정신병원을 다녀야 할 정도로 심신이 쇠약해졌다. 그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던 바이올린 작업도 중단했다. 그렇게 삶의 정체기를 1년 가깝게 보냈다.

    진창현이 재기의 발판으로 삼은 건 고문 경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그는 조국에서 당한 고문이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다고 마인드컨트롤을 했다. 이상하게도 생사가 갈리는 듯한 극한 체험을 한 다음, 어린아이처럼 왕성한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더 좋은 소리, 더 아름다운 모양을 가진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온갖 실험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실험의 모토는 ‘감각 기능을 최대한 키우자’였어요. 눈과 귀, 손과 코로 물질을 탐구하고 그것도 안 되면 혀를 썼습니다. 그런 게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자꾸 반복하다 보면 오감(五感)이 예민하게 발달합니다.”

    진창현은 괴이한 실험을 거듭했다. 모유만 먹는 큰아들의 황금색 변을 보고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빛깔’이라 생각해 바이올린에 똥칠을 했고, 석유에서 나는 특유의 붉은 빛깔을 추출하려고 실험하다 폭발사고도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거리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자폭 테러범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다.

    남들로부터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도 숱하게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무모한 듯한 시행착오들은 진창현 바이올린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에 다가가는 열쇠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리는 공기의 진동이 강하고 물리적 운동량이 많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음파라고 불리는 것이죠. 여름철 매미가 날개를 비비며 내는 소리,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바로 초음파가 담겨 있습니다. 바다 게들은 등딱지를 부딪쳐 초음파를 발산하죠. 키토산이란 분자덩어리가 초음파를 내는 매개물질이에요. 저는 이런 자연의 소리들을 찾아내면 곧바로 바이올린 제작에 응용해봅니다. 가령 게딱지를 잘게 쪼개서 바이올린에 발라보는 것이죠.”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일과

    그는 비록 인간 스승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자연이라는 더없이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 아침에 일어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저 아름다운 소리를 바이올린에 담아낼 수 있다면…’ 하고 고민했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주저하지 않고 그날로 실험을 했다.

    진창현 바이올린은 장인의 숙련된 기능으로 다듬어진 것도 아니고 우연히 발견한 비법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경험만으로는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기 힘듭니다. 명기를 마주할 때면 함수와 기하학, 물리학과 화학, 예술적 센스에 절로 감탄사가 터집니다. 그야말로 과학이 총집결된 예술 작품이에요. 저는 바이올린을 만들 때 ‘한 송이 튤립’처럼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느끼도록 정성을 다해 제작합니다.”

    팔순 노인이 된 지금도 진창현은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 일과의 대부분을 쏟고 있다. 취침 저녁 8시, 기상 새벽 3시. 그의 기획은 모두 새벽녘에 이뤄진다. 시작은 포근한 이불 속에서 상상하는 것이다. 하루 20분씩 이불 속에서 하는 상상은 좋은 아이디어들을 생산해내는 보물창고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센가와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하고, 다음엔 거실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한다. 상상력 키우기와 운동, 그리고 이론 공부를 소화한 다음에야 비로소 빵과 요구르트로 아침식사를 한다.

    “비록 중학교 영어교사는 못 됐지만, 대학시절 익힌 영어는 두고두고 제 인생에 도움이 되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바이올린은 서양악기잖아요. 바이올린의 역사와 연구서, 신간 책자들은 거의가 영어로 씌어 있습니다. 이탈리아나 독일에서 나온 책들도 영어 번역판은 구하기 쉽지요. 그 책들을 구해 이론공부를 하고 공업신문과 외국의 과학 잡지들을 뒤적이며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찾습니다.”

    그가 일본 내 바이올린 제작자 500명 가운데 ‘넘버원’으로 인정받고 세계에서 다섯 명밖에 없는 무감사(無監査) 장인의 반열에 오른 건 부단한 학습과 연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책을 읽을 욕심에 ‘속독법 교본’을 수차례 독파했다. 진창현의 독서는 화학, 물리학, 수학, 미술, 영문학, 일본 고전, 수필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박학다식형 학습가인 것이다. 지금도 매달 도서구입비로 3만엔을 지출하고 있다.

    “만약 남이 만든 것과 비슷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만들었다면 저 같은 재일동포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월등한 악기여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 길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남보다 폭넓고 앞선 지식들을 축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실험도 해볼 수 있고 남이 따라오지 못하는 새로운 기술도 연마할 수 있는 겁니다.”

    그는 성공한 마이너리티(minority)들로부터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찾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러한 인물의 대표가 20세기 최고의 과학자로 꼽히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진창현은 대학 시절 아인슈타인의 꿈이 과학자가 아닌 중학교 수학교사였다는 수기를 읽고 자신의 처지와 그를 오버랩시켰다.

    일본 영어교과서에 소개된 바이올린 장인(匠人) 진창현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쉐링(왼쪽)도 진창현씨(오른쪽)의 바이올린을 애용한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은 물론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수학교사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결격사유는 오로지 유대인이라는 것 하나였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조그만 특허사무소에서 서류정리를 하면서 연구를 계속해 ‘상대성이론’을 정립해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해 자신의 이론으로 핵을 발명해 모국인 독일을 굴복시키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보면서 진창현은 ‘나도 아인슈타인 같은 일류가 되리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5관왕으로 ‘마스터 메이커’ 되다

    1976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가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는 ‘진창현’이란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린 무대였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의 음향과 세공으로 나뉘어 총 6개 종목의 경연이 벌어진 이 콩쿠르에서 그는 5개 종목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1984년 미국바이올린제작자협회는 이러한 진창현에게 무감사 제작자의 영예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란 칭호를 부여했다. 그가 마스터 메이커가 되는 과정에서는 미국에 사는 유대인들의 응원이 있었다고 한다.

    “제 유대인 고객들이 앞장서서 저를 추천했답니다. 일본에 사는 코리안(Korean), 즉 재일한국인이란 저의 정체성이 그들과 교감을 나누는 데 도움이 되더군요. 재일동포와 유대인은 망국의 고통을 안고 국경을 건넜고, 이주한 나라에서 차별받는 존재잖아요. 몇 마디 대화만으로도 서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마이너리티라는 공통점이 저와 유대인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족으로 성장한 비결로 ‘민족사의 계승’을 통한 ‘정신력의 함양’을 꼽았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계율을 기초로 한 민족 윤리와 2000여 년을 견뎌온 고통스러운 유민(流民)의 역사를 후대에게 가르쳤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막강한 생존력을 발휘시키는 원동력이다.

    “유대인의 집에 가보면 화장실이 유독 많아요. 화장실에는 어김없이 책장이 놓여 있어요. 화장실도 공부의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크게 성공해도 사치를 부리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헨리 키신저 같은 사람은 노벨 평화상을 받고 미국의 국무장관까지 지냈지만 아직도 넥타이를 매지 않고 대화하기를 즐깁니다. 격식이나 겉모습에 구애받지 않는 유대인의 실용적 자세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의 집 문패에는 ‘진창현’ 이란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름을 물려준 부모님이 자랑스럽고 재일한국인이란 정체성을 당당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본국에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냐 싶겠지만 재일동포들이 ‘나는 한국인’이라고 밝히고 사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거나 편견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 ‘너는 재일한국인이며, 진씨 가문의 아들임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킵니다. 재일동포는 보통의 본국사람이나 일본인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살아남으려면 부단히 자기 연마를 해야 하고 차별은 환경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일류가 되어야 합니다.”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린 장인

    진창현은 일본인들도 존경하는 재일동포다. 그의 삶은 일본에서 책과 만화, TV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지난해에는 한국 국적자로는 최초로 일본 고등학교 영어교과서(三友社 간행 ‘COSMOS Ⅱ’)에 ‘바이올린의 수수께끼(The Mystery of the Violin)’라는 제목으로 12쪽에 걸쳐 소개됐다.

    진창현이 세계적 명성을 얻자 일본 사회는 그에게 끈질기게 국적 변경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행위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귀화한다고 제가 일본인이 될 수 있습니까? 저를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 아버지를 부정한다고 그 사실을 지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부모가 물려준 유전자, 한민족 DNA의 힘을 믿고 악착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게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재일동포들의 운명이자 생존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지난해 10월 한국 정부는 진창현에게 일반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영예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열네 살 때 혼자 몸으로 일본으로 떠난 지 65년 만에…. 스파이 누명을 씌워 고문의 고통을 안겨줬던 40년 전의 조국이 비로소 그를 따뜻이 환대한 것이다.

    수상식이 있은 후 진창현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꿈만 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러던 그를 두 달 뒤 센가와에서 만나 보니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훈장을 받자 도일 후 그를 한 번도 찾지 않던 김천중학 친구들이 동창회에 참석해달라는 편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다.

    해마다 성묘하러 고향에 들렀지만 번번이 외면하던 친구들이 비로소 그에 대한 경계를 푼 것이다. 정부가 수여한 훈장은 그에게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던 굴레를 벗겨주었다.

    역경이 준 기회

    마음의 짐을 털어서였을까 진창현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요즘에는 술 마시는 취미까지 생겼다. 얼마 전 병원에 들렀다가 만성저혈압 진단을 받고 처방으로 약한 술을 조금 마시라는 권유를 받았는데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는데 마시는 재미가 쏠쏠해요. 기분도 좋고 대화도 재미나고 혈액순환도 잘 되니,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마실 걸 그랬어요. 적당히 마시는 술이 약이 되듯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는 치료의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은 소리를 들으면 사람의 맥박이 강해지거든요. 바로 저의 목표가 모세혈관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깨끗한 피처럼 맑고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의 온몸을 전율시키는 바이올린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진창현은 술잔을 기울이는 순간조차도 술과 바이올린을 연관짓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바이올린을 만들기 위해 태어난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세 차례 인터뷰하면서 발견한 것은, 그는 타고난 천재성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대가가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매일 새벽 3시에 시작하는 일과를 수십년 동안 반복하면서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고 있고, 학구열도 학창시절 못지않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팔순 노인이지만 그는 호기심이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을 갖고 있다.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능가하는 1등 명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저도 모르게 강한 힘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역경이 자기 힘이 되느냐고 하느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라고 하는데요, 저는 제 자신이 역경에 의해 길러지는 걸 체험했습니다. 재일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 잃은 것이 많았지만, 그 역경 덕분에 얻은 다른 기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 진창현(陳昌鉉)

    ●1929년 경상북도 김천 출생.

    ●1955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영문과 졸업.

    ●1957년 일본 나가노(長野)에서 바이올린 제작 독습 시작.

    ●1974년 미국 ‘다이제스트’지의 영·일·한국어판에 그의 바이올린 제작 인생 소개.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자 콩쿠르’에서 6개 종목 중 5개 종목에서 금메달 수상.

    ●1984년 미국 바이올린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無監査) 제작자의 특별인정을 받고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음.

    ●1998년 일본 문화진흥회로부터 국제예술문화상 수상.

    ●2001년 일본 방송협회 종합 TV의 ‘작은 여행’에 출연

    ●2001년 일본 도쿄도 조후(調布)시 시민문화상 수상

    ●2008년 1월 한국인 최초로 일본 고교 영어교과서인 ‘COSMOS 영어2’(三友社)에 진창현 이야기가 한 챕터(Chapter)에 걸쳐 게재됨.

    ●2008년 10월 제2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식에서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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